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음.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유교계는 3ㆍ1운동보다 7년 앞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핵심 인물들을 잃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래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이, 귀양에서 돌아온 뒤인 1912년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는데, 1914년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림들의 파리장서 운동은 이렇습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1]. 대한독립의군부[ 大韓獨立義軍府 ]와 여러 의병활동.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술된 대한독립의군부.
독립의군부 |
단체 |
근대 |
독립운동단체 |
1912년 |
1916년 |
임병찬(林炳瓚) |
정의
1912년 전라남북도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연원 및 변천
독립의군부라고도 불렀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의 지휘 아래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던 임병찬(林炳瓚)은, 귀양에서 돌아온 뒤인 1912년 고종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먼저 호남지방의 의병과 유생을 모으고, 아들인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남북도 지방에서 의군부를 조직하였고, 이 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3년 2월 고종으로부터 다시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된 임병찬은,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강화·개성·수원·광주에 5영(營)을 두었다. 그리고 각 도·부·군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를 선정하였다.
독립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 한국 강점의 부당함을 깨우치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년 5월 국권반환 요구서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일제히 발송하고, 360여 곳에서 조선총독부로 도잇에 국권 반환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임병찬은 붙잡힌 뒤 총독과 일본정부 총리대신과의 직접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16년 끝내 병으로 순국하였다.
. 출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에 서술된 대한독립의군부[ 大韓獨立義軍府 ]
요약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독립운동단체 |
1912년 |
국권반환 촉구, 의병전투 준비 |
국권반환요구서 및 국권반환요구전화 준비 |
서울 |
전국적인 조직 |
1912년 9월 고종의 밀명을 받은 임병찬(林炳瓚)이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 장(巡撫大將)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일본정부와 조선 총독 및 주요관리에게 일제의 한반도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보내는 한편,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의병전투를 준비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하였다.
임병찬은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통해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한 뒤 1912년 12월 호남지방의 의병과 유생을 규합하여 의군부조직을 전라남북도로 확대하였다. 1913년 2월 임병찬은 고종으로부터 다시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1914년 본거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는 한편, 명칭을 대한독립의군부로 고쳤다. 총사령에 추대된 임병찬은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 밑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강화·수원·개성·광주에 오영(五營)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 도·군 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그 대표를 선정함으로써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914년 5월 국권반환요구서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일제히 발송하고 360여개 처에서 일제히 국권반환과 일본군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5월 23일 단원 김창식(金昌植)이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었으며, 주요 임원과 임병찬이 일본경찰에 잡히고 대한독립의군부는 해체되었다.
1910년대 국내외의 민족 운동
.출처: 대한독립의군부 [大韓獨立義軍府] (두산백과)
3]. 의병과 비밀결사로 일제에 저항하다
1910년대의 의병
1909년 호남 지방에서 전개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전남북 지방의 의병은 대체로 소멸되었다. 하지만 경상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는 의병투쟁이 계속되었다. 1910년 경상북도 소백산 · 일월산 일대에서는 이강년 부대의 잔여 의병장 최성천 등이 10~20명의 부대를 이끌고 항전했다. 황해도 일대에서는 이진룡 · 채응언 등이 항전을 전개했다.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한 의병장과 활동 내용은 <표 1>과 같다.
<표 1> 1910년대 항일의병장과 활동 내용
<표 1> 1910년대 항일의병장과 활동 내용도별성명출신 지역활동 내용
경북 | 노병직 | 상주 | 1907. 속리산에서 창의. 1908. 보은에서 체포. 1910. 특사로 석방, 의병 재기. 1913. 체포, 단식 순국. |
김병일 | 봉화 | 1911. 삼척 · 봉화 일대에서 활동. 1913. 군자금 모집 중 체포. 1914. 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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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영 | 문경 | 1907. 제천 · 영월 · 단양 등지에서 교전,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 1914. 안동 · 제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1915. 징역 15년 언도. 1919. 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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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 충북 단양 | 1905. 제천에서 창의, 이강년 부대에 합세. 1908. 이강년 체포 후 단양 등지에서 1911년까지 활동, 체포. 1912. 옥중에서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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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천 | 충북 충주 | 1908. 김상태 부대에 참여. 1910. 체포. 1911. 교수형으로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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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범 | 예천 | 1909. 김상태 등과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 1911.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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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봉화 | 1907. 박화암 의병진에 참여. 1908. 체포 압송 중 탈출. 1910. 강원도 인제에서 활동 재개, 1915년까지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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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 정경태 | 울진 | 1907. 성익현 부대 도총장 · 중군장으로 참가, 성익현의 뒤를 이어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김상태와 함께 활동. 1911. 체포, 교수형으로 순국. |
황해 | 한정만 | 평산 | 1907. 평산에서 박기섭 의병부대에 참여. 1910. 이진룡 의병부대 참여. 1914. 체포, 교수형. |
채응언 | 평남 성천 |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교. 1907. 이진룡 의병부대 부장. 1911. 김진묵 부대 부장. 1915. 평남 성천 등지에서 유격전 전개. 1915. 체포, 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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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진 | 평남 성천 | 1909. 채응언 부대에 참여. 1911.~1914. 황해 · 평안도 각지에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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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룡 | 평산 | 1907. 평산에서 박기섭 의병부대에 선봉장으로 참여. 1908. 강화도 지홍기 부대와 연합. 1909. 연기우 부대와 함께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 1911. 해주 · 평산 · 곡산 일대에서 활동. 1911. 남만주로 망명, 의병부대 조직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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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언 | 황해도 | 이진룡 부대 부장. 1910. 해주 · 평산 등지에서 활동. 1914.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중 전사. |
* 출전: 권대웅,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2008., 32~34쪽.
일본군은 경북 일월산 · 소백산 일대 의병부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1910년 11월~12월에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75명의 의병이 체포되어 4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으며 의병장 윤국범과 김상태의 참모 문성조 등이 체포되었다. 1910년 내내 일본군은 진압 작전을 통해 의병 190명을 체포했으며, 1911년에는 약 250명을 체포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각지에서 전개된 의병 활동 상황은 <표 2>와 같다.
<표 2> 1910년~1913년 국내 의병의 전투 상황
<표 2> 1910년~1913년 국내 의병의 전투 상황년도전투 회수참가 의병 수
1910. | 120 | 1,832 |
1911. | 41 | 271 |
1912. | 5 | 23 |
1913. | 3 | 40 |
* 출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2, 1966., 71쪽.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잔존 의병은 결국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넘어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이 되었다. 가장 먼저 국외로 망명한 의병장은 유인석이었다. 유인석은 1908년에 이미 문인 70여 명을 이끌고 원산에서 배편으로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 도착한 유인석은 최재형 등의 도움을 얻어 의병부대를 정비했고, 1910년 초 이범윤 · 이남기 · 이상설 · 정재관 등의 추대로 십삼도의군 도총재를 맡아 연해주 의병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을 의식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가로막자, 유인석은 1913년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만주로 간 유인석 부대는 집안, 통화현으로 이동했다. 1910년 이후 평안도의 조병준, 전덕원 부대도 만주 관전, 환인현 등지로 이동했고, 훈춘 ·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했던 홍범도 부대는 1910년 봄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다시 근거지를 옮겼다.
의병 계열의 비밀결사운동
1910년대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국내 비밀결사는 크게 의병 계열과 자강운동 계열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의병 계열 비밀결사로는 대한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대한광복회 등이 있었다.
의병 계열 비밀결사 중 대표적인 것은 ‘대한독립의군부’로, 1912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에 의해 조직되었다. 임병찬은 1906년 면암 최익현을 의병장으로 봉대하고 정읍 무성서원에서 창의했으나 곧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1월 귀국한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1910년 병합 후에는 은사금을 거부했다. 그는 1912년 공주 유생 이식이 전해온 고종의 밀칙을 받고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참여자는 김창식 · 이기영 · 강봉주 · 이용철 · 정철화 · 조중구 · 김현각 · 유병심 · 윤효 · 신규선 · 윤이병 등이었다.
독립의군부 조직은 1914년 5월 군자금을 모금하던 김창식 등이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임병찬은 조직이 드러나자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면담을 요구하는 투서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체포되었다. 임병찬은 체포된 뒤 계획이 좌절된 것에 분개하여 3차례 자결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14년 6월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5월에 병으로 서거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풍기에 거주하던 채기중의 주도하에 전원식 · 정성산 등 10여 명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전국의 의병 출신 인사들을 단원으로 ‘혁명기관’을 조직해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실제로 채기중은 홍주 의병에 참여했던 양제안을 영입했다.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했던 강순필 · 정진화, 홍주 의병에 참여했던 유창순 · 한훈 등도 합류했다. 채기중은 경북 함창 출신으로 직접 의병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양반 유생이다.
풍기광복단의 일차 목표는 만주의 독립군 양성을 후원할 군자금 마련이었다. 양제안은 1913년 만주에 들어가 상황을 둘러보았고, 채기중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을 시작했다. 풍기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과 함께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만들게 된다.
‘민단조합’은 1914년 경북 문경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결성된 비밀결사로, 주도한 이들은 의병대장 이강년 휘하의 이동하를 비롯하여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 이강년의 군사장 최욱영, 순국의사 김순흠의 아들 김낙문 등이었다. 또 민단조합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강봉주 · 이은영은 1912년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단조합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의병 출신이었으며,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연변의 예천 · 문경 · 상주 일원의 양반 출신들이 많았다.
이동하는 1914년 9월 민단조합을 결성하고, 1915년 경성에서 이은영 · 이무영 · 이종황 · 권영직 등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금 조달에 나섰다. 그는 먼저 권영직을 경남 밀양에 파견해 박인근 · 김강년 · 유영봉을 경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의군부 참위와 참령의 발령장을 주었다. 이들은 밀양으로 돌아가 1916년 군자금을 모아 경성으로 오다가 체포되었으나, 이동 중 도주에 성공했다.
이식재는 1914년 최욱영 · 강병수와 함께 충북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원을 강탈했다. 1918년 1월 이동하 · 이은영 · 김낙문 · 이식재 · 최욱영 등은 충북 제천경찰서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및 강도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민단조합은 대한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등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군자금 모금을 통해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지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결합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주도한 이는 박상진으로,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경북 경주군 외동면에서 성장했다. 그는 결혼 이후 박규진을 따라 경북 청송군 진보면 홍구로 들어갔다. 그곳은 천혜의 요새로 은거에 적합했다. 이미 그곳에는 1894년 선산 임은에서 옮겨온 유학자 방산 허훈, 왕산 허위, 성산 허겸 3형제가 살고 있었다.
1899년 박상진은 왕산 허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때 박상진은 허위를 통해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유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1899년 고종이 허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원구단 참봉으로 제수하자 허위는 상경했다. 박상진도 1902년 상경하여 허위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수학했다. 그는 1905년 2월 개교한 양정의숙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해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때 안희제도 그와 함께 양정의숙을 졸업했다.
1907년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했을 때 박상진은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의병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1908년 허위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을 때 가족을 대신해 시신을 인도받은 것도 박상진이었다.
1908년 박상진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교남교육회에 참여했다. 같은 해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에도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1910년과 1911년 다시 만주와 연해주를 둘러보고,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지원하기로 작정했다. 1911년 연말 박상진은 상하이 등지를 여행한 뒤 귀국했다. 이때 그는 신해혁명을 목격하고 국권회복 방법으로 폭동, 암살 등의 방략을 생각하게 된다. 이후 박상진은 대구에서 곡물상 상덕태상회, 포목무역상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즈음 박상진은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고 조선국권회복단에도 발을 들였다. 그는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1915년 7월 풍기광복단을 이끌던 채기중과 손잡고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 · 채기중 외 대한광복회 회원들을 살펴보면, 영주의 유생 임세규(장승원, 박용하 처단)와 권국필, 칠곡의 손기찬, 예천의 조용필(이강년 의병대 참여) · 윤창하 · 정진화, 영주의 조재하, 문경의 강병수, 안동의 이종영, 고령의 김재열, 영천의 정재목, 영양의 권영만(진보 의병대), 창녕의 우재룡(산남 의병대), 밀양의 손일민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양반 유생이었다.
한편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와 황해도로 조직을 넓혔다. 충청도의 예산 · 천안 · 괴산 · 청양 등지와 황해도의 송화 · 해주에서 회원을 확보했다. 그 결과 대한광복회 회원은 경상도 17명, 충청도 20명, 황해도 6명, 기타 6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의병 계열 인사가 주축이 되고 자강운동 계열 인사도 일부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무관과 군인으로 된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조직의 설치, 친일 부호 처단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활동 거점은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점, 예산 · 연기 · 인천 등의 미곡상,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 장춘의 상원양행 등이었다. 대한광복회는 100개소의 곡물상과 잡화상을 설치해 상업으로 활동을 위장하고자 했으며, 특히 곡물상을 주요 근거지로 만들려 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고, 우선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1916년 음력 8월 대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되어 박상진 외 9명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대한광복회의 조직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9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박상진은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다른 이들은 징역 12년부터 4개월까지 언도받았다.
1917년 출옥한 박상진은 다시 경상북도 각처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부호들의 명단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산가들이 군자금 모금에 응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그동안 비협조적이던 부호들 몇 명을 암살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채기중 · 강순필 · 유창순은 1917년 11월 장승원을 처단했다. 장승원은 한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칠곡의 부호로서, 두 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금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이어서 1918년 1월 김한종과 장두환은 악명이 높은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박용하 사건 이후 천안군 성환에서 장두환이 체포되고 예산에서 김경태 · 임봉주 등이 체포됨으로써 광복회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박상진은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한광복회는 비밀리에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립하고 전국 의병 참여자들을 모아 대사를 도모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혁명기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왕조 재건이 아닌 새로운 공화주의국가를 지향했던 것 같다. 박상진 · 김한종 등은 체포된 뒤에 경찰 신문에서 대한광복회의 목적이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대한광복회는 또 전라도에 보낸 통문에서 “민국을 건설하자면 국왕이 없는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이 크고 활동도 활발했으며 공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자강운동 계열의 비밀결사운동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자강운동의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자강운동’은 실력을 길러 훗날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서, 대중계몽을 주된 방법으로 택하고 애국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흔히 ‘애국계몽운동’이라 불린다.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하던 비밀결사 가운데는 자강운동 계열의 비밀결사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신민회,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등이다.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 경찰은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이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다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민족운동가를 검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김구 · 김홍량 · 한순직 · 배경진 등 18명을 내란 미수와 모살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른바 ‘안악 사건’이다. 이어서 1911년 1월에는 독립군 기지 창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양기탁 · 임치정 · 주진수 등 16명을 체포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 이름 붙이고 관서 지방 전체에서 검거선풍을 일으켜 유동열 · 윤치호 · 이승훈 · 이동휘 등 6백여 명의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123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제1심에서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제2심에서는 105인 가운데 99인이 무죄판결을 받아 모두 풀려났다.
‘105인 사건’은 일본 경찰이 평소 경계해온 서북 지방의 반일 민족 인사와 신민회, 그리고 이 지역에서 확산된 반일 기독교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자 날조한 사건이었다. 경찰은 1911년 7월 평북 정주에서 강도 사건에 연루된 이재윤을 체포하여, 그의 허위자백을 토대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꾸몄다.
날조된 각본에 의하면, 1910년 8월 이래 서울 신민회 본부의 지휘 아래 5차에 걸쳐 ‘총독 모살 계획’이 서북 지방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평양 · 선천 · 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이 일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일제는 날조된 각본에 따른 진술을 받기 위해 피의자들에게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이와 같은 고문 사실은 1912년 6월 제1심 공판이 시작되면서 피의자들의 공판 진술을 통해 폭로되었다. 따라서 피의자들의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음도 만천하에 알려졌다.
한편 105인 사건 공판 과정에서 검찰은 신민회가 각 도별, 군별 조직을 갖춘 대규모 비밀결사로 국내 회원 수는 12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또 북미주,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국외에도 회원이 10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크게 부풀려진 숫자였다. 안창호는 훗날 신민회 회원이 3백 명 정도였다고 했고, 양기탁은 100명 정도였다고 말했다.
‘신민회’는 안창호가 1907년 2월 귀국한 뒤 서울에서 양기탁 · 유동열 등과 상의하고 서북 지방 순회강연 시 이승훈과 상담하여 비밀리에 창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창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민회의 지방 조직은 평북과 평남에 주로 만들어졌다. 평남 조직은 평양을 중심으로 최광옥-안태국-장응진으로 이어지는 교육사업 종사자들이 만들었으며, 구성원은 주로 신민회 표면단체인 청년학우회, 동제회, 장학회 등의 회원이었다. 평북 조직은 선천과 정주를 중심으로, 이승훈을 정점으로 하는 양준명-이용화-홍성린 등 상공업자들의 인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민회는 주로 교육과 실업의 진흥과 같은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표면단체로는 청년들의 인격수양을 표방하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신민회는 내적으로 공화주의를 지향하고 국권회복운동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공개적인 단체가 아닌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교육운동, 계몽강연, 서적 및 잡지 출판운동, 산업진흥운동, 독립군 기지 창건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교육운동은 주로 학교 설립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과 중부 지방에서 수십 개의 학교가 회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또 회원들은 각지에서 계몽강연을 통해 애국주의, 민족의식, 민권사상, 구습타파의식 등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또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의 기관지로 활용했으며, 평양 · 서울 · 대구에 각각 태극서관을 두고 출판물을 보급했다. 산업운동으로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세우고 협성동사 · 상무동사 · 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도 세웠다.
그러나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을 전후하여 벽에 부딪쳤다.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던 안창호를 비롯해 이갑 · 이동휘 · 신채호 · 조성환 등은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09년에 미국과 러시아령 연해주, 서북간도 등지로 망명했다. 또 이회영 · 이시영 6형제와 이상룡 · 주진수 등 회원은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사업에 착수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1910년 8월 이후 신민회의 진로를 모색하는 회의가 국내외에서 열렸다. 국내에 있던 양기탁 · 이동녕 · 안태국 · 김구 등의 신민회 회원들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국외에 있던 안창호 · 신채호 · 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들 모임에서는 안창호의 준비론보다 독립전쟁론이 우세했다. 결국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관을 양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신민회 조직은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는 친목을 표방한 계몽운동단체로,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겨우 명맥을 이어오다가 1913년 9월 서상일에 의해 조직이 정비 · 강화되면서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게 된 것 같다.
서상일은 윤창기, 이시영, 박영모 등과 함께 상업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1911년 만주와 노령을 여행하면서 독립운동 상황을 둘러보고 1913년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달성친목회를 재건했다. 그러나 대구경찰서는 달성친목회가 조선 청년을 규합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다고 보고 1915년 4월 강제로 해산조치를 취했다.
1915년 정월 달성친목회의 서상일 · 윤상태 · 이시영 · 정운일 · 홍주일 · 박영모 · 서병룡 · 윤창기 등은 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해 최후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통령 윤상태(달성), 외교부장 서상일(대구), 교통부장 이시영(대구) · 박영모(합천), 기밀부장 홍주일(달성), 문서부장 이영국(대구) · 서병룡(대구), 권유부장 김규(아산), 유세부장 정순영(대구), 결사대장 황병기(전라도), 마산지부장 안확 등이 임원이 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9년 조직이 드러날 때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먼저 군자금을 모집했다. 3 · 1운동 직후 이시영은 만주, 김관제는 경남 동부로 향했으며, 변상태는 경남 서부 각지를 순회하며 시위를 계획하여 4월 3일 창원군의 진동 · 진북 · 진전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때 그는 곧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9년 4월 초 상해 임시정부에 15,000원의 자금을 모아 송금했다. 또 경상도 유림들이 중심이 된 독립청원운동과도 깊은 관련을 가졌다. 단원 중 장석영과 우하교가 청원서에 연서했고, 윤상태는 김응섭과 조긍섭으로 하여금 국권회복단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게 하고 영문으로 번역하도록 했다. 김응섭과 남형우는 이것을 상하이로 가져갔다. 그러나 독립청원서는 일경에게 탐지되었고, 동지 정진영의 밀고로 연루된 28명 중 13명이 체포되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장일환 · 배민수 · 백세빈 등 평양숭실학교 출신의 청년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였다. 장일환은 평양 출신으로, 1913년 안창호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미국 선교사와 함께 연화교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1914년 9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지도자였던 박용만을 만났다. 1915년 4월 귀국한 장일환은 목포 출신의 서광조와 강석봉, 그리고 백세빈을 만나 조선국민회의 조직에 대해 협의했다. 장일환은 1917년 2월 배민수 · 김형직 등과 구체적인 단체의 조직을 협의했다. 3월 23일 장일환을 비롯한 10명의 회원들은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임원은 회장 장일환, 통신원 겸 서기 배민수, 외국통신원 백세빈 등이었다. 각 지역 책임자는 경상도 오병섭, 전라도 강석봉, 황해도 노선경이 맡았다. 회원은 평양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숭실학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다른 회원들은 평양신학교, 연희전문학교, 군산영명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었다.
강석봉은 목포 출신으로 1900년 부친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909년 귀국했다. 서광조 역시 목포 출신이다. 백세빈은 중국 안동현에 거주하면서 미주에서 발간되던 『국민보』, 『신한민보』를 배포했다. 배민수는 당시 숭실학교 학생이었다. 그의 부친 배창근은 구한말 청주진위대 하사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으로 봉기하여 일본군 2명을 총살했으며, 1908년 8월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김형직은 평남 대동 출신으로 숭실중학을 중퇴하고 모교인 신명학교와 서당의 교사로 있었다.
조선국민회는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이 멀지 않다고 보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재미국민회 등 재외 동포와 연락을 도모하고, 간도 방면에 점차 세력을 부식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조선국민회의 활동은 독립운동의 근거지 구축과 조직 확대, 그리고 교육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1918년 2월경 경찰에 조직이 노출되어 25명이 체포되었다. 장일환 등 13명의 중심인물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선국민회는 이처럼 일경에 발각되어 해산되었으나, 그 잔여 조직은 3 · 1운동 당시 평양 지역 시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1919년 9월 박인관이 결성한 ‘대한국민회’로 계승되었다.
. 출처: 의병과 비밀결사로 일제에 저항하다(한국독립운동사, 2014. 5. 30., 박찬승)
[2]. 유림들의 파리장서사건[ 巴里長書事件 ].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술된 유림들의 파리장서사건
사건 |
근대/일제강점기 |
독립운동 |
1919년 |
1919년 4월 12일 |
김복한, 곽종석, 김창숙, 송회근, 유림, 신한청년당 |
정의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
내용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혹은 崔中式)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 출처: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에 서술된 파리장서사건[ 巴里長書事件 ].
요약 1919년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탄원서(獨立歎願書)를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
3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김창숙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 출처: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두산백과)
3]. 3.1운동. 고종황제의 붕어가 연관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서술을 발췌.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 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삼일운동.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한국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만주·노령·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 제기되었다. 윌슨이 구상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연합국과 대결했던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의 동맹국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 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져 각각이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하여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족지도자들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재미교포들이었다. 그들은 재미한인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곳에서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을 한인대표로 선출하여, 민족자결주의의 본질적 이념에 따른 한국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였다.
그 방법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인대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미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 소식은 도쿄[東京]에서 발간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보도되었고,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큰 자극을 받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에 보도된 파리강화회의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을 접했다. 이에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에서는 김규식(金奎植)을 한민족 대표로 파리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여운형(呂運亨)을 시베리아로 각각 파견하였다.
한편 김철(金澈)·선우혁(鮮于赫) 등은 국내로 파견하여, 종교계 및 각 사회지도층과 접촉하게 하여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 상하이에 온 크레인(Crane, C. R.)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요망서를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와 같은 국외의 사정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일제의 고의적인 은폐로 즉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도쿄유학생의 귀국, 재미·재중 동포의 활동 등을 통해 차차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당긴 것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한인유학생들 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의 애국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들은 겉으로는 친목과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 27일 조직되었다. 도쿄에 재류하는 유학생을 회원으로 하는 항일독립사상이 충일한 단체로 정기총회 외에도 수시로 웅변회·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저팬 애드버타이저』에 재미동포의 활동과 상황이 보도되자, 비밀리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토의하였다.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의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송계백(宋繼白)·전영택(田榮澤)·서춘(徐椿)·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윤창석(尹昌錫)·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이후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대신 이광수(李光洙)·김철수(金喆壽)가 추가로 선출되어 실행위원은 총 11명이 되었다. 이들은 비밀회합을 거듭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한편, 조선청년독립단는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밀파해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현상윤(玄相允)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동시에, 독립선언서 등 서류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오도록 하였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다.
이 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하였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장내에 진입하여 유학생들과 충돌,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대표는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은 한국의 청년학도들이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의 뿐만 아니라, 국내 3·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경과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하였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때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 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다.
. 출처: 3.1운동 [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필자의견 : 21세기 정치학 대사전에 나온바대로, 유림들이 3.1운동에 동참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렇습니다. 유림들이 3ㆍ1운동 발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따로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큰 이유로는 2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독립선언서에 왕조의 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는 것은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3.1 독립선언서는 복벽주의 노선의 유림들이 보기에는 이런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동학혁명을 일으킨 천도교 측 인사들이 주동한 3.1 독립선언서에 대해 복벽주의적 노선을 견지해야 하는 유림들로서는,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로 대한독립을 선언하는 경향의 급격하고 생경한 노선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 또한 조선.대한제국이 탄압하던 불교인데, 이씨조선의 대한제국이 망한걸로 보고 고려시대 후기 중 일연이 쓴 야사위주 단군신앙의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조선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역사에 대한 야사적 시각(이씨조선.대한제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대한제국이 망한걸로 보면서, 새로운 민족운동차원으로 조선 건국 4252년 사용)은 유교국가 조선의 구 집권층인 유림들이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던 복잡한 시대였습니다. 결국 천도교 및, 불교화 된 일본이 다시 들여온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을사조약이후 활성화 된 일본 불교계파(결혼하는 대처승려 한용운등의 불교계) 및 조선.대한제국이 종교적으로 인정할 수 없던 개신교측 인사들이 모여서 작성한 선언서로 끝나고 마는 3.1 독립선언서가 되는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게 됩니다. 을사조약이후 불교 야사에 기반한 단군신앙의 대종교를 나철이 창시했는데, 유교국인 조선.대한제국 유림들이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는 곤란하여, 서명은 하지 않고, 독립청원에는 찬성한다는 심정을 견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한말 의병의 모태인 유림들은 별도로 파리장서 사건을 주동하고, 이일로 대거 투옥되었습니다. 대한제국 군인들이 해산당하여 의병활동을 하고, 유림들이 조직한 의병은 독립군의 모태가되고, 이시영.이회영 선생등도 독립군을 양성하게 됩니다...
[4].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문제. 미군정때 전국적인 반대를 당하며, 기어코 국립대로 전환되어, 이후 대중언론등에서 주권.자격.학벌없이 카르텔을 만들어 국사 성균관(성균관대)에 저항해 옴.
대중언론에서 아무리 공격당해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 한나라 태학.이후의 국자감(베이징대로 승계), 볼로냐.파리대학의 교과서 자격은 변하지 않더군요. 세계종교 유교와 로마 가톨릭도 그렇습니다.교황성하의 신성성도 변하지 않더군요.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교과서 교육은 거의 변할 사유가 없을것입니다.MBA가 어떻든 한국에서는 Royal성균관대(한국 최고대), Royal 서강대(세계사의 교황 윤허반영,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학부 나오면 취업률과 유지취업률이 가장 좋은 자료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대학원에 가서 신학.법학.의학, 문사철 및 경제.경영,기초과학.공학등을 전문 연구하는 Royal성균관대.Royal서강대 출신들이 일정인원이상 배출되는게 바람직합니다). 베이징대, 볼로냐.파리대같은 세계사 교과서 자격을 승계하였거나, 동일대학名가진 대학들 말고,독일 하이델베르크,영국 옥스포드,스페인 살라망카,포르투갈 코임브라,오스트리아 빈대학처럼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학들과, 2차대전후의 강대국중 하나인 미국 하버드의 역사는 앞으로도 유지될것입니다.
[5].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시고,하느님(天)께서 선택하신 성인이신 공자님께 천명(天命),천덕(天德)을 부여.하늘에 죄지으면 빌곳이 없다고 경고하시게 하신 동아시아 세계종교입니다. 한국은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미군정당시 조선성명 복구령을 발효, 전국민이 조선 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 해야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입니다. 학교교육도 한문,윤리등을 통해 유교교육이 주류입니다.
세계사로는 한나라때 공자님을 추가로 제사하며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 한국사로는 유교의 始原유교 제천의식인 삼한 상달제.시월제,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교육. 조상제사의 고인돌이 있습니다. 유교 교육기관 교육으로 보면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유교 최고대학 교육이 있습니다. 은(상).주시대 성립한 始原유교의 하느님,오제[上帝, 조상신계열로 승천, 하느님(天) 하위신으로 계절주관], 지신,산천신,부엌신(火관련 神)등을 숭배해 온 유교입니다. 은나라 왕족후손인 기자의 한국 기자조선(고려,조선시대 인정, 일제강점기 영향탓 기자조선이 부정되나 한국사의 고조선중 正史영역 기자조선임)의 마지막왕인 기준왕(분명한 正史인물 위만에 멸망)은 중국 始原유교 특징인 한문성씨(서씨,한씨) 성립의 시조로 삼한(三韓)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삼한은 始原유교 특징인 제천의식(단오절,상달제,시월제) 거행. 삼한의 마한유교는 백제영토로, 변한 유교는 가야로, 진한 유교는 신라로 이어졌습니다.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며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로 성립되고 공자님도 제사하였습니다. 한(漢)사군의 낙랑은 부여.고구려(고주몽).백제(주몽임금 후손 온조왕, 백제는 마한영토의 始原유교도 승계)에 영향.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습니다.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이 없습니다. 현재는 5,000만이 유교성명 복구하여 문중별.가족별 조상제사 행하며,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의 주요 명절과 중양절(국화철)을 가지고, 유교문화 24절기의 입춘, 소서.대서의 삼계탕.피서, 상강(단풍철), 입동.소설의 김장철, 동지의 팥죽등 세시풍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입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있지만, 유교의 세계종교 자격이 있는 세계사를 반영해야 하기때문에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예수회(귀족출신 이나시오 사제가 설립한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로 세계적으로 교황윤허대학은 별로 없음)의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성균관대[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다음의 Royal대로 성균관대 출신인 필자(윤진한, 문필가.유학자.사상가)의 사상이며, 유교와 세계종교 가톨릭의 역사적 자격을 바탕으로 공존하고자 합니다. 세계사의 오랜전통의 대학들인 중국 태학(세계 최초의 대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승계됨), 그리고 서양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파리대학의 세계사 자격은 베이징대와 성균관대에 아주 중요합니다. 세계사의 중국 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세계 4대 발명품으로 교육되는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도 중요합니다. 학교교육 전분야에 걸쳐 근대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신학.법학.의학및 역사.철학과 고교때의 수학, 세계사, 사회문화, 국토지리.세계지리,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음악.미술등)은 유교경전이나 가톨릭 경전과 함께 세계인의 만국공통어입니다. 성균관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을 복구시키로 법을 발효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고문:이승만.김구선생, 위원장:김창숙 선생)과 남북유림들이 모여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를 설립(복구설립형식임)키로 결의하여, 성균관장이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등록하여 국사로 가르치는성균관의 유일무이 최고대학자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균관대로 정통을 승계하기로 하자, 미군정이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대 재정에 기여토록 하는 법을 추가로 만들어 주어 1960년대 후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학교법인 성균관대와 달리 재단에 참여해 재단은 달라짐. 박정희 대통령때 대통령령으로 시작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발행으로 행정법상 조선 성균관 승계를 추가로 법제화한것. 성대 6백주년 행사때는 대통령.국무총리.교육부 장관 참석하였습니다.
* 참고자료.
1. Report 제목: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 (tistory.com)
2.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1998). 볼로냐, 파리 1대, 옥스포드, 하이델베르크,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tistory.com)
3. World class Universities. 세계적인 대학들. 세계사 교과서, 한국사 교과서, 백과사전, 참고서, 학술서등에 기반함. 세계사의 중국 태학.국자감(베이징대로 계승),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등. 한국은 국사 성균관 자격 가진 Royal 성균관대(한국 최고대), 서강대(교황 윤허,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하이델베르크,옥스포드,살라망카,하버드등.
4.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tistory.com)
5. 영상역사관, 1954 대한뉴스 제46호,이승만대통령 내외분,문교부장관등 참석, 공자님탄생 기념식
영상역사관, 1954 대한뉴스 제46호,이승만대통령 내외분,문교부장관등 참석, 공자님탄생 기념식 (tistory.com)
6.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tistory.com)
[6]. 필자의 견해를 밝혀봅니다. 헌법이나 국제법,역사적 정론을 따르면 옳은 사회가 될것입니다.
헌법(대한민국 임시정부 반영중)중심으로 해야함. 패전국 불교Monkey일본이 강점기에,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복구)격하,폐지.해방후 성균관대로 복구. 강점기에 세계종교 유교국일원 한국유교[하느님(天), 공자나라]를 종교로 불인정.최근 다시 주권.자격.학벌없는 일제 강점기 잔재 패전국 奴隸.賤民,불교 Monkey서울대와 그 하인.奴卑들이 한국 최고대학 성균관대에 대중언론에서 항거해온 습관으로 유교에도 도전중. 중국의 문화대혁명이후,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를 겪고 있지만, 교과서자격은 유효하므로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세계종교 유교, 가톨릭의 유구한 역사를 계승하고, 세계 최초의 대학인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계승됨], 볼로냐.파리대학의 교과서 자격을 이어가면서, 교황성하 윤허의 서강대와 2인삼각체제로 정사인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계하고자 함.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가 옳음.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음.일본항복후 한국에 주권없었음.현행헌법 임시정부 반영,을사조약.한일병합무효(그리고 대일선전포고)임.국사성균관자격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 대학은 국사 성균관 자격 가진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성균관대가 Royal대. 세계사를 반영하면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대학학벌과 달리 종교로 보면, 한국은 5,000만이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식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등록해야 하는 행정법상 유교국. 최고제사장은 대한제국 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이 있음.
한국은 5,000만이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식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등록해야 하는 행정법상 유교국. 최고제사장은 대한제국 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이 있음. (tistory.com)
[7].성균관대와 관련, 해방후 법적 측면은 이렇습니다. 미군정에서 성균관을 복구시키기로 법률이 발효되어 임시정부 요인들과 남북유림들이 성균관에 대자를 더붙여 성균관대 설립을 결의(고문:이승만.김구, 위원장:김창숙)하였고,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 성균관대는 성균관장(성균관대 초대 학장 겸임)이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등록시켜, 그 때부터 성균관의 자격은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된것입니다. 미군정에서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법을 만들어 성균관대의 재정에 기여토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이 뒤에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조선 국교 유교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한국인 모두. 그 뒤에 조계종 천민승려. 그 뒤에 주권.자격.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 카르텔 및 각종 왜놈학교(그 뒤에 새로생긴 신생 대학들).
1.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가). 1편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tistory.com)
나). 2편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두번째 글. (tistory.com)
필자가 글을 써 놓은 상기 블로그를 읽어보십시오.
3.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미군정령 제 194호 6조(1948년)는,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tistory.com)
4. 영상역사관, 1954 대한뉴스 제46호,이승만대통령 내외분,문교부장관등 참석, 공자님탄생 기념식
영상역사관, 1954 대한뉴스 제46호,이승만대통령 내외분,문교부장관등 참석, 공자님탄생 기념식 (tistory.com)
5.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이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로 승계되어 600년 역사를 가짐)의 의견까지 연결해서 살펴봄.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 (tistory.com)
6. 미군정당시 등록된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과 같은 개념임. 성균관대(교육기구)는 국사교육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대학. 미군정당시 제사기구는 성균관으로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름.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교육기구 성균관대= 국사교육에서 나타나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tistory.com)
7.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tistory.com)
8.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는 프랑스잡지≪국제공법≫1906년 2월호에쓴 특별기고에서 을사조약 무효 주장. 그리고 UN 국제법 위원회에서도 을사조약은 무효라 함.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는 프랑스잡지≪국제공법≫1906년 2월호에쓴 특별기고에서 을사조약 무효 주장. 그리고 UN 국제법 위원회에서도 을사조약은 무효 (tistory.com)
9.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tistory.com)
10.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tistory.com)
11.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라고 정부측 의견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공식화 되어 있는데, 황사손(이원)에 대해서는 정부측 학술사전으로 아직 언급된 내용은 없습니다.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라고 정부측 의견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공식화 되어 있는데, 황사손(이원)에 대해서는 정부측 학 (tistory.com)
12. 세계사.한국사 교과서(참고서),사전,학술서가 바뀌지 않는한 유구한 역사의 기득권들도 바뀌지 않음.
세계사.한국사 교과서(참고서),사전,학술서가 바뀌지 않는한 유구한 역사의 기득권들도 바뀌지 않음. (tistory.com)
13.한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 반열임을 상기시킴.
한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 반열임을 상기시킴. (tistory.com)
14. 교황청이 지속되고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가톨릭전통에 기독교국가라, 2차대전과 별개로 세계사를 바꾸고자 하는
세력은 없는것 같습니다.
교황청이 지속되고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가톨릭전통에 기독교국가라, 2차대전과 별개로 세계사를 바꾸고자 하는 (tistory.com)
15. 국내법상 을사늑약이후의 역사적 해석은 승전국반열인 한국(對日 선전포고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행헌법에 반영)의 몫임.
국내법상 을사늑약이후의 역사적 해석은 승전국반열인 한국(對日 선전포고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행헌법에 반영)의 몫임. (tistory.com)
16. 최종결론. 세계사>UN. 수천년 인류문명과, 역사.전통이 크게 왜곡되지 않고 세계인이 공존하는 방법은, 세계사에 나타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근대와 현대의 격변기에 대처하는게 적절한 방안 같습니다.
최종결론. 세계사>UN. 수천년 인류문명과, 역사.전통이 크게 왜곡되지 않고 세계인이 공존하는 방법은 (tistory.com)
17.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tistory.com)
[8].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막무가내 어거지를 피우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tistory.com)
[9].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도교는 유교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점에 주안을 두지 않고, 후대에 갈수록 불교의 보살같은 용어도 사용하여,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 이어진 유교의 하느님(天).공자님과 맞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원래부터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부처가 새로 만든 후발신앙으로 브라만을 섬겨온 인도에서도 다시 배척받게 된 인도발 신앙입니다. 창조신보다 높다는 Chimpanzee류의 부처를 받드는 무신론적 Monkey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불교와 섞인 후대의 중국 도교도 그런 위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철학.민속적으로만 접근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tistory.com)
*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tistory.com)
[10].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tistory.com)
[11].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 (tistory.com)
한국은 5,000만이 주민등록에 조선성명식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등록해야 하는 행정법상 유교국. 최고제사장은 대한제국 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이 있음.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