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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헤이그서 이준 열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 엄수.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적 정당성과, 현행헌법 前文 임시정부 정통성 표기 이전..

네덜란드 헤이그서 이준 열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 엄수.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적 정당성과, 현행헌법 前文 임시정부 정통성 표기 이전에도, 그 당시 국제법상 강제.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은 무효였음(따라서, 그뒤의 강제.강압에 의한 한일병합도 무효). 

 

1]. 을사조약 무효에 대해 필자가 밝혀온 입장들.

 

1.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이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로 승계되어 600년 역사를 가짐)의 의견까지 연결해서 살펴봄.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 (tistory.com)

 

 

2.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무효", 유엔국제법위 30년전 결론. 일제 위안부.병역합법성 상실 가능성.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무효", 유엔국제법위 30년전 결론. 일제 위안부.병역합법성 상실 가능성. (tistory.com)

 

2]. 대중언론 보도기사.

 

네덜란드 헤이그서 이준 열사 순국 115주년 추모식 엄수

 

2022,08,21, 연합뉴스 최 윤정 기사 보도기사

코로나19로 미뤄진 이준열사기념관 개관 25주년도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 준 열사 순국 115주기를 기리는 추모식과 광복 77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은 20일(현지시간) 정연두 주네덜란드 대사, 얀 반 자넨 헤이그 시장, 타카미츠 무라오카 라이덴대 명예교수, 이기항 사단법인 이준아카데미 원장,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장, 교민 등 약 120명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치렀다고 밝혔다.

이 준 열사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규탄하고 일본이 강제 체결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대표와 함께 고종 황제 특사로 파견됐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이 열사는 '왜 대한제국은 제외하는가'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언론에 발표해 항의하는 등 연일 애통해하다가 1907년 당시 머물렀던 '드용(De Jong)호텔'에서 순국했다.

이날엔 코로나19로 미뤄진 기념관 개관 25주년 행사도 함께 치러졌다.

무라오카 교수는 축사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은 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며 "이는 변명의 여지 없는 피해를 입힌 가해자들뿐 아니라 피해자들도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얀 반 자넨 헤이그 시장은 "이 준 열사는 민족 자결권과 조국 한국을 위해서 싸웠다"며 "이 준 열사가 상징하는 것은 평화와 정의 도시인 헤이그시의 역사와 밀접히 연결돼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선 정 대사의 윤석열 대통령 광복 경축사 대독, 용비어천가 한글해서 기증식, 한인 성악가들의 선구자 등 축가, 만세삼창 등이 이어졌다.

3]. 백과사전류에서 서술하고 있는 헤이그특사사건.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서술하고 있는 헤이그 특사사건.

헤이그특사사건[ 使 ]

헤이그 특사 3인. 이준(1859~1907), 이상설(1871~1917), 이위종(1884-1924?)

이칭별칭유형시대성격발생·시작 일시관련인물·단체
헤이그밀사사건
사건
근대
외교활동
1907년 7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정의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경과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이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헤이그에 밀파된 특사는 정사(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부사(使)에 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주로한국공사관(使) 참서관() 이위종() 등 모두 3인이다. 세 특사 외에도 헐버트가 처음부터 사절단을 도왔고 박용만()이 미국에서 1907년 7월 초순 헤이그에 파견한 윤병구()·송헌주()도 특사 일행을 도왔다.

세 특사의 한국 출발 시기는 각각 달랐다. 이상설은 평화회의가 개최되기 1년 전인 1906년 4월에 한국을 떠나 북간도 용정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준은 1907년 4월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만났다. 두 특사는 6월 중순경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당시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Petersburg: 지금의 상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주로공사(使)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여기서 세 특사는 전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 I.)와 바파로프 등을 통해 도움을 받고자 활동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세 특사는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상을 폭로함으로써 국권회복에 열강의 후원을 얻는 것이었다.

특사 일행은 먼저 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연달아 방문해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그 책임을 미루었다. 또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다.

이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그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하였다. 특사들은 또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Stead, W. T.)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원조를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절규, 청중의 공감을 샀다.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결과

그러나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우분울읍()하던 끝에 이준이 7월 14일 순국하게 되었다.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에도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한국의 특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표면적으로 고종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 열강에게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를 서울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고종에게 특사파견의 책임을 추궁,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또한,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드디어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 출처: 헤이그특사사건[─特使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두피디아에서 서술하고 있는 헤이그특사사건.

헤이그특사사건

[ 使 ]

요약 1907년 고종이 이준()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휴대시켜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게 하여 을사늑약 체결이 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 꾀한 일.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을 소환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실권을 하나하나 박탈하여, 대한제국의 국체는 형해화()하기에 이르러 국가는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럴 즈음인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폐하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의 사절로 하여금 한국의 형세를 만국회의에 설명할 수 있게 한다면 만국의 여론에 한국의 원권()이 회복될 수 있을까 기대하며…”라는 회의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휴대하게 하여, 이들 대표에게 만국회의에 나가 당시 한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 대표는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이곳에서 전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동반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 때문에 강제 체결된 한일보호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역설, 이 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에 상정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그들의 현지 공관과 회의 대표를 통해 한국대표의 회의참석 방해공작을 폈다. 이 때문에 의장 넬리도프는 책임을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미루고, 네덜란드는 을사늑약은 각국 정부도 이미 승인하였으니 한국 정부에는 자주적인 외교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 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이 당시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며 배일()운동을 하던 미국인 B.허버트[]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특사 가운데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하였다.

이 사건의 배후에서 고종의 근신()으로서 러시아에 망명한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과 허버트 등 외국인이 관계하였으며, 고종 자신도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참가 주선을 요청하고 특사의 활동비를 지출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토는 7월 18일 그들의 외무대신 하야시[]를 서울로 불러 함께 고종을 협박하였고 밤을 새워가면서 항거하던 고종은 결국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시킨다’는 황태자 섭정의 조칙()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친일각료들은 이 조칙을 ‘양위’로 왜곡 발표하고, 20일에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및 경찰관서 등을 습격 파괴하고 친일괴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서울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7월 24일 일제의 차관정치()를 위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에는 군대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이와 같이 나라의 운명이 망국으로 기우는 상황 속에 순종은 새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도 광무()를  융희(:8월 2일자)로 바꾸고 일제는 마지막 병탄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 출처: 헤이그특사사건[─特使事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구한말 의병과 고종의 밀칙받은 유림들의 항거로 임시정부가 수립된것임.

고종밀명받은 유림들.대한독립의군부조직,대규모 독립운동획책,발각.

고종의 승하때문에도 일어난 3.1운동임. 그리고 3.1운동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도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를 볼때, 을사조약이후의 의병활동,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론에 입각한 외교활동, 고종의 밀명받은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에 의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파생, 고종의 승하때문에 일어난 3.1운동등은 불법.강제의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을 거치며,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한국인들의 폭 넓은 지지속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연속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와 현대에는 고종의 을사조약무효(따라서 불법.강제의 한일병합도 무효), 대한민국 임시정부(대일선전포고, 한일병합.을사조약 무효), 해방후 미군정법령에 따른 성균관 재건,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전국민이 유교국 조선의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으로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 복구,국사 성균관(성균관대로 정통승계, 현재 6백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음)교육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입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있지만, 유교의 세계종교 자격이 있는 세계사를 반영해야 하기때문에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예수회(귀족출신 이나시오 사제가 설립한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로 세계적으로 교황윤허대학은 별로 없음)의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성균관대[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다음의 Royal대로 성균관대 출신인 필자(윤진한, 문필가.유학자.사상가)의 사상이며, 유교와 세계종교 가톨릭의 역사적 자격을 바탕으로 공존하고자 합니다. 세계사의 오랜전통의 대학들인 중국 태학(세계 최초의 대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승계됨), 그리고 서양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파리대학의 세계사 자격은 베이징대와 성균관대에 아주 중요합니다. 세계사의 중국 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세계 4대 발명품으로 교육되는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도 중요합니다. 학교교육 전분야에 걸쳐 근대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으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신학.법학.의학및 역사.철학과 고교때의 수학, 세계사, 사회문화, 국토지리.세계지리,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음악.미술등)은 유교경전이나 가톨릭 경전과 함께 세계인의 만국공통어입니다. 성균관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을 복구시키기로 법을 발효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고문:이승만.김구선생, 위원장:김창숙 선생)과 남북유림들이 모여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를 설립(복구설립형식임)키로 결의하여, 성균관장이 성균관대신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등록하여 국사로 가르치는성균관의 유일무이 최고대학자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균관대로 정통을 승계하기로 하자, 미군정이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대 재정에 기여토록 하는 법을 추가로 만들어 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대통령령으로 시작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발행으로 행정법상 조선 성균관 승계를 추가로 법제화한것. 성대 6백주년 행사때는 대통령.국무총리.교육부 장관 참석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242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교황윤허,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http://blog.daum.net/macmaca/733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5]. Royal성균관대는 太學등의 별칭있고,왕립대학이며, 대한제국의 皇대학 전통과 자격을 가지고 있음. 해방후의 주권없는 일제잔재 중심 비신분제 국립대학과는 성격도 다름.

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Royal성균관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6].1988년 현행헌법전문에 임시정부구절이 반영되기 이전에도, 유일무이 합법적 기득권대학이어왔던 국사교과서 자격의 Royal대(泮宮,學宮,太學의 별칭을 가져온 성균관임)이며, 해방이후 국사자격으로 일류.명문(일류나 명문은 주권.자격.학벌없는 왜구잔재 서울대나 초급대.전문학교였던 연희전문, 보성전문들의 후신이 마음대로 규정할 성질이 못됨)의 자격을 형성해온 성균관대!

참고로 일류나 명문은 한국적 용어가 아니고, 서양적 용어입니다. 

해방이후 미군정의 성균관 복구령에 의해, 성균관대를 성균관대신 미군정에 교육기구로 등록시키고,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국사 성균관의 교육기구 자격을 승계해 온 성균관대입니다. 해방이후부터 교과서로 가르쳐온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  

 

600년 역사의 성균관(성균관대).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 복구령에 따라, 전국 유림대회에서 선출된 성균관장이, 전국 유림대회 결의에 따라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등록(성균관은 제사기구로 분리)하고,국사교육은 이전 관례대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가 정통승계)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왔음. 해방후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에 대항하여 대중언론과 새로생긴 입시지에서,주권.자격.학벌없이 항거해온 마당쇠 賤民, 불교 Monkey서울대와 그 밑에서 살아온 일본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서민출신 이용익의 보성전문(동학란을 일으킨 천도교 소속이다, 해방후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 고려대가 되어 동아일보에서 서울대 뒤에 붙어 살아옴)은 고구려 태학이후 최고대학 계보인 고려 국자감(통일신라 국학), 고려말 성균관, 조선 성균관, 해방후의 성균관대의 유일무이 최고대학 자격을 극복하지 못해왔습니다. 대중언론에서 왜구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50년정도 이기며 극복해도, 성씨없는 일본 천황으로 새롭게 올라선 점쇠 賤民(히로히토,나루히토등)이 세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마당쇠 賤民을 이긴 돌쇠賤民대학으로 주권.자격.학벌없이 다시 항거하는 과정을 가지게 될것. 한편, 교과서(국사,세계사), 헌법, 국제법을 못이기는 대중언론.입시지의 한계를 알아야 함. Royal 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세워진 귀족사제 이나시오의 예수회(교황청의 실세)산하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성균관대와 서강대만 Royal대며, 일류.명문으로 지속적 제한을 하는게 옳습니다. 

           

7]. 필자는 국사와 세계사, 헌법.국제법 중심이라, 대중언론이나 입시지의견은 반영치 않습니다.국사,세계사 기준이 옳음. 법이나 교과서자격이 없으면, 입시점수!. 왜구잔재대학은 주권.자격.학벌이 없음.Royal성균관대(국사 성균관 자격, 한국최고대)와 서강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는일류,명문끝. 法(헌법,국제관습법).교과서(국사,세계사)>>>주권.자격.학벌없는 왜구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입시점수는 참고사항.​http://blog.daum.net/macmaca/3252

 

학벌과 달리,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인 5,000만 한국인 모두. 그리고 그 다음은 한국에 주권없는, 성씨없는 점쇠賤民일본 천황. 그 뒤에 경성제대 후신 왜구 서울대(점쇠 賤民이자,불교국가 일본에서, 하급군인들이 새롭게 옹립한 불교 Monkey 일본 천황이 세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마당쇠賤民.부처 Monkey처​럼 창조신을 부정하고, 하느님보다 높다는 불교계 일본 신도를 바탕으로 천황제 유지). @서울대이기고 점쇠賤民일본천황뒤 서울대 마당쇠賤民자리 차지하려면,서울대를 대체하였다는 50년정도의 대중언론 기사장악과, 입시지 위치확보要. 그러면, 주권.자격.학벌없이 새로운 마당쇠.개똥이 賤民대학이 되어, 대중언론이나 입시지에서 Royal성균관대나 Royal 서강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세워진 귀족사제 이나시오의 예수회 계통 대학.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에 항거하는 현상을 겪게 될것.

 

생각이나 말로는 가능하지만, 대중언론.입시지 항거자격도 어려움.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적으로 설립한 해당대학들은, 대중언론.입시지에서의 배척.소외과정을 분명히 진단하고, 현행헌법(1988년부터 실시) 전문(前文)에 보장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근거로, 1988학번이후의 해당대학 졸업자들이, 100년~300년 정도의 입지확보를 실현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소정의 입지를 확보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전통의 해방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행태등(수천년 유교문화 전통이라, 국가나 집권정부 차원에서 제재하지 않는한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전통문화들임)에 대해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s://blog.naver.com/macmaca/220648650432

 

2. 일본의 항복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헌법), 대일선전포고, 국제적 승인과정. 그리고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들 및 남북유림들이 결의한 성균관대 설립(이후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성균관대가 계승하게 됨), 국사편찬위에 나타난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교육기능이 계승됨)에 대한 역사교육.

https://blog.naver.com/macmaca/220689121551

 

3.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s://blog.naver.com/macmaca/220122200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