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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춘기석전[春期釋奠:先聖,성인임금 文宣王의 칭호를 가지신 공자님 제사]이 거행되었습니다.

beercola 2016. 3. 17. 08:46

1]. 3월 16일 춘기석전[春期釋奠:先聖,성인임금 文宣王의 칭호를 가지신 공자님 제사]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보도기사.

[포토] ‘2016 춘기석전’…유교 성현 추모 제사

2016-03-16 , 김성광 기자 보도기사.

 

...유교 성균관이 주최하는 ‘2016 춘기석전’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성균관 대성전에서 열렸다. 이날 춘기석전은 국민의례와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분헌례, 헌다례, 음복수조례, 망예례, 일반 분향 등 순으로 진행됐으며, 유림계 인사와 일반시민 등이 참석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인 ‘석전’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을 추모하며 제사하는 의식으로 음력으로 2월과 8월에 두 차례 열린다. 이번 춘기석전은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진행됐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35214.html

 

 

2]. 유교 경전인 예기 월령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자구 해석은 新譯禮記(권오돈 역해, 홍신문화사 간. 2003.10.30 2판 5쇄 발행)에 의거하였습니다.   

天子乃獻開恙冰 先薦寢廟 

천자는 어린양을 신에게 드리고, 얼음을 꺼내고나서, 먼저 종묘(宗廟)에 바친 후에 신하들에게 나누어준다. 

上丁命樂正 習舞釋菜 

그리고 상순의 丁日에 악정에게 명하여 제생(諸生)이 문무(文武)의 춤을 익히고 석채(釋菜)의 예를 행하게 한다. 

天子乃帥三公九卿諸侯大夫 親往視之  천자는 3공.9경.제후.대부를 이끌고 가서 이를 본다  


. 필자 주 1). 석전은 봄 2월(음력)과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에 올리는 제사입니다. 2016년 3월 16일은 음력으로 중춘(仲春)인 2월의 여덟번째 날(2월 8일)입니다. 춘기석전은 봄의 중간인 仲春의 日에 올리는 제사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 필자 주 1-1). 상정일(日)은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에서는 음력으로 매달 첫째 드는 정(丁)의 날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기에서는 음력 2월을 중춘(仲春)이라 합니다. 예기에서는 음력 1월은 孟春,음력 3월은 季春이라 합니다. 


. 필자 주 2). 공자님에 대한 제사인 석전(석전대제,문묘제사)은 위에서 釋(上丁命樂丁 習舞釋菜)로 표현됩니다. 중 菜는 나물의 뜻입니다. 소나 양 따위의 희생을 생략하고 다만 약식으로 푸성귀와 나물등으로 간소하게 공자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석채(菜)라 합니다. 


. 필자 주 2-1). 석전과 석채에 대해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설에는 소[]·양()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 빈조류()]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라 한다.

 

. 필자 주 2-2). 석채는 또 석채(釋采)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采帛)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의 의견입니다.


3]. 유교사상이 한국에 전래된 시기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하신 제자백가 중 공자님의 유가사상은 도가.법가.묵가등과 혼재했는데, 한나라 때 공자님의 유가가 유교로 국교가 된것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유교를 공자님의 가르침이전에도 존재하던 天숭배나 日月星辰숭배, 天子사상등의 개념등으로 보면 유교는 그 연원이 아주 오래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그 전래시기를  위만시대와 한사군(漢四郡, BC 108∼BC 107년에 설치)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유교관련 다음의 고구려에 대한 서술을 참조바랍니다.

- 다 음 - 

고구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유교[儒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 필자가 보기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로 보는 위만시대와 한사군시대는 공자님이전 유가(儒家)라고 이름붙이기 이전의 숭배대상인 천(天), 일월성신(日月星辰) 숭배, 천자(天子)사상 형성이후, 주나라 정치나 지배체제가 붕괴되고 춘추시대 노나라에 태어나신 공자님의 유가사상 영향을 받아 형성된 유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춘추시대 공자님이전에도 있던 은.주시대의 천(天), 천자(天子)사상등에 대해서 필자는 공자님 이전의 유교(儒敎)시대라고 분류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공자님은 유교의 최고신이시자 인간 창조주인 天(태극과 연계된)을 구심점으로 삼으신 분이신데, 세계사와 한국사적 견지에서는 이런 수천년 종교적 관행이 지속되어온 것으로 하겠습니다. 세계사와 중화인민공화국 이외의 유교지역에서 구심점으로 유지되어온 종교인 수천년 유교라, 현대 중국의 정치체제인 공산주의식 종교관을 잘못반영해 유교나 공자님의 종교관이, 중화인민공화국 일부에서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일부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중국은 4천년 유교 전통 명절인 춘절등을 공휴일로 하고 있고, 청명절, 단오절, 중추절등의 유교 전통명절도 공휴일로 하고, 해외의 수많은 공자학당을 통하여 형식상 다시 공자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 필자 주 3-1).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전설상의 나라로 보는 견해를  한국고중세사사전은 가졌군요. 기자조선은 정사에 가까운 나라로도 보여지기도 하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아, 이렇게 전설상의 나라로도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기자[ ]        
국적중국
시대고대/고조선
본명서여(), 수유()
직업

고조선시대 전설상의 나라인 기자조선의 시조. 중국 은나라의 성인으로 이름은 서여()·수유().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는 동쪽으로 도망하여 조선왕이 되어 조선족들에게 예의·전잠·방직·8조법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인들의 사대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고려 중엽에 와서 평양에서 기자묘를 찾아 묘사를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기자에 대한 숭배가 적극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기자릉·묘사·비석 등의 유적이 있는데 모두 고려와 조선시대에 설치한 것이다. 기자의 후손 우평()은 기()씨의 시조, 우직()은 한()씨의 시조, 우량()은 선우()씨의 시조라고 한다.


. 출처: 기자[箕子]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 필자 주 3-2). 공자[ ]        

출생 - 사망BC 551년 ~ BC 479년
출생지중국 노나라
본명구()
중니()
직업사상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이름을 구(), 자를 중니()라고 하며,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 73년의 생애는 주왕조의 지배체계가 붕괴되고, 제후가 대립 항쟁하는 춘추 말의 동란기였다. 당시 노나라에서도 군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의 3공족이 정치를 전횡하였다. 또한 3공족 중 가장 강력한 계손씨에서는 가신인 양호()가 권세를 휘두르고, 하극상의 양상조차 나타났다.


. 출처: 공자[孔子]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 필자 주 3-3). 위만조선(衛滿朝鮮)        
시대명고대/고조선

BC 194년 ~ BC 108년


. 출처: 위만조선[衛滿朝鮮](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 필자 주 3-4). 한사군(漢四郡) 

    

시대명고대/고조선

BC 108년 중국 한()나라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세운 4개의 군. 한의 무제는 대외팽창에 적극적이었는데, 위만조선에 대한 정벌도 그러한 대외팽창 정책의 하나였다. 무제는 BC 109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육지와 바다에서 고조선을 공격케 했다.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결국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한은 위만조선 지역에 낙랑군()을, 옛 임둔() 지역에 임둔을, 옛 진번()의 땅에 진번을 설치하고, 이듬해 고구려 예맥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 후 BC 82년에 진번, 임둔 양군을 각기 반씩을 폐기하고 나머지 반은 낙랑과 현도에 합했다. 얼마 후 현도군마저도 토착인들의 저항으로 서북쪽으로 옮겨 소자하() 상류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국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7현과 옛 임둔군의 7현을 합친 대낙랑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출처: 한사군[漢四郡]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






4]. 석전에 대한 설명


1.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의 설명



석전

[ ]

 

석전대제 / 제관 배례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유형의식행사
성격제사, 추모의식
행사시기봄 2월(음력)과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
행사장소성균관, 지방 향교

 

정의

전통 사회에서 산천()·묘사()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은 ‘놓다()’·‘두다()’의 뜻이고, 전()은 ‘그치다()’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일설에는 소[]·양()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 빈조류()]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정제()·상정제()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 첫 )에 모시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대()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 「춘관()」],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 「왕제()」]. 전자를 정기적()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서()·예()·악()을 가르치는 교관()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에는 순()·우()·탕()·문왕()을 선성()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의 명제() 같은 제왕은 주공()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수()·당()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나라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왕인()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 또는 성균관()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 또는 문선왕묘()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10철과 송조6현()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서무(西)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하였다.

 

. 출처: 석전[釋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국립민속박물관에 나타나는 석전(석전대제). 

우리나라에서 석전이 시작된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최초로 태학이 설립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석전도 함께 봉행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경우 국립학교 설립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같은 명칭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박사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학교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석전 의식을 봉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신문왕 2년(648)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성덕왕 16년(717)에는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대 제자 및 72 제자의 영정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역시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석전을 봉행하였으며, 현종 11년(1019) 8월에는 최치원을 선성묘에 종향(從享)하고, 현종 13년에 다시 설총을 종향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성현을 문묘에 배향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성리학이 정착된 조선조에는 석전이 국가에서 주관하는 오례(五禮) 중 길례(吉禮)에 속하는 국가적 대사로서 봉행되어 왔다. 오늘날 석전이 봉행되고 있는 한국의 문묘인 성균관은 고려 충렬왕 30년(1303) 6월에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있던 국자감을 개칭한 것이며, 조선조 건국 이후 태조 7년(1398)에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성균관의 정전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聖), 10철(哲)과 송조 6현(賢) 등 21위(位)를 봉안했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의 명현(名賢)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 등 112위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에 두 차례 석전을 봉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와 송조 2현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 108위를 매안(埋安)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려 종향하고 춘추 석전 대신 공자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는 변화를 가졌다. 그 3년 뒤인 1953년에 공문 10철과 송조 6현을 복위하고 석전도 봄과 가을 두 차례, 곧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로 환원하여 현재까지 봉행하고 있다. 성균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232개 향교에서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년 같은 날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 필자 주 4). 두산백과는 석전(釋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를 놓고(), 폐()를 올린다()'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 필자 주 5). 한국 고전 용어사전은 菜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석채

[  ]

소나 양 따위의 희생을 생략하고 다만 약식으로 소채(蔬菜) 따위로 간소하게 공자(孔子)의 제사를 지내는 일. 석채().

용례

  • 문선왕은 백대 제왕의 스승이니, 석채의 제례를 마땅히 정결하게 하고 혹시라도 삼가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文宣王 百王之師 釋采之禮 當致精潔 毋或不虔 [태조실록 권제15, 3장 뒤쪽, 태조 7년 9월 12일(갑신)]
  • 출처:석채[釋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5].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취푸의 공자유적으로 공자님 제사의 유래와 역사를 알아봄. 
취푸의 공자 유적 
[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 

중국 봉건 사회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공자(BC 551~479)가 이룩한 사상 체계를 뛰어난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사람들은 공자를 ‘신성한 제1의 스승’이자 ‘수천 년에 걸쳐온 신성한 모범 스승’으로 받들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공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이듬해(BC 478)에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어, 이후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쳐 증축, 개축되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사당인 공묘(孔廟), 묘지가 있는 공림(孔林),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孔府)로 크게 구분된다. 

.................... 
사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1,000개가 넘는 비석에는 한나라(BC 206~AD 220) 때부터 황제가 바친 제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서예 솜씨와 색다른 기록물의 형태를 보여 주는 중국 예술의 귀중한 사례이다. 훌륭한 솜씨로 조탁한 조각품은 물론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한나라 시대의 석조물과 돌기둥, 공자의 일생을 묘사한 명나라 시대의 조각 그림도 많이 있다. 
공자의 묘는 취푸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쓰수이강(泗水)의 제방에 자리한다. 제단 앞에 반구형 언덕을 이룬 이 무덤은 추앙과 순례의 으뜸 장소가 되었다. 그 뒤 2세기까지 공자의 무덤 주변에는 50기가 넘는 후손들의 무덤이 생겨났다. 묘역의 정문은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쭉 뻗은 길로 취푸의 현성 북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어서 좁은 담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문으로 이어지는 장소가 나오는데 이곳은 잔디와 나무, 강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영교(株永橋)를 건너 서쪽으로 가다 보면 공자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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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공자의 사당은 그가 죽은 이듬해에 노나라 애공이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여 조성했다. 이 사당 안에는 공자의 옷과 악기, 마차,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한나라를 건국한 황제 유방(劉邦)은 공자를 기리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 취푸를 찾았고, 이후 여러 황제와 황제의 명을 받은 고관들이 공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공자의 사당은 153년에 재건축되었고,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증축되었다. 수나라 때인 611년에는 유적지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공자가 살았던 방 세 칸짜리 집을 철거했다. 7세기~10세기에도 여러 차례 증축과 확장이 이어졌고, 송나라 시대인 1012년에는 네 개의 정원을 갖춘 세 구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때 3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는데, 1194년 추가 확장으로 4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214년에는 화재와 약탈로 황폐화되었고, 이를 재건하기 시작하여 원나라 초기인 1302년에는 이전의 규모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1331년에는 유적지를 둘러싸는 담을 쌓았는데, 이는 궁전의 담과 흡사했다. 1499년에 발생한 화재로 다시 한 번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로써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화재나 다른 요인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 때는 사당 건물군의 중심인 대성전(大成殿)처럼 더욱 화려하고 큰 건물들이 세워졌다. 공자의 사당은 1906년 성대한 의식을 통해 중국의 수많은 사당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사람들이 숭상하고 순례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는 전한(前漢)의 황제 무제(武帝)가 ‘온갖 사상과 학파를 없애고 오직 유교만을 존경하라’는 명을 내린 뒤부터였다. 이에 따라 묘역은 계속 확장되고 점점 더 화려해졌다. 1244년에는 공자의 후손들의 무덤이 늘어나는 동시에 공자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331년 공씨 문중은 문을 세우고 담을 쌓았으며 문탑(門塔), 아치교, 정자를 지었고, 1594년에는 취푸의 현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까지 만들었다. 18세기 후반에 묘지는 7㎞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3.6㎢의 지역을 아우르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공자의 사당과 묘역을 돌보던 공자의 후손들은 역대 왕조의 보호를 받았다. 송나라(960~1279) 인종(仁宗)에게 받은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세습 존칭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1935년까지 직계후손에게 이어졌다. 이 존칭은 1935년 제77대 후손에 이르자 ‘희생의 국부 및 제1스승’으로 바뀌었다. 저택은 1377년에 사당과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전에는 사당에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운 저택은 1503년에 560개의 방과 9개의 정원을 갖춘 3열의 건축물로 배치하기 위하여 확장되었다. 1838년 황실 지원으로 완전히 보수된 건물은 1885년에 일어난 화재로 파괴되었고, 2년 후 다시 황실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중국 황제들이 가장 훌륭한 예술가와 공예가들을 동원하여 건물과 경관을 만들어내고 재건축하는 일을 지원한 덕분에, 취푸의 공자 유적은 뛰어난 조화를 보여 주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기준 (ⅳ) : 취푸의 조화로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중국의 물질문화를 보여 주는 훌륭한 건축 유적에 잘 나타나 있다. 
기준 (ⅵ) : 2,000년 동안 동양의 여러 나라는 물론 18세기~19세기에 서양과 유럽에도 영향을 미친 공자의 철학과 정치관은 현대적 사고와 국가 발전을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 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번역 감수). 

6].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필자의 견해 

 필자가 보기에는 공자님의 사상으로 집대성 되기 이전의 유교(儒敎)는 황하문명 중국에서 발현하여 역사시대인 은.주시대에 구체적으로 하느님.하늘님(天)이나 천자(天子)사상을 보이다가 한국에는 은나라 멸망이후 은나라 왕족 기자가 한국에 흘러들어 8조법금등으로 영향주고, 중국식 한문성씨 사용의 계기를 마련해 준것으로도 인구에 회자되어 필자도 일정부분 이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만,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아직도 正史영역에서 확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野史인 삼국유사에서 유래하는 단군조선은 정사가 아니며 야사의 설화영역으로 교육시켜온 이전부터의 교육이 옳은것으로 판단합니다. 

한국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문화나 유교에 대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이렇게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상고시대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해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분야는 한중 양국의 현존하는 여러 문헌과 금석학·갑골학·고고인류학·민속학 등의 방증자료를 통해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 필자 주 6).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正史인 삼국사기와 野史인 삼국유사를 같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야사인 삼국유사의 시각을 가진 집필자들이 불교적 시각에서 야사인 삼국유사의 시각으로 유교를 바라보는 측면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정사인 삼국사기나 그 이후의 정사, 중국의 역사서 및 세계사 교과서(참고서).학술서를 중심으로 국사와 세계사를 받이들이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정사인 삼국사기를 발판으로 삼아 후발로 중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내용도 대폭 반영된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임도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학으로는 유교의 고구려 태학.통일신라 국학.고려 국자감.조선. 대한제국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로 그 역사가 확실하기 때문에 분열의 소지가 없는데, 종교측면으로 보면 조금 마찰의 소지가 있고, 오랜 전통의 유교적이지만은 않은 견해가 아주 많습니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를 발행해온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현대에 설립되어, 그 원장은 대학교육을 받고 주로 박사학위를 소지한 교수나 전문가들이 주로 역임해왔으며, 오랜역사의 유교 일방적이기보다는, 일본의 신도나 유.불.선 혼합사상을 배운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유학파나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출신들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많이 지내왔습니다. 성균관대나 고려대 이화여대 출신도 있습니다. 큰 토대는 해방후 국사편찬위나 교육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분들이, 유교와 서당을 통한 한학공부 경험이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일본강점기에 교육받은 내용등도 복합하여 반영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해방이후 국사편찬위등을 통한 한국역사는 일본 강점기에 대학교육을 받은 역사학자(한국인 입학이 수월했다고 하는 와세다대 출신이 주도적이고 간혹 동경대등에서도 교육받은 분도 있음)들과 이 분들의 제자들이 한국의 正史인 삼국사기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외에도 野史인 삼국유사를 상당부분 반영해 온 측면도 아주 강합니다.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꼭 역사서만은 아니며, 역사학, 철학, 법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교육학등 여러 학문배경을 가진 분들이 원장으로 재직하며 만들어진 정부측 학술서이기 때문에, 정사와 야사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술적 의견들을 존중하면서도, 한국학을 넘어서, 세계사나 국제법등과 공존하며 균형감각을 취하는게 보다 객관적이고 바람직한것 같습니다.        

 일본은 고대 한국에서 漢字나 유교를 수입하였으나, 막부시대 기독교에 대항하며 全 住民을 절에 등록한후 유교적 전통과 불교적 특성을 아주 강하게 혼합하고, 이에 토대하여 이후에는 유교는 아닌 일본만의 신도를 後發.局地的으로 만든 나라입니다. 

7]. 해외의 공자님 제사 자료모음.



* 본글은 비영리적이며, 세계유산이나 세계사, 한국사, 유교등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공익적인 글로 해당 자료들을 인용하였으니 이 점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