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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두번째 글.

* 제목: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이와 관련 두번째 글.


2).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나타나는 616년 역사

 

600년 민족교육의 산실 성균관대학교-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얼을 계승해 나아가는 민족의 대학으로 남아있으리라!

현대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나, 그 중에서 제1 시기로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李錫九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3).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및 , 두산백과, 기타 여러 사전 및 학술서등에 서술된 600년 역사의 성균관대 역사

 

http://blog.daum.net/macmaca/733


4). 성균관대학교는 일본 강점기때, 최고대학 지위가 상실되면서 명륜학원등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런 왜곡과정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을사조약이나 한일병합을 이 출판사가 인정하고 있는건가?" 오해가 생길수 있는 어법도 있습니다. 대학이었는데 일제시대에 명륜학원이 되고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니? 이와 관련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어법을 중심으로 그 어법을 분석하고 설명하여 오해를 방지할까 합니다.  

 

가).일본 강점기 관련, 두산백과에서 성균관대학교 역사에 대해 사용하는 어법.   

 
성균관대학교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 출처: 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두산백과)
 
* 필자 주 1). 위의 본문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국권피탈후 일제가 교육기능을 박탈하였다가,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이런 설명입니다. 교육기능을 박탈했다가, 일제가 주체가 되어 전문학교 미만격의 명륜학원을 설립하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킨것입니다. 그러다가 명륜전문학교도 폐교시켜버리니까,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의 명칭복구이전까지는, 불가피하게 명륜전문학교도 임시로 부활시켜야했습니다. 필자가 조금 더 설명하면, 1945년 11월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결의(형식논리상 1946년 가을에 복구 설치된것)한 후, 1946년 봄 전국 유림대회(1945년 11월의 전국 유림대회와 시기가 다름) 당시 김창숙 선생은 성균관의 관장직위를 가지고 계셨는데(이 때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도 선출되심), 1946년 가을(9월 25일)에 김창숙 성균관장이 미군정 문교부에서 성균관대(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 결의로 성균관대 설치 결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주 복잡한 복구과정을 거쳤습니다.   

* 필자 주 2). 위의 내용 관련한 자료입니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 출처: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에서 사용한 용어는 성균관대학 설립보다 설치라는 용어를 다시 쓰는게 더욱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유림들이 결의하기는 성균관대학 설치였는데, 신문기사는 설립이라는 용어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 25일의 인가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는 용어보다는 성균관대학이 사용하는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는 용어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나). 조금 더 부가설명해 둡니다. 위의 과정과 행간에 숨은 뜻을 이해하고, 용어를 제대로 인식하셔야 다른 사전이나 서적을 읽을때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어법인 "일제는 부득이"란 단어를 염두에 두시고, 일제가 주체가 되어 교육기능을 박탈했고, 격하된 명륜학원을 설립했고, 격하시킨 상태에서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마저도 다시 폐교시키고 청년연성소같은 기구로 끈질기게 전락시켜버립니다. 이런 격하.왜곡.폐교상태를 겪어서 해방후 미군정 때, 최고대학 성균관을 복구시키기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1946년 봄은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장 직위를 가지고, 최고대학 성균관의 명목상 대학 타이틀도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성균관장이 주체가 되어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대학은 아닌상태의 성균관에서, 성균관대를 1946년 9월 25일 미군정의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것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인해 성균관대가 전문대학 이하의 상태도 겪다가 1946년 9월 25일에야 성균관대를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받아, 형식논리상 이 때부터 다시 제대로 대학으로 공식 복구되었다는것을 이해하셔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 성균관(성균관대) 복구과정입니다.

5). 그러면 왜 해방후 미군정 당시 성균관(문묘제사 기관, 문묘제사는 석전대제라고도 함)과 성균관대(대학교육 전담)를 분리하였을까요? 아마 고종때의 조치를 이어받은 듯 합니다. 성균관의 근대 학제로의 변천편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 필자 주 4). 고종 32년에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 필자 주 5). 여기서의 경학과는 성균관 경학과가 가장 옳은 표현임)]에서 전담하게 하였던 사례를 이어받은 듯 합니다.   

 

 

6). 경학과를 다룰때 성균관경학과라는 명칭이 옳으니, 이에 상당히 주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다음은 국가기록원에 나타난 성균관관제(1895. 7. 2칙령136),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학부령2)입니다.  


성균관관제(1895. 7. 2칙령136)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학부령2)

 

 


배경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공포된 일련의 근대교육법령에 의해 소학교 중심의 학교제도가 구축되면서기존의 교육기관에 대한 법령도 필요하게 되었다대표적으로 기존의 최고 유교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그 대상이 되었다성균관의 전통적 교육을 유지하면서도근대적인 교과를 부분적이나마 도입하고새로운 시대에 성균관 운영을 담당할 직제 개정 등이 요청된 것이다이와 같은 성균관의 부분적인 개혁은 당시 동도서기적 입장에서 서구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개혁의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이들 법령에 의해서 성균관에는 경학과가 설치되었고일제식민지기에는 경학원으로 변경되었다.

 


경과

 

성균관 개혁 법령은 우선 1895년 7월 2 발표된 성균관관제 제정부터 시작되었다이 법령에 의해 성균관은 학부대신의 관리 하에 운영되는 것이 명시되었고문묘의 봉사와 경학과 설치·운영이 규정되었다직원으로는 성균관장(1주임), 교수(2인 이하주임 혹은 판임), 직원(2판임)을 두었다이러한 관제가 마련된 지 1달 후성균관경학과규칙 발표되어 경학과의 운영에 대한 세부내용이 정해졌다이후 성균관관제 1차 개정(1896. 1. 15), 2차 개정(1898. 5. 26), 3차 개정(1908. 10. 29)이 이어졌고성균관경학과규칙 1차례 개정(1896. 7. 16)이 있었다.

 


내용

 

성균관경학과규칙 주요내용은 교육과정수업연한학년입학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특히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경학교육을 유지하면서도본국 및 만국역사지리산술을 부가함으로써 근대적인 교과교육을 도입하려 했다는 특징을 갖는다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업시수를 42매주 28시간 이내로 규정하는 등 학교운영 면에서도 근대적인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입학지원자는 20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로 하고입학시험을 보는 경우와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경우로 구분하였다시험은 임시시험정기시험졸업시험의 3종류로 하였는데임시 및 정기 시험은 이전의 성균관에서도 시행하던 것이었으나 졸업시험은 이제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격의 시험이었다즉 이전에는 성균관에 학적을 두면서 과거에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졸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된 당시로서는 졸업시험이라는 별도의 단계를 두고 이들의 자격을 공인할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다이 졸업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문묘관리 직원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충원되는 자격이 주어졌다.

 


    참고자료


    한기언·이계학·이길상 공편,《한국교육사료집성-개화기편Ⅳ》일반자료총서 93-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이만규,《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7
    정재철,《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일지사, 1985 


    집필자

    최광만(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4. 교과서.백과사전.학술서적상,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적(대부분은 Royal) 대학들의 전통적 역사와 달리, 현대에는 대중언론의 신문.잡지가 생겨나 이 대중언론들의 시각이 새로운 기준으로 작용하여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언론의 종류로는 TV, Radio, 신문.잡지, 대중의 단체행동, 말로 표현하는 개인들의 의사전달, 대자보등 수 없이 많은 언론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론들의 기사나 보도.표현에, 구독자.시청자가 많아지면 대중언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대중언론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매체들은 많으며, 정부정책과 관계없이 대중들의 의사표현을 단체행동, 신문.잡지, TV.Radio를 통하여 구현시킬수도 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당시의 국대안 반대운동(경성제대등을 국립대로 한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다시 국립 서울대로 바뀌어짐), 얼마전 서강대출신 방송인.가수 양희은씨의 방송중 의견으로 표현되어, 10년 넘게 공중파를 탄 100번 서울대, 국시110브(여기서의 브는 연세임), 중앙일보의 대학평가, 그리고 공식적인 친일파로 불리워지는 방응모의 조선일보식 의견, 친일파 김성수(보성전문 인수 고려대로 변경)의 동아일보식 의견, 그리고 이에 영향받은 다른 대중언론 의견들등, 대중언론의 의견은 아주 다양합니다.

     

    최근의 대중언론으로는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여러가지 블로그, 다음아고라 등 다양하겠습니다.

     

    5. 그런데 대중언론들의 의견과 달리 교과서.백과사전.학술서 중심의 학설로 할때는 국사에서 가르치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가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는만큼 국사 성균관 중심이어야 합니다. 세계사에 강한 서유럽과 교황청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때문에, 필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대학체제는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성균관대 중심의 대학의 학벌부분은 조선왕조 후손들의 제사와는 별개문제입니다.

     

    *  이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차원의 글입니다. 을사조약이후 일본의 불법강점기로 인해,  조선(대한제국)의 교육.종교주권등은 크나큰 피해를 보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피해국 한국인, 피해 당사자인 성균관(성균관대), 유교도의 자격을 가지고 주권회복의 일환으로 자료를 인용하였으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