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제사지내던 중국 연극의 기원,종교축제이던 그리스 연극, 종교극 유럽 연극, 근.현대 학교연극을 살펴봄.
신에게 제사지내던 중국 연극의 기원 및 궁중 연극, 종교축제이던 그리스 연극, 종교극 유럽의 연극, 근.현대 학교연극을 살펴봄. 필자는 전공자가 아니며 연기예술 후원자이므로 논문이나 Report 형식으로 쓰지 않고, 에세이(Essay) 형식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1. 연극은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면, 신에 대한 제사나 종교축제에서 비롯되어 문학과 춤(가무), 음악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연기 예술 형태의 하나로 필자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설립된 유일무이의 최고 대학이자 유교 교육을 중심으로 행하던 Royal대학인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시작되어 해방후 성균관대로 그 정통성이 계승되어 현재에 이름)에 최근에 정진수 교수(서강대 영문과 출신으로 연극협회 이사장등을 역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 성균관대 연기예술과 창설)가 초대 학과장으로 성균관대 연기 예술학과를 설치하여 Royal대학임에도 모든 신설학과가 그렇듯이, 동종분야에서 선배가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습니다. 학과별 전통도 아주 중요한데, 공학계열로는 한양대, 연극영화로는 중앙대, 미술쪽으로는 홍익대가 전통이 깊지요. 독립운동가가 개입한 국민대나 인하대가 이들 대학보다 좋을수도 있지만, 모두 해방후에 세워진 비신분제 대학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열을 가리기가 정말 힘듭니다.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이라 한국에 주권이 성립되지는 않고(점수는 아주 좋게 만들어 놓았는데, 학벌이 없음), 이들의 추종대학들도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추종하는 연세는 일본 강점기 이전에 대학이 아닌 연희전문 이었고, 고려대는 보성전문 이었지요. 어떤 분은 100번 서울대, 국시110브 연세로 보고, 고려대는 별로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서강대 출신 방송인.가수인 양희은씨의 이런 의견을 대중언론인 신문.잡지에서 거의 보이지 않아왔습니다. 국시110브는 많이 방송했음. 서울대가 모종의 권력을 쥐고 있어서 참회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강제.무효의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였고,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이 무효라 하였고, 한일 조약의 한국측 의견이 을사조약.한일병합등이 이미 원천무효로 이미 무효였고, 현행 한국헌법에 對日선전포고한 임시정부 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대중언론의 여러 의견은 법적으로 필자가 공식 채택해 주기는 힘들고, 법리적으로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소위 왜놈학교 후신들의 주권이 한국영토에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되어야 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서울대뒤에서 맹목적인 추종세력이 아니라면, 그저 그런 비신분제 대학으로 연세대나 고려대일수도 있습니다. 인하대등이 독립운동가가 개입하여 연세대나 고려대 서울대보다는 좋을수도 있습니다. 한양대나 중앙대 홍익대도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보다는 더 나은 대학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국민대의 경우 해인사와 연관되었다가 결별한게 있는데, 이런 여러가지를 고려하면 해방후의 비신분제 대학들에게 특정 학벌을 주는것은 어렵고 개인과 학과별 장점으로 입신양명을 추구하면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여하튼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이후에 한국에 강제로 설립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소위 왜놈학교들은 한국에 주권이 없고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할 대상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국사 성균관을 중심으로 하면 Royal대인 600년 역사의 성균관대와 세계사의 지배세력인 서유럽.교황청의 가톨릭계 귀족대학인 서강대 이외에 Royal대학은 한국에 없습니다(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그리고 대학이 아닌 단기군사학교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시작한 육사는 대학교 지위보다 왕정에 필요시 육사출신 몇 명씩 중용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세워진 연극영화과의 학교들은 대개 유럽이나 미국의 영향을 받은 학교연극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강대에서 영문학을,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전공한 정진수 교수가 공부한 쪽도 神과 종교에 바탕한 서강대의 특성과, 英.美계 연극과의 연관성이 강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러나 유교의 연극도 神과 종교에 바탕한 역사입니다. 창설자 정진수 교수가 뿌린 씨 그대로 학교연극등이 성행한 유럽이나 미국형 연극쪽으로 그 특성이 많이 나타날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이자 해방후에 성균관대 초대 총장을 지내신 심산 김창숙 선생(박은식 선생과 함께 성균관 후신인 경학원에서 강의하시던 구한말.일본 강점기 大 유학자. 해방후 美軍政당시 전국 유림대회에서 이승만.김구 주석을 고문으로 하고 김창숙 선생이 위원장이 되어 일본이 격하.폐지시킨 성균관 후신인 명륜전문학교를 토대로 성균관대 복구)의 일대기를 다룬 "나는 누구냐"라는 창작극도 있습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셰익스피어는 배우.시인.극작가로,영국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극단이 있는 연극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미국은 Hollywood를 통하여 영화산업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을 통하여 승전국이 된 두 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한국은 많이 받아온 나라입니다.
학교에서도 지원을 하고 있고, 기 졸업생들의 호응이 만만치 않은 바, 유교와 문학, 역사 및 예술분야 여러 학문들과 융합되면 성균관대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 한국인, 세계인에게도 종교.인종.국적을 초월하여 예술로 활력소를 주고 정신문화에 공헌할 수 있는 측면을 발견하여 필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학과입니다. 기 졸업생 및 유교인, 문화예술인, 정부인사, 정치인, 재계.언론계 인사들이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필자가 알고 있는 정진수 교수
가. 출생: 1944년 5월 18일(70세)
나.학력: 서강대 영문학 학사,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연극학 학사
다. 200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 교수(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 창설자)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그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 1995 제 18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 1998년 보관 문화훈장,
정진수 교수가 서강대학교(교황윤허로 설립된 가톨릭계 귀족대학인 예수회의 대학.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다닐때부터 연극반활동을 하다가, 대학원도 연극학쪽으로 선택하고, 이후에 한국 연극협회 이사장등을 역임하신분인데, 제가 1983~1988 성균관대에 다닐때 원어연극 주최하신것 프랭카드로 본적 있었던것 같음. 성대에서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극도 계속 하시다가 성대 연기예술학과 창설하신것으로 알고 있음. 이 분이 인터넷 소설가 귀여니 발굴하신 분인데, 그 분의 연기예술에 대한 사상은 필자도 잘 알지 못하지만,연기예술과 학생들에게 전공 및 인성의 함양을 강조하면서, 배우,아나운서,모델,쇼핑호스트등 현대와 호흡하는 연기예술가쪽으로 학습을 시키는 것 같음.
3. 학교연극

- 초·중·고교에서 학생들이 행하는 연극활동.
방법이나 형식은 연령·목적에 따라 다양하다. 학습의 보조수단으로 연극적 표현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연극창조 과정에서 정서를 풍요롭게 하고, 자주·협동·도덕관을 고취하여 전인적 교육에 도달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한다. 한편 연극사에서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영향하에 각국 학교가 모태가 되어 발달한 연극의 한 장르를 지칭하기도 한다. 다만 학교 안에서의 교육적 연극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극문학이나 연극계에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근세극 탄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교육과정 속에 연극활동을 삽입하려는 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특히 일정한 각본에 따라 이루어지는 종래의 연극활동과는 달리 각본 없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연극활동을 전개하는 미국의 창조적 연극(creative dramatics)이나 영국의 동작(movement)운동 등이 현대 학생연극의 특징이다. 창조적 연극은 192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성행하여, 이에 관한 연구와 강좌가 노스웨스턴대학교·워싱턴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학교연극이라고 하면 창조적 연극을 뜻하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에도 보급되었다. 영국의 동작운동은 연극과 무용·음악을 종합한 자유로운 표현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창조성·상상력·표현력을 길러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출처: 학교연극 [school drama, 學校演劇] (두산백과)
4.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의 교육목표 및 인재상 소개
1) 교육목표 및 인재상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연기자의 배출과 멀티채널, 멀티미디어 시대의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5. 유교 경전에서 보여지는 연기예술 유관분야인 가무와 음악.
필자는 유교 경전의 五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 월령(月令)으로 살펴봅니다. 그 해석은 新譯 禮記(역해자:권오돈, 홍신문화사 간, 2003.10.30 2판 5쇄 발행)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是月也 命樂正 入學習舞. 이달[* 필자 주 1). 음력 정월인 1월]에 樂正(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명하여 대학[* 필자 주 2). 學: 入學의 學에 대해 필자는 대학 또는 학교로 서술하겠음]에 들어가서 文武의 춤을 가르쳐 익히게 한다.
乃修祭典 命祀山林川澤. 이어서 제사지내는 전례를 수정하고, 명하여 산림.천택에 제사지내게 한다
* 필자 주 3). 제사주재자인 천자가 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명하여 학교에서 문무의 춤을 가르쳐 익히게 하는것은 제사 주재자인 천자가 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제사에서 사용할 음악이나 가무의 역할을, 상당부분 위임한것에 해당됩니다. 이 부분은 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명하여 학생에게 學(학교)에 들어와 춤추는 일을 배우게 하여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명하여 학교에서 문무의 춤을 가르쳐 익히게 하는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번역자가 해석한 것 같습니다.
제사(祭祀)에 대비하여 음악과 가무는 樂正(음악을 맡은 장관)에게 맡기고, 제사주재자인 天子는 연기예술의 형태인 연기로 제사를 행하면서 언어.행동.기도문.복장등으로 직접 제사의 연출자.연기자가 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 필자 주 4). 제사 주재자인 天子는 음력 정월(1월)이 되면 入春에 제사를 거행하고, 元日에 상제에게 오곡의 풍양을 비는, 제천의식을 행합니다. 天子는 제천의식(祭天儀式), 산천제사(山川祭祀), 조상제사(祖上祭祀), 선성제사(先聖祭祀) 모두 지낼 자격이 있습니다. 諸侯는 (天子의 예로는) 제천의식을 못 지내고(천자의 의복이나 천자의 祭物, 천자의 자격으로는 힘들겠음. 3공.9경.제후.대부를 거느리지 못하면 天子의 제사가 아님) 山川祭祀부터 제사를 지낼수 있습니다. 여기서 命하여 산림.천택에 제사지내게 하는 것은 산천제사를 제후에게 위임하는 명령으로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하 번역은 생략하겠습니다.
犧牲毋用牝 禁止伐木毋覆巢 毋殺孩蟲胎夭飛鳥毋麛毋卵 毋聚大衆 毋置城郭 掩骼埋胔
是月也 不可以稱兵 稱兵必天殃 兵戎不起 不可從我始 毋變天之道 毋絶地之理 毋亂人之起
6. 중국연극의 역사
중국연극의 기원은 BC 10세기 전후의 서주(西周) 때 신에게 제사 지내던 무격(巫覡)의 가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배우의 출현은 BC 7세기경의 춘추시대(春秋時代)인 것으로 짐작된다. 초(楚)의 맹(孟), 진(秦)의 전(旃) 등이 궁중의 풍유간언(諷喩諫言)에서 연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대(漢代:BC 202∼AD 220)에 이르러 서역(西域) 여러 나라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2세기경에는 가무 ·골계희(滑稽戱) ·곡예 ·환술(幻術) ·역기(力技)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를 통틀어 ‘백희(百戱)’ 또는 ‘산악(散樂)’이라고 일컬었고, 여기에서 가(歌) ·무(舞) ·악(樂) ·우(優)의 결합을 찾아볼 수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악부(樂府)를 설치하고 민간의 가요를 채집하였으며,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해마다 정월이면 ‘백희’를 대대적으로 연희(演戱)케 하는 행사를 벌였다. 또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이원(梨園)을 설치하고 300명에 달하는 궁정 전속배우를 양성하였는데, 극단(劇壇)을 뜻하는 ‘이원’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당대(唐代:618∼907)에는 《대면(代面)》 《발두(撥頭)》 《답요랑(踏搖娘)》 등 가무와 음악이 결합된 형태의 가면극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참군희(參軍戱)’라고 하여 참군 ·창골(蒼鶻)이라는 두 배역이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간단한 골계극(滑稽劇)도 있었다. 이는 모두 ‘백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당시 이미 모든 예능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출처:중국연극의 역사((두산백과)
* 필자 주 5). 중국 연극의 기원과 관련하여, 한국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BC 10세기 전후의 서주때 신에게 제사지내던 무격의 가무는 유교 경전상으로 天子 및 천자의 대행자와 의미가 상통합니다. 朱子語類에 의하면 巫는 춤을 통하여 신을 접한다고 합니다. 天子와 고대 중국의 종교적 의미가 강하던 王등이 가지는 최고제사장 자격( 天子.王.君등 제사장 신분, 또는 의미가 변형된 무격)등은 아주 높은 신분인데, 비공식적으로 행하는 여러종류 무격(巫覡)의 가무나 주술은 핍박대상이 될수도 있습니다. 유교적 개념에서의 공식적인 제사장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개인이 행하는 주술을 샤머니즘으로 보는데, 이런 샤먼들은 유교사회에서 비공식적 주술사로 엄청난 핍박을 당할수도 있으니까 함부로 따라하지 마세요.
* 필자 주 6).신에게 제사지내던 무격(巫覡)의 가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는 서술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최고제사장인 天子나 王의 명에 의해 樂正(음악을 맡은 장관)등에게 음악과 가무를 배운 제생(諸生)들이 공식적인 천자.왕의 제사와 달리, 배운 기량을 가지고 혼자서 비공식적으로 사익을 위하여 가무나 주술을 행하는 경우에는 핍박받는 개인적 무격(巫覡)으로 탄압받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러나 천자나 왕, 樂正(음악을 맡은 장관)등이 행하는 연기나 연출, 가무.음악은 최고제사장의 자격, 사제의 자격이 됩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시고 글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樂正등에게서 배운 그런 가무나 음악을 개인적으로 생업으로 삼아 비공식적으로 개인적인 주술을 행하면서 복채나 수고비를 받는 사람들은 엄청난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 후계자들에게 기량을 전수시켜 줄 것인데, 그 개인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은 당연히 감수해야 합니다. 연극을 전공한 필자가 사용한 "신에게 제사지내던 무격의 가무"라고 한 것은 유교 국가제사나 공식 행사에서 최고제사장이나 사제의 공식행사를 보고 판단한것이 아니라 樂正등에게서 배운 가무와 음악을 사용하면서 개인적으로 행동하며 주술을 행하는 샤먼(巫覡)의 가무.주술.음악을 보고 서술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중국천자가 가지던 최고제사장의 지위가 일부 분야에서 巫覡으로 소개될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인 최고 제사장은 원래부터 최근까지 공식적으로 최고의 지위거나 이에 준하던 지위입니다(天子, 王, 君, 天君등). 삼국사기에 정월등에 백제의 王이 지내던 제사(제천의식, 조상제사)의 제사장 자격, 신라王이 日月神에 지내던 제사장 자격이 중국 최고 제사장인 天子나 王(농사관련 제사를 주재하던 역할을 가진데서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음)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 제사장 중국 天子에서 유래된 최고 제사장 자격은 한국에서 王이나 君인동시에 神과의 교섭자로서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유교 국가제사(제천의식, 종묘제사, 사직제사, 선성제사)와 조선의 유교 국가제사(조선초에 중단된 후 고종때 부활한 제천의식, 종묘제사, 사직제사, 선성제사)의 최고 제사장 자격(공식적인 최고제사장이나 사제의 경우 巫覡이라는 용어를 적용하기는 힘들고 天子, 王, 君.天君 및 그 대행자의 용어를 사용하는게 옳을것)의 자격은 왕이 가졌었습니다. 이전의 부여의 영고, 삼한의 상달제,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및 백제.신라시대의 제사주재자인 왕.君.天君(고대 한국에서의 天君은 최고 제사장 중국 天子를 변형시킨 용어라 할 수 있음)은 지위가 높은 유교 최고 제사장들입니다. 그 이후
고려시대 왕(宋나라가 별로 간섭을 않던 시기, 고려는 天子라는 공식 용어를 사용하기는 어려워, 중국천자 이후의 새로운 지역적 개념인 海東天子 및 일시적으로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음), 조선의 왕.황제가 행하던 여러 유교제사는 수천년 전통입니다.
* 필자 주 7). 천자는 종교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정치적으로 많이 쓰이는 황제의 직도 대부분 겸임해왔는데, 현대 중국은 祭政이 분리되었습니다. 한국도 祭政이 분리되었습니다. 일본 강점기 이후 왜곡되고 없어진 여러 제사가 다시 복원되어, 현재 한국 최고 제사장 자격은 황사손(이 원, 海東지역 한국의 局地的 제천의식인 환구대제, 왕실 조상제사 성격인 종묘대제, 토지와 곡식의 신에 대한 제사인 사직대제 주관)이 가졌습니다. 헌법에 필자가 국왕으로 추천하는 황사손을 국왕으로 반영하려면 국왕의 지위는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과 같다고 반영하여야 합니다. 이 지위가 헌법에 공식 반영되기 전에는 국제관습법 형태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임금을 마무리하고, 제사장으로서 황사손을 존중하는 선에서 마무리 해야합니다. 현행 헌법에서는 다소 초현실적인 이 모든 직위는 일본 강점기에 대항하면서 발생한 과도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책임은 필자가 지고 대표 집필하고 있습니다. 宮 성균관대(=御서강대) 상태에서 실권은 宮 성균관대임금(=御 서강대 임금)이 가지고, 전통 유교 국가제사를 치르는 황사손(조선왕실.대한제국 황실 후손)을 형식적인 입헌군주국의 국왕으로 옹립하자는게 필자의 의견 핵심입니다. 이런 의견이 헌법에 반영되기 전에는 현행 헌법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황사손측에서 상징적인 입헌군주국 형태의 國王(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서강대 임금과 동일한 지위)에 이의제기를 하면 현행 헌법에서 마무리 하고 국제관습법으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종료시키겠습니다.
필자(宮 성균관대 임금, 宮 儒 윤진한)는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600년 전통의 성균관대학교에서 총학생회와 유학대학에서 인터넷 상 100명 이상의 지지를 받아 宮 성균관대 임금이 되고, 세계적인 매체들인 트위터.페이스북.구글 및 여러 블로그등에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알려왔습니다. 宮 성균관대 임금(宮 儒 윤진한, 문필가)과 御서강대 임금(서강대 기록보존소 서진교 교수)은 국제관습법상 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 서강대 임금으로 별 무리없이 자리잡은것 같습니다. 宮 성균관대 임금이 된 필자가 국왕으로 옹립하기 원하는 황사손(이 원)의 경우, 유럽형 입헌군주제형태로 내각이 책임을 지고 상징성만 가지는 국왕칭호 정도가 무난할 것입니다(대한 왕국 국왕 칭호등). 정치적으로 내각이 책임을 지고 대학의 학벌지위때문 國王과 대등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이 되기를 필자는 주장해 옴. 황제같은 복잡미묘한 용어는 국제적으로 파장을 심하게 미칠 우려도 있어 외국에서는 Emperor가 아닌 King으로 번역되는 국왕칭호가 권한이 별로 없고 상징성만 가지는 국왕제에 적절할것입니다. 일본 수장도 한국에서는 日王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日王은 전쟁 패전후 인간선언도 했음. 일본 막부가 모든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를 탄압한 이후부터 일본은 제도적으로 유교에서 이탈하여왔습니다.불교에서 차용된 "살아있는 부처"처럼 "살아있는 신"같은 생경하고 後發局地的 용어를 사용하게 된 일본 신도의 수장이 日王입니다. 일본 강점기에는 한국에서 일본 천황이 높냐 하느님이 높냐라고 물어보면서 압박하던 後發局地的 Monkey같은 불교적 일본 신도입니다. 필자의 神觀.宗敎觀은 창조주보다 높다고 하면 창조주를 부정하는 無神論的 Monkey라는 의견입니다. 불교는 부처중심임. 창조주보다 높다고 하게 된 힘없는 피조물 인간 부처를 숭배하는데, 인더스문명의 브라만교에 대항하여 네팔지역 부처에서 시작되어 정복아닌 단순 포교된 신앙으로, 유교지역에서는 유교전통의 하위문화가 되어 유교전통을 차용하면서 부처를 숭배하는 중국 유교적 불교로, 핍박과 견제를 많이 당해온 후발 신앙임.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국중심 아시아 유교질서에서는 천황이나 일본왕을 잘 모르고 인정도 별로 않고, 일본 막부로 잘 알려짐. 막부장군을 타도하고 하급무사 중심으로 근대에 일왕을 옹립하였음. 일본은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문물을 수입하면서 한국을 어버이 나라로 섬기던 나라였는데, 강제 개항이후 서양문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급작스럽게 군사력이 강해진 나라입니다.결국 2차대전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 필자 주 8). 한국에서 쓰인 황제 칭호의 사례.
우리나라에서는 왕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고려 광종 때 잠시 황제 칭호를 쓰다가 그후 몽골의 침입과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의식 때문에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을 선포하고 칭제건원을 통해 ‘고종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출처: 황제(皇帝).제(制).조(詔).짐(朕).옥새(玉璽(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2012.1.20, 예담(위즈덤하우스)
7. 그리스 연극
일반적으로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한 종교 축제에서 상연된 기원전 5세기의 현존하는 희곡들을 가리킨다. 그리스의 극장은 최대 1만 8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반원형 극장이며, 관객은 원형의 무용장, 즉 오케스트라와 스케네(skene)를 뒤로 한 길고 좁은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음악, 무용, 노래와 같은 집단에 의한 연출은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기에 중요한 조건이었으므로 합창대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했다. 텍스트의 운율 이외에 그리스 연극이 오페라와 같은 공연이었다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과 같은 작가에 의해 탄생된 극들은 십분의 일 정도밖에는 현존하지 않으며, 아리스토파네스의 극은 약 4분의 1만이 남아 있다.
.출처: 그리스 연극[greek theatre] (드라마사전, 2010, 문예림)
8. 로마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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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연극에 의해서 그리스 연극이 근대로 계승되었다.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은 그리스 신희극의 전통을 전했다. 세네카의 레제드라마(Lesedrama / 읽는 희곡) 는 그리스 비극의 신화적인 주제를 전하는 데 일조했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 나이비우스 · 엔니우스 · 파쿠비우스 · 아키우스와 같은 로마의 극작가들이 쓴 극의 단편이나 제목들이 남아 있다. 그러한 극들의 대부분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극들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극장은 그리스 시대의 것을 개조한 것이었다. 로마의 극장은 세 개 내지는 다섯 개의 출입구가 있는 근사한 프론스 스카에나에를 배경으로 한 긴 무대, 그것을 향하고 있는 반원형의 관객석 그리고 오케스트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형식은 로마의 마르켈스 극장에서 확립되었고, 오랑주(프랑스 남동부의 도시)나 그 밖의 장소에 보존되어 있다. 무대 오른쪽이 도시의 방향을 나타내고, 무대 왼쪽이 항구나 시골로 가는 퇴장구가 있다. 마르켈스 극장보다도 큰 극장에는 지붕은 없었으나 폼페이에 있는 것처럼 그보다 작은 극장에는 목조 지붕이 있었다.
극장의 볼거리에는 검투사의 싸움이나 모의해전과 같은 것들이 더 있었다. 보통은 이동이 가능한 가설무대에서 마임으로 상연되던 소극도 대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가면을 쓰고 공연했으므로 몸짓이 대단히 중요했다.
.출처: 로마 연극[roman theatre] (드라마사전, 2010, 문예림)
9. 르네상스 연극
15세기 초반부터 이탈리아에서 고조되기 시작한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관심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함락되어 그리스 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몰려오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이 갖고 온 고대 서적과 지식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화 바람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인쇄술의 발명은 이러한 지식을 일반에게 널리 보급시켰다.
르네상스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운동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행해졌으며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핵심개념은 인본주의운동으로 요약되는데, 인본주의란 모든 것을 인간을 척도로 하여 평가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기본사고는 각 나라마다 다음과 같이 연극에 반영되었다...
. 르네상스 시대 연극에 일어난 모든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초기의 이탈리아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일치법 등 고전 규칙에만 매인 탓인지 생기가 없이 지리했다. 고전의 복제적 모사를 처음으로 벗어난 작가로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마키아벨리와 함께 대표적인 희극작가로 꼽힌다. 당시에는 비극·희극·전원극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 희극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 전원극은 전원을 배경으로 요정·목동 등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극으로 대표적 극작가로는 타소 등이 있다. 비극·희극·전원극의 확립은 무대미술과도 관련이 깊다. 당시 무대미술은 원근법의 도입 등으로 획기적 전환을 맞았는데 여기에는 BC 1세기의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의 영향이 크다.
인테르메초와 오페라는 고전극의 엄격함과 단조로움을 깨뜨린 이탈리아 르네상스 특유의 연극으로 인기가 높았다. 인테르메초, 즉 막간촌극은 말 그대로 막간에 공연된 경쾌하고 볼 만한 오락거리로서 주로 신화적인 소재를 다루었다. 인테르메초는 본 연극을 능가해 종종 연회에서 독립적으로 공연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당시 무대기술의 발달을 반영하여 무대장치를 화려하고 정교하게 한 것이다. 한편 오페라는 노래와 악기반주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연주의 한 형태이다. 일반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오페라는 '카메라타'(1580경)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인 그룹들이 유럽에 들여온 것이었다. 카메라타는 피렌체 귀족 조반니 바르디의 집에 모였던 시인과 음악가 집단으로서, 이들은 고대 그리스 연극 양식으로 보이는 것에 비극의 대화 부분을 서창하는 것을 연구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서창으로서, 결국 영창(詠唱)으로 이어져 전체적으로 악기를 반주하여 부르는 노래의 대본이 되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J. 베리, G. 카티니, C. 몬테베르디의 작품으로 1600~07년에 연이어 상연되었다. 그리하여 무대장치와 노래와 비극적 또는 목가적 테마를 기반으로 한 오페라는, 1637년에 처음으로 공설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연 베네치아를 거쳐 북방의 빈이나 독일에 파급되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18세기경까지 유럽 전지역에 영향을 끼쳤던 이탈리아의 직업극단으로, 이탈리아의 대중적 희극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 시대의 파불라 아텔라나(fabula Atellana)의 희극전통을 살리면서 르네상스 당시의 이탈리아 사회상을 반영한 전문적인 희극으로 가면과 유형적 인물의 창조가 두드러지며 라치라는 즉흥연기를 사용했다. 코메디아의 희극적 상황과 유형인물은 전유럽의 희극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몰리에르나 셰익스피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은 비교적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은 덜 받았으나 연극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세의 전통과 르네상스 사상을 조화시킨 영국은 막간극과 대학재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극을 거쳐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연극의 황금기를 맞았다. 토머스 키드나 크리스토퍼 말로 등은 5막구조 형식을 사용하고 빠른 진행과 세네카적인 감각성을 살려 이미 복수극의 기본을 보여주었다. 셰익스피어는 배우로 일하다가 1590년경부터 희곡작가로 출발해 비극·낭만희극·역사극 등 폭넓은 희곡을 발표, 오늘날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극장은 실외의 공공극장과 실내의 사설극장으로 구분되었다. 공공극장은 원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였는데 여기에는 지붕이 있는 고급관객석이 있었으며, 가운데의 공터는 일반석으로 관중은 서서 연극을 구경했다. 무대는 3면이 관객을 향한 플랫폼으로 뒤에는 커튼이 달린 벽이 있으며 위쪽은 배우나 음악인들의 갤러리였다....
프랑스는 고전을 충실히 연구, 모방하여 신고전주의를 꽃피웠다. 프랑스 신고전주의는 시간·장소·행동의 통일, 즉 삼일치법과 장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재미 속에 교훈을 담았으며 내용의 일반성과 품위를 내세웠다. 이는 이성과 법과 질서를 신봉하던 절대군주제의 반영인 동시에 르네 데카르트나 파스칼의 합리주의 철학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엄격한 규칙의 강조는 피에르 코르네유의 〈르 시드 Le Cid〉를 둘러싼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이 작품의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삼일치법을 위배했을 뿐만 아니라 장르의 순수성이나 교훈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정했다. 이후 프랑스 연극계는 엄격한 삼일치법과 규범을 지켜 신고전주의를 발달시킨다. 당시 연극애호가였던 리슐리외 추기경 치하에서 프랑스 정국이 안정을 회복하기까지 파리에는 영국의 극단과 같은 순수한 직업적 극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뒤 부르고뉴·말레 극단이 직업극단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이탈리아풍의 비극·희극·목가극등을 상연했다. 프랑스 연극의 수준을 영국 연극 이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몰리에르(1622~73)와 장 바티스트 라신(1639~99)이었다. 몰리에르는 자신이 배우였으며, 라신도 젊었을 때부터 연극의 실제를 잘 알고 있었다. 라신은 몰리에르의 도움을 받으며, 왕과 측근의 비호로 유명해졌다. 이들 두 사람은 인간의 약점이나 정열, 고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연극에서 취급해 부활된 고전형식에 뛰어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스페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연극의 황금기를 맞았다. 이탈리아의 무대기술이나 연기 등의 새로운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신고전주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특유의 정열적·낭만적·서정적 연극을 창조했으며, 비극과 희극 등 여러 장르도 자유로이 혼합했다. 중세 종교극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오래 지속되었으며, 옥외에서 공연된 다양한 세속극들은 오랫동안 극장의 부족을 보완해주었다. 스페인 연극의 대표적 작가는 로페 데 베가, 페드로 칼데론이다. 로페 데 베가의 작품은 400여 편이 전해오는데 재미를 우선으로 했으며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또한 삼일치법을 무시하고 시어와 운율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는 왕·귀족·평민 등으로 이루어진 엄격한 계급사회를 묘사했는데, 특히 농민의 인물창조가 뛰어났다. 한편 칼데론은 좀더 세련되고 철학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후기에는 종교적 내용이 바탕을 이룬 종교극도 썼다. 인생은 순간의 무대이며 인간에게는 제각기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 있다는 사고는,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인생은 일장춘몽 La vida es sueño〉(1635)을 비롯하여 다른 작품에서도 거듭 나타난다.
10. 프랑스 연극
프랑스 연극의 기원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세시대 교회 제일(祭日)의 의식과 연관된 종교극에서 찾을 수 있다. 10세기경 성서의 중요 부분을 수식하여 연극적으로 합송(合頌)하는 트로프스(tropes)가 발생하면서 그것이 차차 연극형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출처: 프랑스 연극[French Drama, ─演劇] (두산백과)
11. 영국 연극
영국연극의 기원은 다른 유럽 국가와 같이 중세 교회에서 행한 예배의식에서 구할 수 있다. 즉, 미사와 성무일도(Hours), 응답공가(Antiphonal Song) 등에는 본래부터 극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고, 여기에 성경구절 이외의 말이나 노래도 첨가되어 전도에 많은 효과를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탄생된 것이 예배극이다. 이것은 처음에 교회에서 행해졌으며, 그 내용은 성서에서 구했고 대사는 라틴어였다. 그러나 점차 예배극이 민중의 인기를 얻게 되자 협소한 교회를 벗어나 교회 앞마당, 후에는 시장으로 그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배극은 성직자의 손에서 차차 멀어지게 되었으며, 그 내용도 세속화되어 대사는 영어로 바뀌게 되었다. 예배극이 시장에서 행해짐에 따라 그 주최자도 성직자에서 상인조합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조합상인에 의한 공연은 성축일 같은 종교적 축제일을 택해 이루어졌으며, 그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이 계속되었다. 예배극은 신비극(mystery play)과 기적극(miracle play)으로 분화 ·발전되며, 그 내용은 모두 성서나 성자들의 이야기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 조합상인에 의한 연극, 즉 상인조합연극은 1300년경부터 1450년경에 걸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동무대(pageant)에서 상연되었다. 의상이나 무대장치가 극적 효과에 한 몫을 담당했으며 배우나 작가는 보수를 받았다.
.출처: 영국 연극[英國演劇] (두산백과)
11-1. 영국연극. 로열연극아카데미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블룸즈버리로 이전하였고, 배우 대표와 제작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09년부터 1955년까지 케네스 반스(Kenneth Barnes)가 교장을 맡아 성공 기반을 다졌다. 1920년 왕실의 특허를 받았으며, 1924년부터 해마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
.출처: 로열연극아카데미[Royal Academy of Dramatic Art, ─演劇─] (두산백과)
11-2. 영국연극. 로열셰익스피어 극단
매년 30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있는 이 극단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는 《당신 좋으실 대로 As You Like It》 《헨리 5세 Henry V》 《리처드 2세 Richard II》 《리처드 3세 Richard III》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등 셰익스피어극(劇)을 주로 공연하며, 런던에서는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고전극을 비롯하여 버나드 쇼(Bernard Shaw), 조반니 베르가(Giovanni Verga), 리처드 셰리든(Richard Sheridan) 등의 현대극을 상연하며, 영국 각지의 학교에서도 순회공연을 가진다.
여왕의 허가를 직접 얻은 단체로 '전영국예술진흥회'를 통하여 많은 국고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보수적이지 않고, 고전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전위실험극까지 대담하게 채택하여 극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출처: 로열셰익스피어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 ─劇團] (두산백과)
12. 스페인 연극
.출처: 스페인연극[─演劇] (두산백과)
13. 북유럽연극
-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의 연극.
이들 나라에서 아이슬란드는 가장 오래 된 문화를 지녔으나 일반적으로 종교극에 기원을 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뒤떨어진다. 그리스도교가 북유럽에 전파된 것은 10세기 이후이다. 당시 강대국이던 스웨덴의 연극은 중세 후기 교회에서 종교극으로 시작되어 도시에 퍼졌다. 16세기 M.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파도는 북유럽 가톨릭 기반을 의외로 빨리 무너뜨려 스웨덴에서는 대학 중심의 학교연극이 활발해졌다. 17세기 성서극과 스웨덴 역사를 제재로 한 희곡이 쓰여지면 학생들이 상연하였고 또 유럽 대륙으로부터 직업적인 순회극단이 초청되었으며, 1667년 스톡홀름 왕궁 내에 최초의 소극장이 세워졌다.
그 후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1737년 스톡홀름에 본격적인 왕립극장이 생기고 스웨덴의 직업적인 배우가 출연하였다. 이무렵 덴마크도 독일·프랑스 연극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21년 코펜하겐에 극장이 세워지고 덴마크어로 된 작품에 대한 요구가 일기 시작하자 ‘북유럽의 몰리에르’라 불리는 L.홀베르가 등장하였다. 그는 세상을 풍자한 희극을 써서 호평을 받았다. 그 후 1세기쯤 뒤에 철학자 J.L.헤이베르(1791∼1860)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왕립극장의 무대감독이 되었다. 그는 이지적인 극작술을 구사하여 극단의 방향을 제시하고 명배우였던 부인과 함께 19세기 전반(前半)의 유럽 연극계를 지배하였다. 이 때 이미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통치권이 넘어간 핀란드에서도 최대의 국민문학 작가인 키비의 사극 《레아》(1869)가 상연되었으며 이윽고 헬싱키에 핀란드 국립극장 건립계획이 세워졌다.
19세기 후반 이처럼 활발했던 북유럽 연극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노르웨이 극작가 H.입센에 의해서이다. 그는 이상을 위하여 헌신하는 목사를 주인공으로 한 《브란:Brand》(66)를 비롯하여, J.W.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형태인 《페르 귄트:peer Gynt》와 사극인 《황제와 갈릴레아인:Kajser ogGalilaer》에서 사상적인 입장을 확립하고, 계속하여 사회의 허위·부정을 파헤친 사회극으로 나아갔으며, 《인형의 집》(79)에서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눈을 뜨게 된 노라라는 새로운 여인을 묘사하여 근대극의 제1인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BC 5세기 그리스 비극의 운명극과 16세기 영국의 W.셰익스피어에 의한 성격극(性格劇)에 대응하는 19세기 후반 북유럽의 사회극(社會劇)이 형성되었다. 입센은 그 후에도 작품마다 세계를 놀라게 했고 사상적으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와 대조적으로 비외른손(1832∼1910)은 스웨덴의 J.A.스트린드베리가 풍자소설 《붉은 방》(1879)을 발표한 이래 자연주의 소설과 사회극의 걸작들을 거듭 집필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연출가와 무대장치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다. 1902년 4월 9일 헬싱키에 핀란드국립극장이 건설되었으며 노르웨이 오슬로에도 국립극장이 생겼다.
.출처: 북유럽연극 [北─演劇] (두산백과)
14. 미국연극
- 미국 건국 전후부터 현대까지 생성 ·발전되어온 연극.
미국 연극의 역사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멕시코나 뉴멕시코 주변에서 가톨릭 교회의 지도 아래 중세 교회극(敎會劇)이나 에스파냐어에 의한 연극이 공연되었고, 북부에서도 간혹 프랑스의 가면극이 공연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들은 영국의 식민지 성립 이전이었으므로 미국 연극의 기원이라 할 수는 없다.
1607년 버지니아에 영국 식민지가 생기고, 또 1620년에는 청교도가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북부에 이주하여 왔지만 엄격한 퓨리터니즘 사회인 북부에서는 비속한 연극이나 쇼 등을 금하고 있었으므로, 영어에 의한 연극은 먼저 남부의 농장 경영주들 사이에서 집단 오락으로서 발생했다. 1665년 버지니아에서 최초로 영어극(英語劇)이 상연되었고, 18세기 초에는 작기는 하지만 극장도 세워지고 왕정복고기(王政復古期)의 연극이 상연되기에 이르렀다.
1798년 뉴욕에 세워진 파크극장은 약 2,000석의 좌석을 갖춘 석조의 대건축물이었다. 이 극장은 182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좌석수 2,500에 특수 조명램프를 쓰는 최신식 극장으로 재건되어 19세기 초 미국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1년 더블린에서 온 아일랜드 극단의 순회공연은 J.싱이나 W.B.예이츠 등의 작품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오락 본위의 연극에 불만을 품어온 젊은 사람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새로운 국민연극(國民演劇)을 만들어 내려는 운동이 태동하면서 1911~1915년, 미국 각지에서 커뮤니티 시어터(Community Theater)가 생기고, 유럽 각국의 여러 가지 새로운 연극도 차례차례 소개되었다. 또 대학에서도 연극전공학과가 생기고, 하버드대학의 G.베이커 교수와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활약하였다.
.출처: 미국연극[美國演劇] (두산백과)
15. 한국연극
요약: 한국 고대 원시적 제천의식을 기원으로 생성 ·발전되어온 연극.
한국연극은 그 양식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개화기를 분기점으로 한 그 이전의 연극 양식과 그 이후의 연극양식이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은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 문화의 충격으로 전통적인 것이 뒤로 밀려나고 대신 서구적 문학형태가 이 땅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화기 이후 모든 문화예술은 서양적인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토착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연극은 물론 미술이나 문학 ·음악 ·무용 ·건축 등 모든 예술양식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여러 나라가 비슷했으며, 오늘날 제3세계로 일컬어지는 나라들이 그런 과정을 밟아왔다. 개화기는 각 나라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자기의 전통문화를 뒤로 하면서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초기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가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화기 이전에 생성 ·발전했던 연극을 민속극 또는 전통극 ·고전극이라 부르고, 개화기 이후 서양문화의 영향 밑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연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을 근대극 또는 신극(新劇)이라 부른다.
.출처: 한국연극[韓國演劇] (두산백과)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로 연기예술의 토대가 되는 연극에 대해 그 역사를 알아보고 교육.홍보하기 위하여 자료들을 인용하였으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서지혜, 광고 촬영 비하인드컷 공개...매혹적 여성미 ‘발산’.현대 연기예술은 영국이 자랑하는 배우.시인.극작가 Shakespeare이후 영국(연극)과 Hollywood의 미국(영화)에서 세계적 경쟁력 가진것같음. http://starn.hankyung.com/news/index.html?no=358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