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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프랑스 파리 6대학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 받는다.

beercola 2016. 5. 25. 06:58

1. 박대통령, 프랑스 파리 6대학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 받는다.

국민일보 2016-05-22, 김영석 기자 보도기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637008&code=61111111&cp=nv


2. 파리제6대학교(Université de Paris VI/Université Pierre et Marie Curie)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서술은 이렇습니다. 


... 파리대학교가 기원으로, 1971년에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다. UPMC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며, 파리 주쉬외 광장에 있다. 이공·의약 계열의 2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 필자 주 1). 파리6대학은 이공.의약계열이 강한 대학이군요. 


3. 파리대학교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서술.



.....

1170년경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전형적인 유럽의 대학교.


파리대학교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중세기 대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교수와 학생 조합이었다. 교황의 지원으로 파리대학교는 곧 알프스 산맥 이북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정통 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말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대학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교육 중심지였다. 이 대학의 명망 있는 교수들로는 알렉산더 오브 헤일스, 성 보나벤투라,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처음에는 4개 학부, 즉 3개 '상급과'인 신학·교회법·의학과 1개 '하급과'인 예과 등이 있었으며, 예과에서는 3학(문법·수사학·논리학), 4과(산수·기하·천문학·음악), 일반과학·문학·일반문화 등을 가르쳤다. 예과에서 특별히 중요한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다. 각 과는 학장에 의해 감독되었으며 예과 학장은 14세기에는 대학구 총장(rector)이라는 직책 아래 대학 집합체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많은 단과대학이 설립되었는데, 파리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단과대학은 1257년에 신학자 로베르 드 소르봉이 설립한 소르본대학이었다. 그 강의실들은 수많은 신학 논쟁의 장이었기 때문에 소르본이라는 이름은 파리대학교 신학부를 일컫는 일반 용어가 되어버렸다.


파리대학교는 정통 로마 가톨릭의 대변자였으며,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에 기초한 교육 프로그램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결과 이 대학은 르네상스기의 인문학에는 거의 기여한 바 없으며, 종교개혁과 그에 잇달아 일어난 반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1789~99)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도 재조직에 의해 파리대학교는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대학교의 한 아카데미가 되었다. 1886년 신학부가 없어진 것을 비롯해서 파리대학교의 몇 개 학과는 나중에 폐지되었으며, 과학이나 약학 같은 과들이 새로 신설되었다. 대학 교육은 정치적·종교적 교의와는 독립하여 세속화되었다. 교육을 총괄·조직화하는 중앙본부로서의 프랑스대학교가 공교육부에 자리를 내어준 20세기 중반 파리대학교는 다시 과학적·지적 중심지로서 명성을 되찾았다. 뛰어난 교수들이 강의를 맡았으며 그 수는 600명을 넘었다. 1968년 5월에 소르본 대학생들이 시작한 저항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를 분권화하고 학생들을 대학 행정에 보다 많이 참여시킨 교육개혁이 일어났다. 이것의 결과로 1968년 프랑스 고등교육법이 재정·시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파리대학교 및 파리지역의 대학들이 파리제1대학교, 제2대학교 등 13개의 국립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각 대학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파리제1대학교(Université de Paris I/Université Panthéon Sorbonne) : 파리대학교를 모체로 해, .... 문학·예술, 인문과학, 법학·경상 계열의 23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⑥ 파리제6대학교(Université de Paris VI/Université Pierre et Marie Curie) : 파리대학교가 기원으로, 1971년에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다. UPMC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며, 파리 주쉬외 광장에 있다. 이공·의약 계열의 2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 필자 주 2). 본문에 교황의 지원이 언급됩니다. 파리대학교는 교황의 지원으로, 곧 알프스 산맥 이북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정통 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고 브리태니커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교황으로부터의 특권.자치권 획득, 또는 로마교회로부터의 인정과 관련된 설명들.   


1). 파리대학이 로마교황으로부터 자치권 얻은 내용


1215년 파리공교회()의 부속학교 등을 모체로 하여 설립되었다. 설립 당초에는 모두 같은 성직자 신분을 가졌던 교수와 학생의 연구·교육을 목적으로 한 길드(동업조합)였으나, 13세기에 자치권 획득을 위하여 몇 차례 투쟁을 벌인 결과 로마 교황과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었다.


. 출처: 파리대학교[─大學校] (두산백과)


2). 13세기 초에 옥스포드대학이 <로마교회 제2의 학교>로서 파리대학 다음가는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내용. 시사 상식사전에 나옴.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ersity]        


영국 옥스퍼드셔 주 옥스퍼드에 있는 세계적인 명문대학.

옥스퍼드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학 도시로 시내 곳곳에 40여개의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다. 이 단과대학들의 연합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이루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자세한 설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133년 파리대학에서 신학자 뷜랑이 초빙되어 강의한 것을 대학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168년 무렵, 파리대학교에서 영국 학생들의 입학을 불허하자 파리대학을 빠져나온 영국인 학생들이 귀국해서 이곳에 옮겨오는 한편, 헨리 2세의 칙령으로 해외유학이 금지된 학생들도 여기에 들어오면서 대학의 기초가 더욱 확고해졌다.

12세기 말 대학은 모든 그리스도교국가에서 인정하는 공통의 학위인정권을 취득하였고, 13세기 초에는 <로마교회 제2의 학교>로서 파리대학 다음가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시기에 도미니쿠스회와 프란체스코회 같은 여러 수도회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옥스퍼드대학교는 신학 부문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초의 칼리지는 1249년에 창설되었으며, 그 무렵 옥스퍼드대학의 명성을 높인 사람에는 베이컨·스코투스 등의 철학자와 종교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가 있다.


. 출처: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ersity]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3). 파리대학의 특권이나 자치권, 인정등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성당학교의 통제를 벗어난 교수조합이 국왕에게 인정받고, 일종의 교단으로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는 내용.  


Paris, Université de

[프] 빠리 대학교.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교 중 하나. 13세기에 학자들의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Anselmus de Laon, Guillaume(William) de Champeaux, Petrus Abelardus, Guillaume(William) de Conches, Adam du Petit Pont, Gilbert de la Porrée, Alan de Lille, Richard de St. Victor, Hugues(Hugh) de St. Victor 등이 유럽 각지의 학자들과 학생들을 빠리에 모아들였고, 특히 Notre Dame 성당 학교의 선생님들은 성당 학교 밖에 학교가 필요함을 느끼고 이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특히 Rue du Fouarre에서, Mont-Ste.-Geneviève 수도원 학교에서, Petit Pont 다리에서, Saint Germain-des-Prés 수도원 근처에서, Seine 강 왼쪽 강변에서(그때부터 Quartier La-tin으로 알려짐)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성당 학교의 통제를 벗어나 일종의 교수 조합을 이루고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했다. 1200년 국왕 Philip Augustus가 이들 조합을 인정하고 교수의 특권을 부여해 지방 법원의 면책 특권을 주었으며, 성직자로서 각자 소속된 장상과 빠리 주교에게 속해 있음을 인정했다.

1208~1215년에 교단으로서의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성당 학교장은 이들에 대한 교수권(licentia docendi)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시세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는 이들 교단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대칙서 Parens scientiarum(학문의 모태, 1231)을 발표했다. 이 칙서를 대학교의 Magna Carta(대헌장)라고 한다.

조직. 13세기 초 교수들은 문과(Arts), 의과, 교회법, 신학의 네 개 학부로 갈라졌다. 문과는 다른 학부의 발판 격의 학부로서 학생이 가장 많았고, 시초에는 프랑스 문학, Picard, Norman, 영어–독어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학생들은 출신 국에 따라 자기 나라 문학을 선택했다.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를 위시해 유럽 남부와 동부,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왔고, Picard 지역은 Flanders(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Walloon(현 벨기에) 지방에서 왔으며, NormanNormandyBrittany 지방에서, 영어–독일어 계통은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슬라브 지방에서 왔다. 각 나라 학부는 독립적인 학원을 운영했다. 4개국 학부는 문과 학부를 대표하는 학장을 선출했다. 각 Facultas를 수료하면 교수 자격증(licen-tia docendi)을 획득한다.

Colléges. 빠리 대학교는 교수들의 연맹체이니만큼 학생들은 교수들을 통해 학교생활을 했다. 따라서 방과 후의 학생들의 규율은 전혀 잡혀져 있지 않았다. 이 필요성을 메우고 동시에 먼 데서 온 학생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숙사 형식의 학원이 생겼다. 이것을 Collège라고 했다. 말하자면 공동 학숙()인 셈이다. 이 학숙을 위해 은인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생겨난 collègeCollège des dix-huits(18 Collè-ges), Étienne Belot 부부가 창설한 “착한 아이들의 St. Honoré Collège”, Ave Maria Collège, Bayeux Collège, Narbonne Collège, France Collège, Lin-koping Collège, Skara Collège, Sweden Collège 등이다. 유명한 Collège de SorbonneRobert de Sorbon이 이미 문과 학부에서 교수 자격을 따고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려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세웠다. 몇몇 Collège들은 기숙사이면서 동시에 강의 장소이기도 했다.

학과. 문과대학(Faculté des arts)은 자유 문예(liberal arts)를 기반으로 강의하는데 이 학과목은 자유인의 교양과목이며 다른 Facultés에 올라가기 위한 일종의 예과이다. 의과 대학에서는 그리스 의학자 Hippocra-tesGalen의 저서, 아라비아 의학자 RasisAvi-cenna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강의했고, 라틴 학자의 저서도 강의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지도 아래 빠리에서 6개월의 실험, 빠리 밖에서 1년의 실험 강의를 받았다. 교회법 대학에서는 Gratianus의 법령집, 그레고리오 9세의 교령집, 보니파시오 교황의 제6권(Liber sextus), 글레멘스 5세의 법률집, 부록 교회법(extravagantes) 등을 가르쳤다.

신학대학에서는 성서를 중심으로 교부들의 저서, Petrus Lombardus의 신학 명제집(Sentences),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집(Quaestiones)과 신학 전서(Summa Theolo-giae)를 가르쳤고, 중세 신학자들의 저서도 가르쳤다. 강의는 일정한 텍스트를 놓고 설명하는 형식과 collatio라는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강의는 오전에 교수가 행하는 정상 강의(ordinary)와 오후나 휴일에 초청 강사나 학사가 하는 특별 강의가 있다. 이 밖에도 quodlibeta(수의 문제, )라고 하는 공개 토론회가 있다.

특권. 빠리 대학교 교수들은 지방 법정의 법적 관여를 받지 않고, 지역 주교들의 교회법상 제재에서 자유로우며, 모든 세금과 군 복무와 어떤 종류의 징집에서도 자유로운 특권을 누렸다. 다만 대학교 안에서 자율적인 규정을 마련했다. 대학 교수들은 또한 공석 중의 교회 직록에 대해 우선권을 가졌다.

영향력. 빠리 대학교는 13세기부터 15세기의 유명한 학자와 신학자들이 가담했다. Roger Bacon, Alexan-dre de Hales, Albertus Magnus, Thomas Aquinas, Bonaventura, Duns Scotus, Jean Bridan, William of Occam, Nicole Oresme, Jean Gerson, Peter of Alley 등이 그들이다. 빠리 대학교는 1500년 이전 북유럽 각 대학교의 모델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그레고리오 9세(1227~1241), 우르바노 4세(1261~1264) 등 몇몇 교황들이 이 대학교 출신이고, 많은 대주교, 주교, 왕궁과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왕과 교황의 주치의 등 고관들이 이 대학교 출신들이다. 대학 당국자들은 프랑스 군주들의 고문 역할을 했고, 교회 안에 신학 토론이 있을 때 정설을 결정하는 판관 노릇을 했다. 백년전쟁 때는 평화 사절 역할을 했고 교황 분리 대란 때는 콘스탄츠 공의회(Constance, Council of)에 참석해 분란을 조절하기도 했다.

후기 역사. 15세기 초에 “프랑스 왕의 딸”이라고 불리던 빠리 대학교는 서방 교황 분리 대란(Great Schism) 때 많은 교수들의 교단 포기 사건이 일어났고, 영국군의 빠리 점령, 15세기 여러 지방 대학교 창건(Caen, Poitiers, Bordeaux)으로 빠리 대학은 퇴보 일로를 걸었다. 서방 분리 대란 때 국왕 Charles 2세가 가()교황 글레멘스 7세(1378~1394)를 대립시키고 대학교에 압력을 가해 편들 것을 강요했을 때, 대학교는 희미한 태도를 취했다.

시대가 바뀌어 인문주의가 창궐하고 갈리까니즘이 세를 늘릴 때(1530) 국왕 François 1세는 새 세대의 지성들이 필요해 궁중 학자단을 만들었다. 이 학자단을 대학교와 구별해 Collège de France라고 불렀고, 이 Collège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빠리 대학교는 이를 반대했다. 1598년 국왕 앙리 4세는 교회 개입 없이 대학교를 혁신했다.

17, 18세기. 17세기부터 Sorbonne 학원은 신학대학의 중심이 되었고 Richelieu가 그 기구와 건물을 강화한 후(1622) Sorbonne은 대학 생활의 본부 노릇을 했다. 1679년 칙령으로 프랑스의 각 대학교는 신학, 법률, 의학, 문학의 네 개 대학(Facultas)으로 조직되었다. 걸식 수도회(프란치스꼬회, 가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와 도미니꼬회, St. Victor 성당의 참사원들, 삼위일체회, Cluny 수도원, Saint Germain-des Prés 수도원도 대학교에 참여했다. 대학교는 가끔 법률, 신학 이론 개진이라는 구실로 외부 정치 문제에도 간여했다. 1762년 예수회 축출 후 대학교는 국가 교육을 맡아 예수회 대학에서 가르치던 현대 어학, 현대 역사, 지리, 물리학 등을 교과목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혁명 전의 신학대학은 10명의 교수가 있었고, 법학대학은 7명, 의학은 152명(그중 7명이 교수)의 박사가 있었으며, 문과대학은 5,0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프랑스혁명기(1789~1896).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빠리 대학은 자동으로 해산되었고 1804년과 1809년의 혁명정부령으로 국립대학이 설립되었으며, 1808년령으로 제국 대학으로 조직되었다. 황제의 율령에 따라 각 지방에는 따로따로 가톨릭 신학대학, 가톨릭 법학대학, 가톨릭 의과대학, 과학대학, 문과대학이 독립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은 1893년과 1896년 다시 대학교로 뭉쳐 빠리 대학교가 다시 탄생했다. 그러나 신학대학은 폐쇄되어 빠리 대학은 완전히 세속 대학교가 되었다.

20세기의 빠리 대학교는 법학대학, 경제학대학, 의학대학, 과학대학, 문과대학(Literature and Human Sci-ences), 약학대학의 5개 단과대학으로 조직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는 학교의 지방분산 경향이 거세어 과학대학은 이미 빠리 교외 Orsay로 자리를 옮겼다.

. 출처: Paris, Université de(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가톨릭대학교출판부)

4). 교황 그레고리 9세의 교서에 의해 파리대학이 인정된 사실.


<인물로 읽는 교회사> 356페이지 


...1231년 교황 그레고리 9세의 교서에 의해 파리대학이 인정.

저자 김 상근/평단문화사/2007.09.10 


. 필자 주 3). 그레고리 9세는 그레고리오 9세로도 읽음.

교황사전에서는 Gregor IX, 두산백과에서는 Gregorius IX.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대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파리대학에 대해 더 잘 알아보고, 세계사등에 대해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