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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奠大祭. 공자님(先聖, 文宣王)제사

 

 제목:釋奠大祭. 공자님(先聖, 文宣王)제사

 

1.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취푸의 공자유적으로 공자님 제사의 유래와 역사를 알아봄.  

취푸의 공자 유적

[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

 

중국 봉건 사회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공자(BC 551~479)가 이룩한 사상 체계를 뛰어난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사람들은 공자를 ‘신성한 제1의 스승’이자 ‘수천 년에 걸쳐온 신성한 모범 스승’으로 받들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공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이듬해(BC 478)에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어, 이후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쳐 증축, 개축되었다. 취푸의 공자 유적은 사당인 공묘(孔廟), 묘지가 있는 공림(孔林),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孔府)로 크게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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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1,000개가 넘는 비석에는 한나라(BC 206~AD 220) 때부터 황제가 바친 제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서예 솜씨와 색다른 기록물의 형태를 보여 주는 중국 예술의 귀중한 사례이다. 훌륭한 솜씨로 조탁한 조각품은 물론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한나라 시대의 석조물과 돌기둥, 공자의 일생을 묘사한 명나라 시대의 조각 그림도 많이 있다.

공자의 묘는 취푸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쓰수이강(泗水)의 제방에 자리한다. 제단 앞에 반구형 언덕을 이룬 이 무덤은 추앙과 순례의 으뜸 장소가 되었다. 그 뒤 2세기까지 공자의 무덤 주변에는 50기가 넘는 후손들의 무덤이 생겨났다. 묘역의 정문은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쭉 뻗은 길로 취푸의 현성 북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어서 좁은 담으로 둘러싸인, 두 번째 문으로 이어지는 장소가 나오는데 이곳은 잔디와 나무, 강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영교(株永橋)를 건너 서쪽으로 가다 보면 공자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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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공자의 사당은 그가 죽은 이듬해에 노나라 애공이 취푸에 있는 그의 옛집을 사당으로 개축하여 조성했다. 이 사당 안에는 공자의 옷과 악기, 마차,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한나라를 건국한 황제 유방(劉邦)은 공자를 기리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 취푸를 찾았고, 이후 여러 황제와 황제의 명을 받은 고관들이 공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공자의 사당은 153년에 재건축되었고,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증축되었다. 수나라 때인 611년에는 유적지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공자가 살았던 방 세 칸짜리 집을 철거했다. 7세기~10세기에도 여러 차례 증축과 확장이 이어졌고, 송나라 시대인 1012년에는 네 개의 정원을 갖춘 세 구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때 3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는데, 1194년 추가 확장으로 4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214년에는 화재와 약탈로 황폐화되었고, 이를 재건하기 시작하여 원나라 초기인 1302년에는 이전의 규모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1331년에는 유적지를 둘러싸는 담을 쌓았는데, 이는 궁전의 담과 흡사했다. 1499년에 발생한 화재로 다시 한 번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로써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화재나 다른 요인으로 파괴된 건물을 재건할 때는 사당 건물군의 중심인 대성전(大成殿)처럼 더욱 화려하고 큰 건물들이 세워졌다. 공자의 사당은 1906년 성대한 의식을 통해 중국의 수많은 사당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사람들이 숭상하고 순례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는 전한(前漢)의 황제 무제(武帝)가 ‘온갖 사상과 학파를 없애고 오직 유교만을 존경하라’는 명을 내린 뒤부터였다. 이에 따라 묘역은 계속 확장되고 점점 더 화려해졌다. 1244년에는 공자의 후손들의 무덤이 늘어나는 동시에 공자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331년 공씨 문중은 문을 세우고 담을 쌓았으며 문탑(門塔), 아치교, 정자를 지었고, 1594년에는 취푸의 현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까지 만들었다. 18세기 후반에 묘지는 7㎞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3.6㎢의 지역을 아우르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공자의 사당과 묘역을 돌보던 공자의 후손들은 역대 왕조의 보호를 받았다. 송나라(960~1279) 인종(仁宗)에게 받은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세습 존칭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1935년까지 직계후손에게 이어졌다. 이 존칭은 1935년 제77대 후손에 이르자 ‘희생의 국부 및 제1스승’으로 바뀌었다. 저택은 1377년에 사당과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전에는 사당에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운 저택은 1503년에 560개의 방과 9개의 정원을 갖춘 3열의 건축물로 배치하기 위하여 확장되었다. 1838년 황실 지원으로 완전히 보수된 건물은 1885년에 일어난 화재로 파괴되었고, 2년 후 다시 황실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중국 황제들이 가장 훌륭한 예술가와 공예가들을 동원하여 건물과 경관을 만들어내고 재건축하는 일을 지원한 덕분에, 취푸의 공자 유적은 뛰어난 조화를 보여 주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기준 (ⅳ) : 취푸의 조화로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중국의 물질문화를 보여 주는 훌륭한 건축 유적에 잘 나타나 있다.

기준 (ⅵ) : 2,000년 동안 동양의 여러 나라는 물론 18세기~19세기에 서양과 유럽에도 영향을 미친 공자의 철학과 정치관은 현대적 사고와 국가 발전을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 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난 석전(석전대제).

 

전통 사회에서 산천(山川)·묘사(廟社)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祭享)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釋)은 ‘놓다(舍也)’·‘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치다(停也)’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薦饌)’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迎尸)’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일설에는 소[牛]·양(羊)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菜: 빈조류(蘋藻類)]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釋菜)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釋采)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采帛)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舍奠)·정제(丁祭)·상정제(上丁祭)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上丁日: 첫 丁日)에 모시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대(上代)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周禮)』, 「춘관(春宮)],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전자를 정기적(常時)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非時)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가르치는 교관(敎官)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周代)에는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을 선성(先聖)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漢)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수(隋)·당(唐)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明)나라에 와서 태학(太學)의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太學: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國子監) 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先聖廟) 또는 문선왕묘(文宣王廟)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獻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10철과 송조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1.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 상기 글에대한 저술자의 의견은 고구려 소수림왕때 태학이 설립된것을 유교의 최초 전래로 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글의 저술자가 유교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하늘에 대한 제사(제천),산천제사, 조상제사등에서 유교의 전래를 찾으려하는 유교 경전을 중시하는 저술가인지, 아니면 일본 강점기에 일본 신도나 일본 민중불교에 영향받은 학파의 일원인지는 본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세계종교 유교가 한국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유교 경전이나 중국의 역사서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하는 저술자가 있다면 제천의식, 산천제사, 조상제사등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일단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쳐온 선사시대의 고인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고인돌은 유교의 조상제사 형태입니다.   대개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중요 인물의 시신 또는 유골 위에 세운 단순한 무덤방으로 알려져 있다. 흙무덤이 고인돌을 덮고 있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풍화작용과 동물들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유골을 가족 공동묘지에 묻기 위해 시신을 수습하는 제단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본 글의 필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나오는 한국의 고인돌에 대한 설명에서 주요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 필자 주 2. 유교경전의 내용과 始原儒敎(원시유교), 세계사, 국사가 같이 연결되어야만 국사나 세계사, 윤리, 국어, 한문교과서에서 유교의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중국의 史書, 삼국사기, 한국의 국사에서 나타나는 제천의식으로 삼한의 상달제, 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祭天儀式인 교천, 신라의 설날과 추석, 삼한시대에 오월제로 유래되어 유교권 공통명절인 단오로 이어진 과정등을 좀 더 면밀히 조사하면 중국 황하문명에서 유래된 유교가 한국에 언제 전파되었는지 더욱 잘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서로는 다른 자료들이 분실되어 고려시대에 王命으로 쓰여진 三國史記가 최초의 歷史書이자 正史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正史는 아니고 일종의 野史인데 일본강점기부터 일본 신도나 일본 민중불교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이를 역사서처럼 이용하면서 삼국유사 시각을 가진 일부 역사학자들도 생겨난 것 같습니다. 사전에 보면 有史以來라는 단어는 있어도 단군이래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고조선이나 단군은 하나의 假說이며 世界史에서는 모르는 용어이고, 쓸 수 있는 용어들도 아닙니다. 고려 후반기에 중 일연이 삼국사기를 모방하며 불교적 시각을 가미하여 설화형태로 만들어 낸 삼국유사를 正史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는데 상고시대부터의 神話도 아니고 그렇다고 正史도 아닌 책이 삼국유사로, 아직까지도 正史아닌 野史로 분류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중국 유교나 한국 유교를 잘 알기 위해서는 한자를 잘 알고 유교의 五經(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과 四書(논어,중용,대학,맹자) 및 중국의 역사를 잘 알면 한국 유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 필자 주 3. 세계사적 개념으로 한국의 역사를 잘 아는데 도움되는 책들은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後漢書등임은 아시는분은 잘 아실것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보면 부여의 제천의식인 영고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魏書 東夷傳 夫餘條)의 기록을 보면,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첫머리에,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인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以臘月祭天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라 하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오늘날의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내용이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져 그것은 종교적 제의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추수감사제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영고만은 은력 정월, 곧 12월에 행해졌다.

 

* 필자 주 4. 위에서 나타난대로 殷나라 歷法인 殷正月(은력 정월)은 지금의 陰歷과 차이가 있지만 부여가 殷歷을 채택해서 그게 바로 그 당시 正月(1월)의 설날입니다. "은력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 하는 부분이 바로 황하문명의 설날(元日,元旦)이며 중국등 중화권(중국.대만.홍콩), 한국,베트남,싱가포르의 설날(Lunar New Year)에 해당됩니다.   

 

* 필자 주 4-1. 원일(설날)에 제사하는것은 유교 경전인 예기에 나옵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원일(元日, 첫 辛日)에 상제에게 풍년을 빌고(天子乃以元日 祈穀于上帝"라 하는 내용입니다.  殷正月도 모르고, 유교 경전인 禮記도 공부하지 않아서, 설날의 한자표기인 元日이나 元辰등의 표현을 망각하게 되고, 유교권 공통명절인 설날의 유래를 다른데서 찾으려 하는분도 있습니다. 유교권 공통名節인 설날,대보름,淸明(한식),단오,추석(仲秋節)등은 유교 경전과 중국의 古書에서 찾아야  중국인도 이해하고, 한국인도 제대로 이해하는 역사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 필자 주 4-2. 설날의 다른 명칭인 元辰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대 중국 하력(夏曆)의 정월 초하룻날을 가리키며 길신(吉辰)이라고도 한다. 흔히 원단(元旦)·원일(元日)·원삭(元朔)·원정(元正)·원조(元朝)·삼원(三元)·세조(歲朝)·세수(歲首)·세단(歲旦)·수조(首祚)·정조(正朝) 등과 같은 말로 쓰인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진(晉) 유천(庾闡)의 ‘양도부(揚都賦)’를 인용하여 “설날 새 아침, 음양이 차례를 이루네(歲惟元辰 陰陽代紀).”라 하였고 장화(張華)의 ‘식거동서상악시(食擧東西廂樂詩)’에는 “천지인 삼원의 새 아침, 조정에 빼어난 인물들 모여드네(三正元辰 朝慶鱗萃).”라 하였다

*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 필자 주 4-3. 고대 한국의 백제에서 正月에 제사지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고이왕(古尒王) 5년(서기 238) 봄 1월과 10년 봄 1월 및 14년 봄 1월, 근초고왕(近肖古王) 2년(서기 347) 봄 1월, 아신왕(阿莘王) 2년(서기 393) 봄 1월, 전지왕(腆支王) 2년(서기 406) 봄 1월, 모대왕(牟大王) 11년(서기 489) 겨울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 지냈다. 다루왕 2년 봄 1월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책계왕(責稽王) 2년(서기 287) 봄 1월, 분서왕(汾西王) 2년(서기 299) 봄 1월, 계왕(契王) 2년(서기 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1월, 전지왕 2년 봄 1월에도 모두 이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古尒王五年 春正月 十年 春正月 十四年 春正月 近肖古王二年 春正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牟大王十一年 冬十月 並如上行 多婁王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 春正月 汾西王二年 春正月 契王二年 夏四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並如上行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연관목차 (153/264)

* 출처: 제사[祭祀]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필자 주 4-4.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설날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자료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 출처:한국문화재보호재단


 

3. 국립민속박물관에 나타나는 석전(석전대제).

 

우리나라에서 석전이 시작된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최초로 태학이 설립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석전도 함께 봉행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경우 국립학교 설립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같은 명칭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박사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학교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석전 의식을 봉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신문왕 2년(648)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성덕왕 16년(717)에는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대 제자 및 72 제자의 영정을 가져와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역시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석전을 봉행하였으며, 현종 11년(1019) 8월에는 최치원을 선성묘에 종향(從享)하고, 현종 13년에 다시 설총을 종향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성현을 문묘에 배향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성리학이 정착된 조선조에는 석전이 국가에서 주관하는 오례(五禮) 중 길례(吉禮)에 속하는 국가적 대사로서 봉행되어 왔다. 오늘날 석전이 봉행되고 있는 한국의 문묘인 성균관은 고려 충렬왕 30년(1303) 6월에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있던 국자감을 개칭한 것이며, 조선조 건국 이후 태조 7년(1398)에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성균관의 정전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聖), 10철(哲)과 송조 6현(賢) 등 21위(位)를 봉안했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의 명현(名賢)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 등 112위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에 두 차례 석전을 봉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와 송조 2현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 108위를 매안(埋安)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려 종향하고 춘추 석전 대신 공자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는 변화를 가졌다. 그 3년 뒤인 1953년에 공문 10철과 송조 6현을 복위하고 석전도 봄과 가을 두 차례, 곧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로 환원하여 현재까지 봉행하고 있다. 성균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232개 향교에서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년 같은 날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4. 시사 상식사전에 나타난 석전(석전대제).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1986년 11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춤을 일무(佾舞)라고 한다.

'석전'은 옛날 중국에서 자연이나 조상들의 묘에 올리던 제사와 학교에서 앞선 성인들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하여 올리던 제사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학교에서 행하는 제사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봄ㆍ가을ㆍ겨울에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스승들 중 훌륭하신 분께 석전을 올렸다. 시대에 따라 모시는 분이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대부분 공자를 으뜸으로 여겨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서 공자 및 그 제자들, 한국의 유학자 등 명현 16위의 위패를 모시는 제례의식을 열었다. 임금이 참여하는 국가적 큰 의례이기 때문에 석전대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봉행하여 왔으며, 성균관 대성전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일제히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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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이 의식을 음력 5월 11일(공자 기일)과 9월 28일(탄강일)에 봉행하고 있어, 석전은 성현에게 개학을 알리는 축제인 만큼 공자 기일이나 탄강일에 지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이견이 있다.

출처: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5. 두산 백과에 나타난 석전(석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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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성전(大成殿)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과 한국의 유학자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 명현 16위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두 차례 기념석전을 행하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주관한다. 제를 지내는 날짜는 여러 차례 변경을 거듭하다 1953년부터는 음력 2월과 8월의 첫째 정일(丁日)에 행하였고, 2007년부터 공자의 기신일(忌辰日)을 양력(陽歷)으로 환산한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절차는 영신례(迎神禮)·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공악(空樂)·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음복례(飮福禮)·철변두(徹邊豆)·송신례(送神禮)·망료(望燎)의 순서로 진행된다. 

 출처:두산백과

 

 * 대만 타이페이시에서 거행되는 공자님제사(아래 유튜브 台北孔庙举行秋季释奠典礼
 클릭 요망). 추계 석전.중국은 공자님 고향인 곡부에서 행해지는 국제공자문화제가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은 釋奠大祭있고, 베트남은 하노이文廟가 있음.
* 본글은 비영리적이며, 세계유산이나 세계사, 한국사, 유교등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공익적인 글로 해당 자료들을 인용하였으니 이 점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台北孔庙举行秋季释奠典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