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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그지(Vogue)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5곳.그 중 대학도서관으로 선정된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도서관

beercola 2017. 7. 4. 09:02


한국 보그지(Vogue)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5곳.그 중 대학도서관으로 선정된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도서관                               



1]. 2017.3.4, 한국 보그(Vogue)지 보도자료(에디터 우주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서관 5.  


http://www.vogue.co.kr/2017/03/04/%ec%84%b8%ec%83%81%ec%97%90%ec%84%9c-%ec%a0%9c%ec%9d%bc-%eb%a9%8b%ec%a7%84-%eb%8f%84%ec%84%9c%ea%b4%80-5/?_C_=11



. 필자 주: 보그(Vogue)지에 대한 설명


.요약: 여성 패션잡지


프랑스.미국.영국.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한국 등 10여 개국에서 발행되고, 3종이 있다. 1892년 당시 사교계의 명사였던 뉴욕의 컨데나스트(Conde Nast)에 의해 월간으로 창간되었다. 편집에서는 각기 자국의 특색에 주력하고 있는데, 프랑스판은 고답적인 취향이 강하고, 미국판은 일반성이 있는 내용에 치중하며 120만부 이상 판매되며, 영국판에서는 견실하고 수수한 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어판은 1996년부터 (주)두산 잡지BU에서 발행하고 있다.


. 출처: 보그[Vogue] (두산백과)



2]. 서유럽의 내륙 국가중 가장 서쪽에서 스페인과 더불어 대서양에 접하여 중세시대부터 광대한 해양국가를 건설했던 포르투갈!

포르투갈의 대학도시 코임브라. 그리고 코임브라대학.



두산백과에 의하면 코임브라대학의 역사는 이렇게 출발합니다. 


...1290년 3월 성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디니스 왕(King Dinis)이 리스본에 ‘에스투두 제랄(Estudo Geral)’이라는 명칭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8월 교황 니콜라우 4세(Pope Nicholas IV)로부터 인가를 얻었다...



3]. 두산백과가 서술하는 코임브라 대학(University of Coimbra)에 대한 소개.


코임브라대학은 중세에 설립된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으로,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주()의 고풍스러운 도시인 코임브라의 시가지와 몬데고강(Rio Mondego)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1290년 3월 성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디니스 왕(King Dinis)이 리스본에 ‘에스투두 제랄(Estudo Geral)’이라는 명칭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8월 교황 니콜라우 4세(Pope Nicholas IV)로부터 인가를 얻었다. 당시 깊은 학문을 연구하려는 이들은 대학이 있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로 유학을 떠나야 했던 상황에서 자국에서 인재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대학이 설립되었고, 설립 초기에는 예술, 법률, 교회법, 의학 관련 학과가 개설되었다.

디니스왕이 여전히 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1308년, 정치세력과 교회간 권력을 둘러싼 알력과 주민과 학생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리스본에서 코임브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1338년 아폰수 5세(Afonso IV) 때 다시 리스본으로, 1354년 다시 코임브라로, 1377년 페르난두왕(King Fernando) 때 또 다시 리스본으로 이전을 거듭하다가 1537년 주앙 3세(João III) 때 코임브라로 완전히 이전하여 알카소바궁전(Palace of Alcáçova)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당시 리스본에 있던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옮겨오고 그곳에서 일하던 교수진을 데려온 것은 물론 여러 칼리지(colleges)를 설립하고 새로운 강좌를 개설했으며, 내국인 교수뿐 아니라 외국인 교수들도 초빙하여 새로 채용하였다. 1537~1557년 주앙 3세 시기에 최고의 권위와 명성을 갖춘 대학으로 번영기를 맞았지만 이후 발전 없이 퇴보 국면에 처했다가 18세기에 재상이었던 폼발(Pombal) 후작이 교회의 간섭을 배제하고 과학을 중시하는 내용의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한 바 있다.

대학 설립 이후 1559년까지, 1759년에서 1911년까지 포르투갈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코임브라대학교는 포르투갈 고등교육 체계의 발전에 있어 그 실례이자 표상일 뿐 아니라 기념비적인 문화적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며 교육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분야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또, 대학의 알타(Alta) 구역과 소피아(Sofia) 구역을 중심으로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 대성당과 13세기 초에 완공되고 16세기에 중수한 산타크루즈수도원(Monastery of Santa Cruz), 알사코바 궁전, 16~17세기에 세운 여러 대학(colleges) 건물들, 200년이 넘는 공사기간을 거쳐 18세기 중순에 완공된 성 미구엘교회(São Miguel Chapel), 바로크 양식의 주도서관, 18세기에 세운 식물원과 대학출판사, 화학실과 실험실 등 수많은 문화유산도 보유하고 있다. 이에 코임브라대학의 알타와 소피아 구역은 ‘코임브라대학-알타와 소피아’라는 명칭으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알타 구역에는 알사코바 궁전, 구 대성당, 식물원, 왕립예술대학, 주도서관, 지저스(Jesus)·삼위일체(Holy Trinity)·성 제롬(St. Jerome)·성 베네딕트(St. Benedict)·성 리타(St. Rita) 칼리지, 대학출판사, 화학실과 여러 실험실 등이, 소피아 구역에는 성 미구엘교회, 산타크루즈수도원, 성 토마스(St. Thomas)·성 보나벤처(St. Bonaventure) 칼리지 등이 있다.


. 출처: 코임브라 대학- 알타와 소피아[University of Coimbra-Alta and Sofia] (두산백과)


4]. 코임브라(Coimbra) 대학 

항해 왕자 동 엔리케는 대학의 옹호자로서 그의 과업에 지식층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개편했고, 과학 강좌와 자연과 도덕, 철학(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추가했다. 1431년에는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받은 대학 자체에서 연구한 「대학 법안(estatutos)」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대학 자치권은 약화되고, 동 엔리케 왕자 이후에는 연구의 수준이 형편 없이 저하되었으나, 동 마누엘이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고 대학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마누엘 왕의 개혁(1500~1504)으로 천문학과 같은 새로운 강좌가 개설되었고, 총장은 종전의 학생들이 선거에 의해 선출했던 교수들이 자문 위원들과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동 주앙 3세는 미래의 교수들을 양성하기 위해 파리나 그 밖의 국외 대학에서 공부하는 포르투갈 학생 50명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1537년, 리스본에 있었던 대학은 확고 부동하게 코임브라에 소재지를 옮겼다. 동 주앙 3세의 지원으로 새롭게 발전된 대학은 훌륭한 국내외의 석학들을 초빙하여 새로운 교수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알사코바(Alçácova) 왕궁에 설립된 코임브라 대학에는 스페인의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을 비롯하여 파리, 이탈리아 등지에서 초빙된 교수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스페인의 교회법 연구가인 아즈필쿠에타 나바로(Azpilcueta Navarro)와 같은 저명한 교수도 있었다.

최고의 권위와 명성을 얻었던 1537~1557년의 코임브라 대학의 번영기가 지나고, 1557년에 동 주앙 3세가 죽은 후부터 스페인의 펠리페 왕 정부가 통치할 때까지 대학은 또다시 많은 개혁을 수행했지만 별다른 발전이 없었고, 오히려 퇴보의 국면에 처해 있었다.

동 주앙 3세는 대학 교육 외에도 코임브라에 중등 과정인 콜레지오 다스 아르티스(Colégiodas artes)를 설립하여 대학 입학 예비 과정으로 삼았다. 이 학교에는 프랑스에서 콜레지오 드 구에네(Colégio da Guyenne)를 운영했던 안드레 드 고베이아(Andre de Gouvéia)가 초빙되었는데, 그는 명성 있는 교원들을 많이 대동하고 왔다. 코임브라 대학 외에도 동 주앙3세는 추기경이며 왕자였던 동 엔리케의 요청으로 에보라 대학을 세우고 논리학과 예술 과정을 개설했으며, 학교 운영은 예수회에서 맡았다.


. 출처: 코임브라(Coimbra)대학(스페인·포르투갈사, 2005. 7. 15., 미래엔)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의 전통이나 역사를 유지하는 국가주권을 중심으로 하면서도,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반영, 2차대전이후 세계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의 관계설정 및 유지는 기존에 이루어진 학문적 틀이나 국가간 협약등을 그대로 유지하는게 좋습니다. 이런 비영리적이고 학술.연구차원에서 자료를 인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