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국>패전국. 인류의 보편적 관습. 국제법은 존중해야 하지만, 전통적인 국내법우위론도
승전국>패전국. 이는 인류의 보편적 관습. 국제법은 존중해야 하지만, 전통적인 국내법우위론도
언제든지 중요함.
@ 어느정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특정국가가 국내법우위론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하겠다고 할 경우,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그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할 수 없는 UN특성상, 그 특정국가는 제재를 당하며 상당한 고통을 겪어도,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는 현상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제사회가 아무리 비난하고, 경제 제재해도,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가 없으면, 무력으로 국가주권가진 특정국을 붕괴시키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북한이 지금 그런 상태라, 북한핵을 포기시키지 못해온 거 아닙니까?
현행 국제법의 틀내에서 생각해보면, UN이나 다른 나라의 중재도 있고,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법도 있고, UN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한 군사적 제재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면, 당사국간 전쟁도 하나의 국제법으로 작용합니다. 전력이 약한 패전국은 해당 건에 대해서 군사력의 강한 우위가 확보되지 않거나, 특별히 집착할 사유가 없으면 그렇게 승전국의 조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국가적으로 전력을 다해 상대국과 싸울 마음이 없으면, 패전국이 무력투쟁하지 않고 승전국이 해당지역에서 우위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경우, 특정지역에서 그냥 철수해도 항복문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그 非 강대국이 강대국을 이긴것도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프랑스 철수, 미군 철수, 중국군 격퇴가 국지적으로 발생했어도, 베트남이 강대국이 되는것은 아니고, 강대국이 특별히 전력을 다해 베트남을 지배하고 싶지 않은 의도를 보인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포클랜드 사태 기억나십니까? 1982년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아르헨티나는 국력을 전부 이 전쟁에 쏟아부어서, 영국을 한동안 난처하게 했었지요.
그 때 프랑스제 AM39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의 정확도가 어찌나 놀라운지, 영국이 아르헨티나의 반격에 쩔쩔 맸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결국은 이겼다고 할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수긍하지 않고 있기는 있습니다.
1). 두산백과가 정의하는 포클랜드 전쟁입니다.
포클랜드전쟁
[ Falkland Islands War ]
- 남아메리카대륙의 동남단, 아르헨티나의 대륙부에서 약 500km 떨어진 남대서양의 소도인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싼 영국·아르헨티나 간의 분쟁.
실질적으로는 1833년 이후 영국령인 포클랜드에 대하여, 1816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 그 영유권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는 아르헨티나(에스파냐어로는 Malvinas제도로 불리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흔히 아르헨티나 영토로 생각하고 있다)가 1982년 4월 2일 무력점령을 감행한 데서 발단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은 근해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으며, 또 남극대륙에의 전진기지로서의 포클랜드 방위를 위하여 급거 기동부대를 파견, 4월 26일에는 포클랜드제도의 동남쪽 1,500km에 있는 남조지아섬을 탈환하였다. 5월 20일 유엔 사무총장의 조정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포클랜드에 상륙, 75일간의 격전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포클랜드 휴전과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에 양측이 합의하였다’고 항복이라는 말을 빼고 발표된 아르헨티나측 성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한 채 원점으로 되돌아갔으며, 다시 유엔으로 넘겨진 포클랜드 영유권 문제의 타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한편, 이 전쟁이 남긴 교훈으로는 첫째, 무기현대화에 따른 전비(戰費)의 팽창이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었으며 전비 15억 달러를 소비하였는데, 국위선양 등 작은 성과에 비하여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은 GNP 600억 달러의 아르헨티나는 거의 국력을 총동원하는 모험으로 영국보다 더욱 많은 전비를 염출하여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몰렸다. 둘째는 이 전쟁을 통하여 드러난 유엔과 미국의 무능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개전 후에도 협상의 문호를 계속 개방하고 있었으나 유엔과 미국은 교전당사국의 이해조정에 실패하였으며, 특히 미국은 조급히 영국을 지원하고 나섬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제국의 반미감정만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함으로써 대미신뢰에 커다란 문제점을 남겼다.
.출처: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 (두산백과)
2). 시사 상식사전이 정의하는 포클랜드 분쟁입니다.
포클랜드 분쟁
[ ─ 忿爭 , Falkland islands war ]
-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놓고 벌인 국제 분쟁
오늘날까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는 국제 분쟁이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독립한 이후 1820년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선포하고 말비나스(Islas Malvina)로 명명했다. 그러나 1833년 영국이 포클랜드 제도에서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추방하고 제도를 식민지로 삼아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아르헨티나는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회담을 갖고, 1973년 국제연합(UN)에 포클랜드 제도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확한 성과를 보지 못하자 아르헨티나는 1982년 4월 2일,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포클랜드를 점령하였다.
이에 영국의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은 1만 5,000명 규모의 육해공 연합군을 전격적으로 파견하여 스텐리 항(Port Stanley)을 탈환하였으며, 아르헨티나 사령관인 메넨데즈(Mario Menendez)는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 255명, 아르헨티나군 650명이 전사하였다. 영유권을 회복한 영국은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지사를 파견하고 수비대를 파견하여 방어하였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영국이 실질적으로 해당 지역을 영유하고 있다.
전쟁의 영향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포클랜드 전쟁의 패전 여파로 실각하였으며, 1990년 양국의 국교가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여전히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1994년 아르헨티나 제헌의회는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을 확인하였지만 1997년 영국 정부는 영유권의 수호 방침을 공고히 했다. 포클랜드 전쟁 25주년을 맞은 2007년,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대해 주권 협상을 다시 요구했다. 또한 영국이 포클랜드 제도 인근의 대륙붕에서 석유를 일방적으로 개발하는 것에 대하여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출처: 포클랜드 분쟁[─ 忿爭, Falkland islands war]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 먼저도 공지했듯이,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UN적국상태고 독일, 이태리등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계사로 보면 종교나 대학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현행 한국 헌법 前文은 1910년의 한일병합(경술국치)무효선언, 불평등조약의 무효(을사조약이 대표적)선언, 對日 선전포고(일본등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국내법상 한국은 대일 승전국의 승전국 반열로 을사조약 이후의 일본침략에 승전국 반열로 국내법 자격을 가져도 되는 나라입니다.
한국은 公敎育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부탁드릴점은, 세계사는 강행법 성격이 아니고, 단지 참조하고 예우하여 반영하는 것이니까, 서유럽이나 교황청이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는 세계사나, 한국사, 기타 여러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전문학술서적.논문의 저자가 아니므로, 교과서나 참고서, 학교 公敎育, 백과사전, 정부방침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에 따라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학이나 종교, 왕의지위, 역사등에 관련하여서는 대중언론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2.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http://blog.daum.net/macmaca/1900
3.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4.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733
5.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6. 교과서적 기득권 대학들의 자격을 바탕으로, 필자가 주관적인 World Class Universities들을 정의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습니다.
World Class Universities.
http://blog.daum.net/macmaca/1812
7.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