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도교)이 한국에서 형성된 질서인지, 일본에서 형성되어 한국에 역수입된 질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요즘 조선시대 천민 승려들의
산중 불교 역사를 부정하려는것처럼 대중언론이나 친일세력등이 불교를 띄우며 유교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황하문명의 중국 유교를 빨리 받아들인 나라가 한국입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과 기자조선의 후예라고 하는 기준왕(箕準 王, 기자의 후예라고 일컬어지며 한국의 姓氏인 이천서씨, 청주한씨를 형성시킴)이 先史時代에 있었는데 고인돌은 유교의 조상제사 흔적입니다. 한문성씨 사용도 유교도의 징표입니다.
단군조선은 신화적 野史입니다. 기자조선도 箕準王을 先史時代의 정치가로 보는 경향이 있어 先史時代라 할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역사시대 인물인 위만이 箕準王을 멸망시켜서 歷史時代로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위만조선(기준왕을 멸망시킨 위만)부터는 공식 역사입니다. 삼한의 상달제(시월제)나 오월제.기풍제,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학교는 유교 太學), 예의 무천, 백제의 교천(비공식으로 오경박사 존재), 신라의 日月神숭배(설날.추석등 있었고 왕릉등의 무덤, 유교대학으로는 國學)등으로 오랜 유교전통을 가진 나라가 한국입니다. 고려시대는 治國의 道가 유교고 修身의 道가 불교라고 하는 시대로 신라가 거부하던 불교에 대한 탄압도 없었고 유.불.선이 공존하던 시대라 합니다.
고려시대의 유교 제천의식과 종묘제사.사직제사.문묘제사(석전), 국자감.과거제, 설날.단오.추석등은 유교국가로서의 고려의 모습입니다. 유교권 공통명절 설날.단오.추석은 조선과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중국에서 발현되어 고대 한국에 전해진 유교권 공통 명절).
1). 고려시대 유교 제천의식 나옴.
『후한서』동이전(東夷傳)과『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고대 우리나라의 종교의식에 관한 기록들이 나온다.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三韓)의 시월제(十月祭) 등이 바로 그것이다.
행사내용
이러한 의식들은 농경과 정착생활이 본격화함에 따라 나타난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등장하였고, 집단행위인 추수감사제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대부분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삼한의 경우 5월(수릿날)과 10월(상달)에 각각 거행된 것으로 보아, 당시 농경사회에서 파종기·수확기와 관련된 계절제라 하겠다.
단지 부여의 영고만은 중국 은(殷)나라의 정월(12월)에 행해졌는데, 이는 수렵사회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직업적인 종교전문가가 이를 주관했던 것 같다.
고구려의 동맹은 수도의 동쪽의 대혈(大穴) 속에 있는 나무로 된 수혈신(隧穴神)을 맞아다가 이를 수도에 연(沿)한 하천의 동쪽 고지의 신좌(神座)에 올려놓고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 수신(隧神)은 아마도 곡신(穀神)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이 제사는 곡신의례의 축제로 치러진 듯하다.
한편, 삼한의 5월 수릿날의 제사는 기풍제(祈豊祭)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행사들은 모두 주술행위를 통한 집단의식적인 축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래와 춤, 그리고 음주 등은 기풍제나 추수감사제와 같은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발로 땅을 높게 혹은 낮게 밟으면서 손발을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는 중국의 탁무(鐸舞)와 흡사한 율동과, 여러 사람이 모여 집단적으로 춤을 추는 군무(群舞) 등이 술과 곁들여 축제 분위기를 더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시대에 하늘에 제사하던 곳은 ‘영일현(迎日縣)’에 있는데, 세속(世俗)에서 전하기를 일월지(日月池)라 불린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하늘 뿐만 아니라 해와 달, 그리고 별에도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항상 10월에 제사하면서, 또 3월 3일에 모여 수렵을 하고 하늘에 제사하였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4중월(四仲月)에 하늘과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하였다. 부여에서는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또 전쟁이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하였다.
고대에서의 제천의례는 갈등과 해소의 장으로서 축제이자, 정치·경제·군사·사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고대 국가 초기의 왕권은 제천의례(祭天儀禮)에 의한 종교적 권위에 기반한 것이었다. 당시 초기 왕은 주술적(呪術的) 능력을 가지고 기후와 농사의 풍흉(豊凶)을 책임진다고 믿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적 생산을 보장받기 위해 자연의 공포와 기아(飢餓)의 두려움을 왕에게 위임하고 그의 특권을 인정해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직접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조선시대 역시 왕이 직접 원구단에서 비와 풍년을 빌었으며, 단(壇)을 쌓고 천지(天地)에 제사하였다. 그리고 한말(韓末)에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이를 되찾기 위해 일어난 의병 중에는 제천의식을 행하는 부대도 있었다.
2). 고려시대 유교 종묘제사 나옴.
종묘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보이지만 제도로서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대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1395년 새로운 종묘를 완성하였다. 이때 규모는 7칸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의 익실(翼室)은 각각 2칸이었다. 세종 3년(1461) 종묘 정전 바로 서쪽에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을 세웠는데 정전 4칸에 좌우로 익실 1칸을 더한 것이었다. 이어 명종 1년(1546) 증축을 하여 정전이 좌우 2칸씩 모두 4칸이 늘어나 11칸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이전 상태대로 복원되었으며, 영녕전은 정전 4칸에 좌우 익실 각 3칸으로 이전보다 증축되었다. 현종 8년(1667) 영녕전의 익실을 좌우 각각 1칸씩 중축하고 영조 2년(1726) 종묘 정전의 신실을 동쪽으로 4칸 중축하였다. 종묘 정전은 헌종 2년(1836) 다시 동쪽으로 4칸을 늘려 모두 19칸이 되었으며 이때 영녕전도 같이 증축하여 좌우 익실 각 2칸씩을 늘려 모두 각 6칸이 되었다. 종묘 정전에는 27명의 조선 왕 가운데 18명과 추존된 왕 1명 등 19명의 왕과 왕비의 신위만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영녕전에 있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없다.
종묘 제사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다. 고려 성종대에는 태묘(太廟)로 이름을 고치고 천자의 예로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묘를 세우고 제후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대한제국기에는 다시 황제의 예로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대한제국기의 형식을 대체로 수용하는 편으로,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종묘 제사에 관한 의례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대한예전(大韓禮典)』 등에 수록되어 있다.
3). 고려시대 유교 사직제사 나옴.
사직대제는 A.D. 4세기 고구려에서 시작된 이래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중국 예제(禮制)의 영향을 받아 정착되었다. 고려에서는 성종 10년(991) 이후 당대(唐代)의 의례를 본받아 시행했는데 그 규모는 대사(大祀)였고, 제사 시기는 중춘, 중추, 납일이었다
4). 고려시대 유교 석전(문묘제사, 공자님제사) 나옴.
한국에서는...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國學:大學)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國子監:成均館)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位)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지금도 성균관에서는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과 가을, 2차례씩 석전을 거행한다.
.출처:두산백과
- @ 또는 불교.기독교를 이용해 유교를 공격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일본 신도와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후신 서울대등의 새로운 침략으로 정의해야 될지 어떨지 잘 판단이 서지 않기는 하지만 대중언론의 주력세력들이 그런 일본 강점기 학교들이라 의혹이 깊어집니다.
참 궁금합니다. 일본 기준으로 한국에 강제로 포교한 외래종교가 일본 총독부령 83호에 의해 일본 신도(불교적 특색 강함), 일본 민중 불교(한국의 산중 불교와 달리 승려가 결혼도 하고 시중에 불교마크 달고 진출하는 특징), 기독교(주로 개신교, 한두개 가톨릭 성당)였었는데,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종교주권은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킨게 일본이고 불교적 일본 신도, 일본 민중불교를 한국에 퍼뜨린게 일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구한말에 학교들이 설립되어 學內 선교의 자유는 있을것입니다.
을사조약이 무효고, 한일병합이 무효고, 일본이 2차대전때 항복하여, 일본이 한국에 퍼뜨린 일본 학교(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 신도계열 학교에 해당됨), 일본 민중불교는 정말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 한국은 국제법과 역사적 관습법상 유교국입니다. 美蘇 軍政期에 전 국민을 조선성명복구령등으로 행정기관에 姓氏.本貫등을 등록하게 해서 전국민이 기본적으로 유교도인 나라가 한국입니다(그리고 설날.단오.추석 같은 유교권 공통명절을 쇠며, 황사손이 여러 국가제사를 주재하고, 석전대제나 가족별 조상제사등이 있습니다). 後發 局地的 일본만의 신앙인 神道國家 일본의 창씨개명때문에 姓氏와 이름을 빼앗겼던 한국.
해방후에 들어온 가톨릭 예수회의 서강대는 학내 선교의 자유가 있고, 구한말에 설립된 기독교 학교들도 학내에서 선교의 자유는 있습니다.
헌법상 國敎가 없고 종교의 자유가 있으면 한국은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국제법과 관습법상 조선의 국교를 계승한 유교를 이기기 위해 자꾸 일본 강점기 세력들이 다른 종교를 유교 앞에 놓는것은 의혹을 자아냅니다. 일본 강점기 잔재라 종교주권이 없이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美蘇 軍政期에 행해진 조선성명복구령등에 의해 전국민이 한문성씨.본관등을 등록하며 전국민이 유교도인 한국(美蘇 軍政令도 타당한 법이라 지금도 국내법으로 이어지고 있음)입니다. 이를 위배하며 대중언론이 유교에 항거하는 것은 법규와 전통에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새로운 일본.일본잔재의 도발에 해당됩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후발 국지적 신도국가) 일본 강점기로 인해 피폐해지고 왜곡된 한국 유교 전통을 바로 잡기위해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