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의 후예인 기준(箕準, 王)이후 분명한 歷史時代인 위만조선, 漢四郡, 三韓시대를 거쳐
기자(箕子)의 후예인 기준(箕準, 王)이후 분명한 歷史時代인 위만조선, 漢四郡, 三韓시대를 거쳐
한국에 정착한 황하문명(黃河文明) 중국(儒敎 宗主國)의 유교(儒敎),한자(漢字),한문성씨(漢文姓氏) 그리고 본관(本貫).
1. 강원 도민일보 윤수용 기자 기사(2010.02.12, 설특집 성씨와 가문)로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남.
조선시대 姓氏別 과거급제자수. 전주李씨,파평尹씨,안동權씨,남양洪씨, 밀양朴씨, 안동金씨순서.
조선시대는 전주李氏가 역성혁명을 통하여 태조(이성계)의 나라를 건국한 시대로 전주이씨가 왕족이며 왕의 부모,배우자,자녀,형제자매들이 왕실의 일원입니다. 을사조약이 무효라 고종과 순종의 후손인 황사손(이원)이 왕족. 조선의 최고대학인 성균관(성균관대로 600년 역사와 전통 이어짐, 국사와 세계사, 국제법과 국내법등을 혼합, 宮 성균관대=외래종교출신 御 서강대로 필자는 정의해 옴)이은 성균관대(성균관대로 600년 역사와 전통 이어짐, 국사와 세계사, 국제법과 국내법등을 혼합, 宮 성균관대=외래종교출신 御 서강대로 필자는 정의해 옴)가 한국 최고학벌(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황사손(이원)으로 추대하여 수천년동안 한국 유교의 오랜 국가제사인 환구대제(제천의식), 종묘대제(왕실의 조상신 제사), 사직대제(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를 치르는 황사손(이원)이 국제법과 관습법상 한국 國王이 되었다고 선포한 사람은 宮 성균관대 임금임(필자, 宮 儒 윤진한, 전주 신흥고 졸업하고 모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1983년 다시 입학시험을 보고 성균관대 1983으로 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에 입학). 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 서강대 임금(전주 신흥고 졸업하고 서강대 사학과 1981학번인, 서강대 기록보존소 서진교 교수)은 國王과 같은 King의 위치며, 황사손(이원)을 國王으로 규정하기전 王의 위치로 한국을 영적 통치해 옴.
2. 高麗時代의 개국공신들로 보는 주요 姓氏
고려시대 개국공신은 개성호족출신 왕건을 도운 윤신달(파평尹씨 시조),홍유(남양洪씨 시조),신숭겸(평산申씨 시조)이 대표적. 三韓시대부터의 뿌리깊은 姓氏로는 箕子(중국 殷나라 王族출신의 역사적인 인물. 箕子조선은 역사에 가까움)의 후예인 기준(箕準,箕準王은 역사시대 인물인 위만조선의 위만에 멸망당한 箕氏姓의 王인데, 先史時代 인물중 가장 확실한 역사적 인물임. 혹자는 先史時代 정치인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가깝다는게 필자의견임. 단군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고려시대 중 일연이 正史인 三國史記를 모방하여 삼국유사를 개인적으로 만들면서 수천살을 살았다고 고려시대 후기에 뒤늦게 창조한 설화적 인물. 三國史記는 正史, 삼국유사는 野史로 가르치는게 통례임)에서 유래된 徐씨.韓씨등이 있다고 전해짐. 고구려는 高씨, 백제는 扶餘씨,신라는 朴씨와 石씨, 金씨가 지배.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인 국자감이 있던 시대며, 중국을 모방하여 유교의 과거제가 대대적으로 실시된 시대임.
두산백과에 의하면 고려시대 과거제는 다음과 같음. 과거의 응시자격은 양인(良人)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민이나 승려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양인 이상은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농민은 사실상 응시하지 못하였다.
3. 중국 황하문명(黃河文明)의 유교(儒敎)와 한자(漢字). 그리고 선사시대(先史時代)와 역사시대(歷史時代)인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삼한시대(三韓時代),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려시대(高麗時代) 한국의 한자.유교.한문성씨와의 대략적인 관계.
중국 황하문명에서 발생된 한자와 유교문화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에 선사시대(先史時代)와 역사시대(歷史時代, 위만조선, 한사군,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하여 유교와 한자,한문성씨등을 전파시키고 전승시켜옴. 이후 삼국시대 중국의 혼란기인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황하문명에서 파생된 유교와 도교,한자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한국에서는 외래종교차원으로 호기심차원에서 방관하기도 하고, 유교와 도교와 같이 믿어보기도하고, 배척도 하고 탄압도하며 불교를 존재케 함. 고려는 治國의 道가 유교고, 修身의 道가 불교라고 하는 시대인데, 유교.도교.불교(유교식 중국불교)의 공존시대로 볼 수 있음.
위만조선 이전의 시대는 기준(箕準,王)이라고 하는 상당히 역사적 인물이 지배하던 箕氏성의 기자조선 시대라고 일컬어지는데 상당히 역사적이지만, 혹자는 기준왕을 先史時代의 정치인으로 보기도 함(위만조선부터는 분명한 역사시대인데, 위만이 멸망시킨 箕準王은 箕子의 후손으로 일컬어짐). 기준왕의 조상이 기자임은 오랜 관습적 통설인데, 중국도 기자와 조선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때문에 역사시대에 아주 가까움. 단군은 고려후기 중 일연이 유학자들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정사인 三國史記를 개인적으로 모방하여 지어낸 후발 불교 설화형태 삼국유사에서 만들어 낸 인물로, 단군과 단군조선은 歷史아닌 野史로 가르쳐옴. 삼국유사나 단군은 고려 후기 중 일연이란 개인이 지어낸 하나의 전설과 설화형태임.
고려시대에 유학자인 최승로의 불교억제책을 보거나, 과거제도 도입, 중국식 한문姓氏사용의 보편화추세를 보면 고려의 治國의 道가 유교임은 분명함. 治國의 道는 國敎임. 고려의 治國의 道는 유교, 修身의 道는 불교라는 교과서(참고서 영역 포함)적 서술을보면, 고려시대는 유교와 불교 도교를 같이 허용하면서, 유교 국가제사인 제천의식, 종묘제사, 사직제사, 문묘제사(석전)를 치르고 중국에서 유래된 유교 전통 명절인 설날,단오,추석을 3대 국가명절로하면서 유교 최고대학인 국자감과 과거제를 시행하고, 부분적으로 유교적인 팔관회나, 불교행사인 연등회를 같이 치루었다고 할 수 있음. 승려의 자식이란 문구로 볼때 고려의 불교는 결혼하지 않는 불교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음. 가끔 고위신분의 사람이 승려가 되는것은 승려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본인세대에 출가하는 특수한 경우로 볼 수 있으며, 고려는 유교.도교.불교(중국불교)를 같이 허용했지만 통치학문과 통치종교는 儒學(국자감등)과 儒敎였음을 알 수 있음.
4. 중세시대 모든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한국에서 받아들인 한자.유교.도교.중국불교가 왜곡되었다고 보여지는 일본. 그리고 을사조약 이후 일본 강점기를 통하여 조선총독부령 83호로 조선(대한제국)에 강제 포교된 외래종교 신도.불교.기독교와 수천년간 조선의 국교요 가까운시대 조선(대한제국) 국교였던 유교와의 대략적인 관계.
일본강점기 이후 조선사 편수위원회가 생겨서 일본 불교적 사상을 반영하여서 고려시대의 불교가 국교로까지 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려시대의 治國의 道는 유교이고 최승로의 불교 억제책등이 채택된점으로 볼때 고려시대는 왕건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를 축출하면서 궁예(신라 왕족의 사생아로, 절에 버려진인물로 기록됨. 양길의 수하에 있다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를 세웠으나 왕건에 의해 축출됨)가 믿던 불교(중국불교)를 상당부분 답습한 것 같음. 그리고 삼한시대부터 전해지던 중국유교나 중국에서 전해진 도교 및 중국에서 전해진 중국불교를 같이 허용한 나라가 고려시대 같음. 유교국인 조선이 을사조약이후, 불교(한국에서 수입해간 한자.유교.도교와 혼합된 유교적 중국불교)적 특색이 강한 일본에 강제 점령당하여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한국의 왕실과 주요 문벌들이 감시당하면서, 모든것이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목격해왔음.
지배층(왕족.양반)들을 조선(대한제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멀어지게 하고, 불교적 특색이 강한 일본 신도.일본 민중불교에 노출시키고, 일본 신사참배와 일본어사용, 창씨개명, 일본 민중불교의 포교등을 활발하게 진행시켜 현재까지 그 강점기에 희생당한 왕실.귀족가문들이 존재하고 그 잔재가 남아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할 수 있음.
신도나 일본 민중불교(일본은 한국과 달리 산속 산중불교 아니고, 승려가 결혼도 하고 시중까지 진출하는 불교인데 이를 한국에 퍼뜨림)는 일본만의 후발국지적 신앙인데, 일본 막부가 모든주민을 절에 등록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하여 형식적인 불교국가의 길로 접어든이후, 일본 강점기에 피해를 본 한국으로 일본 신도.일본 민중불교를 전파하여왔음은 우리는 역사에서 목격하고 있기때문에 이런 부분도 염두에 두어야 할것임.
* 필자 의견 1). 신라말기까지도 귀족출신임에도 姓氏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시대부터 姓氏를 가져야 과거를 볼수 있게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姓氏보급이 확산되고, 조선시대 이르면 姓氏가 없으면 천민취급.
5.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대대로 門閥이 높은 집안.
출처.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조기형, 2011.2.15, 이담북스
* 필자의견 2). 삼한갑족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전해지지만 필자는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겠음. 기자조선의 후예인 기준왕에서 비롯되어 三韓시대와 新羅시대에 어느정도 좋은 門閥을 유지하던 성씨를 의미하는것으로 이해함.
6. 고려시대의 문벌귀족.
경원 이씨(이자겸)는 수많은 왕비를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습니다.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왕실의 외척으로 80여 년 동안 정권을 독점했습니다. 그 밖에도 해주 최씨(최충), 경주 김씨(김부식), 파평 윤씨(윤관)도 대표적인 문벌 귀족 가문이었죠.
출처 .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김아네스.최선혜,2009.2.5, (주)신원문화사
* 필자의견 3). 尹氏는 중국 삼황오제시대에 형성된 성씨로,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태종무열왕의 태자태사(太子 太師)에서 유래되었다가, 통일신라 말기 윤신달(파평윤씨 시조)에서 다시 윤씨의 문벌이 재 형성됨. 한국에서 형성된 파평 尹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해 1,000년 넘게 최고 귀족문벌을 유지하던 姓氏라고 판단함.
* 필자의견 4).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 나타나는 尹氏. 칠원윤씨가 가장 오래됨.
칠원윤씨(漆原尹氏)는 신라시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始祖)로 한다...
또한 《경신보》의 세록편(世錄遍)에는 윤시영이 칠원백(漆原伯) 혹은 호장랑(戶長郞)을 지냈다고 하며, 7대에 걸쳐 봉군(封君) 되었다고 적혀 있다.한편 윤시영의 아들 윤황(尹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7. 고려시대 과거제와 氏族(성씨)과의 상관관계.
고려시대 중국 과거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성씨를 가진 씨족록에 실려야만 과거응시를 가능하게한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氏族不付者 勿令赴擧,1055년(문종9).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
8. 한국 향토문화대전에 나타나는 여러 姓氏 설명. 특별한 순서는 없음.
가). 이천서씨의 시조는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의 후손 서신일(徐神逸)이라 한다. 기준(箕準)은 위만을 피하여 이천에 있는 서아성(徐阿城)에 살았다 하여 그 후손이 성을 서씨라 하고 본관을 이천(利川)이라 하였다(향토문화대전 이천서씨편에 의함).
나).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다(향토문화대전 청주한씨편에 의함).
다). 밀양박씨의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이다. 박씨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에서 비롯되었다. 박씨는 밀양·성주·완주·강릉·고성 등 12개 본관을 가진다. 그 중 밀양박씨가 대종으로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계보를 가진다. 밀양박씨의 세계(世系)는 밀성대군의 7세손인 박언부(朴彦孚,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판도공파(版圖公派)·좌윤공파(左尹公派) 등으로 대별된다
라).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 벼슬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오름으로써 세계가 번성하여 파조도 대단히 많다
마). 파평윤씨는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한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태사에 오른 인물이다. 5세손 윤관(尹瓘)은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파평백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윤관을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파평으로 삼게 되었다.
윤관은 일곱 아들을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파평윤씨는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재상 11명, 대제학 1명, 왕비 4명을 배출하였다
바).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선시조는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洪天河)이다. 선시조 학사공 이후의 계대가 확실하지 않아,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을 세우고 고려 개국 일등공신이자 삼중대광태사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다
* 필자의견 5). 두산백과에 의하면 1세조인 홍은열은 《고려사》에 고려 혁명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된 홍유(洪儒:義城洪氏의 시조)와 동일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는 신숭겸(申崇謙)이다. 그는 신라 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창건한 개국공신으로, 927년(태조 10) 후백제 견훤군과의 공산전투에서 적군에 포위를 당해 전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자 용모가 태조와 흡사한 신숭겸은 태조를 숨기고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에 태조는 그를 고려 태사(太師)로 봉하고 시호를 장절공(壯節公)으로 하였으며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봉안하였다
아). 안동 김씨의 시조는 신라 말 고창[안동]의 성주로서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건충공신에 피봉된 김선평이다. 김선평은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과 함께 안동에 침입한 견훤의 대군을 병산(甁山)전투에서 대파하자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안동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안동 김씨는 조선 중종 때 14세(世) 회인현감 김기보(金箕報)의 3형제 중 김극(金克)이 승의랑공파(承議郞公派), 김태(金兌)는 증승지공파(贈承旨公派), 김원(金元)은 춘당공파(春撞公派)로 분파되었는데 김천 지역의 후손은 춘당공파에 속한다
자).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대대로 안동에 살던 토족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이다.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권씨(權氏) 성을 하사받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보(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졌으며 후삼국 통일 후 태사(太師)의 작위를 받았다.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다
* 필자의견 6). 족보와, 과거급제(구한말 과거제 폐지이후는 성균관과 성균관대 졸업이 大科 합격자와 같은 위치라고 볼 수 있음. 일본 강점기를 거치며 해방을 맞고, 일본강점기 청산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시대와 같은 제도가 없어져 최근에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로 정의해 옴), 문중별 제사, 왕실후손 황사손(이원)주관의 전통 국가제사인 환구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등을 종합해서 해방이후의 신분제를 정의할수도 있을것임.
* 이 글은 논문이나 Report가 아니고 Essay형태의 의견제시 글입니다. 비영리적이고 공익성을 가진글로, 일본 강점기로 왜곡된 한국의 역사와 유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