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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마음에 황사손 측에서 국왕.종교수장 자리를 이어가기 바랐는데, 寡人에 대하는 태도가 너무 무례하므로

 

안타까운 마음에 황사손 측에서 국왕.종교수장 자리를 이어가기 바랐는데, 寡人에 대하는 태도가 너무 무례하므로 없던 일로 하겠음. 황사손측과 석전대제 치르는 인구 몇십만 가진 성균관보다 최고 대학 교육기관인 성균관대(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중심으로 한국의 王政을 펼쳐나가겠음. 황사손측과 석전제사기구 성균관은 그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공화국 상태로 이어지기 바라며 비신분제 조직으로 남기바람.    

이 글 지워도 무방함(석전대제 제사기구 성균관 게시판에 쓴 글).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니까 일본강점기에 피해본 것 잊어먹고 왕정복고의 여러방안 외치는 寡人을  말뼉다구(정식 교육기구는 아니며 석전대제 제사기구인 성균관의 게시판 관리자인 명륜골 선비의 글)로 언급하는데 뭘 어떻게 존중해 주겠는가? 황사손측도 기획실장이 당초 민주공화국체제라 국왕이니 종교수장이니 하는걸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반발한것을 그대로 인정하여 민주공화국 상태의 비신분제 제사단체로 보겠음.   

 

* 다음은 과인이 몇십만의 제사인구 가진 석전제사기구 성균관(성균관대와 달리 정식 교육기구는 아님)에 먼저 써 놓은 글이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황사손(이 원) 측에서 국왕칭호를 못받았다고 사양하고 계심. 원하면 언제든지 國王복귀하도록 길을 터 놓겠음.

다만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은 황사손 발견 이전에도 몇 정부를 거치며 사용하던 칭호이므로 그대로 사용할것임.  

황사손 측 기획실장이 어떻게 의견을 내더라도 조선왕조의 적합한 계승자는 아직까지 황사손(이 원)이심. 그리고 환구대제, 종묘대제, 사직대제등을 주관하는 황사손측의 유교 국가제사는 유교의 수천년 전통임. 황사손이 거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종교수장은 황사손이심.

기획실장(이효재) 아닌 황사손(이 원)이 직접 성명서를 내어 거부하면 과인(宮 성균관대 임금, 윤진한)이 국왕의 모든걸 평화적으로 이어받겠음

작 성 자 행소 유생 비밀번호  
내      용

 

행소 유생 황사손님이 직접 공식 발표하는 글이 아니면,누가 어떤 의견을 내도 비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2013-12-11 오전 7:12:49
명륜골선비 귀하가 대관절 무슨 자격으로 이런 글을 자꾸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전이벽해가 됐다해도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뼉다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과인이란 용어를 함부로 쓰시다니 참으로 가관입니다.
國體가 개인이 주고 받는 것입니까?
황당무괴한 글 자제 바랍니다.

- 2013-12-11 오전 11:20:20
행소 유생 헌법 前文에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책에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로 되어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헌법前文 1조가 다가 아닙니다. 국제법은 헌법과 달라 한국이나 일본의 헌법기관이 2차대전 패전사실을 부인하고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UN 국제법 위원회의 의견을 부인해도 국제법은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필자는 국제법적 측면과 헌법전문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조항으로 그렇게 자칭 임금자격을 정신적으로 인정받고 있는것 같습니다. 국제법으로 보면 한국은 왕정 국가가 맞으며 헌법전문도 그러한 문구가 있어서 그런건데 무지한 분들이 이걸몰라 필자가 그렇게 대내외적으로 그렇게 발표했습니다. 과인이라 칭하는것도 맞습니다. - 2013-12-11 오후 11:10:07
행소 유생 글을 지워도 상관 없지만, 일본의 강점기로 빚어진 피해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알리고자 석전대제 제사기관인 성균관 게시판에 글을 올려왔으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 2013-12-11 오후 11:12:33
행소 유생 10년 정도 과인이 쓰는 글을 읽는 수천명의 사람들 중 대통령, 정치인, 성균관대 동문, 외국 국가원수들, 국가 기관, 일반 독자들중 아무도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대놓고 따지는 경우는 귀하가 처음이군요. 과인을 몰라서 그러겠지요. - 2013-12-11 오후 11:21:49
행소 유생 필자는 황하문명.유교.漢나라太學(國子監,京師大學堂,北京大)때문에 미국만큼 중국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전통 유교국인데, 수천년 공동체사회의 韓.中 전통을 지난 몇십년때문에 단절시킬수야 없지요. 그러나 필자(宮 성균관대 임금. 宮 儒 윤진한)와 御서강전하(서강대 기록보존소 서 진교 교수)가 미국 선교사가 구한말에 세운 개신교 고등학교(전주 신흥 고등학교) 출신이기때문에 미국은 앞으로도 여전히 한국의 최고 동맹국이 될것입니다. 공식적인 최고 동맹국은 아니지만 수천년 儒敎와 漢字.중국의 교육제도. 문화등을 共有해와 지난 몇십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수천년 유대관계때문에 中國은 利益社會(Gesellshaft)라기보다 共同社會(Gemeinschaft)성격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입니다(공산주의 국가라는 괴리감도 물론 아직 있습니다).



한국은 (後發 局地的) 신도 국가 일본의 불법강점기때문 모든 주권을 잃었던 나라인데, 이런 주권을 회복하려는 와중에 혼란기가 있었고 교황청,미국,한국정부(김대중.노무현.이명박정부를 거치며 십 몇년을 그렇게 해옴. 박근혜 정부도 최근 이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게 됨)등이 개입하여 자연스럽게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대 체제를 구축해 필자가 宮 성균관대 임금이 되고 서진교 교수가 御 서강대 임금이 되어 Twitter나 Facebook등 SNS를 통하여 세계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御서강 전하때문에 스페인 국왕께서 한국을 형제국으로 느낀다고 발언하신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필리핀 내 가톨릭 예수회 대학 네트워크인 아테네오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한국과 무기거래로 이미 결정된 어떤 건이 있었는데, 중국이 늦게 취소요청을 하였지만 미리 예정된 약속이라 그대로 진행하였다 하니 이 점 참고하시고 한국 사정에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필자에게는 중국이 먼저 다가왔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경우도 많으니까 이 현실도 이해해 주십시오.

- 2013-12-12 오전 1:43:09
행소 유생 일본의 강점기로 빚어진 피해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알리고자 석전대제 제사기관인 성균관 게시판에 글을 올려왔으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국체부분에서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니까 역사와 전통은 필요없고 "궁"이나 "과인", ""황사손님"같은 표현이 눈에 거슬릴수도 있겠지만 을사조약이 무효고, 일본이 항복해서 한국은 대한제국 왕정을 승계한 부분도 같이 병행되는 나라입니다. 이 점 숙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2013-12-12 오전 3:31:52
행소 유생 민주공화국이니까 모든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 하나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고 교육도 되지 않던 황사손을 중히여겨서 사후에 국왕추대등을 언급한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뭐라해도 황사손의 의사표현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왕들이 지내던 국가제사를 이어받아서 한국의 종교수장도 맞습니다. 이런측면을 필자가 존중하였습니다. - 2013-12-12 오전 3:40:31
행소 유생

이글이 지워진다고 해서 다른 언론 매체에 써놓은 동일한 내용들은 그대로 남고, 수천명의 내외국인이 읽게됩니다. 황사손이 과인이 자리를 만들어 준 국왕,종교수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포기하겠다고 어떤 매체에서든지 밝히면 과인이 그 지위를 승계하겟다는 취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 2013-12-12 오전 3:44:23

 

일본강점기때문에 피해를 본 대한제국(조선)의 계승자인 황사손을 아끼는 마음에서 끊어질뻔한 국왕.종교수장 기회를 열어두는 것이니, 조선왕조 황족(왕조)출신이 아니라고 과인에게 함부로 하지말것. 이 글 지워도 상관없으며 명륜골선비가 여러가지 정황을 제시했는데도 과인에게 무례를 범하여 괘씸하였음. 고민을 많이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는데 중요한 분은 황사손(궁 성균관대 임금인 과인과 어서강과 같은 지위)이며, 그 분의 의사표현이 나오면 사후 대책을 세우겠음. 앞으로 이 게시판에 글은 더 이상 쓰지 않겠으며, 과인과 어서강 주변의 통치조직이 자리를 잡는데 더 주안점을 둘것임. 이 글 지우거나 한번 더 무례하게 굴면 황사손과 석전대제 인구 몇십만의 성균관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공화국 상태의 비신분제 조직으로 간주하겠음

 

 

@

* 제목: 차후 한국의 왕은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만 그 칭호를 사용하도록 함. 현재 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 서강대 임금뒤에는 성대출신 宮감찰 副院君 2명, 서강대출신 御감찰 副院君 2명이 국제법.관습법.교육.종교.정신적으로 국가 중대사에 관여하고 있음. 宮은 御며 御는 宮임.

 

국가 해당조직은 앞으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대한 예우에 개입하지 말고 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 서강대 임금의 정신적 통치체제 정착에만 힘써주기 바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王 칭호 사용을 거부하고 황사손으로만 그 칭호를 사용하겠다고 하니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입장을 존중하여 그리하도록 하겠음.

 

@ 다음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의 입장. 황사손칭호만 쓸것이며 왕이나 국왕칭호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거부하겠다는 형식임.

 

일전에도 정중히 부탁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게시물에 황사손(이원)의 함자를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향후에는 그 어떤 행소유생님의 글에도 황사손(이원) 이라는 함자를 언급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는 황사손님을 지근에서 뫼시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 기획실장 이효재입니다. 황사손님께서는 고종황제의 증손자로서, 고종황제-->순종황제-->의민황태자(李垠)-->구 황세손(李玖)-->원 황사손(李源)으로 황통이 이어졌습니다. 황사손(이원)님은 대한황실의 황통을 계승하신 분으로, 지금은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이사장과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를 역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황사손(이원)님은 이 외에 그 어떤 직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황사손님께서는 지난날의 선제(先帝)들의 일들로 인하여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노심초사 국민들앞에 진심어린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이해해 주시고 함부로 황사손님의 함자를 여기저기 인터넷에 게재하여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에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문제점]
1. 최근에 황사손(이원)을 발견하였다---->황사손님은 고대유물도 아니고 무슨 물건도 아닙니다.
2. 무슨 서강대 임금이니, 성균관대 임금이니 운운하면서 황사손(이원)을 임금 운운하며 모셨다는 것은 그대들의 황강무계한 주장일 뿐, 본 대한황실과는 전혀 의논된바도 없는 허구입니다.
3. 황사손(이원)을 무슨 국왕이니, 유교 종교의 수장이니 운운함도 당치도 않은 주장입니다. 엄연히 유교의 수장은 성균관 관장이므로 이 또한 대한황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바입니다.

끝으로 이런 황당한 글들이 계속하여 유포되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매우 송구합니다.  

 

@ 이에 대한 필자(궁 성균관대 임금) 의  답변.

 

허허! 이거 참. 알겠습니다. 그러면 민주공화국 상태에서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사자측이 싫다는데 제가 뭘 어찌 하겠습니까? 國際法과 慣習法상 國王으로 대우해서 편하게 살려고 그랬더니 돌발사태가 생기는군요. 알겠습니다.  체면때문에 한 번 권해 보았는데 두 번이나 완강히 거절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사기능은 존중해주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일도 차후의 수천년 향배를 결정할수도 있는법입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입장은 그렇게 알겠고 앞으로 왕이나 임금 칭호사용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획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측 입장은 몇 정부를 거치며 宮 성균관대 임금=御 서강대 임금으로 국내외에 인식되어 이제 바꿀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참고로 알려드리면 현재의 성균관은 조선(대한제국)시대 최고대학인 성균관에서 교육과 문묘제사(석전)를 같이 거행하다가 일본강점기에 성균관의 최고대학기능이 마비되어 제사기능만 남겨놓아서, 해방이후에도 합쳐지지못하고 분리된 상태에서 과거의 문묘제사(석전)를 치르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初獻官이  국왕이었고 성균관의 책임자는 대사성이었습니다(현재의 대학 총장급). 해방후의 문묘제사(釋奠) 초헌관은 문교부장관등이 맡아왔습니다. 성균관장은 설날.단오.추석.대보름등 유교 전통 名節이나 門中別 조상제사, 환구대제.사직대제.종묘대제와 관계없이 문묘제사(釋奠)만 책임지는 성격을 현재는 가지고 있으며 유교의 종교수장 전통은 없었습니다.   

우리측은 대통령령에 의해 발표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와, 한국학 중앙 연구원 및 주요 백과사전, 성균관대 학술적 입장, 국사 성균관, 세계사 한나라 태학, 볼로냐대.파리대학등의 학설로 대학만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 Report 제목: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본 블로그에 대한 사이버테러는 국제법과 국내법에 저촉될 수 있음. 이 블로그는 UN적국 일본(패전국, 전쟁범죄국가)에 대한 규제조항을 어기려는 현상개변 저지, 한국내 일본 잔재 청산을 위한 블로그임. 이전 야후 코리아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 중 필요한 부분은 다시 手作業으로 본 블로그에 옮겨 적을 계획입니다. 아주 힘들고 벅찬 작업이 될것입니다. 인용자료는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Report자료로 사용하오니 이 점 충분한 양해 바랍니다. UN적국 일본 강점기의 죄상규명과, 한국인의 주권회복용으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I. 序論.  

기본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일본과 친일파등에 적대적 일 수 밖에 없는 독립투사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 측면도 있으므로, UN적국 일본(패전국, 전범국)과 한국내 일본강점기 학교 및 여러 잔재들은 사회운동이나 국회차원의 결의, 정부조치등 어떤 형태로든 올바르게 제재.청산해 주는게 제대로 된 자세임.  

일본강점기때 강제로 설립된 대학교의 대표 경성제대 후신이며, 해방후 미군정서 패전처리용으로 재편된 Monkey서울대.  

1945,11.30 임시정부 요인들과 남북 유림들의 결의로 성균관대를 설립(조선시대에 설립된 국사영역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 후신으로 600년 전통의 한국 최고대학 학벌. 그 이전의 유교 최고대학으로는 王朝가 각각 다른 고구려 태학, 백제의 오경박사,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이 있었음. 불법적인 강제 한일병합이후 야만족 일본의 강점기에 교육기능이 폐지되어, 1945년 11월 재건형식 설립결의)키로 결의한것을 보았으면 경성제대나 일본 강점기학교들을 재활용하지말고 폐쇄하여 방치하여두는게 한국인에 대한 사죄인데, 그 당시 문교부장이던 친일파 유억겸(유성준.유만겸.유억겸 3명의 가족이 친일파) 주도로, 일본강점기학교 경성제대등을 다시 규합하여 아웃사이더같은 점령대상 일본잔재 친일파들의 국립대로 만들려고 하니까, 전국적인 국립대 설치안 반대운동(國大案 반대운동, 해방민족 한국인의 대한민국 공식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이고 일본 통치기구는 점령상태기 때문에 시기가 맞지 않는다고 반대함)이 일어난것임.  

경성제대나 일본 국.공립 중고들은 재활용하지말고 방치.폐교조치했어야 민족정기가 제대로 회복되는것은 자명한 일이었음.  

 

일본 강점기학교,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 친일파로 두 번에 걸쳐 거론한 친일파, 일본강점기잔재에 대한 면죄부 부여는 불가하며, UN적국 등록처럼 방어조치를 해놓아야 됨. 한국정부가 없을때 헌법역할을 하던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서 한국을 해방시키기로 하여, 하위법인 미군정령이 준거법으로 작용하던 당시 해방 한국인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인 총독부 인원을 재활용한것은 한국에대한 몰이해나 실수처럼 돌발변수로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보이지 않는 비극이었음. 점령대상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 잔재인 총독부에 남은 친일부왜배들이 하부 실무인력으로 해방한국의 하부토대를 공고하게 구축한것은 지금까지 한국유교와 성균관대, 한국 학교, 한국 전통과 반대작용을 하며 대립되고 있는 양상임. 한국인을 해방민족으로 대우하고, 일본 통치기구들(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강점기 국.공립대학, 국.공립 중고등학교, 일본 총독부 포교종교인 신도.불교.기독교잔재, 총독부 및 행정기구, 군.헌병.경찰, 친일언론, 관변 억압기구등)은 점령대상으로 이분하여 대우하는것은 포츠담선언과 미군정의 입장이 다를수 없으므로, 경성제대가 주축인 그 후신 Monkey 서울대나 일본강점기 관립대학, 국.공립 중고등에 대한 행정처리는 승전국인 미군정 점령행정당시 3년정도 기간에 변경되거나 적용된 패전처리업무의 하나로 적용하는것이 옳음.  

II. 本論.  

1].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최고학벌 성균관대(Royal, Imperial학벌)의 정통성에 대한 학술적 서술자료 검토.  

각종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동아, 파스칼대백과,한국의 세계 대학사전등)을 보면 사립대학이 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한 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는데,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의 승계대학은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임은 분명함(泮宮.學宮.芹宮.태학의 宮 성균관대).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 필자 주1). 1979년이면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당시인데, 임시정부에서는 위관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상황을 가장 잘 반영하던 당시의 임시정부 요인 기준으로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음.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그 전신은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현재의 위치인 숭교방(숭교방)에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성균관은 최고의 국립 대학으로서, 국가에 필요하고, 유능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갑오경장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여 성균관은 제향기능을, 경학과는 교육기능을 맡게 되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며, 교육과정은 유학경전을 위주로 하되,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근대적인 교과목이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만 담당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경학원에 명륜학원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 명륜전문학원으로, 1939년에 명륜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4년 일제의 강요로 명륜연성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광복과 함께, 같은 해 9월 명륜전문학교로 재개교하였다. 명륜전문학교는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  

1946년에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여, 같은 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초대학장에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으며,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였다. 1953년 2월에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편성하였다.  

같은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이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변경하고, 1963년에 다시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조직 변경하였다.  

이하생략....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1398년(조선 태조 7)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것이 그 시초이다.  

이하 생략....  

2).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種路區)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398년(태조 7) 현재 위치인 숭교방(崇敎坊)에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광복뒤인 1946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열려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석구(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 같은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이하 생략....  

3). 위키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다. 1398년 조선이 유교 건국이념에 따라 숭교방(崇敎坊)에 설립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成均館)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 후 1895년 고종의 칙령에 따라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였으며, 이 경학과는 성균관의 고전적 대학에서 근대적 대학으로의 변혁을 상징한다. 경학과는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되, 역사학.지리학.수학등의 근대적 학문을 부가하였다. 1911년 일제가 성균관을 폐지하고 기능을 축소하였으며, 이름을 경학원(經學院)으로 변경, 1930년에 조선인들의 강렬한 열망에 따라 그 부속으로  
'명륜학원'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는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하였고, 1944년 친일 유림 양성소격인 '명륜 연성소'로 개편되어 민족 고등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 전국 유림대회가 열려 일제가 박탈한 고등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대학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김창숙을 대표로 삼았다. 이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면서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김창숙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 필자 주 2). 위키백과에 서술된 내용은 국내 백과사전들과 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한국사적 입장과 약간 달리, 세계사적 측면도 가지고 있음.  


3. 성균관이란 문구로 성균관대학교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봄.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성균관과 현대 성균관대학교와의 관계를 살펴봄.  

성균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  
우리 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이와 같은 성균관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존치되었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漢陽遷都)에 따라 새 도읍지의 동북부지역인 숭교방(崇敎坊) 부근(지금의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터가 정해져서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에 대성전(大聖殿 : 단종 때 大成殿으로 개칭됨.)과 동무(東廡)·서무(西廡)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정록소(正錄所)·식당·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조선 건국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3).위키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이후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명칭 또한 경학원으로 바뀌어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 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에 의해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를 세웠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원래의 성균관이 가지고 있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근대적 형태의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4). 성균관. 종교학대사전. 1998.8.20/한국사전 연구사.  

우리나라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데서 시작되었으며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이조 일대를 걸쳐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 이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 8ㆍ15해방 후에 성균관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5). 성균관  
[ 成均館 ]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이은석/2006.11.15/(주)신원문화사.  

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이다. 고려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성균관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1946년 성균관 대학이 설립되어 그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6). 宮으로 표현되는 성균관에 대한 사전적 서술내용.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성균관을 반궁(泮宮).근궁(芹宮)으로 서술함. 필자가 첨언하여 설명하면 泮宮은 학교형태의 宮이란 의미이고, 芹宮은 문묘(文廟:공자를 모신사당)를 가리키는말로 공자님에 대한 제사기능가진 제사기능의 宮이란 의미임. 그리고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성균관과 같은말이 學宮으로 나타나고 있음.  

4. 성균관대학교가 가지는 학술적 입장.  

대학 소개란의 약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음.  

600년 민족교육의 산실 성균관대학교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얼을 계승해 나아가는 민족의 대학으로 남아 있으리라!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보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 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본 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 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 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교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 대학시대는 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본적인 것으로 발전하여 왔다.  

# 고전대학시대  

....중략....  

# 근대대학시대  

근대 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는 개화기, 제 2기는 수난기, 제 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 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 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교육기관은 과거 최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 현대 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다. 그 중에서 제 1시기로는 성장기, 제 2시기로 발전기, 제 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이석구(李錫九) 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 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이하 생략...  

2]. 한국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교황 윤허 서강대에 대한 한국내 학술자료 검토.  

1. 성균관대(宮 성균관대, 泮宮.學宮이 성균관의 별칭임)와 서강대(御 서강대, 敎皇聖下 윤허 대학으로 귀족계파인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인데 교황윤허 및 한국유교와 성균관대에 대한 이해때문에 世界史的 측면에서 그 Royal자격을 인정하여 御 서강대라 함)의 한국 및 해외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의견.  

宮 성균관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Royal.Imperial대학이며, 가톨릭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계파로 가톨릭의 위기를 막아낸 계파입니다. 일본 강점기 여파 및 해방후의 일본잔재 미청산으로 친일언론에서 비롯된 대중언론 의견들은 국사 최고대학인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600년 역사 이어짐) 중심이 아닌데, 이런 혼란상황에서도, 敎皇聖下 윤허의 御서강대 몇 몇 학자와 전문가들은 망각하고 있던 전통적인 宮 성균관대의 일반적 지위를 점차적으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가는데 저와 개인적 인연을 가진분들 및 다른 분들 상당수가 드러내지 않고 다양하게 기여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유교와 가톨릭 예수회가 상호 전이가 가능하다는 마테오리치 신부님의 의견은 지속적으로 반영해 나갈것이며, 御서강대와 宮성균관대는 학풍이 다르고, 엄밀히 말해 종교가 같지는 않으며,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도 어쩔수 없는 것이기에 약간의 문화충돌이나 종교마찰은 불가피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神道國家 일본이 항복하였고,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은 무효라고 UN총회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가장 가까운 시대인 조선(대한제국)의 國敎인 儒敎를 이어받아 국제법과 역사.관습적으로 유교국입니다. 儒敎를 국제법적.역사와 전통측면의 관습법적 國敎로 하면서 모든 국민이 조선의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는 儒敎國이 한국입니다.  

*필자 주 3). 敎皇聖下 윤허 대학들은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예수회는 明나라 선교이후 유교문화권에대한 이해폭이 서양 기독교세력중 가장 넓은 계파며, 교황청의 실세로 불리는데, 예수회 산하 전세계적 네트워크가 있음.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요한 비오 12세의 허락으로, 대학설립을 기획하여, 1955년 창립사업이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Wisconsin) 관구에 이관됨으로써,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서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킬로렌(Killoren,K.E.)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와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증설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하 생략....  

3.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1956년 인가된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에서 1960년 서강대학으로 설립하였다.  

이하 생략....  

4.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요약: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로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허가로 대학설립을 기획, 1956년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K.E. 킬로렌 신부가 취임하였고, 1964년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1967년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70년 종합대학인 서강대학교로 개편, 초대총장에 J.P. 데일리 신부가 취임하였다.  

이하 생략....  

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사립 종합대학  

법인명은 학교법인 서강대학교이며, 예수회의 교육이념에 근거하여,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1번지에 있다. 1960년 4월 예수회에서 서강대학을 설립했고, 1970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생략....  

6. 서강대학교 홈페이지에 나타난 서강의 발자취.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창립이 기획되어, 1960년 가톨릭 예수회에 의해, 6개학과 158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부터 국제화된 커리큘럼, 학생당 최적의 교수비율, 국내 최초 교수 안식년제 도입등으로 대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1966년 경향 교육상 수상을 통해, 국내 최우수 모범대학으로 선정되었다.  

III. 결론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출판사들의 백과사전, 성균관대 학교당국이 현재의 私立 성균관대(王立과 私立 2중 형태를 가지며, 이는 서강대도 비슷함)가 조선(대한제국)의 王立(國立) 성균관을 승계했다고 공통된 의견을 보이는것은 일본이 패전국에 UN적국이되어, 강제적인 을사조약(을사늑약)부터 강제적인 한일합방(한일병합) 및 그이후의 불법 강제점령기까지 통틀어서, 일본의 월권적 행위를 무효로 보고,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대한제국) 최고의 대학 성균관의 최고대학 기능회복을 정당한것으로 보는것 같으며, 1945년 11월 30일의 전국 유림대회 및 그 이후의 유림들의 결의를 반영하여 그렇게 서술한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주안점은 일본의 강제점령기를 무효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한것 같습니다.  

일본 강점기때 최고대학인 성균관의 교육기능은 폐지되거나 단절.격하로 수난을 겪었지만, 공자님(先聖,文宣王)과 맹자님 및 여러 현인들에 대한 문묘제사 기능은 그대로 남겨져서, 그 제사 기능을 성균관이 이어왔고, 성균관대 명륜캠퍼스가 과거 성균관의 위치에 그대로 있어서 그러한 역사적 근거들도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와 전통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적절한 시기에, 일본강점기 잔재(교육분야 일본강점기 피해는 京城帝大및 일본 강점기 官立 전문대나 國.公立 中高 설립임, 京城帝大가 중심된 후발대학이 서울대임), 친일파나 친일언론등이 제재당하지 않아, 그들에서 비롯된 대중언론세력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成均館의 승계대학인 성균관대학교의 최고학벌 지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언론의 동태기때문에, 國史 성균관의 최고대학(Royal자격도 있음) 學閥을 승계한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학교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최고대학이며, Royal.Imperial대학의 學閥지위를 가졌다는것은 국가차원 및 학술적 차원에서는 분명합니다. 敎皇聖下 제도는 계속 이어지는 제도기때문에 韓國史의 최고대학인 성균관대학교(宮 성균관대)와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예수회 산하 서강대학교(御 서강대)가 연계하여 국내와 해외에서 동등한 Royal.Imperial 學閥을 확립하는것은 필요하며, 서강대는 세계사에 강한 특성으로 성균관대와 상호 의존적 Royal.Imperial대학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 상호 교류 확대와 상호 지원등은 두 Royal대학사이에 필요한 조치로 판단됩니다.  

*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논문이 아니고 Report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