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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定說)에 해당됩니다.

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定說)에  해당됩니다.

 

 

I]. 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교과서적 정설이 해당국가에 맞지 않으면,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해당국가만 별도의 이론을 교육시키는 방법도 가능하겠습니다.   

 

 

대학.종교관련, 확실하다고 인용할 수 있는 이론은 교과서(참고서포함), 백과사전, 전문사전, 오랜동안 애독되어온 전문 학술서등이 가장 신뢰대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定說에 바탕하지 않거나 위배되는 새로운 이론은, 세계사나, 그나라 국사 및 정부입장과 대조하면서, 定說로는 채택하기 어려운, 새로운 논문.主義등으로 간주하는게 적절한 것 같습니다(학자가 아니면서 문필가.사상가 영역에서 활동하는 필자를 포함하여 누구의 이론이나 주장.主義든간에...).

 

대학관련,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들의 자료, 시중의 광고용 홍보는 定說이나 학술이론으로 채택해 줄 수 없는 특정집단의 홍보자료로 간주하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 대중언론과 광고의 범람으로, 오랜 권위를 인정받아온 교과서나, 정부 간행물, 역사서, 경전(유교나 가톨릭등)등의 권위가 훼손될수도 있겠는데, 대중언론과 대중문화는 한계가 있는 매체임은 분명하니까, 상업적으로 돈을 버는데 유리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의 대학.학술.문화.종교등의 기득권은 보호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국가기관이며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해온 국사의 내용을 학교교육에 반영하고, 이전의 예비고사.학력고사나 현재의 수능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것입니다. 고등고시, 공무원시험, 경찰시험등에서도, 국사편찬위의 발행내용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 그대로 반영하여 출제해 온 특성이 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公敎育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국사교육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최고대학으로 600년의 역사를 한국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음)=御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 중 하나)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2].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의 자료를 이용하여 매일 덤벼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6백년 역사)가 정부의 학술적 정설(定說)이기 때문에, 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은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정부체제.국가체제(국가기관.국책연구기관인 국사 편찬위의 국사 성균관 서술, 교육기구로는 성균관=성균관대)는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국사 성균관=성균관대이며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

 

 

6백년전부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성균관의 정통성은 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교육을 통하여 성균관.성균관대가 유지.계승시켜옴)같은 유서깊고 정통성있는 Royal대인 성균관대.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으로 을사조약이 무효고(따라서 국내법 우위의 전통 법이론으로 보면 한일병합도 무효),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의해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왔습니다. 그 추종세력인 서울대.연세대.고려대도 당연히 그런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 강점기 잔재 서울대의 추종세력.

 

한국의 현행헌법(1988년부터 시행)에 보장된 임시정부 법통때문에,이론상으로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강행법측면에서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적.교과서적.국가적 차원의 최고(最古,最高) 대학학벌은, 조선,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입니다.

 

한편 세계사를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대부분 서유럽 학자들의 이름만 나옴. 이는 2차대전 이전 근대에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의 역사가 그렇게 만든것 같음] 서유럽.교황청의 영향력은 지금도 세계사나 여러가지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학술서적등을 통하여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강대는 교황윤허로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Royal대학은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로 6백년 역사)와, 교황윤허의 서강대 뿐입니다. 다른 대학들은 비신분제 대학으로, Royal대에 대한 충성도를 보아, 개인적으로 조금씩 중용해 나가면 될것입니다.   

 

 

3]. 세계종교 유교의 성립시기와, 한국의 유교. 

 

1. 다시 되짚어보는 전통 유교국들의 역사 

 

 

1). 중국.한국.베트남같은 전통 유교국의 대학제도

 

가. 중국의 경우 한나라 태학.국자감.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변함.

 

나. 한국은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고려말 성균관이 됨).조선 성균관(2차대전 이후 해방후 미군정기 성균관대로 정통승계되어 오늘에 이름)

 

다. 베트남의 국자감. 공자님을 모시고, 베트남 최초 대학인 문묘국자감에서 이루어진 유교교육이나 통치이념인 유교,그리고 진사(進士)배출등    

 

하노이에 있는 ‘반 미에우 꾸옥 뜨 잠(Văn miếu Quốc tử giám, 문묘국자감())’ 사적은 11세기에 세워졌으며 유교 및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기원전 551~479)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의 왕들은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건설하였고 유교를 사회적·정치적 기초로 삼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에는 유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반 미에우 꾸옥 뜨 잠’은 베트남 조정에서 일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관료들을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천 명의 띠엔 시()를 배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이곳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여기고 있다.

 

. 출처:레 왕조와 막왕조(1442~1779)의 과거 시험 관련 석판기록[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한나라이후 세계종교 유교의 문화를 가져온 나라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입니다.     

 

 가.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걸쳐,유교명절 전해짐.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

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定說)에 해당됩니다. (tistory.com)

 

나.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 나오는 내용.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지은이: 장종근, 박현준, 최태선

발행일:2003년 1월 10일(초판 1쇄),2011년 12월 10일(9판 1쇄)  

 

 

. 필자 주 1). 인용 도서에 나타나는 수자의 형상과 필자가 사용한 수자의 형상은 100%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 미리 참작해 주십시오.   

 

역사와 인간 ~Ⅱ 도시 문명의 성립과 지역 문화의 형성 

 

01. 인류 문화의 기원과 문명의 발생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03. 고대 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 세계

04. 고대 지중해 세계

 

Page 22.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탄탄 정리

 

3]. 중국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한  

 

1. 한의 건국과 발전

 

(1). 건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장안을 수도로 중국 재통일(기원전 202)...

 

(2). 한고조(유방):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 실시 

 

(3). 한 무제의 정치

 

① 중앙 집권 체제 확립:군현제 실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③ 경제 정책:소금.철 전매제, 균수법.평준법, 상인에 중과세, 오수전 주조

 

(4) 멸망: 무제 사후 외척과 환관의 권력 투쟁→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 건국(8)

 

2. 후한의 성립과 발전

 

(1) 배경: 왕망의 급진 정책(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농민 반란으로 신 멸망

(2) 성립: 광무제가 호족의 지원을 받아 뤄양을 도읍으로 건국(25)

(3) 발전: 전한의 정치제도 부활, 유학 존중

(4) 멸망: 환관과 외척의 횡포, 관료들 사이의 당쟁→황건적의 난(184)으로 멸망

 

3. 한의 경제와 사회

 

(1) 경제: 철제 농기구 보급, 농업 기술의 발달→농업 생산력 증가, 토지 사유화 진전

(2) 사회: 빈부 격차 심화→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의 등장

① 농민 지배: 대토지와 노비 소유→사회 지배 계층으로 성장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중앙 정치 주도

 

* 위 본문 중 3. 한의 경제와 사회, (2)사회,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향거리선제: 지방장관이 여론을 참작하여 지방의 덕망있는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관료 선발제도이다. 유학을 공부한 호족들이 선거를 독점하여 지방과 중앙의 관료로 진출함으로써 호족 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유가사상이 황제와 지배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유교로 발전

① 유학 교육: 수도에 태학 설치, 오경박사 제도 마련

② 관리 선발: 유학의 수준을 평가하여 선발

③ 학문 발전: 유교 경전의 해석과 주석에 주력하는 훈고학 발달

(2) 도가 사상: 신선 사상과 결합→태평도, 오두미도와 같은 민간 신앙으로 발전

(3) 불교 수용: 후한 때 비단길(사막길)을 통해 전래

(4) 역사서 편찬: "사기"(사마천), "한서"(반고)→기전체 방식의 역사 서술 확립

(5) 제지술 발달:채륜이 종이 만드는 법 개량→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위 본문 중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유교의 국교화: 한 무제는 제자백가중에서 유학만을 관학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학문과 정치가 일치되면서 학자가 정치가이고 정치가가 곧 학자라는 정치.교육 일치주의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에 나타나는 자료.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 Page 7

 

#자료분석#

 

.유가: 유가는 마음에 우러나오는 "인"과 "예"를 바탕으로 도덕 정치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 무제에 의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어 동아시아의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 필자 주 2). 위 본문 중 1. 한의 건국과 발전, (3) 한 무제의 정치,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관련 사항입니다.

 

흉노는 현대의 몽고지역 일부도 포함되며, 중앙아시아 국가의 일대까지 포함됨. 고조선은 현대의 한국 지역 일부, 남월은 현대의 베트남 일부 지역임.  

 

. 필자 주 3). 위 본문에 나오는 흉노를 다시 백과사전이나 중국사 학술서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3-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흉노.

 

흉노

 

[ ]

요약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
)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 말.

주대()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 씨족의 족장() 두만()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 출처: 흉노[匈奴] (두산백과)

. 필자 주 4). 위 본문에 나오는 고조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4-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고조선

 

[ ]

요약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에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에는 조선이 보하이만[]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미송리식토기     랴오허강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谿)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谿)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고조선 [古朝鮮] (두산백과)

 

. 필자 주 4-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관련사항 필자 의견: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입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지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설화성격이 강하고 한국의 정사(正史)나 세계사적 성격의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 야사(野史)라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 필자 주 4-3).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    

요약
고려시대 김부식(
) 등이 기전체(
)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

            
구분 역사서
저자 김부식 등
시대 1145(고려 인종 23)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 등 8명의 참고()와 김충효() 등 2명의 관구()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와 머리말, 논찬()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출처: 삼국사기[三國史記] (두산백과)

 

. 필자 주 4-4).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기전체의 역사서. 보물 제722호.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정사이다.

            
유형 문헌
시대 고려
성격 사서
편저자 김부식()
제작시기 1145년
권수·책수 50권
소장처 성암고서박물관, 옥산서원, 이병익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722호 , 국보 제322-1호 , 국보 제322-2호
문화재 지정일 1981년(보물 제722호) , 2018년(국보 승격)

 

정의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내용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 정덕임신본()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이온문()·허홍재()·서안정()·박동계()·이황중()·최우보()·김영온() 등 8인의 참고()와 김충효()·정습명() 2인의 관구()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간관(: ·)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현실 비판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삼한고기()』·『신라고사()』·『구삼국사()』와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및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후한서()』·『진서()』·『위서()』·『송서()』·『남북사()』·『신당서()』·『구당서()』 및 『자치통감()』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 사료의 취사 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출처: 삼국사기 [三國史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4-5).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    

요약
고려 충렬왕(
) 때의 보각국사(
) 일연(
: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
)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31호
지정일 1999년 11월 19일
소재지 부산 금정구 청룡동(범어사)                                
시대 고려시대
종류/분류 활자본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두산백과)

 

. 필자 주 4-6). 위 본문에는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정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란 문구에 의거,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상식대로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 주 4-7).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    

의의와 평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하여 현존하고 있는 역사서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 책은 『삼국사기』와 함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단군을 나라의 시조라고 언급한 점은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4-8). 위 본문에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반영하여 삼국사기는 정사의 성격을 가졌고, 삼국유사는 야사를 다루고 있다라는 구분을 그대로 인정하는게 옳습니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라는 기존의 우리나라 역사관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필자 주 5). 위 본문에 나오는 남월에 대해 살펴보갰습니다.

 

. 필자 주 5-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남월.

 

남월[ ]    

요약
중국 진말(
)∼한초(
)의 혼란을 틈타 조타(
)가 광둥[
]·광시[
西
]의 양성(
)과 베트남 북부지역에 세운 나라(
BC
203∼
BC
111).

진나라 시황제()는 남중국을 평정하고 거기에 남해()·계림()·상()의 3군()을 설치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자, 남해군위()를 대행한 용천현령() 조타가 BC 203년에 지금의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계림·상의 2군을 합쳐 남월국()을 창건하고 무왕()이라 칭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회유책을 써서 조타를 남월왕으로 봉()하였으며, 대부분이 월인()이던 남월국의 주민도 그에게 잘 복종하였다. BC 137년에 조타가 죽고, 그의 손자인 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남월에 대한 한나라의 압박이 점차 강화되었다. 호()의 뒤를 이어 손자 흥(:재위 BC 113?∼BC 112)이 왕위에 올랐으나, 남월에 내란이 일어나 재상 여가()가 권력을 장악하고 한에 입조()하려는 왕과 왕모()를 살해하였으며, 또한 한의 사신까지도 죽인 뒤 흥()의 이복 형인 건덕(:재위 BC 112∼BC 111)을 옹립하여 한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무제()는 남월 토벌을 결심하고, 복파장군() 노박덕()과 누선장군() 양복()을 지휘관으로 삼아 대군을 급파하여 남월을 공략하였다. 드디어 BC 111년 한군은 남월의 국도()를 함락하고 그곳에 9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남월은 5대 93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 남월 평정은 푸젠[]·서남이(西)의 평정을 촉진시켜 한의 남방경략에 한 계기를 이루었다.

 

. 출처: 남월 [南越] (두산백과)

 

. 필자 주 6). () 속에 나타나는 수자의 이해.

 

한의 건국(기원전 202). 한의 건국은 ()속에 기원전 202로 표기됨. ()속에 기원전 이란 언급이 없으면 차후 ()속의 수자는 서기 몇 년으로 이해 할것. 예를 들어 신 건국(8)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속의 수자는 서기 8년, 후한의 건국(25)은 서기 25년, 황건적의 난(184)은 서기 184년으로 이해할것. 

 

. 필자 주 7).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한의 역사

 

한의 역사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는 그를 한왕()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무제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평준법()에 의한 상업관영()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선제()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 이후는 외척()·환관() 등 근신()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 왕망()이 8년에 평제()를 독살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의 6대 자손인 유수()가 남양(:)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을 수도로 하여 후한()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 때에는 한제국()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의 난으로서, 도교()의 시초인 태평도()의 주창자 장각()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손책()·조조()·유비()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여 하북()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 출처: 한의 역사 (두산백과)

 

. 필자 주 8).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신

 

신[ ]    

 중국의 왕망(
)이 전한(
)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 

. 필자 주 9).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신

 

신 왕조의 흥망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요약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한 기점으로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왕망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왕전제와 사대제도 등을 실시했으나 지방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신나라는 불과 15년에 그쳐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로 남았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8년 : 백제시조 온조왕, 위례성에서 즉위
3년 : 고구려,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계속 팽창
8년 : 백제, 마한을 멸망시킴
22년 : 고구려, 부여 공격, 부여민 1만 명 투항

왕망, 왕위를 찬탈해 신나라를 건국하다

한나라는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던 신()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전한의 수도는 서쪽의 장안, 후한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이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나라는 왕망 1대 15년에 그친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했던 왕조이다. 그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유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된 후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이 두텁게 자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 출처: 신왕조의 흥망 -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 필자 주 10).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후한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요약
호족세력이 역사 전면에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며 후한 정권의 시대가 도래했다. 반왕망 움직임의 물결을 타고 후한의 건국자가 된 광무제(유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이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후한 정권의 수립을 성공한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26년 : 고구려, 개마국을 멸망시킴
42년 : 수로왕, 가락국 건국
49년 : 고구려, 요하 장악
56년 : 고구려 태조왕, 동옥저 통합

 

평범한 지주 청년 유수, 후한을 건국하다

기원후 25년, 유수가 다시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어릴 적부터 그를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문숙

(광무제의 자)

이 다만 정직하고 유화할 뿐, 농담도 잘하지 않고 얌전한 보통 청년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줄이야···."

이 말을 들은 유수는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유화의 길에 의해서 하고자 하노라"라고 말했다.

 

. 출처: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다.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세계종교 관련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으로 유교, 불교, 기독교등 세계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지침이 있었습니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교육과학기술부

 

15 Page에 이런 지침이 나옵니다

 

⑺ 통일 제국의 등장 고대 문명의 형성 이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통일 제국의 정치적 변천과 그 특징을 다룬다. 지역별로 통일 제국이 성립되어 확대되는 모습을 살피고, 이어 제도의 정비 내용 및 문화적 특징을 이해한다. 아울러 각 지역 의 문화 발전이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세계 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 을 파악한다. ➀ 춘추ㆍ전국시대, 진, 한에 이르는 정치ㆍ문화적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 탕으로 진ㆍ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국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였 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당시 활약했던 주요 학자와 그들의 활동을 찾 아보게 한다. 진은 중국 영역을 통일하였으며 한 제국은 진이 세운 중앙 집 권 정치체제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안정시켰음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진․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혼란의 시대로 규정하기 보다는 변혁의 시대라는데 유의 한다. 한 고조 시대의 과도적 제도에 관한 서술로 인해 한나라가 진나라와 다른 정치제도를 채택하였다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한다.

 
위 지침에 의거한 듯 교학사 자료는 다음 자료 Ⅶ. 통일 제국의 등장 1. 중국의 통일 제국과 유교에서 유교가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 다 음 
 

Ⅶ. 통일 제국의 등장 1. 중국의 통일 제국과 유교. 

 

...유가 사상은 한나라 때 유교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

 

. 필자 주 11). 고대 세계의 세계종교로 성립한 유교, 불교, 기독교 중 인도의 브라만에 대항해 새로 일어난 무신론적 부처의 불교는, 그 때는 강력한 세계종교였지만, 다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배척받게 되어, 동남아시아 약소국과,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서 단순 포교 종교로 머물며,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이,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고 배척당하기도 하는등 외래 포교종교상태가 길었음. 고려시대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한국 국사 교육은 가르치고 있음. 이씨 조선당시의 한국에서는 갈수록 승려가 천민이었음. 결혼하지 않고 산속에 머물러야 되는 조계종 승려가 이에 해당됨. 이에 비해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에 대항해 온 일본은 제도적으로 불교국가화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일본 신도도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종교인데,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는 무신론적 Monkey의 불교사상으로 한국 강점기에 기독교를 배척한 것으로 보아(일본이 유교 국가였다면 외래종교나 이교도로 배척하거나, 조선 조정처럼 조상도 몰라보는 금수로 유교적 배척을 해야 정상임), 창조주 범천을 부정하던 습성의 불교에 토대하니까 나약한 일본 마당쇠(성씨없는 일본 천황이라 한국개념으로 마당쇠.돌쇠임. 부처 Monkey행태를 보이면서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는 일본 부처 Monkey는 유명함)가 일본 천황이 되어 그렇게 하느님보다 높은게 일본 천황이라고 기독교를 탄압한 것 같음. 결혼하는 Monkey 승려가 일본 천황등 그 이하 일본 신도 추종 계급들이고, 또 다른 Monkey가 일본 불교임. 여하튼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 다시 일본 신도(일본 신도는 일본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 종교의 하나임), 일본 불교, 극소수 일본 기독교를 강제로 포교하여, 2차대전 패전후에 종교 주권도 없는채로 현재까지 한국 유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없는 강제 포교종교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권없고 학벌없이 대중언론에서 성균관대에 대항하면서 살고 있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세력들(왜놈학교 후신들 포함)과 똑같이 한국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다만, 세계종교 유교로 수천년을 타 종교가 범접치 못하게 굳건하게 지켜오던 중국 유교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종교 전부가 수난기를 겪었는데, 이 때문에,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필자는 세계사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중국 유교와 다른 공산국가 유교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중국은 서유럽인들이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 세계사에서 참 대단한 혜택을 본 나라입니다.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 세계 종교 유교,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계승됨), 세계 4대 발명품(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여하튼 근세는 서유럽이 세계의 지배세력이었고 중국은 아편전쟁이후 절대적 군사력 열세로 반 식민지 상태였고, 인도는 분명한 영국 식민지로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의 오래된 기득권들인 종교나 대학제도에 대한 역사는 변하지 않고 똑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종교로는 세계종교 유교.불교.기독교, 대학으로는 중국의 태학.국자감, 볼로냐.파리대학. 그래서 필자는 세계사 뿐 아니라, 여러 과목의 학술적 이론을 제공해온 서유럽 학자들의 학설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부처는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브라만교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임은 맞습니다.                 

 

 

* 오래전 필자가 발췌한 역사교사의 중등역사 블로그 내용.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

 

 

1. 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1) 춘추 전국 시대

       ① 시기 : 주의 동천부터 진에 의한 중국 통일까지의 시대

                    (기원전 770 ~ 기원전 221 )

       ② 정치 : 주 왕실의 약화 → 봉건제 붕괴 → 제후들의 독립과 세력 다툼

                    (춘추 5패, 전국 7웅)

       ③ 사회 ․ 경제 : 철기의 보급

           * 철제 농기구 사용 → 농업 생산력 증가 → 상공업 발전 → 시장, 화폐, 도시

           * 철제 무기 사용 → 전투력 향상 → 정복 전쟁 활발

       ④ 제자백가의 출현

           * 부국강병을 위해 각국이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 다양한 사상 출현

           * 유가 : 공자, 맹자 → 인, 예 강조, 도덕 정치

           * 도가 : 노자, 장자 → 무위자연

           * 법가 : 한비자, 상앙 →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 진의 통일에 기여 

 

   2)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

      ① 시황제의 통일 정책

          * 정치 : ‘황제’ 칭호 사용 →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 (중앙집권 통치)

                       군현제 실시 → 지방관 파견

          * 사상 : 법가 사상 채택, 분서갱유 (사상 탄압, 유가 사상가 생매장)

          * 사회 ․ 경제 :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 만리장성 축조 : 흉노 침입 대비

     ② 멸망 : 지나친 토목 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와 가혹한 통치

                   → 진승 ․ 오광의 난으로 멸망 (기원전 206)

 

   3) 한(漢)의 발전과 유교 사회의 형성

      ① 한의 유방(한 고조)이 항우를 물리치고 수립, 장안에 도읍 (기원전202)

      ② 한의 성장과 발전

           * 고조의 정치

              - 군국제 실시 : 중앙은 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로 다스림

           * 무제의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군현제의 전국적 실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

             - 영토 확장 : 베트남, 흉노, 고조선 정복

             - 국가 재정 강화 : 소금, 철 전매제도

             - 비단길 개척 : 흉노 격퇴를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함, 대월지와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비단길(실크로드)이 개척됨

     ③ 신(新) (8~23) : 한 무제 이후 외척인 왕망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건국

     ④ 후한 (25~220)

         * 건국 : 왕망에게 빼앗겼던 한을 광무제(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킴

         * 쇠퇴 : 환관과 외척의 횡포 극심 → 농민 생활의 어려움

                     → 황건적의 난 + 지방 호족들의 자립 → 위 ․ 촉 ․ 오 삼국으로 분열

 

     ⑤ 한의 경제 :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질 좋은 비단, 칠기, 옥제품 생산)

 

     ⑥ 한의 사회와 문화

         * 사회 : 호족 중심 사회 → 향촌 질서 유지, 교육 담당, 대토지 소유, 관리로 진출

         * 문화 : 중국 전통 문화의 기틀 마련

                    - 한자 정리 :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됨

                    - 역사학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반고의 ‘한서’

                    - 지동의 발명 : 후한 때 장형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지진 관측 기구

                    - 종이 발명 : 후한 때 채륜이 제지법 개량 → 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불교 전래 : 후한 대에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됨

 

     ⑦ 유교의 발전과 확산

          * 유교의 국교화 : 한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음

            - 유학 교육 장려 : 수도에 태학 설치, 지방에 오경박사 파견 → 인재 양성

            - 유학의 생활화 : 학문의 중심, 관리 선발과 일상생활의 기준이 됨

            - 유학의 주요 경전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 훈고학의 발전 : 유교 경전의 정리와 해석을 중시함

         * 유교의 확산 :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음

 

 

​위 자료외에 구글에서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자료를 검색해보시면 됩니다. 

 

https://www.google.co.kr/search?newwindow=1&source=hp&ei=9yW4XNHjM6GvmAWV86C4Aw&q=%ED%86%B5%EC%9D%BC%EC%A0%9C%EA%B5%AD%EC%9D%98+%ED%98%95%EC%84%B1%EA%B3%BC+%EC%84%B8%EA%B3%84%EC%A2%85%EA%B5%90%EC%9D%98+%EB%93%B1%EC%9E%A5&oq=&gs_l=psy-ab.1.1.35i39l6.0.0..4790...1.0..0.154.154.0j1......0......gws-wiz.....6.LK8LP_GHrRo

 

                                                             

                                 

                                                          

 

 

                      

 2. 세계사 개념으로, 제자백가이후,한(漢)나라때 국교(國敎)로 성립된 공자님의 유교(儒敎). 제자백가중 한 파인 공자님의 유가(儒家)가 국교인 유교로 형성됨. 공자님이전의 유교는 은.주시대의 천(天)이나 천자(天子)개념등 여러가지 숭배대상을 가진 시원유교(始原儒敎)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음. 한나라의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되어, 현재까지 이름. 한자와 유교 및 중국의 교육제도인 태학.국자감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함. 동아시아인들(중국,한국,베트남, 몽고 및 2차 대전후의 대만.싱가포르인 및, 세계 각국의 화교)에게 국교화 된 수천년 유교전통, 한자(漢字)에 기반한 언어생활, 음식문화, 의(衣)생활, 주거문화, 대학교육인 국자감 교육(한국은 고려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변화됨), 사고방식등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생활에 체화되어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게 아주 많음. 한국은 위만조선, 더 구체적으로는 한사군(漢四郡) 이후, 수천년동안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

 

이전부터 전해지던 중국의 여러 신앙체계에 대해, 유가나 도가, 음양가, 묵가등 여러 사상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국교로 채택된 유교는 공자님의 유가사상으로 교육되어오다가 채택된 것임. 공자님과 맹자님에게서 배운 여러 제자들이 고대 중국의 종교적 토대를 형성하였고, 서양은 로마제국이 받아들인 헬레니즘사상에서 살다가, 숭배대상으로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받아들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종교나 신앙체계는 고대 태동기에 정형화시키면, 후세사람들이 보기에 다소 불만족.불합리해 보여도 지배적인 종교.신앙으로 유지되는 특성이 있음.  동아시아의 유교는 황하문명과 한자를 토대로 유교를 국교로 유교교육으로 태학등을 설립하여 교육.전파.계승시켜옴. 단순하게 중국에 포교된 인도의 불교는 국교인 유교와 달리, 창조주를 부정하는 부처를 숭배하면서, 무군무부의 금수로 배척당하면서 중국.한국이나 동아시아 국가에서 연명하여 왔지만, 어디까지나 국교인 유교나 유교교육의 지배자들 밑에서, 산간에 숨어든 외래신앙 정도로, 유교를 중심으로 하면서, 유교의 하위신앙형태로 유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 중국 도교나 중국 불교의 특성이 국교인 유교의 국교상태를 존중하면서, 주변부 신앙으로 이어져 온 것에 해당되며, 한국이나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그러함. 다만, 후발국지적으로 새로 신앙체계를 형성한 일본은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면서 기독교에 대항하다가, 오랫동안 선진문명국이자 어버이나라로 섬겨온 한국과 달리, 불교적 특성이 강한 신도를 국교로 하여, 일본 민중불교를 같이 믿다가, 일본 강점기에 이러한 일본 신도.불교 및 일본에 포교된 기독교를 한국에 포교시켰음. 2차대전 패전후 일본의 근대적 의미의 수장(일본이 천황으로 호칭.한국은 일왕으로도 호칭)이 인간선언을 하였음.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국에 유교 문화가 전승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음.

 

- 다 음 -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4. 기자조선에 대한 필자의견. 두산백과의 서술을 인용함.

 

고려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필자 주 12). 고려.조선이 인정하던 기자조선이기 때문에, 최근에 부정하는 이론이 지배적이 되었어도, 위만조선에 멸망당한 기준(箕準) 왕이라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므로, 고려.조선이 인정한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일본강점기 이후의 부정적인 견해에 의해 그렇게 부정당한 측면이 있는지등도 검토하여야 할 것 같음.

 

. 필자 주 13). 기준 [箕準]에 대한 민중서관의 설명. 

 

기자 조선 최후의 왕. 기부()의 아들. 기자의 41대손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중국의 연()ㆍ제()ㆍ조()로부터 많은 사람이 피난해 왔다. 연의 위만이 망명하여 온 후, 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금마( 지금의 전북 익산군)에 남천, 한왕()이라 하여 마한()의 시조가 되었다.

 

. 출처: 기준 [箕準]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5. 위만조선.한사군을 거쳐서, 한국에 전래된 유교는 지금까지, 수천년동안 제도적.관습적 유교국가입니다. 일본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후에는 유교국가이던 조선의 한문성씨와 본관을 국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와, 행정법상 유교 국가.

 

학교 교육은 삼강오륜 유교교육 실시하면서 유교의 다른 가르침인 인.의나 충.효교육등을 위주로 함. 그리고 설날.추석등 전국민적 전통 유교명절을 지켜옴.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교는 없고, 종교의 자유도 있음. 

 

 

고려시대는 조금 특이한데, 유교 국자감 교육에,유교적인 사상에 입각한 삼국사기가 정사로 편찬되고, 치국(治國)의 도(道) 유교,수신(修身)의 도 불교로 유교와 불교가 혼재된 사회였음.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며 유교만 국교(國敎)로 인정.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등학교 국사 참고서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의 발달편에 나오는 중세의 문화[필자 주 14). 고려시대의 문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다 음 -

 

고등학교 국사 지식창고/펴낸데 (주)두산동아/지은이 윤영호 김용석 엄기환/발행 2007년 10월 1일.

Page 254.

 

VI. 민족문화의 발달

 

...2. 중세의 문화...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1). 유학의 발달

 

① 특징: 유교(치국의 도)와 불교(수신의 도)가 서로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며 발전

 

② 초기: 유교주의적 정치와 교육의 기틀 마련

 

. 태조: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 건의(최언위, 최응, 최지몽등)

. 광종: 과거제도 실시-->유학에 능숙한 사람을 관료로 등용

. 성종: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유교 정치사상 정립, 자주적.주체적 성격

 

③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유교 사상의 보수화

 

. 최충:해동공자, 9재 학당 설립,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 가미

. 김부식:보수적.현실적 성격의 유학 대표

. 특징:시문을 중시하는 귀족적 경향, 유교 경전에 대한 전문적 이해 심화

 

④ 무신정변 이후: 문벌 귀족 세력 몰락-->유학 위축

 

(2). 교육기관

 

① 관학

 

. 국자감(국학): 중앙의 국립대학, 유학부(국자학, 태학, 사문학)와 기술학부(율학, 서학, 산학)

 

. 향교: 지방에서 지방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 담당

 

② 사학의 발달: 고려 중기에 최충의 문헌공도등 사학 12도 융성-->관학교육 위축

 

③ 관학 진흥책

 

. 예종: 국자감 재정비, 전문 강좌 설치, 장학재단 설립

. 충렬왕: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 문묘 건립

. 공민왕: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 유학 교육 강화

 

(3). 역사서의 편찬

 

① 건국 초기: 왕조실록과 7대 실록 편찬-->전하지 않음

 

② 중기: 삼국사기(인종 때 김부식)-->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 신라 계승의식 반영...

 

. 출처: 두산동아 발행 고등학교 국사/지식창고 254p, 발행:2007년 10월 1일, 지은이:윤 영호,김 용석, 엄 기환, 펴낸데:(주)두산동아 

 

  

 

4].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종합대학
  • 개교일1398년
  •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은행나무
  • 면적(㎡)627,025
  • 홈페이지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는 윤진한 이라고 합니다. 성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1983학번입니다. 宮 儒. 성균관대 출신임. 어릴때부터 파평윤가 양반으로 살아왔는데, 이 양반자격은 한약방집 딸인 유모(법률상으로는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아니고, 이전남편과 이혼신고를 하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서 필자와 동생을 낳음)가 필자의 법률상 어머니가 아닌 유모임을 주장하여 얻어진  양반자격입니다. 한약방집 딸이라 아버지(선거등에 출마하느라 선거빚이 많은 상태로 살아오신 것 같음)에 비해서 돈이 많은 유모(유모 아버지가 유모에게 기와집도 사주고 그랬으며, 외부에서 곡마단등이 오면 필자의 집에 단체로 숙박할 정도로 집이 컸음)였는데, 그 당시 수편물 기구도 여러대 가지고 고용인들을 데리고 있었음. 유모는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집안에 운전사나 자가용을 굴리는 정도로 재력이 향상된 시절에 아버지와 필자의 법륭상 어머니가 이혼해 달라고 요구한적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음(아버지가 장남이라 작은 아버지들이 필자의 법률상 어머니와 큰 형님.형님들이 사시는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명절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기에, 제사때문에 결국 이혼을 거부한 것 같음). 필자의 고모가 시집간 고모부 집안 어른(안동권씨로 선거로 지역 면장 배출한 집안. 필자의 파평윤씨 집안도 선거로 지역 면장 배출함)의 견해로는 필자가 국민학교 3학년 즈음 호적에 등록되었는지 궁금하였고, 호적에 등록되었다면 자기보다 높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필자가 국민학교 3학년 즈음 양치질을 하기 위해 소금을 가지고 가서 마을의 시냇물에 가서 양치질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주변에 살던 한의사는 어린 나이라도 필자가 양반이라, 부담스럽다며 필자가 양치질 하던 냇가의 상류에 있다가도 다시 하류로 내려가서 양치질을 하였습니다. 여하튼 파평윤씨들이 많이 사는 전북 남원부근 장수군 산서면 고향마을 국민학교(전북 장수 산서 국민학교)선생의 견해는 반에서 필자가 가장 양반이라는 견해였습니다.      

1983년 성대 입학전, 1981년 모 지방 국립대 법학과에 입학해서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초까지 다닌적이 있었으며, 한국나이 스물한살 시절이던 1982년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한국나이 스물두살인 1983년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주간)에 퇴계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988년에 졸업하였습니다. 대학다닐때는 전공공부도 많이 하였지만, 문학이나 역사.유교 경전 말씀 및 법학과목도 같이 수강하였습니다. 대기업을 거치고, 현재는 돈버는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필가.사상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필자의 부친은 파평윤씨 양반이며, 어머니도 양반가 출신입니다.

 

병역면제탓에 추천장의 위력이 약해져 여러군데 면접에서 탈락, 평범하게 입학하고 병역을 마친 다른 동기들이 다들 재벌기업.대기업에 입사확정되던 시기에, 입사 미확정 상태로 살다가, 작은 광고회사등에 입사확정되어 출근한적도 있지만, 며칠 다니다 그만두고 1988년 2월 성균관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미도파 백화점을 가진 대농그룹에도 다니고 그러다가, 1988년 8월경 지금은 LG그룹으로 변한 럭키금성그룹의 금성전선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근무한적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졸업즈음 전주 신흥고 교문을 나서면서 전라고.서강대 출신 영매를 처음 만났습니다(고 1때 전주시내 학교들이 모여서 교련 경시대회를 참관하던 중, 응원석에서 신흥고 응원단장하던 사람이 전주여고 응원단에 신흥고 응원단에 잠깐 와서 기량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때, 왜놈학교 잔재인 전주고 응원단장과 티격태격하는 마찰이 생겼을때, 박정희 대통령이 영매를 통하여 필자에게 무의식의 세계관을 보인것 같음. 라이벌학교같다는 무의식의 느낌. 필자주변의 어른들이 왜놈학교 전주고라고 엄청나게 배격하던 걸 듣고 자란 필자임). 

 

이 분을 통하여 여러 지도자들의 무의식과 접하는 뇌과학의 정신세계를 경험하였다고 판단됩니다. 1989년 금성전선에 다닐때 옆 부서에 서강대 영문과 출신 부장이 조달부장으로 있었는데, 이 분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아마 이시기에 교황(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임시기임)성하나, 한국문화와 맞지 않고 이질적인 특성이 많은 일본천황의 무의식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의 재임시 일본 천황이 필자가문에 뇌과학 상태로 개입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일본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불교적 특성이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나, 일본 불교,  다른 왜놈학교들을 통하여 필자 가문에 부정적 영향력을 끼친것 같습니다. 그래도 필자의 법률상 아버지.어머니가 양반이고 형님들이 파평윤씨 양반가문 후손(일본 강점기 이전 필자의 증조부가 조선.대한제국의 벼슬을 얻았음. 조선.대한제국은 전주이씨나 파평윤씨에게 많은 특혜를 준 나라임)이라, 필자의 양반자격은 유효하며, 호적과 주민등록에 기반하여 이 양반 상태에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자천하여 등극(성대 총학생회 게시판과 유학대학에서 인터넷으로 백명 정도의 동의를 얻음)한 것인데, 성왕으로 인정되는 필자의 자격은 이렇게 형성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싫어하는 일본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일본 천황의 지위는 분명하게 맞습니다. 필자의 가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놓았어도 그 부정적 영향을 받은 필자가문의 해당자(왜놈학교등에 진학)는 일본 천황의 볼모정도로 신분은 높게 책정된 상태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필자가 다시 정리하여 나갈 것이며, 한국의 제도권에 편입시키지는 않고, 그 피해자가 자연사 할때까지 놔두다가 자연사하면 그 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사 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 재임시, 1998년에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에,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성하 재임시 필자가 궁 성균관대 임금으로 자천하여 왕위에 올라(궁 성균관대 임금=어 서강대 임금), 트위터나 페이스북, 국내의 Portal사 블로그등에 십 몇년 넘게 알려왔습니다.

 

국내의 집권자들인 역대 대통령들도 필자에게 관여한  상태에서 얻어진 宮 성균관대 임금(= 御 서강대 임금, 법적인 자격이 아니고 정신적인 자격임)자격이지만, 이미 관습적으로 정착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문이 한일합방을 무효로 하였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을 종합하여 성왕(成王)에 오른 필자의 임금자격은 대한제국 후손인 황사손(이 원. 이구公의 후계자 자격으로 公정도의 지위에 해당될것)보다 높은 상태입니다. 이런점을 충분히 숙지하시기 바랍니다(한일합방을 강행법으로 부정할 수 없던 대한제국 문벌가지고 쓸 데 없이 쿠데타.혁명 일으키면 않됨). 일본 강점기를 부정하며, 국가적 정설로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행정법(대통령 령인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의 공식 견해)상 인정되는 성균관대 자격입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