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재임시 한국.성균관대.필자에게 일어난 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재임시 한국.성균관대.필자에게 일어난 일
[1]. 필자는 윤진한 이라고 합니다. 성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1983학번입니다. 宮 儒. 성균관대 출신임. 어릴때부터 파평윤가 양반으로 살아왔는데, 이 양반자격은 한약방집 딸인 유모(법률상으로는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아니고, 이전남편과 이혼신고를 하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서 필자와 동생을 낳음)가 필자의 법률상 어머니가 아닌 유모임을 주장하여 얻어진 양반자격입니다. 한약방집 딸이라 아버지(선거등에 출마하느라 선거 빚이 많은 상태로 살아오신 것 같음)에 비해서 돈이 많은 유모(유모 아버지가 유모에게 기와집도 사주고 그랬으며, 외부에서 곡마단등이 오면 필자의 집에 단체로 숙박할 정도로 집이 컸음)였는데, 그 당시 수편물 기구도 여러대 가지고 고용인들을 데리고 있었음. 유모는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집안에 운전사나 자가용을 굴리는 정도로 재력이 향상된 시절에 아버지와 필자의 법륭상 어머니가 이혼해 달라고 요구한적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음(아버지가 장남이라 작은 아버지들이 필자의 법률상 어머니와 큰 형님.형님들이 사시는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명절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기에, 제사때문에 결국 이혼을 거부한 것 같음). 필자의 고모가 시집간 고모부 집안 어른의 견해로는 필자가 국민학교 3학년 즈음 호적에 등록되었는지 궁금하였고, 호적에 등록되었다면 자기보다 높다는 의견이었습니다(면장을 지낸 안동권씨 집안. 필자의 가문도 집안 어른이 면장을 몇 번 역임. 그런데 필자의 집안은 으리으리한 경반이 아니고 경제력이 미미한 향반가문이 맞음). 필자가 국민학교 3학년 즈음 양치질을 하기 위해 소금을 가지고 가서 마을의 시냇물에 가서 양치질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주변에 살던 한의사는 어린 나이라도 필자가 양반이라, 부담스럽다며 필자가 양치질 하던 냇가의 상류에 있다가도 다시 하류로 내려가서 양치질을 하였습니다. 여하튼 파평윤씨들이 많이 사는 전북 남원부근 장수군 산서면 고향마을 국민학교(전북 장수 산서 국민학교)선생의 견해는 반에서 필자가 가장 양반이라는 견해였습니다.
1983년 성대 입학전, 1981년 모 지방 국립대 법학과에 입학해서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초까지 다닌적이 있었으며, 한국나이 스물한살 시절이던 1982년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한국나이 스물두살인 1983년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주간)에 퇴계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988년에 졸업하였습니다. 대학다닐때는 전공공부도 많이 하였지만, 문학이나 역사.유교 경전 말씀 및 법학과목도 같이 수강하였습니다. 대기업을 거치고, 현재는 돈버는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필가.사상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필자의 부친은 파평윤씨 양반이며, 어머니도 양반가 출신입니다.
병역면제탓에 추천장의 위력이 약해져 여러군데 면접에서 탈락, 평범하게 입학하고 병역을 마친 다른 동기들이 다들 재벌기업.대기업에 입사확정되던 시기에, 입사 미확정 상태로 살다가, 작은 광고회사등에 입사확정되어 출근한적도 있지만, 며칠 다니다 그만두고 1988년 2월 성균관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미도파 백화점을 가진 대농그룹에도 다니고 그러다가, 1988년 8월경 지금은 LG그룹으로 변한 럭키금성그룹의 금성전선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근무한적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졸업즈음 전주 신흥고 교문을 나서면서 전라고.서강대 출신 영매를 처음 만났고, 이 분을 통하여 여러 지도자들의 무의식과 접하는 뇌과학의 정신세계를 경험하였다고 판단됩니다. 1989년 금성전선에 다닐때 옆 부서에 서강대 영문과 출신 부장이 조달부장으로 있었는데, 이 분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아마 이시기에 교황(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임시기임)성하나, 한국문화와 맞지 않고 이질적인 특성이 많은 일본천황의 무의식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의 재임시 일본 천황이 필자가문에 뇌과학 상태로 개입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일본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불교적 특성이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나, 일본 불교, 다른 왜놈학교들을 통하여 필자 가문에 부정적 영향력을 끼친것 같습니다. 그래도 필자의 법률상 아버지.어머니가 양반이고 형님들이 파평윤씨 양반가문 후손(일본 강점기 이전 필자의 증조부가 조선.대한제국의 벼슬을 얻었음. 조선.대한제국은 전주이씨나 파평윤씨에게 많은 특혜를 준 나라임)이라, 필자의 양반자격은 유효하며, 호적과 주민등록에 기반하여 이 양반 상태에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자천하여 등극(성대 총학생회 게시판과 유학대학에서 인터넷으로 백명 정도의 동의를 얻음)한 것인데, 성왕으로 인정되는 필자의 자격은 이렇게 형성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싫어하는 일본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일본 천황의 지위는 분명하게 맞습니다. 필자의 가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놓았어도 그 부정적 영향을 받은 필자가문의 해당자(왜놈학교등에 진학)는 일본 천황의 볼모정도로 신분은 높게 책정된 상태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필자가 다시 정리하여 나갈 것이며, 한국의 제도권에 편입시키지는 않고, 그 피해자가 자연사 할때까지 놔두다가 자연사하면 그 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사 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 재임시, 1998년에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에,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성하 재임시 필자가 궁 성균관대 임금으로 자천하여 왕위에 올라(궁 성균관대 임금=어 서강대 임금), 트위터나 페이스북, 국내의 Portal사 블로그등에 십 몇년 넘게 알려왔습니다.
국내의 집권자들인 역대 대통령들도 필자에게 관여한 상태에서 얻어진 宮 성균관대 임금(= 御 서강대 임금, 법적인 자격이 아니고 정신적인 자격임)자격이지만, 이미 관습적으로 정착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문이 한일합방을 무효로 하였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을 종합하여 성왕(成王)에 오른 필자의 임금자격은 대한제국 후손인 황사손(이 원. 이구公의 후계자 자격으로 公정도의 지위에 해당될것)보다 높은 상태입니다. 이런점을 충분히 숙지하시기 바랍니다(한일합방을 강행법으로 부정할 수 없던 대한제국 문벌가지고 쓸 데 없이 쿠데타.혁명 일으키면 않됨). 일본 강점기를 부정하며, 국가적 정설로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행정법(대통령 령인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의 공식 견해)상 인정되는 성균관대 자격입니다.
필자가 성균관대를 졸업하던 1988년 즈음에 현행헌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 반영되었고, 1991년 즈음 대통령령에 의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발행되어,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서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정통이 승계되었다고 국가적인 정설로 채택되었습니다.
필자는 중학생시절에, 주변 어른들이 왜놈학교를 부정하던 어른들의 경험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2차대전때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주권이 없는것은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다른 국.공립 전문학교 출신 대학교들, 국.공립 중.고등학교들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은 없이, 침략.반란군 상태로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 국가였던 조선성명의 본관과 성명을 호적.주민등록에 강제로 등록하기 때문에 한국은 대중언론에서 개인들의 종교가 어떻게 표기되어도 조선성명을 사용하고, 설날.추석등에 제사지내는 유교국가임)에 도전해 온 것에 해당됩니다.
[2]. 전임 교황들의 재임시기.
1. 교황사전에 나타난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
[Johannes Paul Ⅱ ]
직업 |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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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1978 ~ 2005 |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후임자로는 카룰 보이티야(Karol Woityla) 추기경―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 선출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선출은 대단한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1978년 10월 16일 456년 만에 처음으로 비(非)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Wadovice)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의 점령하에서 어렵게 공부를 계속하여 마칠 수 있었다. 1946년 사제 서품 후 사목자로서 활동하였다. 1953년 크라코프(Krakau)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58년에는 크라코프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1964년에는 크라코프의 대주교를 역임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교회 생활을 심화시키고, 평화, 인권, 자유 등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는 데 교회가 협력한다는 계획을 자신의 교황명 선택에 담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과 교황 권고 등은 인류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979)이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자비(Dives in misericordia, 1980)를 전제하고 있다. 평화, 인권, 자유라는 세 가지 주제는 교회와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관한 회칙 Dominum et vivificantem(1986)에서 종결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다른 교서들은 사회 정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Laborem cxercens, 1981), 아니면 가정 생활(Familiaris consortio, 1981), 현대의 교리 교육(Cathechesi tradendae, 1979), 교회의 사명과 관련된 화해와 참회(Reconciliatio et paenitentia, 1984), 그리고 슬로바키아의 사도 치릴로와 메토디오(Slavorum apostoli, 1984)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사목자로서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와 기꺼이 대결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많은 호소와 설교를 통해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독일 개신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1986년 10월 27일 아시시에서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기도 모임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초대되었다. 평화라는 주제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설하였고, 이 연설 후 각 대표들은 자신의 고유한 전례에 따라 아시시의 여러 장소에서 모임을 주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라는 주제 역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심 분야에 속하였다.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지 주일에 로마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여행 일정 가운데에는 자주 교회 일치에 대한 대화 또는 전례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다교와의 관계 정립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독일을 처음 방문하여 마인츠에서 유다교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분위기 아래서 만남을 가졌을 때, 미국의 세계 유다교 연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발트하임(Waldheim)을 만났다는 사실을 두고 비난을 퍼부었다.
유다인들은 발트하임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反)유다인 군사 행동에 가담하였다고 비난한 바 있었다.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국 방문 이전에 유다교의 지도자들과 로마 교황청 사이에 대화의 기회가 있었고, 이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이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자세는 상호간의 관계 개선에 중대한 장애물로 남아 있다(*옮긴이 주: 그사이 바티칸과 이스라엘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사목자로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교회의 실상을 파악하기를 원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의 각 지역을 방문하였다(1987년 가을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교황은 약 40여 개의 국가를 방문하였다). 비록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을 방문한다 할지라도 방문의 목적은 항상 사목적인 방문이었다. 이러한 방문은 미사, 강론, 연설, 만남 등 교황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가중시켰다. 1981년 3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에 대한 암살 계획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교황은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회복을 하고 난 뒤에는 여전히 예전처럼 정상적인 업무 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1950주년을 기념하여 성년을 선포하였다. 성년의 중심지는 교황의 원의에 따라 로마만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나 순례지도 성년을 기념하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성년 선포와 관련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1월 6일 교황 권고 Aperite portas Redemptori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교회의 쇄신 필요성과 관련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이 항상 신앙의 수호자라는 자아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교회와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설교와 연설은 바로 이러한 자아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기본 자세는 해마다 성목요일 전 세계의 주교와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도 반영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사제직에 관하여」, 1980년 「성체성사의 비밀과 공경」, 1982년 「거룩한 아버지의 기도」, 1983년 「구원의 신비」(성년), 1984년 「구원의 성년과 설 교」, 1985년 「사제의 사목 활동과 청소년」, 1986년 「아르스의 본당 신 부」, 1987년 「사제적 실존의 중심인 기도」 등의 서한을 발표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독일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크라코프의 교구장으로서 재직할 때 폴란드 주교 회의가 파견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독일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마인츠에서는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마리아에 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심은 폴란드의 마리아 성지 쳉스토호바(Tschenstochau)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M이라는 대문자의 형태로) 자신의 교황 문장과 선거 표어 ‘Totus Tuus’(온전한 헌신)에도 반영되어 있다. 1987년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Redemptoris Mater와 「순례하는 교회 안에서 복된 동정녀 마리아」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회칙을 통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7년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 1988년 8월 15일까지 계속 기념된 마리아의 해를 선포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천년대를 맞이하기 위해 2천년대의 교회가 준비해야 할 점들을 강조하고 있다.
. 출처: 요한 바오로 2세[Johannes Paul Ⅱ] (교황사전)
2. 두산백과에 나타난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 ]
- 요약 제264대 교황(재위 1978∼2005). 교회 안팎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약을 하였다.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구 ·신교 일치운동에 한층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출생-사망 | 1920.5.18 ~ 200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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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1978년∼2005년 |
본명 |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
별칭 | 안드레아 예비엔 |
활동분야 | 종교 |
출생지 | 폴란드 바도비체 |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이다. 1938년 아젤로니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연극활동을 하며 안드레아 예비엔이라는 이름으로 시·희곡 등을 쓰기도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배우생활에 전념하다가, 1942년 성직에 뜻을 안고 나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던 크라코프신학교를 졸업, 1946년에 사제(司祭)가 된 후, 크라코프대학교 신학교수 등을 거쳐, 1964년 크라코프의 대주교가 되어, 1967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등위 34일 만에 죽자, 그 후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은 사상 처음 455년 만의 일이다. 1981년 5월 교황청 앞뜰에서 교인들을 접견 중 한 터키인의 저격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건강을 회복했다. 바오로 6세의 교회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 안팎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식 때 내한, 103위 복자(福者)에 대한 시성식(詩聖式)을 집례하였으며,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4년 11월에는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不寬容)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는, 가톨릭으로서는 진일보의 고백을 함으로써, 요한 23세 이후에 조성된 구 ·신교 일치운동에 한층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2005년 4월 2일 선종했다.
. 출처: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두산백과)
3. 두산백과에 나타난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
[Benedictus XVI ]
- 요약 제265대 교황.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여 강경파 교리에 정통하다. 2013년 고령 및 건강 상의 이유로 들며 자진 사임하였고, 퇴임 후 ‘명예 교황’(emeritus pope)에 추대되었다.
본명은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이다. 1927년 4월 16일에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주(州) 마르크트 암 인(Marktl am Inn)에서 태어났다. 프라이징신학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5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7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8년에 프라이징신학대학교 신학교수로 부임하였다. 1966년에 튀빙겐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당시 그의 신학 강의 내용이 보수적이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1969년에 레겐스부르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부총장까지 올랐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행정면에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3월에 뮌헨 대주교가 되었고, 그해 6월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981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신앙교리성 수장을 맡았다. 2002년에는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이 되었다. 2005년 4월 19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제265대 교황에 올랐다. 교황에 선출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베네딕토로 정하였는데, 라틴어로 '축복(blessing)'이라는 뜻이다.
그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며 강경파 교리에 정통하다. 가톨릭 내의 진보성향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으로, 해방신학이나 종교 다원주의, 사제의 결혼이나 여성 사제 서품, 개신교와 합동 미사 등에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낙태•동성애•콘돔 사용•혼전 성관계•페미니즘•인간복제 등도 반대한다.
가톨릭이 세속주의와 다른 종교에 위협받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도록 바티칸이 정통 원리에 충실하여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가톨릭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신학자 및 신자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2005년부터 2013년 2월 27일까지 교황직을 수행한 베네딕토 16세는 고령 및 건강 상의 이유로 들며 자진 사임을 선언했다. 종신직인 교황의 생전(生前) 사임은 중세인 1294년 첼레스티노 5세의 사임 이후 처음이다. 베네딕토 16세는 퇴임과 함께 ‘명예 교황’(emeritus pope)에 추대되었다.
. 출처: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두산백과)
[3]. 일본 천황 히로히토
히로히토
[裕仁(유인) ]
- 요약 일본의 제124대 천황(재위 1926∼1989).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에 가담하였고,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출생-사망 | 1901.4.29 ~ 198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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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왕조 | 일본 |
재위기간 | 1926년 ~ 1989년 |
별칭 | 미치노미야 |
활동분야 | 정치 |
칭호 미치노미야[迪宮]이고, 다이쇼[大正] 일본 왕의 장자이며, 1916년 입태자의 의식, 1919년 성년의 예식을 거쳐, 1921년 다이쇼 일본 왕의 섭정이 되었고, 1924년 나가코 왕녀[良子王女]와 결혼, 1926년 12월 왕위에 올랐다. 연호(年號)는 쇼와[昭和]이다.
중일전쟁에 이어 제 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에 가담하였고, 1946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생물학을 연구하여 《사가미만[相模灣] 후새류도보(後鰓類圖譜)》 《나스[那須]의 식물》 등을 저술하였다.
일본에선 사망 후에 그가 태어난 날인 4월 29일을 '쇼와의 날' 이라 칭하고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 출처: 히로히토[裕仁(유인)] (두산백과)
[4]. 대한 민국 현행헌법
대한민국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5]. 성균관대!
성대가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임은 변치 않아왔고, 앞으로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유지되는한 정부정책을 바꾸기 어려울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이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대로 계승되었다고 국가적 定說로 삼음)는, 수천명의 학자가 동원된 대통령령에 의한 학술서라 이런 국가적 방침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국가기관이며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와, 미군정법령, 성균관.성균관대 자료만 검토해도 국사 성균관이 성균관대로 계승되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그 추종세력들이 시중 사설 입시기관이나 대중언론에서 아무리 덤벼도 한국 최고(最古,最高) 대학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입니다.
성대는 해방이후, 미군정부터 지금까지 국사 성균관 교육과 미군정 법령[성균관 복구, 이후 그 당시 성균관장이 전국 유림대회 결의에 따라 설치한 성균관대(성균관에 대자를 더붙여 유림들이 성균관대로 결의)]이 연계되어, 법이나 정부차원으로는 조선.대한제국처럼 한국 최고(最高)대학 학벌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최고(最古) 대학이어왔음. 그런데 시중의 대중언론들에서는 을사조약 무효이론이나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등에 의해, 주권없고 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재산이었다가 적산재산 형식으로 미군정 국립대로 되었지만, 국립대 형식에 전국적인 반대도 아주 많았고, 일본의 주권이 한국영토에 없기때문에, 한국에서 대학학벌로 어떤 자격이나 지위를 형성할 수 있는 자격은 없었음. 현행헌법에 임시정부가 반영되어 강행법 이론으로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진것)뒤에서 카르텔을 형성한 도전세력들이 성대의 교과서.역사적.법적 자격에 도전해 왔었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977
대학은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가 정부자료로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학과가 무슨과라도 Royal 대인 성균관대로 가는게 좋다고 판단합니다.
대학은 무슨과가 되었든(신설학과라도), Royal대인 성대나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 윤허대학 중 하나)같은 대학으로 가는게 Royal학벌 취득, 세계적인 인지도, 우량기업의 높은 취직, 학문적 자격(국사는 성균관 교육, 세계사는 다른 많은 교과서들처럼 서유럽 학자들 이름이 많이 나옴)등에서 더 좋다고 판단합니다.
[6]. 대학은 과에 상관없이 Royal대인 성균관대나 서강대로 가는게 좋습니다.
대학은 무슨과가 되었든(신설학과라도), Royal대인 성대나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 윤허대학 중 하나)같은 대학으로 가는게 Royal학벌 취득, 세계적인 인지도, 세계표준에서의 유리함, 학문적 자격(국사는 성균관 교육, 세계사는 다른 많은 교과서들처럼 서유럽 학자들 이름이 많이 나옴)등에서 더 좋다고 판단합니다.
1].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鳳鳴財團)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비신분제 대학들인 서울대(경성제대 후신)나 그 추종 대학들은 과만보고 갔다가는 평생 그렇게 비신분제 대학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신분제 대학의 카르텔인 서울대(경성제대 후신으로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던 대학으로 헌법 임시정부 조항으로 보아도 법리적으로 그렇게 됨)나, 일본 강점기 잔재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 후신 고려대(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고려대로 변경)등의 대중언론, 사설 입시학원 카르텔은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에 덤비는게 일상화되어 그렇지, 학벌같은게 없는 일본강점기 잔재거나 사설신문단합체들의 대학들일 뿐입니다.
입결도 중요하지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상태로, 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을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고려대로 만들어 해방후 미군정부터 대중언론을 주축으로 국사 성균관교육(해방후 미군정령에 의해 성균관으로 복구되어,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해 옴)과 대립하며 사설입시학원에서 형성해 온 입결이라, 미군정 법령(성균관 복구), 국사 편찬위의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교육, 한국정부가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을 성균관대가 승계. 6백년 역사 인정)의 국가적 정설(定說)에 토대한 성균관대의 자격을 극복할수는 없어왔습니다.
대학은 유일무이의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승계한 성균관대[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를 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Royal대학은 성균관대(성균관의 정통성 승계로 6백년 역사 인정받고 있음)와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대학)밖에 없습니다. 다른 대학들은 비신분제 대학들입니다(사설 입시기관의 점수.배치표등과 관계가 없습니다).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6백년 역사)의 자격과 정통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학은 한국에 없습니다. 다만 대중언론에서 주권없고 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뒤에 붙어서 덤빌수는 있어도...
. 대학의 전체적인 학벌측면에서의 성대입니다.
한국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가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으며,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학벌입니다.
해방후, 미군정시대, 전국 유림들이 모여서 전국 유림대회를 거친후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미군정에 등록된 대학이 성균관대입니다. 두 번의 유림대회가 있었음. 첫번째는 신문에 나타난바로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승만.김구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임시정부 요인이신 유학자 김 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함.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림대회가 있었음. 이후 미군정시대의 성균관장이시던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기구로 등록시키고, 성균관은 제사기구로 하여 교육기구인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 대학선택시 고려해야 할 사항
수험생의 성적, 향후 취직(대학졸업후 바로 취직할것인가, 아니면 집안사정이 부유하여 대학원.박사과정까지 공부해야 하는가등), 학생의 적성, 헌법.법률.정부자료.정부의 교과서를 통한 공교육등 다각도를 반영하여 대학을 선택하는게 좋을것입니다.
현재의 대입제도에 있어, 대학을 선택할 것 같으면, 6백년전부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성균관의 정통성은 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교육을 통하여 성균관.성균관대가 유지.계승시켜옴)같은 유서깊고 정통성있는 Royal대로 가는게 가장 좋을것입니다. 성균관대와 아울러 추천하고 싶은 대학은 교황윤허의 Royal대학인 서강대입니다.
[7]. 세계사와의 연계
성균관대는 역사적으로, 교과서적으로, 국가의 공식 의견으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임은 언제든지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
한편 세계사 교과서를 반영해 볼때, 교황청이 지속되고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가톨릭전통에 기독교국가라, 2차대전과 별개로 세계사를 바꾸고자 하는 세력은 없는것 같습니다.
세계사(世界史)에 나오는 서유럽의 대학은 볼로냐.파리대학으로, 교과서(敎科書)나 공교육(公敎育)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쳐오고 있는데, 이 역사적.전통적 대학(大學)들의 자격은, 격변기(激變期)에 문제제기가 되지 않아, 앞으로도 변할 사유가 없을것 같습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공교육(公敎育)으로 국사(國史)에서 가르치는 성균관[成均館. 해방(解放)후, 미군정기(美軍政期)에 성균관대(成均館大)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오다가, 다시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를 공식화하여, 성균관대의 6백년 역사를 정부측에서 공식화하고 있습니다.]의 정통성 승계자 성균관대((成均館大)가, 여전히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학벌임은 변치 않습니다.
영국이나 미국도 기독교 국가라 교황중심의 세계사나 볼로냐.파리대학(최근에는 옥스포드대도 부분적으로 세계사에 보임)을 변경시킬 의지가 없는것 같으며, 중국도 그렇습니다.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지도 않았고, 학술서가 아니지만 중국학자의 책을 한국에서 번역한 역사적 관성(세계사 불변의 법칙으로 한국에서 번역됨)이란 용어에서 힌트를 얻어보았는데, 지금도 유지되는 역사적관성이 세계사에 반영되고 있다면, 세계사 불변의 법칙은 맞는 용어입니다.
세계사의 기존 내용을 중심으로 현재를 반영하여 미래를 어느정도 예측하며 필자의 의견을 제시해봅니다. 2차대전 때문에 세계사의 4대문명(그리고 에게문명), 종교(漢나라이후 전통 세계종교인 유교, 로마제국부터 인정된 기독교에서 발현된 세계종교인 로마가톨릭, 기타등등), 세계사의 전통대학(漢나라 太學, 이후의 國子監, 국자감에서 교체된 경사대학당과 경사대학당을 이은 북경대, 중세 유럽의 대학인 볼로냐대.파리대)들이 바뀔 사유는 없는것 같습니다.
세계사 불변의 법칙은 2차대전 승전국들이 있는 서유럽(영국포함), 중국이 기존 세계사 내용을 변경시키자고 적극적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도 기존 세계사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르치고 있으며 역사를 존중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러시아도 교황중심 로마가톨릭의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에, 2차대전 때문에 세계사의 기득권들이 바뀔 사유는 없는것으로 판단됩니다.
패전국이 생겼어도, 교황중심 로마가톨릭과, 유서깊은 대학들의 기득권이 제도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필자가 경험하는 바로는, 세계사가 바뀔 사유가 없는것입니다. 한국은 한국사에 나오는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이 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이어지며 600년 역사를 인정받기 때문에, 정치체제가 민주공화국으로 바뀐것 말고는 역사나 국제법(을사조약 및 한일병합 무효라 조선.대한제국 국교인 유교의 자격이 이어짐).행정법(신도국가 일본의 창씨개명 압제에서 벗어나, 美.蘇 軍政당시 전국민이 조선성명 복구령등에 의해 유교국가의 조선 성명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는 제도가 행정법상 유교국가 특징)상 유교국가의 틀이 그대로 이어지는 나라입니다.
국내법우위론으로 보면 을사조약이 무효라, 당연히 한일병합도 무효임. 국제법으로는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을사조약 무효론이 있어서, 불법 강제의 한일병합도 무효임. 또한 국제연맹의 을사조약 무효, UN의 을사조약 무효론에 따라서도, 강제.불법의 한일병합은 무효임. 을사조약 무효는 국내법이나 국제법 모두 거의 당연한 이론이라 할 수 있음. 그런데 한일병합 무효에 대해서는 한국은 을사조약.한일병합이 원천무효라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이에 수긍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 특히 한일병합 무효건은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경향이 강함. 이런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별도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임. 예를들면 2차 대전중에 대한 민국 임시정부가 프랑스.러시아.폴란드에 승인받아서 부분적으로는 이 때부터 한일병합은 무효임(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도 무효). 또한 2차대전중에 일본이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수락하여, 일본이 항복한 시점부터 일본의 주권은 한국영토에 없어졌으므로, 국제법상 당연히 이 시점부터 한일병합은 무효임(을사조약도 당연 무효).
다음 자료를 참조바람.
1.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2.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3. 국내법상 을사늑약이후의 역사적 해석은 승전국반열인 한국(對日 선전포고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현행헌법에 반영)의 몫임.
http://blog.daum.net/macmaca/1977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조선유교의 특징중 하나인 한문성명 및 본관등록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 바랍니다.
대중언론이 이상하게 언급해도, 미군정때,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조선 유교의 한문성씨를 의무적으로 국가에 등록한이후, 한국은 행정법상 유교국가로 복구된것. 국사로 성균관 가르치고, 학교에서 삼강오륜 유교교육 실시해온 유교나라.
http://blog.daum.net/macmaca/2313
[8]. 요즘 어디가 배치표가 자주 등장함.
@ 요즘 어디가 배치표가 자주 등장함.
...그러면 느닷없이 고려대가 국가기구 아닌 사설협회인 대교협의 의견으로, 배치표 1번순위 대학이 되고...그 다음 성균관대로 불법혁명에 가까운 시도를 유지하겠다면, 여기 어디가 배치표에 나오지 않은 서강대, 서울대는 이 뒤의 대학이 되는것입니까?
성균관이나 성균관대처럼, 국가적으로, 교과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한번도 나라를 대표하거나 최고가 아니었던, 그저 그런 대학들인 연희전문 후신 연세(사회적으로는 서울대 100번, 국시 110브 연세로 듣고 살아옴. 고려는 이뒤의 별 볼일 없는 대학)뒤의 대학으로 살아온 전문학교 출신의 고려대학이라, 이런식으로 하면, 카이스트.포항공대, 부산대.경북대.전남대등과 이화여대.숙명여대등이 내가 고려대 앞이라고 주장하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런 급격하고 생경하고 조잡한 혁명적 시도들은 분란만 부를뿐, 남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법적으로 강행법 능력도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불법 혁명으로 치부됩니다.
. 필자 주 1).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으로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지만, 서강대 사학과 출신 양희은씨 같은 경우는 서울대 100번, 국시110브(연세)로도 판단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통용되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견해중 하나입니다.
. 필자 주 2).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기존 최고대학 학벌이 유지되면서, 세계사의 참조로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6백년 역사의 Royal대학)와 교황윤허 서강대는 Royal대학 맞습니다. 그런데 현행 헌법에 임시정부가 반영되어, 이 뒤의 비신분제 대학중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등에 의해 원래부터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왔던데다가, 임시정부 반영부분으로 인해, 헌법이론의 법리적차원에서 더 구체적으로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중언론에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의 카르텔로 살아온 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평민출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만든 고려대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의 카르텔임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국사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이자 Royal대인 성균관대는 교황윤허의 Royal대인 서강대와 공존하는 방법이 좋다고 여겨 필자는 그렇게 한국과 세계에 알려왔습니다.
대학은 Royal대로 가는게 학술적.보편적.세계적인 학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입시정보 포탈 어디가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를 먼저 소개합니다.
중앙일보 의견입니다.
2016.06.14, 박정경 기자, 보도기사
....교육부와 대교협은 '어디가' 포털이 대학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대학들의 반발을 고려해 합격선을 환산점수, 백분위, 등급 가운데 하나로 기준을 택하고 공개 범위도 상위 70%, 80%, 90%, 전체 평균 중 하나로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마다 다른 잣대로 합격선을 공개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학별 비교는 불가능하다. 어느 경우든 하위권의 점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합격 커트라인은 더 낮을 것이 분명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만족스런 정보도 주지 못하면서 서열화 혐의도 벗지 못한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 제가 볼때 사실상 대학별 비교가 불가능하면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한편, 한국은 헌법에 임시정부가 반영되었고, 그래서 왜놈학교 후신들은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습니다. 서울시립대나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등.
지금 몇 가지 답변자료 보니까, 교육부에서 만들었다고 작성자가 주장하는 입시정보 포탈(어디가)이 보입니다. 확인해보니까 교육부가 공식 주관자는 아닌것 같고, 한국 대학교육협의회가 주관자로 나옵니다.
한국 대학교육 협의회는 정부기관이 아니고, 협회며 사단법인일 뿐입니다. 단체를 만들도록 법률로 허락은 받았지만, 국가기관은 아닙니다. 국가적인 어떤 강행법적 자격은 형성되지 않으며, 다만 사단법인으로 대학교육 협의회의 의견을 정부에 건의하는 사단법인일 뿐입니다. 대학 상호간의 합의도 분명하게 필요한 단체고요. 여기서 어떤 의견을 제시해도 강행법적 능력이 없습니다. 또 의견이 채택되어도 국사편찬위원회의 성균관교육이나,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규정(성균관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승계됨)을 대체시킬수도 없을것이고, 역사와 전통, 그동안의 법률공표에 의해 형성된 국가적 질서를 위하여 성균관.성균관대의 최고학벌에 도전적인 의견은 무효로 기각시킬 필요도 있습니다(필자는 성균관.성균관대의 最古.最高학벌 질서에 도전적인 이런 후발 의견은 기각시키는게 옳다고 판단함).
국사편찬위원회(국가기관, 국책연구기관, 국사 성균관 교육)나, 정부에서 법으로 보호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정부 출연 연구 기관임. 대통령령에 의해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발간: 성균관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하였다고 규정), 헌법만든 법제처(임시정부 법통만든 법제처)와 같은 정부기관이 관리.감독하여 대학.교육등에 대한 의견을 규정하는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강행법적 자격이 없는 단체가 한국 대학교육협의회입니다. 전국 대학들이 모두 합의해야 하는 제약성도 있는데, 입시정보를 서술한다고 해서 강행법적 자격을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대입정보포털 어디가는 전국의 회원대학 상호간에 아직 합의된 기준도 없는것으로 판단됩니다(그러면 公的 자격이 형성되었다고 판단하기 어려움. 대입정보 점수기준도 회원대학마다 제 각각 다르고, 대학의 새로운 임의적인 순서도 합의는 아주 어려울것 같음).
입시정보포탈 어디가는 어색하고 생경한것인데, 헌법(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도전이나, 대통령령에 의한 국사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의 公교육에 도전하기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실행한 쿠데타적 자료 같습니다. 어떤 법령에 근거해서 만든 자료인지 몰라도 헌법(임시정부 조항)이나 행정부 대통령령(한국 민족문화대백과), 국사 성균관 교육의 여러가지 정부차원 복합자격과 오랜 전통을 능가하는 법률은 없습니다.
몇 학교만 나열하고 헌법이나 대통령령에 도전하는 자세로 모험을 감행한 쿠데타적 자료로 보여집니다.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같은 법적 강행성이 준비되었는지 의문이 들고, 아직 강행법적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확정되어 공포된 자격[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규정: 국사에서 가르쳐온 성균관에서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계승됨]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급격하고 돌발적인 도전적 입시정보 포털같은데, 대학간에 이렇게 하자고 합의한 것도 없을것같고, 서울대나 다른 수 많은 대학 다 빼고, 고려대, 연세대는 또 무슨 이상한 순서입니까? 구한말 평민출신 이용익이 만든 보성전문에서 시작되어 해방후에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고려대로 변경한것이고, 일본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일 뿐입니다. 국사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대학 성균관과 비교할 수 있는 대학들이 결코 아닙니다.
강행법적 자격이 없으면 그저 그렇게 후발로, 대학교육협의회 실무진들의 새로운 도전적 의견에 그칠것입니다. 대교협 관계자들의 실무의견을 거르지 않고, 대학간에 합의해 줄수도 없는 후발 임의적인 입시정보 포탈자료인데,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나 국사교육(성균관)을 능가하기는 힘든것 같습니다.
몇 개 대학만 임의적으로 이름을 써넣고 입시정보 포탈이라고 하는것은, 국사 성균관 교육이나 대통령령(한국 민족문화대백과: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에 대한 비합리적인 후발 도전적 자세나, 쿠데타적 발상으로 보여지니까, 작동 못하도록 조치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의문투성이입니다. 한국 대학교육협의회 실무자들이 밀실에서 최근에 만든 도발이나 쿠데타적 의견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성공할 수 없는 쿠데타적 발상! 국사 성균관교육이나 대통령령의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정통성 승계)를 이길수 없으면서 도전하는 성공할 수 없는 쿠데타적 발상의 자료가 대입정보포탈 어디가로 판단됩니다.
한국 대학교육협의회의 이런 생경하고 돌발적 도전 자료는, 기능이 작동되지 않도록 사전 제지해야 할 필요가 생겼군요.
대입정보 포탈을 만들어, 몇 학교만 나열하고 이런 자료 만들어서 후발로 덤빈다고 해도, 헌법의 임시정부 법통은 바뀌지 않으며, 대통령령에 의해 규정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성 승계" 조항은 바뀔 사유가 없습니다. 삼강오륜 교육도 그런 대상의 전통 정부 방침에 해당될것입니다.
[9].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2.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동국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서울시립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한편 국제관습법상 세계사의 정설(定說)은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함.
3. 대학은 역사가 오래되고, 국가차원에서 교과서나 법령으로 보장해 주는 성균관대 같은 Royal대학이 가장 좋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260
4. 을사조약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에 대항해 온, 을사조약 무효 이론(국내법과 국제법)을 현행헌법과,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대한제국의 성균관이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로 승계되어 600년 역사를 가짐)의 의견까지 연결해서 살펴봄.
http://blog.daum.net/macmaca/2026
5.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6.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http://blog.daum.net/macmaca/1900
7.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8.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733
9. 교과서적 기득권 대학들의 자격을 바탕으로, 필자가 주관적인 World Class Universities들을 정의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습니다.
World Class Universities.
http://blog.daum.net/macmaca/1812
10.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