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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문화유산. 취푸의 공자 유적

beercola 2016. 3. 8. 07:52

유네스코 문화유산. 취푸의 공자 유적

[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

요약
공자는 기원전 6세기~5세기에 활동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자이다. 중국 산둥 성 취푸에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과 묘지, 후손들의 저택이 남아 있다. 기원전 478년에 공자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은 수세기에 걸쳐 파괴와 재건을 되풀이해 왔으며, 현재는 10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묘지에는 공자의 무덤을 비롯하여 10만 명이 넘는 후손들의 묘가 있다. 공씨 일가가 살았던 작은 집은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귀족 저택으로 변모했으며, 그중에서 152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중국의 황제들이 2,000년 넘게 대대로 관심을 가져온 덕분에 뛰어난 예술적·역사적 특징을 유지해 오고 있다.
국가중국(China)
위치산둥성(, Shandong Province), 취푸시(, Qufu City)
좌표N35 36 42.012, E116 58 30지도
등재연도1994년
등재기준(ⅰ), (ⅳ), (ⅵ)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본문

중국 봉건 사회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공자(BC 551~479)가 이룩한 사상 체계를 뛰어난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사람들은 공자를 ‘신성한 제1의 스승’이자 ‘수천 년에 걸쳐온 신성한 모범 스승’으로 받들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공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노()나라 애공()이 공자가 죽은 이듬해(BC 478)에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어, 이후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쳐 증축, 개축되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사당인 공묘(), 묘지가 있는 공림(),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로 크게 구분된다.

사당 입구에는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주요 건물은 중앙을 축으로 세로로 배열되어 있고, 9개의 정원이 각각의 건물을 감싸고 있다. 작은 문들과 커다란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 처음의 세 정원은 사당의 중심부로 방문객들을 이끈다. 네 번째 정원에서부터 등장하는 건물들은 황색 기와를 올린 지붕과 붉게 칠한 담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구조로, 유교의 심오함과 화합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사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1,000개가 넘는 비석에는 한나라(BC 206~AD 220) 때부터 황제가 바친 제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서예 솜씨와 색다른 기록물의 형태를 보여 주는 중국 예술의 귀중한 사례이다. 훌륭한 솜씨로 조탁한 조각품은 물론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한나라 시대의 석조물과 돌기둥, 공자의 일생을 묘사한 명나라 시대의 조각 그림도 많이 있다.

공자의 묘는 취푸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쓰수이강()의 제방에 자리한다. 제단 앞에 반구형 언덕을 이룬 이 무덤은 추앙과 순례의 으뜸 장소가 되었다. 그 뒤 2세기까지 공자의 무덤 주변에는 50기가 넘는 후손들의 무덤이 생겨났다. 묘역의 정문은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쭉 뻗은 길로 취푸의 현성 북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어서 좁은 담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문으로 이어지는 장소가 나오는데 이곳은 잔디와 나무, 강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영교()를 건너 서쪽으로 가다 보면 공자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공씨 일가의 저택에서 사당과 묘지를 지키고 돌보던 공자의 후손들은 귀족 칭호를 받아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저택은 앞쪽의 공무 장소와 후원의 생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중국 건축물의 배치 구조이다. 가장 번성했던 16세기 때의 저택은 170여 채의 건물에 방이 560개나 되었다. 현재는 152채의 건물에 480개의 방이 남아 있다. 두루마리와 그림을 포함하여 많은 문화 유적들이 저택 안에 보관되어 있고, 내부는 청나라 후기와 중화민국(1912~1949) 풍으로 장식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공자의 사당은 그가 죽은 이듬해에 노나라 애공이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여 조성했다. 이 사당 안에는 공자의 옷과 악기, 마차,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한나라를 건국한 황제 유방()은 공자를 기리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 취푸를 찾았고, 이후 여러 황제와 황제의 명을 받은 고관들이 공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공자의 사당은 153년에 재건축되었고,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증축되었다. 수나라 때인 611년에는 유적지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공자가 살았던 방 세 칸짜리 집을 철거했다. 7세기~10세기에도 여러 차례 증축과 확장이 이어졌고, 송나라 시대인 1012년에는 네 개의 정원을 갖춘 세 구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때 3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는데, 1194년 추가 확장으로 4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214년에는 화재와 약탈로 황폐화되었고, 이를 재건하기 시작하여 원나라 초기인 1302년에는 이전의 규모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1331년에는 유적지를 둘러싸는 담을 쌓았는데, 이는 궁전의 담과 흡사했다. 1499년에 발생한 화재로 다시 한 번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로써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화재나 다른 요인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 때는 사당 건물군의 중심인 대성전(殿)처럼 더욱 화려하고 큰 건물들이 세워졌다. 공자의 사당은 1906년 성대한 의식을 통해 중국의 수많은 사당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사람들이 숭상하고 순례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는 전한()의 황제 무제()가 ‘온갖 사상과 학파를 없애고 오직 유교만을 존경하라’는 명을 내린 뒤부터였다. 이에 따라 묘역은 계속 확장되고 점점 더 화려해졌다. 1244년에는 공자의 후손들의 무덤이 늘어나는 동시에 공자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331년 공씨 문중은 문을 세우고 담을 쌓았으며 문탑(), 아치교, 정자를 지었고, 1594년에는 취푸의 현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까지 만들었다. 18세기 후반에 묘지는 7㎞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3.6㎢의 지역을 아우르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공자의 사당과 묘역을 돌보던 공자의 후손들은 역대 왕조의 보호를 받았다. 송나라(960~1279) 인종()에게 받은 ‘연성공()’이라는 세습 존칭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1935년까지 직계후손에게 이어졌다. 이 존칭은 1935년 제77대 후손에 이르자 ‘희생의 국부 및 제1스승’으로 바뀌었다. 저택은 1377년에 사당과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전에는 사당에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운 저택은 1503년에 560개의 방과 9개의 정원을 갖춘 3열의 건축물로 배치하기 위하여 확장되었다. 1838년 황실 지원으로 완전히 보수된 건물은 1885년에 일어난 화재로 파괴되었고, 2년 후 다시 황실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중국 황제들이 가장 훌륭한 예술가와 공예가들을 동원하여 건물과 경관을 만들어내고 재건축하는 일을 지원한 덕분에, 취푸의 공자 유적은 뛰어난 조화를 보여 주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기준 (ⅳ) : 취푸의 조화로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중국의 물질문화를 보여 주는 훌륭한 건축 유적에 잘 나타나 있다.

기준 (ⅵ) : 2,000년 동안 동양의 여러 나라는 물론 18세기~19세기에 서양과 유럽에도 영향을 미친 공자의 철학과 정치관은 현대적 사고와 국가 발전을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취푸의 공자 유적[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유네스코 세계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의 국사나 다른 公敎育과 더불어, 시야를 밖으로 돌려 나라 밖의 상황도 수시로 파악하면서, 국가주권의 自尊을 토대로 하면서도, 세계사나 UN,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며 세계인과 교류하고자,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