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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王을 이기고 호국경에 올라 그 아들도 호국경이던 크롬웰(Oliver Cromwell). 왕정 전통이 있던 나라는 신하가 왕을 이겨도 다시 왕정이 복구
beercola
2015. 3. 20. 19:06
영국에서 王을 이기고 호국경에 올라 그 아들도 호국경이던 크롬웰(Oliver Cromwell). 왕정 전통이 있던 나라는 신하가 왕을 이겨도 다시 왕정이 복구되는 역사가 많습니다.
한국 고려시대도 그렇게 무신들이 문신들의 차별을 견디다 못해 王을 폐위시키고, 그 동생을 새로운 王으로 내세운 뒤, 정권을 장악하여 폐위시킨 王을 죽이기까지 하였지만, 100년 정도 무신정권을 유지하면서 고려 왕조를 완전히 교체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내부 힘으로는 어렵고, 世界史的으로 중국의 元.明 교체기가 있어서 무장출신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되신 것입니다. 조선시대도 신하들이 왕을 몰아낸 반정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조선왕조는 존중하면서 왕만 교체하는 그런 반정이었습니다.
세계사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나일문명. 그리고,에게문명)이나 종교[유교, 기독교(헬레니즘+헤브라이즘. 기독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한게 가장 큰 축복같음), 인도 브라만교(나중에 힌두교), 유태교, 불교, 새로만든 알라의 이슬람교], 성인(공자,예수,소크라테스,부처), 여러가지 왕정 전통, 역사가 오래된 세계사 수준의 대학들[동양의 漢 太學.國子監.京師大學堂.북경대, 서양의 볼로냐.파리.옥스포드], 현존하는 敎皇聖下제도는 정말 존중받는 역사라 격변기가 있어도 다시 복구될 인류문명.종교.성인.문화들입니다.
2차대전이 있었어도 수천년 이어진, 인류의 세계사 전통이 잘 변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는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 1642~1651)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시작되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53년에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초대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1658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전권(專權)을 행사했다.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646년 찰스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Oxford)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크롬웰은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1608~1670)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내걸려졌다.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려 나타나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가 내전 이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입헌주의 정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민혁명의 가치를 훼손한 군사독재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출처: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두산백과)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크롬웰은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1608~1670)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내걸려졌다.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려 나타나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가 내전 이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입헌주의 정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민혁명의 가치를 훼손한 군사독재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출처: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두산백과)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살피고, 교육.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