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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명이후 형성된 서양의 기독교나, 브라만에 항거한 불교,일본신앙에 영향받은 외래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석해도 중국.한국.베트남.대만.싱가포르

제목: 황하문명이후 형성된 서양의 기독교나, 브라만에 항거한 불교,일본신앙에 영향받은 외래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석해도 중국.한국.베트남.대만.싱가포르의 유교신자 특징은 조상들이 물려준 황하문명 중국 유교의 한문姓氏나 本貫등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유교도였던 조상들이 물려준 황하문명의 유교에서 파생된 한문성씨(혹자는 본관 포함)를 쓰고 있으면 그 자체로 유교도입니다.

 

황하문명 유교 후발로 형성된 서양의 기독교나 불교는 유교의 조상제사(祖上祭祀)를 모르고 수용하지 않아 無君無父의 금수로 배척받고 그래왔습니다. 한국에서 선사시대로 분류되는 기자(箕子)조선의 후손들은 한문姓氏를 사용하였는데, 箕準 王(箕子의 후손으로 거론되며 先史時代의 정치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歷史時代 인물인 위만이 멸망시켰다고 하는 점에서 역사적 인물이기도 함)이 위만(위만조선 건국, 위만조선은 분명한 歷史時代)에 멸망당하여, 그 일행들이 三韓으로 피신했다고 전해집니다. 箕準(王)의 후손들은 徐씨나 韓씨등의 한문성씨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자료(姓氏관련 자료들)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관리하는 향토문화대전에 나오는 이천서씨 관련 내용입니다. 이천서씨의 시조는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의 후손 서신일(徐神逸)이라 한다. 기준(箕準)위만을 피하여 이천에 있는 서아성(徐阿城)에 살았다 하여 그 후손이 성을 서씨라 하고 본관을 이천(利川)이라 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관리하는 청주한씨 관련 내용입니다.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신라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사적에 의하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이다. 한란고려 태조(太祖)후백제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이 있으므로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는 청주 방정리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 일본의 항복이후 해방된 한국민족으로 살아가던 美蘇 軍政당시 한국인은 누구든지 행정기관에 한문姓氏(조선姓名 복구령등에 따름)와 本貫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제도가 바로 國敎로서 한국 유교도의 징표입니다. 별도의 종교시설없이 서양식.불교식.일본 신도식 종교단체에 등록되지 않고도 國敎(국가 기관에 의무적으로 한문姓氏와 本貫등 등록)형태를 띈 유교도의 자격이 한문姓氏(그리고 本貫) 등록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양반가문은 족보에 수록되고, 先山에서 門中제사도 같이 지내고, 관리직첩도 있고, 일가친척들이 알아보는 전통 양반가문인데, 양반가문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행정기관에 조선 유교도의 특징인 한문성씨와 본관만 등록해도, 평민정도로는 누구나 다 인정되는 좋은 시대 아닙니까?  필자는 고려 개국공신 太師公 尹莘達(윤신달, 고려 개국공신으로 三韓公臣) 

의 후손입니다. 어릴때부터 양반.양반 소리가 부담스러웠는데, 아버님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업체의 호남총판을 하게 되면서, 일본 신도나 친일부왜배들의 마수가 일본 신도.불교쪽으로 본인의 유모에게 뻗친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집안은 어머님이 아주 연로하신데, 군포 산본시장 부근에 살아계셔서 명절이나 조상제사를 거행하는 가문입니다. 구한말 서울에 있던 주요 왕족이나 양반가문들은 감시대상으로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것을 알게되었는데, 결국 저희 집안도 그렇게 일본.친일부왜배 세력의 일본화에 유모가 희생양으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뭉개졌어도 왕족이나 주요 양반가문 희생자들은 필자는 인정해 주려고 합니다.     

 

기자조선과 삼한시대의 왕들과 달리, 삼국시대의 한국유교 지배자들은 원래 한문성씨를 쓰지 않다가 나중에 한문성씨를 추증받는 형태를 보입니다. 고구려 주몽임금(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신, 백제는 주몽의 자손 온조가 건국), 혁거세.알지임금(신라), 수로왕(가야)등에 단체로 조상제사를 지냈고 통치자와 지배층의 무덤은 규모가 큽니다. 이 조상제사의 무덤형태는 한국의 先史時代에는 고인돌이란 형태로, 이후의 역사시대에는 석관묘.목관묘.거대한 왕릉이나 무덤으로 기록되어, 역사를 통하여 先史時代.歷史時代 조상들의 유교적 삶을 배우고 있습니다.

 

@ 제천의식(祭天儀式)이나 산천제사(山川祭祀)도 유교 경전에 기록된 제사형태입니다. 발견자가 누구든지 한국 先史時代의 유교 제천의식은 울산 반구대등이 그 증거입니다.  유명한 한국유교의  제천의식으로는 삼한의 상달제, 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등이 유명하고 백제의 교천(郊天)도 제천의식입니다. 신라의 설날.추석(한가위)도 日月神을 숭배하는 제천의식의 한 형태입니다.

 

고대의 제천의식은 유교가 治國의 道(치국의 도는 유교, 修身의 道는 불교라는게 최근에 필자가 읽은 국사학계의 입장)로 작용하던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고려는 유교 국가제사로  제천의식, 종묘제사(왕실의 조상제사 성격), 사직제사(산천제사의 한 형태인데, 토지와 곡식의 신에 제사) 및 문묘제사(文宣王이신 공자님제사, 공자님은 주공같은 성인임금이 先聖이던 시기에 先師의 위치에 계셨는데, 후에 유일한 先聖으로 대체되심. 先聖이나 이런 칭호가 없어도 三皇五帝나 요순우탕문무주공은 聖人임금이심)를 치르던 나라입니다. 유교권 공통명절인 설날.단오.추석을 국가 명절로 하였는데 조선에도 그대로 유교권 공통 명절입니다. 고려시대는 유교의 신령등에 제사하는 팔관회도 있었는데, 불교의 연등회도 있었습니다. 국가제사는 유교의 제사가 주종이었습니다.   

 

삼한시대의 상달제(시월제)나 오월제(기풍제, 단오로 전해짐)는 그 시기로 볼때 추석이나 단오제로 전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고유의 명절은 아니고 모두 중국의 유교명절에서 유래된것입니다. 

  

@유교의 특징은 종교시설이나 종교단체가 없이 국가적으로 통일된 한문성씨를 사용하면서(國敎형태의 한문성씨등 사용), 하늘에 제사하고, 山川에 제사하고, 祖上에 제사하고(家祭와 墓祭를 통해서), 先聖에 제사하고, 冠婚喪祭를 치르고, 孔孟의 三綱五倫을 따르고, 유교권 공통名節[설날(春節), 한식(淸明), 단오, 추석(仲秋節), 대보름.칠월칠석등]을 지키는 특징입니다. 중국(홍콩 포함).한국.베트남.대만.싱가포르 국민 및, 해외의 중국 華僑들 특징인데 이런 유교신자가 십수억명입니다.     

 

@ 일본은 유교국과 달리, 공식적으로 유교가 없으며, 일본의 주요 종교는 신도.불교.기독교(기독교는 교세가 아주 미미함)입니다. 유교국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일본의 종교가 한국을 불법 强占한동안 세력을 확장해서 유교국가 한국인들을 Anomie(아노미) 현상에 빠지게 하고, 해방이후도 한국 총독부에 남은 하급관료들과 대학교.중고교.교육기구에 남은 친일부왜배, 대중언론등에 남은 친일부왜배들이 일본강점기 미청산 상태에서 고위직으로 성장해 일본 강점기 시각으로 한국의 종교를 재단하려 하고, 최근에는 다른 유교국들의 유교까지 마음대로 재단하려 하는것으로 파악됩니다. 일본강점기 잔재세력에 대한 축출.제지 및 청산이 다시 필요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새로 만든 신도는 경전이 없는 특징이 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신도 국교화정책을 추진하며 신불분리령을 내려 신도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불교는 일본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를 탄압했던 탓인지, 불교의 교세는 여전합니다. 일본 신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 책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신도에는 경전도 없고 교주도 없으며 설교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신도교 신자라는 말도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신사를 찾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근대국가로 나아가자 정부는 신도국교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불분리령'를 내려 신도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1870년에는 국가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각 지역별로 신사를 정리 체계화하여 그 정점에 천황을 둔 것이다.

 

* 출처: 새로운 일본의 이해, 공의식 외, 2005.3.2, 다락원

 

* 필자 주 1). 일본 신도는 경전이 없지만 세계사의 세계종교인 유교나 기독교는 經典이 있습니다. 유교의 經典은 五經(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과 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입니다. 五經은 기독교의 舊約聖經에 해당하고 四書는 기독교의 新約聖經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 필자 주 2). 일본의 종교인 집계수는 종교법인으로 등록된 신사의 신자, 불교 사찰에 등록된 불교도, 교세는 약하지만 기독교 종교단체에 등록된 기독교도를 기준으로 산출한다고 판단됩니다.   

 

다음은 '새로운 일본의 이해'에 나타난 일본의 종교 신도 파악내용입니다.

 

천황의 신격화를 위해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켜 갔는데,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짓고, 궁성 요배 등을 강요한 것도 그 유산의 하나이다. 현재 종교법인으로 등록된 신사는 약 8만 개소로, 일본 전국 어디에나 신사가 산재해 있다.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출생·결혼식의 축하를 비롯하여 시험합격, 무사고 운전, 가업 번창 등을 기원하기도 하며, 지역주민들이 신사에 모여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의 일생은 신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신도 그 자체에 깊은 신앙심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전통과 습속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면이 강하다.

 

* 필자 주 3). 위 내용은 일본의 신도관련 종교법인 서술내용입니다. 일본인 대다수는 신사의 신도라고 파악됩니다. 

 

불교는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신자수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인이라면 대부분 신자가 아니라도 사원에 참배하고, 장례식은 불교의식에 따라 거행한다. 시신은 화장하여 사원에 딸린 가족 납골당에 안치하고 사후에는 일반적으로 계명을 붙인다. 또한 일부 종파를 제외하고는 근대 들어 대부분의 종파에서 승려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식 혹은 양자를 통해 주지직이 계승되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약 7만 5,000채의 절이 있으며, 승려수는 18만, 신도수는 8,000만 명 정도이다.

* 필자 주 4). 위 내용은 일본인이 신자가 아니라도 사원에 참배하고, 장례식은 불교의식에 따라 거행하며, 대부분 종파에서 승려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7만 5,000채의 절이 있으며, 신도수는 8,000만 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 필자 주 5). 일본인 대다수는 일본 신사의 신자지만 또한 2중으로 불교를 같이 믿는 불교신자가 8,000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도 수: 일본의 기독교는 전 인구의 1%에도 못 미치는 신자수를 기록하고 있다.

 

* 필자 주 6). 일본의 기독교는 그 교세가 아주 미미한 걸 알 수 있습니다.

 

* 출처: 새로운 일본의 이해, 공의식 외, 2005.3.2, 다락원

 

@ 황하문명의 발생지이자, 유교 종주국인 유교국가인 중국은 조상대대로 전해내려온 중국의 한문성씨에 대해 거부의견을 낸 외래종교 불교에 대해 무군무부의 금수로 배척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한문성씨를 쓰고 있습니다. 13억 5천만의 한문성씨 쓰는 유교 국가 중국. 그 중 2천만 정도는 소수종교인 도교.불교.기독교.이슬람 종교단체에 등록됨. 다시 무군부부라고 배척당하던 중국 불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법보신문 2011.8.17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의 글입니다. 

 

 중국에서 세속의 성을 쓰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은 동진의 도안 스님이다. 굳이 성을 써야 한다면 ‘석’씨를 쓰자고 했다. 아마도 ‘석’씨가 대중화된 것은 이 때부터일 것이다. 도안 스님은 왜 ‘석’씨를 주장했을까?


당시 스님들은 스승의 성을 받은 관계로 각양각색이었다. 또 하나.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때 유가에서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라 폄하했다. 국가도 가문도 없다는 것이다. 도안 스님은 이에 반기를 들며 외친다. “불교도의 진정한 스승은 석존이므로 불제자가 된 사람은 모두 ‘석’으로 성을 삼아야 한다.” 불교계 내의 무분별한 성씨 사용, 그리고 유학계 매도를 단박에 정리해 낸 것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후는 어떠했을까? 초기에는 ‘석’씨도 거의 쓰지 않고 법명과 법호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근대 이전 까지 지속된다. 나옹 혜옹, 서산 휴정, 태고 보우의 예를 들어보면 명확해 진다.
그러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법명 앞에 속성이 붙기 시작했다. 왜인가. 일본불교는 당시 대처불교였다. 따라서 자식에게도 성을 주어야 했기에 스님이 되어서도 속성을 붙였다. 물론 일본의 행정통제를 위한 강압도 있었겠지만 우리 스님들도 무분별하게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화해야 할 일본불교의 잔재가 아닌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행정상에서의 공적 서류에 법명은 인정되지 않는다. 속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법명 앞에 속성을 붙이는 게 대수’냐고. 아니다. 행정 서류에서만 밝히면 될 뿐이다. ‘한용운’도 마찬가지다. 당시 이러저런 이유로 썼다 해서 지금까지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다. 고려 시대의 일연 스님 비문에는 ‘보각국사’가 아닌 ‘보각국존’으로 되어 있다. 중국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았던 터라 ‘국사’를 쓰지 못하고 부득이 ‘국존’으로 썼던 것이다. 그렇다 해서 우리가 지금 일연 스님은 보각국사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 북주 도안 스님은 “그대가 이미 출가 했으니 낳아 준 어버이와, 세속, 일가친척을 떠난 것”이라 했다. 그리고 말한다. “그대가 출가했으니 수도인이라 불린다.” 불제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딘 이상 세연을 끊으라는 말이다. 물론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출가의 자부심을 갖고 수행에 매진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임금에게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도안 스님은 말하고 있다.


출가인은 법명법호면 충분하고 혹 성씨를 써야 한다면 ‘석’씨를 쓰면 그만이다.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 그리고 출가인의 기개와 위상을 스스로 일제잔재 속에 묻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중국인구는 13억 5천만인데 그 중 2천만명이 소수 종교를 믿는 소멸시켜야 할(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정치체제상 집권당인 중국 공산당 방침이 종교를 소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삼음) 종교의 신자들입니다.  2천만명 중 대부분은 중국 소수 전통종교인 도교.불교를 믿고 3% 정도의 인구가 기독교를 믿고, 1~2% 정도의 인구가 이슬람을 믿는다고 두산백과에 나옵니다. 13억 3천만명은 새로운 방법인 종교단체에 등록하지 않고, 국교전통의 유교를 믿는 유교도로 조상들이 전해 준 중국의 한문성씨를 쓰는 유교도로 파악하면 됩니다.   

@ 한국의 국교전통인 유교도들은 강점기 포교종교들(신도.불교.기독교)인 외래종교나 신흥 종교의 종교단체에 등록하지 않고 국가기관에 국교전통의 조선 姓名(유교성명임)을 등록하는데, 의무적으로 등록하기때문에 한국의 유교도는 남한 5,000만, 북한 2,400만 명입니다.   

@ 유교권 국가들은 조상대대로 전해져 온 한문성씨와 본관을 쓰는게 국교인 유교도의 자격인데, 최근 일본 총독부령 83호의 침략적.불법적 사고방식(신도.불교.기독교만 포교종교)에 젖은 친일부왜배 세력들이 한국 국교인 유교의 종교인수를 임의대로 재단하고, 이제 외교부 등록자료에 다른나라 종교를 표시하면서, 한국어로  중국.베트남.대만.싱가포르등의 유교도 신자수까지 임의적으로 재단하려 한것을 보았습니다.이는 일본의 항복을 인정치않는 일본 총독부령 83호 시각(신도.불교.기독교만 포교종교, 포교종교가 그 나라 전통 국교를 이기기라도 하는건가?. 더구나 일본이 패전국이 되어 일본 총독부령 83호의 신도.불교.기독교는 종교주권이 없어졌는데...)을 되살린 국제법 위반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종교신자수를 집계하는 방식인데, 그 불법적 일본 강점기 시각을 다른나라에까지 적용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일본 항복후 미소 군정때 조성성명 복구령등으로 모든 한국인은 국교차원의 조선성명(한문성씨.본관)을 행정기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오고 있는 나라입니다. 국제법과 국내법에 위배되는 일본 강점기 시각같은 종교인구 표본조사등을 실시하며, 패전국 일본 총독부 83호 시각을 또다시 써먹는 세력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해도 패전국 일본 시각이라 무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