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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4일은 입춘이었습니다. 입춘은 유교의 경전인 5경(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4서(논어.중용.대학.맹자)중 하나인 예기의 월령편에

beercola 2015. 2. 5. 05:05

2015년 2월 4일은 입춘이었습니다. 입춘은 유교의 경전인 5경(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4서(논어.중용.대학.맹자)중 하나인 예기의 월령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1. 예기 월령(月令) 제 6

 

孟春之月(맹춘지월)  日在營室(일재영실)  昏參中(혼삼중)  旦尾中(단미중) 其日甲乙(기일갑을) 

其帝大皥(기제대호)  其神句芒(기신구망)  其蟲鱗(기충린)  其音角(기음각) 律中大蔟(율중대족)

其數八(기수팔)  其味酸(기미산)  其臭羶(기취전)  其祀戶(기사호) 祭先脾(제선비)

東風解凍(동풍해동)  蟄蟲始振(칩충시진)  魚上冰(어상빙) 獺祭魚(달제어)  鴻鴈來(홍안래)

 

 

 

..........

是月也(시월야)  以立春(이립춘) 先立春三日(선입춘삼일)  大史謁之天子(대사알지천자)

曰某日立春(왈모일립춘)  盛德在木(성덕재목) 天子乃齊(천자내제)  立春之日(립춘지일)

天子親帥三公九卿(천자친수삼공구경) 諸侯大夫以迎春於東郊(제후대부이영춘어동교) 

 

. 필자 주 1). 홍신문화사 간 신역(新譯) 예기(禮記)[역해자:권오돈(權五惇), 2003년 10월 30일 2판 5쇄 발행]에서  역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달에 입춘이 있으므로, 입춘 3일전에 太史가 천자를 뵙고 말하기를,  "某日이 입춘입니다. 천지 생육의 성대한 덕이 木에 있습니다"고 하면, 천자는 곧 재계하고 있다가, 입춘에 3공.9경.제후.대부를 거느리고 東郊에서 봄을 맞이한다....

 

 

2. 입춘이던 양력 2015년 2월 4일(수)은 음력으로 2014년 12월 16일(평달)로, 음력간지로 갑오(甲午)년 정축(丁丑)월 신해(辛亥)일 이라 합니다.  

  

양력(陽歷. 사전적정의로 太陽歷으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한 역법)으로는 아직 겨울이지만 음력(陰歷. 사전적 정의로 태음력으로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을 쇠는 유교문화권에서는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4계절을 나누어서  봄에 들어서는 입춘이라고 합니다. 바깥기온보다도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4계절을 구분하여 봄에 들어선다고 하는것이기 때문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는 사계절 분류와는 약간 달리, 실제 바깥 기온과는 약간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태음력을 많이 써왔지만, 태음태양력을 병행하고 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필자 주 2). 봄을 다스리는 春의 帝는 태호(太皞)인데, 여기서의 帝의 의미는 황제나 임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교 경전에서 쓰이는 帝로 五帝의 帝나,하늘의 아들인 天子로 인간을 다스리다가 승천하여 하늘天의 일부가 되어 하늘天(太極과 연계되는 하늘天)의 다스림 중 일부를 이양받은 天의 일부가 된 天子로 볼수 있습니다. 태고적에 天子로 살다가 초월적 하늘天과 天人合一된 上帝.하느님(太極과 연계된 하늘天에 天人合一된 하느님)의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서 나타나는 帝는 다음분들입니다.

 

春의 帝는 태호(太皞), 夏의 帝는 炎帝, 秋의 帝는 소호(少), 冬의 帝는 전욱(顓頊)

 이렇게 4계절의 帝만 나타내는 禮記 책도 있지만 季夏와 孟秋의 달에 中央의 帝를 집어넣어 그 帝를 黃帝로 하는 禮記 月令도 있습니다. 필자가 볼때는 이 예기 월령의 五帝를 근거로 오제설이 설립된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기 월령편이나 다른 경전에서 이 5제의 모습을 인간이나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전설적.신화적 형상으로 표현하는 구절은 필자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더스문명등과 교류하면서 神話的인 모습의 동물들을 숭배하는 원시신앙에 영향받아 유교 경전 아닌 중국의 俗書에는 신화적인 동물모습의 3皇5帝 현상도 나타나고는 있습니다. 황하문명에서 파생된 유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다른 신앙도 그렇고 인지능력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들이 잘 모르는 능력을 가졌다고 동물도 혼합하여 같이 숭배할 수 있었겠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화나 상상.또는 先史時代에 실재로 존재하던 강력한 존재였다고 추정되는데, 인간들이 점차 옷도 만들어 입고 말도 하고 집도 지을줄알고, 근친혼을 배제하고, 글을 쓰면서 더욱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을 중시하여 신화적인 동물 모습은 유교 경전이나 기독교 경전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화나 전설로 밀려난 채로, 그런 신화적.전설적 형상의 神들은 그대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무한하시지만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이 쉽게 그려낼 수 없을것 같은데, 유교나 기독교가 인간중심으로 전승되면서 신화적.동물혼합적 지배자들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중심으로 변화시키면서 經典에 반영했을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발달하기전에 숭배하던 강력한 존재가 동물의 모습을 가졌다면 이 전통을 인정해주는것도 옳을것 같습니다.인더스문명같은 오래된 문명에서 뱀이나 소의 모습을 한 강력한 존재를 지속적으로 경배대상으로 하여 이를 융합하였을 수도 있었고, 지금도 타 문명권에서는 지속적으로 그 동물모습의 강력한 존재를 숭배대상으로 삼는다면  인정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유교권에서는 근친혼이 강하게 배제된 것 같고 8촌이내의 결혼도 기피하게 되었고, 근친혼을 인정할 수 있던 서양도 비극적인 연극을 통해 原罪意識을 가지게되고, 생물학적 개념으로 근친혼은 열성인자를 가진 후손을 낳는다고 교육시키면서 서양도 근친혼은 기피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가진 로마제국이 새롭게 기독교를 國敎化시킨 원인도 근친혼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던 아득한 先史時代의 전설에 원죄의식을 가지게 되면서(오이디푸스 이야기), 점차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기 월령에서 帝를 보좌하는 보좌신을 神이라고 표현한것은 上帝(天人合一說에 의해 하늘天의 일부 지배권을 이양받으신 하느님 五帝)를 보좌하는 신으로서, 여기서의 신은 보좌신의 의미로 신령이나 귀신정도의 하위신에 해당된다고 파악합니다. 유교는 수천년의 전통에서 주신인 天(태극과 연계된 최고신)을 중심으로 山川의 神, 조상신(五帝는 하늘의 일부가 되신 원래의 조상신으로도 파악할 수 있음. 하늘로 승천하여 계절별로 하늘을 지배하시는 하늘天의 일부가 되신 오제의 자손들은 天子의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先聖등 다양한 숭배대상을 가진 多神敎 전통으로 그 다신교 전통이 변질되지 않은 始原 종교중 하나입니다. 

 

 

3. 참고로 예기 월령에서 봄.여름.중앙.가을.겨울의 帝와 보좌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봄(春)

 

 

其帝太皥(기제태호) 其神句芒(기신구망)

 

그 上帝는 태호(太皥), 그 보좌신은 구망(句芒)이라는 의미입니다.

 

 

구망(句芒)은 소호(少皥)의 아들 중입니다.

 

 

2). 여름(夏)

 

 

其帝炎帝(기제염제)) 其神祝融(기신축융)

 

그 上帝는 염제(炎帝), 그 보좌신은 축융(祝融)이라는 의미입니다.

 

 

축융(祝融)은 전욱의 아들 여입니다. 

 

 

3). 중앙(中央). 禮記 月令에서는 夏와 秋 사이에 나타남. 

 

其帝黃帝(기제황제) 其神后土(기신후토)

 

그 上帝는 황제(黃帝), 그 보좌신은 후토(后土)라는 의미입니다.

 

 

후토(后土)는 공공씨의 아들 구룡입니다.

 

4). 가을(秋)

 

其帝少皥(기제소호) 其神蓐收(기신욕수)

 

그 上帝는 소호(少皥), 그 보좌신은 욕수(蓐收)라는 의미입니다.

 

 

욕수(蓐收)는 소호(少皥)의  아들 해입니다.

 

 

 

5). 겨울(冬)

 

其帝顓頊(기제전욱)) 其神玄冥(기신현명)

 

그 上帝는 顓頊(전욱), 그 보좌신은 현명(玄冥)이라는 의미입니다.

 

 

현명(玄冥)은 소호의 아들 수와 희입니다.

 

 

. 필자 주 3). 보좌신들에 대한 출처

 

 

오정(五正)

 
행(五行)을 관장하는 다섯 우두머리. 곧 목(木)은 구망(句芒:소호의 아들인 중), 금(金)은 욕수(蓐收:소호의 아들 해), 화(火)는 축융(祝融:전욱의 아들 여), 수(水)는 현명(玄冥:소호의 아들 수와 희), 토(土)는 후토(后土:공공씨의 아들 구룡)임.
.출처: 오정[五正]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필자 주 4). 순서상으로 볼때 尹씨는 중국의 소호(少皥)씨에서 유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소호씨는 성이 아니라, 칭호등에 해당되며, 그 姓은 已씨임). 필자는 파평윤씨(坡平尹氏)입니다. 윤씨는 통일신라 말기에 태어나신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하는 성씨인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개국공신으로 三韓功臣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의 명문 문벌로 살다가 조선시대에도 전주 이씨 다음으로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1천년 이상 한국의 명분문벌로 살아온 성씨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착은 늦은편 같습니다. 윤씨는 파평윤씨가 가장 많습니다. 


4.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다음의 서적을 소개 하겠습니다.

 

조상성씨의 세계 내가만난

저자:김 문순/답게/2009.03.25

 

위 책은 무송 윤씨와 칠원윤씨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무송윤씨 

 

원 성씨는 원래 소호(少皥)씨였으나, 소호 금천씨의 아들 선(船)이 옹주의 윤성에 봉해져 윤씨가 되었다. 후손인 경(鏡)이 병란을 피하여 무송(전북 고창)에 세거하여 이어져 오고 있다...

 

. 칠원윤씨

태종 무열왕때 태자 태사 역임.

 

. 필자 주 5). 향토문화대전에 나타난 무송 윤씨의 시조와 칠원윤씨의 시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a). 한국에서의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윤양비(尹良庇)에 대한 설명.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설명편에 나옴.


[연원]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보승낭장(保勝郎將)·호장동정(戸長同正)을 지냈다. 윤양비의 선계(先系)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에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무송(茂松)[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지방에 정착하면서 무송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윤양비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장령공파(掌令公派)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b). 한국에서의 칠원윤씨(漆原尹氏) 시조 윤시영(尹始榮)에 대한 설명.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에 있는 칠원윤씨 上良齋 
설명편에 나옴.

 


[개설]
칠원윤씨 대언공파(代言公派) 양산 소문중(小門中)이 임진왜란 전에 남하하여 양산 상삼 및 양동에 세거의 터를 잡았는데 26세조 윤승원(尹承元)을 모시는 재사이다. 「상량재기」는 1997년 5월 18일 38세손 윤정삼(尹政三)이 근찬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태사로서 고명원로(顧命元老)에 이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로 삼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27세조 윤옥(尹沃)은 무과중추부사(武科中樞府事)였으며, 윤발(尹潑)은 무과에 급제한 만호(萬戶)였다. 두 사람은 임진왜란시에 형제가 창의(倡義)한 공으로『양산읍지』, 『양산향안』에 실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c). 한국에서의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윤신달(尹莘達)에 대한 설명. 

성씨의 역사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龍淵寶鑑)》 등에 의하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坡平山)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옥함(玉函)이 물위에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나왔다고 한다. 윤신달 이전의 자세한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출처:파평윤씨[坡平尹氏] (성씨와 본관, 2011.1.14,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6). 이로볼때 무송윤씨 시조 윤양비의 선계(先系)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에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무송(茂松)[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지방에 정착한것으로 판단됨.  칠원윤씨의 시조 윤시영(尹始榮)도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태사로서 고명원로(顧命元老)에 이른점을 보면, 태종무열왕재위시 중국을 통치하던 당나라 때 칠원윤씨가 한국에 정착한것으로 파악됨.

 

결국 소호씨에서 유래된 중국 尹씨는 唐나라때와 後唐시대(역사적으로 923~936 존립) 한국에 정착한 성씨라 할 수 있음. 정착순서로 보면 칠원윤씨가 태종 무열왕때, 파평윤씨가 고려 건국(918년)에 참여한 전후시기에, 무송윤씨가 후당(923∼936)시대에 한국에 정착한 것이라 판단됨.    

 

. 필자 주 7). 태종무열왕, 당나라, 후당(後唐)의 시대 설명.

 

a).신라시대 태종무열왕의 출생.사망 및 재위기간

ㄱ). 출생~사망: 603(진평왕 25)∼661(문무왕 1).

ㄴ). 재위기간: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신라 제29대왕.

 . 출처: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 당(唐)나라 존속기간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출처: 당[唐] (두산백과)

 

c). 후당(後唐)에 대한 설명

 

중국 고대의 오대(五代) 중의 한 왕조(923∼936).

 

통칭 후당(後唐)이라 한다. 돌궐(突厥) 사타부(沙陀部)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이 당(唐:618∼907)에 봉사(奉事)하며 황소(黃巢)의 난(875∼884) 진압에 공을 세워 895년 진왕(晉王)으로 훈봉(勳封)을 받았는데, 아들 이존욱(李存勖:재위 923∼926)은 923년 후량(後梁: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國號)를 당(唐)이라 칭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였다...

.출처:당[唐] (두산백과)

 

 

. 필자 주 8). 유교사회는 자손번성을 위해 부인을 여러명 두며 살아온게 역사적 현실인데, 이는 그대로 반영하여야 합니다. 왕족이나 양반은 대개 그렇게 여러명의 부인들 두고 一夫多妻制로 가문의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현대는 一夫一妻制지요. 

. 필자 주 9). 五帝의 姓.

태호, 염제, 황제, 소호, 전욱은 하나의 칭호에 해당됩니다. 중국은 姓氏제도를 발달시켜 한국도 殷나라의 왕족출신 箕子조선의 출현이후 기자의 후손들이 성을 사용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부터 역사적 조선으로 보여지는데, 기자조선을 불명확한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음. 물론 아직까지 단군은 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野史로보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음. 세계사 영역과는 맞지 않는 야사와 전설이 단군조선 이라 할 수있음. 최근에 급작스럽게 단군조선도 교과서에 넣기는 넣었지만 世界史.正史로서가 아니라 신화와 전설 차원으로 넣은것이라 이는 학계에서 많은 검토를 해야 함. 국어사전이나 한자사전에서 유사이래.有史以來란 말은 있어도 단군이래라는 말이 등재되지 않은걸 보면 正史에 근거한 역사적 자격이 중요하기는 중요한 것 같음.그런데 기자조선 기준(箕準)王은 분명한 正史시대의 위만이 멸망시켜 출생.사망이 부정확한 인물이면서 역사적 인물에 해당되기도 함.  

. 필자 주 10). 준왕(準王), 즉 기준(箕準)은 출생.사망은 불명인데, 재위기간은 명확하고 정사시대 인물인 위만에 멸망당하는 역사에는 분명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준왕

재위기간: BC 3세기~BC 2세기.

 

고조선의 왕. 중국의 진(秦)나라 말기와 한(漢)나라 초기에 걸치는 시대에 재위(在位)하였으며, 지금의 랴오둥[遼東]지방에서 도망해 온 위만(衛滿)을 받아들여 한씨조선의 서북변(西北邊) 지방을 지키게 하였다. BC 194년 위만이 왕검성(王儉城)을 공취(攻取)하자, 준왕은 마한(馬韓) 땅으로 도망하여 그 전에 이미 그 지역에 이주해 있던 유민(流民)을 수습하여 그들을 지배하면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출처:준왕[準王] (두산백과)

 

. 필자 주 11). 기자조선의 실체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인정하였다고 하는데, 최근에 부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성씨의 유래나 기준왕의 역사적 등장으로 볼때 기자조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근대와 현대 일부분 시기는 일본 강점기인데, 학술서나 백과사전.교과서 등 많은 학술서에서 유교 아닌 일본 신도.일본불교적 시각과 일본 기준 역사관이 강점기 한국에 작용한점을 염두에 두어 장기적 재검토가 필요한 분야라 생각합니다.   

 

기자조선(箕子朝鮮)

 

.요약: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처:기자조선[箕子朝鮮] (두산백과)

 

여하튼 한국 성씨를 보면 기자조선의 후손들이 徐氏나 韓氏등으로 姓을 자연스럽게 적용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고적에 성이란건 꼭 父의 성을 따르지 않고도 그 후손이 地名등을 활용해 姓을 사용하여 전승되어온 부분도 많습니다. 한국의 경우 기자조선 후손들은 姓을 사용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기자조선 후손이 아니면 자생적인 부족연맹체의 수장들이 姓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 나중에 추증형식으로라도 姓을 사용하며 확대시켜 온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막부시대를 타도하며 하급무사들이 추대한 日王이 아직도 姓이 없는게 좀 특이합니다.  한국에서 漢字나 유교 및 도교.중국불교 여러 문물을 수입해간 나라가 일본이며 한국을 어버이 나라로 알던 나라가 일본인데 느닷없이 중국.한국이 모르고 인정치 않던 천황칭호를 강요하니까 해방후 한국은 日王이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필자 주 12). 유교 경전에서 보면 윤씨가 나오는점으로 보아 중국에서 발생한 姓인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소호씨가 尹성을 사용한게 아니고 次妃(둘째 왕비)에게서 난 후손이 尹성을 사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성씨는 몰라도 필자가 尹氏라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든 책 [조상성씨의 세계 내가만난/김문순 저]에서 무송윤씨의 원래 성씨가 소호씨라고 한것은 칭호를 성씨로 혼동하여 그렇게 서술한 것 같기도 합니다. 상고시대의 일로, 좀 복잡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래서 五帝의 姓을 밝혀주는 자료를 근거로 五帝의 姓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오래된 태고시대의 인물들이라 여러가지 설이 많아 후세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혼란한 측면도 있으니까 이런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유교 경전에서 태호나 복희씨의 형상을 신화적.동물적 혼합형태로 서술한 내용을 필자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인더스문명에서 계승된 인도에서 뱀이나 소를 숭배하는 현상이 지금도 있음. 문명교류기에 중국에 영향을 주어 俗書들 및 이에 영향받은 그림에서 인간과 동물의 혼합형태인 신화적.전설적 형태로 묘사되고 있는것 같음. 동물의 모습을 혼합하여 신적으로 여기는 특성은, 인도 서북일대를 석권한[* 출처: 인도사(2005.2.25, 미래엔). ...알렉산더가 기원전 327년에 인도의 서북부로 진격하였다. 그의 침공 루트는 카불을 넘어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는 북부 인도를 횡단하여 서북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정복군과 교류하던 인도가 알렉산더 정복군에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렉산더 정복군이 인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가능성이 존재함. 또는 중국의 태고적 믿음이 인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음. 나일문명지역의 스핑크스도 인간과 동물의 혼합체인 점도 주의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5. 오제와 삼황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

五帝나 三皇에 대한 설은 한국의 여러 백과사전이나 학술서적들도 아직, 통일된 의견을 보이지 않고 있어 제 각각 다양한 상황인데, 이는 현대 중국도 큰 차이가 없는것 같음. 그러나 유교종주국이자 발생지인 중국이 모든 내용들을 가장 잘 알것임. 필자의 견해로는 백과사전이나 중국.한국의 俗書보다 禮記 月令에서 五帝를 발견하는게 가장 正道라 판단함. 다음부터는 백과사전이나 俗書도 혼합하여 五帝의 姓을 밝혀보겠음.

 

1). 태호. 그 성씨는 風씨라고 함. 태호씨는 복희씨로도 인식되고 있음.

. 복희씨(伏戱)

출생-사망: 미상-미상伏戱

복희(宓羲) 또는 포희(包牺), 포희(庖犧), 복희(伏戱), 여희(慮犧), 희황(犧皇), 황희(皇犧)라고도 쓴다. 중국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사람. 수인(燧人氏)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성은 풍(風)씨다. 일설에는 태호(太昊)라고도 한다. 도상(圖像)으로는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 형상을 가지고 있다. 처음 팔괘(八卦)를 그리고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며, 그물 엮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어업과 수렵, 목축에 종사하도록 했다. 신화(神話) 속에서 인류의 시조로, 여왜씨(女蝸氏)가 누이인데, 혼인하여 결혼 제도를 만들었다. 도교에서는 동방의 천제(天帝)라 일컫는다. 글자를 만들었다고 믿어졌다.

.출처: 복희씨 [伏羲氏]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2). 염제. 그 성씨는 姜씨라고 함. 

중국 태고의 전설적인 제왕. 원래 남방에 위치해서 여름을 지배하는 관념적인 신격이었다고 생각된다.

오행사상에서 <화(火)>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점에서 삼황(三皇)의 일인인 신농(神農)과 결부되어서 염제 신농씨라고 불리며, 복희(伏羲)와 황제(黃帝)사이에 들어가는 제왕으로서 역사화되었다. 성은 강(姜). 어머니의 여등(女登)은 신룡(神龍)에 감화받아서 그를 낳고, 인신으로서 소의 머리를 하였다고 한다. 성덕이 있어서 제위에 오르자 진(陳)으로 수도를 정하고, 농기구를 발명해서 곡물을 심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시장 제도를 창시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 노력했다. 또한 초목을 뒤져서 약초를 찾고, 『신농본초경』 4권을 저술했다고 한다.

.출처:염제[炎帝]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3). 황제.  그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수(姬水)에 살아 희(姬)라 함. 

 

황제[黃帝]

 

출생 - 사망미상 ~ 미상

신화에 나오는 제왕.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수(姬水)에 살아 희(姬)라 했으며, 헌원의 언덕에서 살아 헌원씨(軒轅氏)라고도 한다. 또 유웅(有熊)에 국도를 정한 까닭에 유웅씨(有熊氏)로도 일컬어진다.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염제(炎帝) 때 제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병사들에게 무기 사용법을 가르쳐 판천(阪泉)들에서 함귀(咸歸)를 물리쳐 해결했고, 배와 수레를 고안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 당시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치우(蚩尤)를 쳐서 평정하자, 제후들이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神農氏) 뒤를 잇게 되었다. 토덕(土德)의 서기(瑞氣)가 있다고 해서 황제로 일컬어진다. 세상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배와 수레를 만들며, 양잠과 직면(織綿)을 가르쳤고, 간지법(干支法)과 역산(曆算), 문자를 발명하고, 음률을 제정하며, 의약품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중국 각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받들리고 있다.

.출처:황제[黃帝]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4). 소호. 그 성(姓)은 이(已)며 호는 金天氏라 함.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 의하면 그렇게 표현됨. 

  

a). 소호 금천씨에 대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설명. 

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

 

소호 금천씨는 상고시대 제왕으로 이름은 현효(玄囂), 혹은 설(挈)이라고 하며, 황제(黃帝)의 맏아들이다.

.출처:소호 금천씨[少昊 金天氏]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5). 전욱. 그 성(姓)은 희(姬)며 호는 고양씨(高陽氏)라 함.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 의하면 그렇게 설명됨. 

 

 

. 전욱[顓頊]

  

출생 - 사망미상 ~ 미상

전설에 나오는 중국의 다섯 성군인 오제(五帝) 가운데 한 사람. 황제(黃帝)의 손자고, 창의(昌意)의 아들이며, 우왕(禹王)의 할아버지라고도 하는데, 천하를 잘 다스려 명군(明君)으로 이름이 높다. 10살 때 소호(少昊)를 보좌했고, 20살 때 제위에 올라 고양씨(高陽氏)로 불렸다. 제구(帝丘)에 살았다. 소호 때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혀 민간의 신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그가 제위를 이어 중(重)을 남정(南正)에 임명해 하늘을 맡아 신을 속하게 하고, 여(黎)에게 화정(火正)을 맡겨 땅을 다스려 백성들이 속하게 해 신과 사람이 서로 침해하지 못하게 하니, 이를 ‘절지천통(絶地天通)’이라고 불렀다. 또 별이나 별자리의 위치 모두 북유(北維)에 있게 했는데, 그가 세운 것이다. 78년 동안 재위했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의 「천문훈(天文訓)」에 보면 그가 공공(共工)이라는 자와 제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공공의 힘이 넘쳐 불주산(不周山)에 서 있던 천주(天柱)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은 북서로 기울고 일월성신은 북서를 향해 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秦)나라나 초(楚)나라에서 자신들의 원조(遠祖)로 섬기고 있다고 했다.


.출처:전욱[顓頊]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 상기 자료는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차원에서 이용하였습니다. 유교국가에서 벗어난 후발 국지적인 신도국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서, 역사적인 기자조선(기자조선시대를 혹자들은 先史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正史의 시대인 위만조선시대 왕인 위만이 기준왕을 멸망시킨 복합적 특성), 위만조선, 한사군(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인 원시적권원의 시대로 봄. 부족.국가간에 행해진 약육강식 논리에 의한 원시적 권원은 만국공법이 국제법으로 등장하게 된 근대까지 타당한 인류문화의 일반적 특징중 하나라 할 수 있음.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통일국가인 고려.조선이전 언제 확실하게 정립되었는지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기자나 주몽.온조.혁거세 등 씨족신이나 부족신을 중심으로 한 씨족.부족개념 국가는 역사적으로 오래전에 형성되었던 것 같음.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 시조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로, 아버지 주몽을 섬기는 동명왕묘를 설치해서, 국가제사의 조상신제사에서 백제의 조상신 제사는 고구려와 비슷하겠다고 필자는 판단함), 삼한, 부여, 삼국시대, 고려, 조선(대한제국), 현재까지 수천년간 한국인의 몸속에 일상적으로 체화되어 있는 유교전통이 상당부분 왜곡되어 왔기에, 수천년 전통문화인 유교의 전통문화 창달을 위하여 교육.연구.보도자료로 자료를 인용합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바랍니다. 

 

* 첨언: 그런데 굳이 민족적 동질성을 부여하자면, 황하문명 중국에서 영향받아 漢字를 바탕으로 한 姓氏를 사용하면서 그 후손들이 사용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한자 성씨의 사용후부터 韓國민족의 동질성이 확보될 수 있겠다고 필자는 생각해 봅니다. 先史시대 인물로도 평가되는 기준왕의 후손들이 사용한 徐씨를 사용한 이천서씨나, 韓씨, 그리고 姓氏를 사용하게 된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성씨인 高씨, 온조의 후손들이 사용한 왕성인 夫餘씨,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왕의 후손인 朴씨나 昔씨, 金씨등의 한문성씨 사용후부터 본격적인 민족동질성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백제의 부여씨를 예로 들면, 정사인 삼국사기로 접근해야 하며, 야사인 삼국유사로 삼국사기의 당초 서술에 변형을 가하면 않될것입니다. 백제에서 초기에 특정 성씨를 쓰지 않다가, 부여씨란 성씨를 사후 추증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교 경전 예기에서는 제천의식, 산천제사, 조상제사의 신분별 구분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정설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앞의 제천의식처럼 황하문명에서 탄생한 유교 경전 예기의 제천의식으로 판단할 때, 삼한의 기풍제나 상달제도 황하문명 유교에서 전파된 제천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하문명이나 유교, 경전, 한자등에 근거하여, 옳은 역사로 이어지는 正史적 개념으로는 그렇게 파악해야 맞고, 사후시대에 최근 개념으로 한국에서 전설로 만들어진 인물을 염두에 두고 제천의식을 했다고 새롭게 해석하기는 아주 힘듭니다.      

 

그리고 더 알아보면 백제의 교천, 신라의 일월신(日月神) 숭배, 고려의 제천의식, 조선초까지의 제천의식(이후 제후의 예를 따라 제천의식을 중단시켰다가 고종때 부활)이 있었습니다. 


조상제사로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무덤인 고인돌에서 비롯하여 여러가지 석관묘.목관묘.왕릉등이 있고, 주요인물이 아니면 많은 묘는 그대로 방치하거나 소멸시켜왔을 것입니다. 묘지가 부족해진 현대에는 묘가 없이 집안에 사당을 짓거나, 위패를 모시고(또는 영정을 걸어놓고) 신분별로 조상제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창조주에 대항해 일어나서 창조주를 부처 밑에서 가르치며 부처가 창조주보다 높은 후발신앙으로 그런쪽에 치중하는 종교입니다. 유교처럼 다신교 신앙에 의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늘天(太極과 연계된), 산천의 신, 조상신의 조상제사, 先聖을 모시는 종교가 아님도 참작해야 할것입니다. 원래는 공자님 이전의 성인 임금이 先聖이라 할 수 있는데, 주대(周代)에는 순()·우()·탕()·문왕()을 선성으로 모시는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석전(釋奠)편은 서술하고 있습니다(그러면 그 당시 요임금은 聖天子의 반열일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위.수.당을 거치며 先師의 위치에 계시던 공자님을 유일한 선성으로 대체해서 모셔왔다고 합니다.주공도 공자님 이전의 선성이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고전 용어사전(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의 先聖은 옛 聖人, 周나라 文王의 아들인 周公, 당나라 태종 이후의 孔子가 선성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 막부에서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킨후로, 일본 불교쪽에서 조상제사를 절에서 지내는 풍속이 생겨 한국에 잘못 퍼진것 같은데, 한국은 절에서 조상제사 지내면 않되고 문중이나 가정의 사당에서 위패나 영정을 걸어놓고, 또는 벽에다 영정등을 걸어놓고, 또는 묘나 근.현대의 납골당등에서 조상제사를 지내는게 적절합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사례, 또는 근.현대 일본에서는 화장이나 납골당이 종교적 차원이 아닌, 인구폭발에 따른 묘지부족으로 인한 불가피한 대처방법이라고 인식되는 시대가 된것 같으며, 한국의 현대도 종교적 측면이 아닌, 묘지부족의 차원으로 인식하는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시골이 아닌 대도시는 더더욱 현대적 추세를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교전통도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이전에는 매장이었지만,현대처럼 묘지가 절대 부족한 시대에서는 고대문명중 인더스문명이나 중세 유럽에서 화장도 병행된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화장이 꼭 불교적인건 아니고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던 인도지역에서 지배층의 대규모 묘지가 유교나 피라미드처럼 없던 사례를 참작하면 좋겠습니다. 역사적이고 중요한 묘는 보존해야 하겠지만, 현대에 대다수 국민들이 도시지역에서 묘지가 부족한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유교도 매장전통이 오래되었지만,유교  경전 예기 왕제에서 신분별로 차등을 두는것은 무덤(墓)이 아닌, 사당(廟)임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예기(禮記)』 왕제(王制)를 요약하면 “天子七廟, 諸侯五廟, 大夫三廟, 士一廟, 庶人祭於寢” 인데, 여기서의 묘는 무덤이 아닌 사당(廟)임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화장에 대해 두산백과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있던 장법이며, 일반적으로 서유럽의 켈트족은 토장()을 하고, 튜튼사람은 화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BC 1000년경에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도 토장과 화장이 병행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그리스도교의 유체 정화와 부활의 사상에 따라 화장 풍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교회 묘지의 수용 증대와 묘지의 거주지역 접근 등이 동기가 되어 19세기 말경부터 화장하는 예가 생기기 시작하여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화장이 증가하고 있다.

 

.출처:화장[火葬] (두산백과)

 

유교나 기독교, 이슬람의 경우, 화장보다는 매장문화 전통이 강한데, 선산이나 시골에서 매장(埋葬)을 선택할 수 있지만, 도시지역에서 묘지의 절대부족은 전 세계적 추세이니만큼 유교는 유림지도자.마을어른.문중과 가족의 상의하에, 납골당을 선택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종교적 대응방법 마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유럽의 경우 공원묘지나 납골당등이 대도시에서 제도화 된 경우가 많고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납골당이 현재의 대처방법 중 하나 같습니다.        

 

한편, 입춘행사는 불교등 다른 외래종교나 후발 국지적 종교단체에서 차용하여도 황하문명에서 탄생된 유교를 중심으로 살아온 한국인의 유교적 종교행태임은 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