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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 성균관대와 御 서강대의 Royal대 중심. 그리고 완만하게 육사출신 중용. 고등학교는...

beercola 2014. 12. 5. 17:07

宮 성균관대와 御 서강대의 Royal대 중심. 그리고 완만하게 육사출신 중용. 고등학교는...

 

중.고등학교 부분은 향교와 서원의 역사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에는 향교.서원이 정규 고등학교등으로 유지되지 않고 제사만 하는 점을 반영하여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중.고교는 학교보다 유교전통 門閥 부분을 중요시하여 대한제국(조선)시대에 과거 합격자가 많았던 전주이씨, 파평 윤씨, 안동 권씨등의 명문 문벌을 그대로 계승하여 해당 종친회에서 중요시하고 내세우는 인물들을 중용하고, 舊 황실 및 주요 門中, 향교.서원등 유림지도자가 추천하는 사람도 주요 인재가 될 것입니다. 한편 이와 달리,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의 국제법 질서가 형성되었기 때문, 삼한시대부터 기자조선의 후손으로 이천서씨등의 선발 성씨를 형성해 온 이천서씨등 서씨의 수천년 역사도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이 되어 조선시대.현대까지 꾸준하게 중요한 門閥로 유지되고 있는 평산신씨나 남양홍씨등의 門閥도 마찬가지로, 유교의 門閥과 조상제사를 지탱하는 중요 주춧돌 세력입니다.    


 

1.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독의 호언인지, 악담인지 몰라도 대중언론 분야에서는 그의 말대로 식민사관을 유지한 일본 강점기 잔재들이 대부분 그대로 온존해왔고, 노예교육의 연장이 이루어진 측면도 아주 강합니다.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중심 기사나 보도, 그리고 서울대 부속 중.고등학교의 기사를 보면 쉽게 판단이 갈 것입니다. 서울 사대부고나 부중 중심으로 계획하다가 결국 중간에 약간 변형시킨 것 같음. 서울대 중심 사대부중(서울 사대부고, 부중)으로 하려다, 나중에는 서울대 중심으로 다시 서울대에 많이 입학하는 경기고(경기 중.고, 한국계 학교로 시작하였지만 일본 강점기 일본인 교장들이 재임하기도 함),서울고(서울 중.고),경복 고(경복 중.고) 등 일본 강점기의 공립학교에 바탕을 둔 학교들 중심으로 입시계와 대중언론의 물줄기를 바꾼 것으로 판단됩니다. 법인격체의 학교야 자격을 줄 수 없지만, 개인의 인격은 존중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중언론에서 중요시하던 일본 강점기 잔재학교들을 완만하게 정리하고, 대학은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가 됨. 일본 강점기 잔재와 마찰을 빚던 중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로 정착시킴)을 중심으로, 중.고교 그 자체보다는 門閥이 좋거나 독립투사의 자제들 중심으로  인물을 발탁해서 중용해가야 할것입니다(중.고교는 평준화로 큰 마찰은 없어진 상태임).  


2. 교육분야의 피해가 대중언론 및 입시지, 학원, 일부 학교의 교육에서 아주 심각하게 대한제국(조선, 일본 강점기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의 전통적 교육주권과 위상.역사를 훼손해 왔습니다. 중.고등학교 부분은 향교와 서원의 역사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에는 향교.서원이 정규 고등학교등으로 유지되지 않고 제사만 하는 점도 반영하여야 하겠습니다.

 

 

 

점수나 아베노부유키의 노예적 삶(또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운운 이후의 이상한 전기.후기 구분말고, 향교.서원등의 고등중학교 정도의 교육역사를 역사적 사실로 하면서, 구한말부터 이어지던 한국계 학교들의 역사성을 약간 반영해야 하겠습니다.   

@ 해방후 미군정 당시 경성제대를 국립 서울대로 설립하려는 계획에, 시기상조 측면으로 반대하고 노예교육의 연장을 두려워하여 반대하였다고 할 수 있는 학교들 명단. 해방당시 국대안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는 다른 시각도 있지만 이 측면도 같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朝工 야간부, 漢城中學, 東明高女, 大東상업, 東星中學, 배재중학, 경기공업, 경복중학, 휘문중학, 京東중학, 中東중학.


* 필자 주 1). 위에서 현재도 이어지는 학교들은 휘문중학(휘문 중.고교, 고종이 허가한 측면에서는 좋은 자격을 가짐), 배재중학(배재 중.고교, 이승만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 東星中學(동성 중.고교, 김수환 추기경이 공부하던 가톨릭 학교임), 京東중학(경동 중.고교), 中東중학(중동 중 고교,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여기서 공부했었다 함).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차적으로 확인 대조해 가면서 朝工 야간부, 漢城中學, 東明高女, 大東상업, 경기공업등도 국대안 반대운동에 참여한 민족의식부분은 재조명 해야 할것임. 


* 필자 주 2). 경복중학(경복 중.고교)이나, 지명도가 약하던 경동중학은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공립학교입니다. 그런데 국대안 반대운동에 동참한 걸 보면,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공립학교들 중에서도 그 노예교육이 특히 심했다고 느꼈던 학교들 같습니다.  

서울지역에서는 평준화 정책에 의해 평준화 이전 졸업생들은 중요 분야에 진출한 분들이 많지만, 그 이후 대학입시나 고교 입시로 한국 학교들에 피해주고 그런건 없는 학교가 되었음.

 

* 필자 주 3). 법인격체의 학교법인으로 보면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관립전문학교에서 해방후 대학이 된 서울 시립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등)과 일본 불교학교 후신 동국대 및 여러 중.고등학교의 학교주권이나 학벌은 한국 영토에 성립되지 않는건 맞습니다. 그래도 개인차원의 인격체로 보면 학교와 관계없이, 본인 개개인이 가진 능력에 따라 미군정처럼 개인적으로 능력을 존중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중.고등 학교는 평준화 정책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으니까,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등의 원칙은 유지하되, 관망해도 무방한 중.고교 분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서울 시립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및 동국대등의 대학은, 적산재산 개념처첨 교육기능을 철폐하고 국가 소유의 연구시설이나 국가재산으로 귀속해야 타당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그렇게 해야 함.     


* 필자 주 4). 또 하나 큰 문제는 해방후 미군정 당시 경성제대 잔재를 국립 서울대로 강행 설립해, 대중언론 및 입시계, 재수 학원, 일부 학교등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보성전문 인수하여 해방 후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변경. 그러나 보성고.중앙고는 한국인의 학교였고 대학도 되지 않았으며 입시등으로 한국 학교에 큰 위해를 주던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보성전문에서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변경시킨 고려대와는 다르게 구분해야 맞습니다) 카르텔을 형성해 온 문제점을 정리해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 필자 주 5). 지금은 작고하여 생존하지 않지만, 대학출신 중에는 해방후 일본 유학생.중국 유학생.미국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일본 유학 해외파들은 법인격체 측면의 학교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의 힘이 닿지 않고, 법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사유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성균관이 왜곡.폐지된 후, 해방후에 이 일본 유학파 대학출신과 경성제대 출신들이 대통령(이 승만), 부통령(이 시영), 총리(이 범석)등의 독립투사와 달리, 주요 국가보직.일반 단체에 중용되어온 측면도 있습니다. 일본 유학파 중에는 유독 와세다 大 출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야간부를 두어 한국인들을 많이 받아주어 그렇다고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이 와세다 대 출신들이 해방 한국에서 문학.역사.법학등으로 일정 역할을 한 분도 많았습니다. 이 와세다대 출신들이 많아서 해방후 성균관대에 조선시대와 달리 처음에 야간부도 같이 만들었고, 십 몇년간 모집하지 않다가,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습니다.그러다가 2,001년에 야간부를 폐지하였다고 합니다[한겨레 신문에 투고한 김길태(성균관대 야간강좌 총학생회장)씨의 글에서 발췌한바에 따르면 학사구조 조정안을 통해 2001년 폐지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전통이 아니고, 지금은 되돌릴 수 없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다고 필자는 판단합니다.   

 



한편 윤보선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영국 유학파입니다. 독립투사 자격을 가졌다고 정부에서 사후에 훈장을 수여한적이 없어 독립운동가로 확인하기 아주 어려운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한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적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후에 임시정부 요인들인 김구선생(임시정부 주석), 김창숙 선생(해방후 성균관장, 성균관대 학장), 이범석 총리등을 존경하여 집권당시 훈장을 추서한 건 잘한 일입니다. 필자가 육사를 완만하게 중용하려는 이유는 해방 후 미군정당시, 단기 군사학교인 조선 경비 사관학교에서 출발하여,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뒤의 카르텔에 별로 동조할 일이 없고, 박정희 대통령 때 구 황실 인사인 영친왕등을 환국시켰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설립에 보호막을 형성했고, 훈장이 없던 독립운동가들에 적절한 훈장을 사후 추서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김종필 총리도 해방후에 그런 시대상을 겪었고, 나중에 집권한 4년제 육사 출신 대통령들도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집필작업을 일부러 방해하거나 그런적이 없어서 정치적인 비판과 달리 그 부분은 존중하였습니다. 또한 과거를 현대에 대입하면 무반의 배출처 육사. 그러나 현재에 진행중인 정치적인 비판과 법률적 조치는 존중하여야 합니다. 특히 5.18에 대한 件은 법률적 조치라 아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재판을 거쳐서 시행된 법적 조치에 대해서는 필자도 지극히 존중하고 있고, 누구든지 그 조치를 따라야 합니다. 국제적인 관심사라, 법적 조치를 존중하는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만일 법적 자료가 충분하다면 다시 항소를 거쳐서 5.18관련 그 당시 정부가 억울한점을 법적으로 해결할 기회는 있어야겠지요. 문제는 복잡하니까, 육사출신의 경우에는, 아주 완만하게 개인적으로 필요하면 점차 중용해 나가겠습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발간과 관련하여, 서울대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그 이전에 발간된 서적에 대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할 시기는 놓쳤던 것 같습니다. 수천명의 집필자.편집자가 참여하여 박정희 대통령 이후 노태우 대통령 때 완성단계로 접어들어 주로 발간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이 때, 육사 출신 아닌 서울대 출신이 대통령 이었다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발간에 방해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 추가 발간을 방해하지 않은점은 개인적으로 고려해 둘 사항입니다(거의 다 발간하고 나머지 발간 방해해도 별 소득도 없었겠지요). 김영삼 대통령 때 장을병 성대 총장이 찾아가서 성대 국립대 환원을 요구했으나 이건 거절되었다고 성대인들에게서 전해들었습니다. 대신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여하튼 김영삼 대통령이 마지막 발간을 방해하지 않은점은 그 부분 약간 고려해 둘 사항입니다. 민주화등의 측면에서(개인적으로만)...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명박 대통령.박근혜 대통령등도, 인간인 이상 각기 장점과 단점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