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등 임시정부 對日 선전포고 행사참여. 아무리봐도 한국은 2차대전 勝戰國 자격을 국제법상 인정받으려 노력해야 할 나라.
* 제목: 국가보훈처 등 임시정부 對日 선전포고 행사참여. 아무리봐도 한국은 2차대전 勝戰國 자격을 국제법상 인정받으려 노력해야 할 나라.
@ 정책 브리핑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72주년 기념식
http://www.korea.kr/policy/pressReleaseView.do?newsId=155935227
@ 국방일보
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오늘 72주년 기념식
-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서
@ 뉴스 1
한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72주년 기념식
http://news1.kr/articles/1442175
@ 필자의 의견.
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87년부터 한국 헌법에 그 정통성이 나옵니다. 1941년의 對日.對獨 선전포고 이후, 카이로선언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나라들은 프랑스, 소련, 폴란드 정부였고, 이와 별도로 중국 장개석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정부로 예우해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카이로선언 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 및 UN에서 중국 대표가 된 중국기준으로 볼때 한국은 이들 나라의 도움을 얻어 2차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주장해도 될 나라같습니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 및 연합국으로 공식 거명되는 관련 국가들과의 합의를 거치는 과정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한국 정부가 앞으로 해야 할일이 한국을 연합국.승전국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確定된 학설이 아니라고 포기할 성격이 절대 아닙니다).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교수의 국제법논문으로 볼때는, 국제관습법상 그 당시부터 을사조약이 무효였고 이 국제법 의견은 결국 UN국제법 위원회의 법리적 의견으로 채택되었습니다(고종의 노력으로 볼때는 국내법상 을사조약이 당연무효). 이러한 과정을 보면 1941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對日 선전포고를 한것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유지되는 개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對日 선전포고를 한것에 해당됩니다(국제법 논리로 보면 그러함).
2. 성균관대(성균관은 泮宮.學宮, 성균관대는 泮宮.學宮의 宮대학)는 을사조약 무효이론으로 보면,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인 성균관에서 이어진 600년 전통의 한국을 대표하는 最古(最高) 대학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헌법에 정통성이 추가로 보장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로 보면 임시정부 요인인 이승만 전 대통령, 김구 주석 및 김창숙 선생이 해방후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 설립결의에 참여한 사실이 있습니다(기존 성균관에 大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로 명칭을 정하고, 미군정당시 1946년에 인가받음).
* 필자 주 1).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보장된 시기는 1987년.
...
〈제9차 개정〉 1987년 6 ·29선언에 의해 여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 ·야 합의에 의하여 국회에서 의결된 헌법개정안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고, 29일에 공포되어 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대통령직선제, 의회의 복권 등을 통하여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가 민주화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제6공화국 헌법의 제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현행 헌법은 ① 전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 ·19민주이념의 계승 및 조국의 민주개혁의 사명을 명시하고...
.출처:대한민국헌법의 개정(두산백과)
* 필자 주 2). 1945년 11월 30일부터 전국 유림 1천명이 모여 성균관대학의 설립(일본이 왜곡시키고 폐지시켜서 복구과정 거친것임)을 결의한 사실. 임시정부 전 대통령인 이승만박사와, 그 당시 임시정부 현직 주석 김구선생을 고문으로모시고, 경학원(성균관에 부설되었던 교육기구)에서 교수정도 자격으로 강의하시던 김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균관대 설립을 결의하였습니다.
* 필자 주 2-a) 임시정부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된 후 대통령직을 수행한 이승만 선생.
...1919년 9월 6일 상해의 임시정부(약칭 임정) 의정원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그는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출처: 이승만[李承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2-b). 다음은 그 당시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서기로 환산하면 1945년 12월 10일).
성균관대학 설립을 결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전국의 유림들이 일치 단결하야 지난 11월 30일부터 6일간 시내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엿다. 남북 조선의 유림 천여명이 모인가운데, 임시의장 김성규씨 사회로 성대히 사회가 진행되었는데, 한국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향상과 성균관대학의 설치, 재단 완성등의 중요 안건을 결의하엿다. 당일 피선된 역원은 다음과 같다.
* 고문: 이승만,김구 * 위원장: 김창숙
* 필자 주 2-c). 다음은 매일신문 기사입니다. 2013,11,30 서 영관 객원기자의 기사에서 발췌.
.........
심산의 제안에 따라 1945년 11월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 유림대회가 열렸다. 유림 1천여 명이 모였다. 대회에서는 민족 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교 설립, 이를 위한 재단의 완성 등이 결의됐다. 단체 이름은 유도회 총본부로 정했다. 심산은 위원장을 맡았고 김구 이승만은 고문으로 위촉됐다....
3. 성균관에 부설된 경학원에서 강의를 하던 유림의 태두 김창숙(經學院 강의를 한것은 士林의 학문경지가 높아 일종의 교수 자격으로 강의한것. 조선은 官學派와 士林이 공존하던 나라). 박은식, 곽종석, 김창숙 선생의 경학원 강의 사실은 아래 박은식 선생 설명에서 나옴. 해방이후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 초대 학장을 맡고 그런것은 이 분이 임시정부 독립투사라, 그 당시 친일부왜배를 배척하려던 임시정부 요인들 및 한국인들의 국내 시중민심이 반영된 것 같음. 경학원.명륜전문학교에서 관직을 차지한 친일부왜배를 배척하려는 시류와 합치하여 士林출신 유림의 태두인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을 초대 학장으로 추대한것 같음.
* 필자 주 3). 박은식. 유림의 태두 곽종석(郭種錫)ㆍ김창숙(金昌淑) 등과 같이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던 박은식.
* 필자 주 3-a). 박은식[朴殷植]
출생-사망(1859~1925)
호는 백암(白厳). 대표저작으로「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손꼽을 수 있는 민족사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지낸 독립운동가.1900년에는 민족교육을 위하여 교육계에도 투신하여 유림의 태두 곽종석(郭種錫)ㆍ김창숙(金昌淑) 등과 같이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 국민교육 담당자를 집중 육성한다. 그가 이같이 교육에 뜻을 둔 것은 관직을 탐내지 않고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애국정신 때문이었다. 1905년에는 “황성신문”이 장시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 배설(裵說)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이 된다
.출처:박은식[朴殷植]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 필자 주 3-b). 김창숙(金昌淑)
출생-사망(1879~1962)
호(號)는 심산(心山). 그는 18세 이후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이종기, 이승희, 장석영 등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라안팎의 어수선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세속학자들이 한갓 성리의 오묘한 뜻만 떠벌릴 뿐 시급한 구국책을 강구하지 않음을 알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족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 그 문제 해결에 솔선 수범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신념은 을사륵약의 체결을 계기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광무황제의 통치권이 현저히 손상되는 망국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때 선생은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조약체결에 적극 동조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 역신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출처:김창숙 [金昌淑]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4. 성균관과 경학원. 박은식.김창숙 선생이 강의한 경학원은 성균관과 연계되던 역사성 있음.
....이에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1887년(고종 24)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지만, 이것이 특수 귀족학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다 종래의 유학교육만을 답습함으로써 당시의 개화풍조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에 갑오경장의 단행으로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의 철폐와 함께 새로운 관리등용법이 마련됨으로써 성균관은 인재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 급 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신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895년에 성균관은 관제가 새로이 마련되어 장(長 : 學部 奏任官이 겸임) 1인, 교수(敎授 : 學部 判·奏任官이 겸임) 2인, 직원(直員 : 判任) 2인이 두어졌고, 경학과(經學科)의 설치로 교육기능이 부활되었다.
이때의 성균관은 종전의 성균관과 달리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학과의 학제도 옛 학제와 달리 3년제 학교로서 학급이 편성되고 학년이 전·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학과목도 많이 달라져서 유학 등의 전통적 학과목 외에 본국역사(本國歷史)가 필수과목으로, 만국역사(萬國歷史)·본국지지(本國地誌)·만국지지(萬國地誌)·산술이 선택과목으로 설치되었는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선택과목도 모두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개정되어 장이 칙임관(勅任官)으로, 교수가 3인으로 늘어나면서 판임관(判任官)으로 바뀌고, 박사(博士 : 판임관) 3인이 신설되었다. 박사는 1907년(융희 1)에 사업(司業)으로 개칭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처: 성균관[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미군정당시 성균관대 인가. 1946년 9월. 초대학장 김창숙.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출처: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 한국의 학벌은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의 유일무이한 최고대학 성균관(성균관에 경학원, 경학과 설치과정도 있었음)이 최고(최고)대학임. 일본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치며 교육기구.대중언론.정부.국회.군.경찰,헌병,관변 억압단체.종교기구등에 法人體의 기구나 自然人상태의 실무인력으로 남아있던 일본강점기 잔재들을 적시에 청산하지 않고, 재활용 및 방치하여 둔 관계로, 조선(대한제국)에서 이어진 대한민국의 역사나 전통, 주권, 교육(성균관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계 학교들), 유교등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보이던 혼란기를 겪어왔음. 이에 최근 10년 넘게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로 세계적인 매체인 트위터나 페이스북등에 이 사실을 공표해온 관계로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Imperial대학 학벌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임.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에 어떻게 대처하는것이 승전국과 해방국의 권익을 지키는 방법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
http://blog.daum.net/macmaca/733
2. 中國 지식인의 世界史 不變 발견에 동의하며! World class Universities. http://durl.me/4x8c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