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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인 성균관.향교의 추기(秋期) 석전(釋奠). 2020년 양력 9월 28일에 거행.정부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지침에 맞춰 자체행사로 치러

beercola 2020. 9. 28. 19:35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인 성균관.향교의 추기(秋期) 석전(釋奠). 2020년 양력 9월 28일에 거행.정부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지침에 맞춰 자체행사로 치러

 

1]. 보도기사.

 

2020,09,28 유교신문 손경수 기자 보도뉴스.

 

성균관, 공기 2571년 추기석전 및 공부자탄강 기념식 봉행

정부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지침에 맞춰 자체행사로 치러

 

...

 

성균관은 9월28일 오전 10시 성균관 대성전에서 공기 2571년 추기석전을 봉행했다.

정부의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지침에 맞춰 외부초청 없이 자체행사로 치렀으며 문묘를 통제하고 성균관 유림회관 1층 입구에 적외선 열감지기와 체온계를 준비해 성균관 임직원과 유관기관 관계자, 제관 등 모든 출입자에 대한 검사를 실시했고 마스크를 제공했다.

추기석전의 초헌관은 손진우 성균관장, 아헌관은 구본식 부관장, 종헌관은 최광일 경주최씨청년회 수석부회장이 맡아 봉행했다.

추기석전은 전폐례로 막을 올렸다. 초헌관이 삼상향을 하고 폐비를 받아 헌폐하고 대축에게 주어 대축이 폐비를 대성지성문성왕 신위 앞에 올렸다.

전폐례에 이어 초헌례가 봉행됐다. 초헌관 손진우 성균관장은 대성지성문성왕 신위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예제를 따른 술잔을 헌작했다. 이어 오성위에 헌작했다.

아헌관 구본식 부관장은 앙제를 차례로 헌작했다. 종헌례에서 최광일 종헌관의 헌작과 동시에 동서분헌관들도 동서종향위에 헌작했다.

초헌관의 음복수조례와 변두를 거두는 철변두가 이어졌고, 폐백을 태우는 망예례로 막을 내렸다.

이어 2부 행사에서는 자리를 명륜당으로 옮겨 '공부자탄강 기념식' 행사를 가졌다.

기념식은 최영갑 교육원장의 사회로 ▶식전행사 ▶개회선언 ▶국민의례 ▶순국선열과 먼저 가신 유림제현에 대한 묵념 ▶윤리선언문 낭독(박기숙 성균관 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 연구원) ▶기념사 ▶'공부자탄강일 국가지정 기념일 제정 청원' 선언문 낭독(손한나 재단법인 성균관 과장) ▶폐회 순으로 진행됐다.

식전행사에서는 임학선 댄스위와 성균관대 팔일무단이 공부자의 학문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을 춤으로 표현했다. 또한 팔일무의 원형을 통해 전통을 계승하는 정신도 함께 표현했으며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손진우 성균관장은 기념사에서 "석전봉행에 애써주신 헌관과 제관 그리고 참석해 주신 유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이번 공기 2571년 추기석전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수칙을 엄수하고 내부행사로 추진했다. 어려움을 딛고 성현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정성이 전통유교문화를 지키고 세상의 평안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공기 2571년 추기석전은 성균관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성균관대학교에서 후원했다. 그리고 재단법인 성균관,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성균관모성회,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 유교신문사, 성균관유도회서울특별시본부, 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 (사)석전대제보존회, 성균관석전교육원, 석전대제이수자회, 유교교육원총동문회, 석전교육원총동문회 등이 참여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재숙 문화재청장, 최효석 경주최씨중앙종친회 회장, 하곡연구원, 김건중 광산김씨 문원공종중 도유사 등이 화환을 보내 축하했고 성균관모성회 30개 문중이 별도로 헌성했다.

한편, 이날 석전 봉행의 분헌관 이하 제관은 다음과 같다.

 

동종향위 전열 분헌관 金熙庚 成均館 監事 서종향위 전열 분헌관 全明植 成均館 監事 ▶동종향위 후열 분헌관 薛東休 慶州淳昌薛氏大宗會 常任副會長 서종향위 후열 분헌관 朴勝錫 成均館 諮問委員 

집례 金東穆 대축 朴萬吉 묘사 崔光京(), 魏昌復() ▶알자 安度燮

찬인(분헌관) 李在克 찬인(대축) 孔在春 사세 金明蘭韓順福 ▶진설 金淑子黃美淑

오성위 봉향 金淵俊 봉로 權善出 봉작 河榮鎬 전작 李石雨 사준(정위) 金玉蘭 사준(배위) 李柰炅

동종향(, ) 봉향 金炯烈, 鄭然大 봉로 梁完錫, 洪性煥 봉작 金東潤, 林炳起 전작 梁完錫, 林榮仁 사준 鄭榮振

서종향(, ) 봉향 金光南, 金鍾昊 봉로 吳三洙, 金培鐸 봉작 安相鉉, 方石官  전작 吳三洙, 吳漢文 사준 崔順任

감찰 朴光泳 찬자 李旭...

 

 

 

2]. 표준 국어대사전에서는 석전(釋奠)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석전제(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한국 유교는 조선.대한제국 국교인 유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역사적.관습적.행정법 상으로는 전국민이 유교국가인 조선식 한문성씨와 본관을 호적.주민등록에 법으로 강제로 등록해 온 나라임. 전국적으로 성씨별 문중별 종친회가 있음. 그리고 학교에서는 유교의 삼강오륜 교육과, 인의예지신 교육, 충효교육을 실시해 온 나라임. 또한 설날.추석 등 유교 전통명절과 24절기의 주요 기념일, 문중별 제사, 성균관.향교의 춘기.추기 석전, 최고대학인 성균관대등에서의 별도의 유교교육이 있음.

 

유교는 크게 보면 주민등록에 강제로 조선식 성명과 본관을 등록하는 행정법, 설날.추석등 전통 유교명절의 성묘나 제사, 성씨별.문중별 전국적인 조상제사, 성균관.향교의 석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환구대제.사직대제.종묘대제, 24절기 및 주요 명절의 기념 행사, 성균관대등에서의 유교교육, 초.중.고에서의 유교 교육등이 유교의 전체집합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3]. 추기(秋期) 석전(釋奠). 선성(先聖)이시자 문선왕(文宣王)이신 공자님제사.

 

1. 석전(釋奠)에는 춘기(春期) 석전(釋奠)과 추기(秋期) 석전(釋奠)이 있는데, 성균관 및 전국의 많은 향교에서 거행함. 향교는 약간씩 날짜가 다를 수 있음.  

 

석전 제사 기구인 성균관(성균관대와 성균관은 원래 같은 한 몸이었는데, 해방후 미군정시대 구한말의 정부지침을 이어받아 교육기능은 성균관대, 제사기능은 성균관으로 분리하여 현재에 이름)에서 석전(釋奠)을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2. 유교 경전의 오경(五經) 사서(四書) 중 하나인 오경의 예기(禮記)에는 다음과 같이 석전(釋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편에 의거합니다.

 

 

- 다 음 -

 

凡學春官釋奠于其先師 秋冬亦如之 凡始立學者 必釋奠于先聖先師

及行事必以幣 凡釋奠者 必有合也 有國故則否 凡大合樂 必遂養老

 

무릇 봄과 여름에는 교관이 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을 드리고(생도로 하여금 도덕을 함양하고 고매한 인격을 도야하게 한다), 가을.겨울에도 이와 같이 한다. 처음으로 학교를 세운자는 반드시 선성.선사에게 석전을 드리는데 그 제례를 행할때는 반드시 폐백을 드린다. 석전제에는 반드시 합악(合樂)을 하되,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는 이것을 그만 둔다. 대합악(大合樂)이 있을 때는 반드시 양로의 예를 행하는 것이다.    

 

. 필자 주 1). 번역자가 부가설명 해놓은 자구 풀이

 

ㄱ). 춘(春): 凡學春官의 春임.

춘하(春夏)의 약(略)이다.

 

ㄴ). 관(官): 凡學春官의 官임.

교관(敎官)

 

ㄷ). 석전(釋奠): 선성.선사를 제사 지내는 것

 

ㄹ). 선사(先師): 지난날에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대중의 사표(師表)가 될 인물

 

ㅁ). 선성(先聖): 주공(周公).공자와 같은 성자(聖者)를 가리킨다.

 

ㅂ) 유합(有合): 합은 합악, 즉 합주악(合奏樂)을 말한다.

.....................

.....................

 

凡語于郊者 必取賢斂才焉

교학에서 논설을 듣는것은 반드시 현명한 인물을 뽑고 재능이 있는 자를 뽑으려는 것이다................

 

於成均以及取爵於上尊也

다만, 천자가 성균(成均)에서 주연을 베풀었을 때 당(堂)위에 올라 술을 마시는 영광을 입을 뿐이다.

 

. 필자 주 2). 번역자가 부가설명 해놓은 자구 풀이

 

ㄱ). 성균(성균): 오제(五帝)때의 대학 이름, 주나라 때까지는 이것이 남아 있었다.

ㄴ). 취직어상준(取爵於上尊): 상준은 당(堂)위에 있는 술통. 즉 술잔을 잡아 당 위에 있는 술통의 술을 마시는 것. 

 

 

. 출처: 新譯 禮記/권오돈 譯解/홍신문화사/2003.10.30 발행의  문왕세자(文王世子)편.

 

 

4]. 사전류에서 설명하는 석전(釋奠).

 

(1).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에서 설명하는 석전에 대한 규정

 

석전(釋奠)

 

석전제[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설명하는 석전(釋奠).

 

1. 필자가 필요에 의해 발췌한 부분적 요약 설명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상대()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 「춘관()」],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 「왕제()」]. 전자를 정기적()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서()·예()·악()을 가르치는 교관()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에는 순()·우()·탕()·문왕()을 선성()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의 명제() 같은 제왕은 주공()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수()·당()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나라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최초로 태학(: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왕인()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 또는 성균관()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 또는 문선왕묘()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하기도 했다...

 

. 필자 주 3). 한국에서는 해방이후 미군정시대, 교육기능은 성균관대로 분리하여 미군정에 등록하고, 문선왕(文宣王)이시자 선성(先聖)이신 공자님에 대한 석전은 현재의 성균관으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석전(春期, 秋期 釋奠)은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향교는 이전에는 고등학교[향교.서원.사부학당은 조선시대에 주로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하던 고등학교 성격. 이 이외에도 명망높은 학자밑에서 사숙(私塾)하다가 과거에 응시하는 방법도 있었음. 이 이전의 소학교 기능은 서당등]에 해당되며, 성균관은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대학이었음. 현재 한국의 향교는 공식적인 교육기능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석전제사등의 제사업무를 거행함.      

 

2,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설명하는 석전(釋奠).

 

석전[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에서 열렸던 석전제 전경. 요즘도 성균관 문묘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씩 공자를 비롯, 4성 10철 72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인 석전이 거행되고 있다.

유형성격행사시기행사장소

의식행사
제사, 추모의식
봄 2월(음력)과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
성균관, 지방 향교

정의

전통 사회에서 산천()·묘사()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은 ‘놓다()’·‘두다()’의 뜻이고, 전()은 ‘그치다()’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일설에는 소[]·양()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 빈조류()]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정제()·상정제()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 첫 )에 모시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대()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 「춘관()」],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 「왕제()」]. 전자를 정기적()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서()·예()·악()을 가르치는 교관()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에는 순()·우()·탕()·문왕()을 선성()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의 명제() 같은 제왕은 주공()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수()·당()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나라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왕인()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 또는 성균관()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 또는 문선왕묘()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10철과 송조6현()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서무(西)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하였다.

내용

집례 및 묘사()가 먼저 섬돌 아래에서 4배()를 올린 뒤 손을 씻고 자기 위치에 선다.

① 창홀():집례가 홀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전악()이 악사()와 무생()을 인솔하여 정해진 위치로 입장하면, 찬인이 대축()과 모든 집사()를 인도하여 섬돌 아래서 4배하도록 한다. 대축과 모든 집사가 관세위()에 나아가 손을 씻고 각각 자기 위치로 가서 선다.

묘사 및 봉향()·봉로()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한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아헌관()·종헌관()·분헌관()을 인도하여 정해진 위치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의 시작을 청하고 당하악()이 연주되고 문무()가 시작되면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4배한다.

② 전폐례():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위, 맹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③ 초헌례():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으로 가면 당상악과 문무가 시작된다. 공자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은 안자·증자·자사자·맹자 신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④ 아헌례():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 아헌관이 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순으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가 연주된다.

⑤ 종헌례():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예로, 종헌관이 앞의 순서대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를 춘다.

⑥ 분헌례():앞서 술잔을 올린 공자와 네 신위 이외에 종향()되어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드리는 예이다. 동종향분헌관()과 서종향분헌관(西)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동종향 17위, 서종향 17위에 술잔을 올린다.

⑦ 음복례():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예이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음복하는 곳으로 나아가 술과 포를 음복한다. 대축이 철상()을 한다. 당상악을 그치고 당하악을 연주한다.

⑧ 망료례():제사가 끝나서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는 예이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축문 사르는 곳으로 나아가면 대축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른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난다.

 

. 출처: 석전 [釋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필자 주 4).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설명하는 한국 상고시대와 삼국시대 유교.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다 음 - 

 

 

2. 삼국의 발전과 유교

  1. 2.1. 고구려의 유교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대와 작자는 미상이지만, 고구려에는 일찍이 100권에 달하는 사서로 『유기(留記)』를 편찬한 바 있고, 영양왕 때(600)에는 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사(古史)를 축소해 『신집(新集)』 5권을 수찬하게 하였다. 고구려는 『유기』·『신집』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서 찬수 사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상류의 귀족층은 ‘대학’에서 교육했고, 민간의 일반 서민에게는 어디에나 공회당과 같은 학원을 세워서 경서와 무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빈천하고, 짐승이나 먹이는 집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대옥(大屋)을 지어 이를 경당(扃堂)이라 불렀으며, 미혼의 자제들이 주야로 이곳에서 글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교 경전을 통해 인문 정신을 배양하고 강용(强勇)한 상무 정신(尙武精神)을 수련함으로써 고구려는 강대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 출처: 유교 [儒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두산백과에서 설명하는 석전.

 

석전(釋奠)        

 

요약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4성() 10철() 72현()을 제사지내는 의식.

 

 

석전제·석채()·상정제()·정제()라고도 한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첫째 )에 거행한다.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를 놓고(), 폐()를 올린다()'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중국의 상대()에는 선성()·선사()의 제사로 발전하여 주공()을 제사하다가 한()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의 명제(:재위 57∼75)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를 설치하고 대성전(殿)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과 학노비()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과 가을, 2차례씩 석전을 거행한다.

 

. 출처: 석전[釋奠] (두산백과)

 

. 필자 주 5). 황하문명을 가진 중국 유교(儒敎)는 제자백가(諸子百家)중 공자(孔子)님의 유가(儒家)가 한(漢)나라시대 국교(國交)인 유교(儒敎)로 정해지기 이전에는 나중에 유교나 유가라고 이름붙이기 이전의 시원(始原)유교(儒敎)시대를 거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이전의 기독교를 구약시대로, 예수님이후의 시대를 신약시대로 구분하는것과 비슷합니다.    

 

(4). 한국 고전 용어사전에서 설명하는 석전. 

석전

[  ]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와 산천() 묘사()에 올리는 제례. 석전()과 석채(釋菜)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설이 많으나 대개 석전에는 소•양 등 희생(犧牲)을 쓰고 풍악()을 합주하며, 석채는 석전보다 가벼운 의례로 희생•합주가 없음. [참고어] 석전제(釋奠祭).

용례

  • ㉠무릇 제사의 예는 천신에게는 사라 하고, 지기에게는 제라 하고, 인귀(죽은 사람의 혼)에게는 향이라 하고, 문선왕에게는 석전이라 한다. ; 凡祭祀之禮 天神曰祀 地祗曰祭 人鬼曰享 文宣王曰釋奠 [세종실록 권제128, 1장 뒤쪽~2장 앞쪽, 오례 변사]
    ㉡홍문관 부제학 이언적 등이 상소하기를, “…제사를 삼가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역경≫ 췌괘에 이르기를, ‘임금이 사당을 두었다.’ 하였습니다. 제사하여 보답하는 것은 인심에 근본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중에서 지극히 큰 것으로는 종묘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죽은 이를 살아있을 때처럼 섬기고 이를 있는 것처럼 섬기는 것이 효성입니다. 사직에 제사하는 것은 만물이 땅에서 살며 곡식을 먹기 때문이고, 석전•석채는 선성•선사가 백성을 위하여 가르침을 세웠기 때문이며, 산천의 여러 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재앙을 막고 환난을 물리쳐서 백성에게 공이 있기 때문이며, 성황 여단은 발원한 곳이기 때문에 제사가 없습니다.…” 하였다. ; 弘文館副提學李彦迪等上疏曰…祭祀不可不謹也 易之萃曰 王假有廟 祭祀之報 本於人心…而其至大 莫過於宗廟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至於社稷 以萬物 居於土 食乎穀也 釋奠釋采以先聖先師 爲民立敎也 山川群神 以御災桿患 有功於民也 城隍厲壇 所以致發告而秩 無祀也… [중종실록 권제95, 6장 앞쪽, 중종 36년 4월 2일(무오)]

 

. 출처: 석전[釋奠]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5]. 한국의 역사교육에 나타나는 세계종교 유교.

 

(1).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유교는 교과서를 통해 학술적으로 파악하는게 옳음.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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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은 수천년 하느님, 유교, 공자나라.불교Monkey일본 항복후,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성명 유교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일제강점기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유교를 인정않았음.하느님에 대드는 불교 일본 성씨없는 점쇠賤民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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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국가인 한국 유교를 종교로 인정치 않았는데,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국민이 조선 유교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등록, 현재는 5,000만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 헌법에 국교는 없음. 일제 강점기에 강제 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일본 불교, 기독교 및 기타 특수하게 신흥종교로 피어난 원불교등의 주권은 한국영토에 없음.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

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과 세계의 유교에 대해 되돌아보고, 더 잘 이해하고,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불교 Monkey일본은 유교처럼 하느님의 형상닮은 인간의 고귀함 모르고,부처Monkey가 창조주에 대드는것 배워서,성씨없는 차돌이賤民천황(차돌이가 한국에 마당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 설립)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다 패전국됨. 할복자살.동물 윤회사상가짐.한국유교를 인정않다가 패전,조선성명복구령으로 5,000만 유교 성씨등록.공자나라.

세계최초의대학 중국 태학.국자감(베이징대로 계승),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 한국사 성균관(성균관대).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하느님,공자숭배),서유럽 세계종교 로마가톨릭(하느님, 예수숭배).세계4대 발명품 중국의 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근대세계의 지배세력 서유럽.2차대전이후 미국 $화가 가장 영향력 큰 기축통화.

국사 성균관의 정통승계한 성균관대 졸업해야 생원.진사등의 양반됨.일본 하급군인들이 성씨없는 점쇠賤民(점쇠가 석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을 천황으로 옹립,하느님보다 높다 날뛰다 원자탄 쏘니까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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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

한국에서는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입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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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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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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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가 최고대학이며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도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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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는 불가피함. 그 동안의 한국 공교육 전통을 감안하면, 지엽적인 마찰이 생겨도 수천년 인류역사를 담은 세계사와의 연계는 가장 옳은 정답에 해당됩니다. 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하여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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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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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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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 한자의 사용, 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 불교는 중국불교형태로 받아들였지만,거센 반발때문에,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포교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가 유교, 수신의 도가 불교였는데, 유교의 각종 명절과 제사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음.

새롭게 종교인구 산출을 어떻게 해도,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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