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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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키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이후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명칭 또한 경학원으로 바뀌어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 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에 의해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를 세웠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원래의 성균관이 가지고 있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근대적 형태의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4). 성균관. 종교학대사전. 1998.8.20/한국사전 연구사.
우리나라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데서 시작되었으며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이조 일대를 걸쳐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 이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 8ㆍ15해방 후에 성균관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5). 성균관
[ 成均館 ]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이은석/2006.11.15/(주)신원문화사.
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이다. 고려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성균관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1946년 성균관 대학이 설립되어 그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6). 宮으로 표현되는 성균관에 대한 사전적 서술내용.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성균관을 반궁(泮宮).근궁(芹宮)으로 서술함. 필자가 첨언하여 설명하면 泮宮은 학교형태의 宮이란 의미이고, 芹宮은 문묘(文廟:공자를 모신사당)를 가리키는말로 공자님에 대한 제사기능가진 제사기능의 宮이란 의미임. 그리고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성균관과 같은말이 學宮으로 나타나고 있음.
4. 성균관대학교가 가지는 학술적 입장.
대학 소개란의 약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음.
600년 민족교육의 산실 성균관대학교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얼을 계승해 나아가는 민족의 대학으로 남아 있으리라!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보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 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본 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 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 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교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 대학시대는 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본적인 것으로 발전하여 왔다.
# 고전대학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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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대학시대
근대 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 1기는 개화기, 제 2기는 수난기, 제 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 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 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 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교육기관은 과거 최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 현대 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다. 그 중에서 제 1시기로는 성장기, 제 2시기로 발전기, 제 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이석구(李錫九) 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 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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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교황 윤허 서강대에 대한 한국내 학술자료 검토.
1. 성균관대(宮 성균관대, 泮宮.學宮이 성균관의 별칭임)와 서강대(御 서강대, 敎皇聖下 윤허 대학으로 귀족계파인 예수회에서 설립한 대학인데 교황윤허 및 한국유교와 성균관대에 대한 이해때문에 世界史的 측면에서 그 Royal자격을 인정하여 御 서강대라 함)의 한국 및 해외에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의견.
宮 성균관대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Royal.Imperial대학이며, 가톨릭 예수회는 교황청의 실세계파로 가톨릭의 위기를 막아낸 계파입니다. 일본 강점기 여파 및 해방후의 일본잔재 미청산으로 친일언론에서 비롯된 대중언론 의견들은 국사 최고대학인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성균관대로 600년 역사 이어짐) 중심이 아닌데, 이런 혼란상황에서도, 敎皇聖下 윤허의 御서강대 몇 몇 학자와 전문가들은 망각하고 있던 전통적인 宮 성균관대의 일반적 지위를 점차적으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가는데 저와 개인적 인연을 가진분들 및 다른 분들 상당수가 드러내지 않고 다양하게 기여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유교와 가톨릭 예수회가 상호 전이가 가능하다는 마테오리치 신부님의 의견은 지속적으로 반영해 나갈것이며, 御서강대와 宮성균관대는 학풍이 다르고, 엄밀히 말해 종교가 같지는 않으며,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도 어쩔수 없는 것이기에 약간의 문화충돌이나 종교마찰은 불가피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神道國家 일본이 항복하였고,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은 무효라고 UN총회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가장 가까운 시대인 조선(대한제국)의 國敎인 儒敎를 이어받아 국제법과 역사.관습적으로 유교국입니다. 儒敎를 국제법적.역사와 전통측면의 관습법적 國敎로 하면서 모든 국민이 조선의 한문성씨와 본관을 의무적으로 등록하는 儒敎國이 한국입니다.
*필자 주 4). 敎皇聖下 윤허 대학들은 유럽에서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예수회는 明나라 선교이후 유교문화권에대한 이해폭이 서양 기독교세력중 가장 넓은 계파며, 교황청의 실세로 불리는데, 예수회 산하 전세계적 네트워크가 있음.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요한 비오 12세의 허락으로, 대학설립을 기획하여, 1955년 창립사업이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Wisconsin) 관구에 이관됨으로써,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서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킬로렌(Killoren,K.E.)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설치하였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와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증설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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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1956년 인가된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에서 1960년 서강대학으로 설립하였다.
이하 생략....
4.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요약: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960년 2월 서강대학의 설립인가로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설립배경은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허가로 대학설립을 기획, 1956년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가 인가되어 현재의 위치에 개교하였다. 초대학장에 K.E. 킬로렌 신부가 취임하였고, 1964년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1967년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70년 종합대학인 서강대학교로 개편, 초대총장에 J.P. 데일리 신부가 취임하였다.
이하 생략....
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서강대학교.
西江大學校
사립 종합대학
법인명은 학교법인 서강대학교이며, 예수회의 교육이념에 근거하여,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1번지에 있다. 1960년 4월 예수회에서 서강대학을 설립했고, 1970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하 생략....
6. 서강대학교 홈페이지에 나타난 서강의 발자취.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창립이 기획되어, 1960년 가톨릭 예수회에 의해, 6개학과 158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부터 국제화된 커리큘럼, 학생당 최적의 교수비율, 국내 최초 교수 안식년제 도입등으로 대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1966년 경향 교육상 수상을 통해, 국내 최우수 모범대학으로 선정되었다.
III. 결론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출판사들의 백과사전, 성균관대 학교당국이 현재의 私立 성균관대(王立과 私立 2중 형태를 가지며, 이는 서강대도 비슷함)가 조선(대한제국)의 王立(國立) 성균관을 승계했다고 공통된 의견을 보이는것은 일본이 패전국에 UN적국이되어, 강제적인 을사조약(을사늑약)부터 강제적인 한일합방(한일병합) 및 그이후의 불법 강제점령기까지 통틀어서, 일본의 월권적 행위를 무효로 보고,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대한제국) 최고의 대학 성균관의 최고대학 기능회복을 정당한것으로 보는것 같으며, 1945년 11월 30일의 전국 유림대회 및 그 이후의 유림들의 결의를 반영하여 그렇게 서술한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주안점은 일본의 강제점령기를 무효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한것 같습니다.
일본 강점기때 최고대학인 성균관의 교육기능은 폐지되거나 단절.격하로 수난을 겪었지만, 공자님(先聖,文宣王)과 맹자님 및 여러 현인들에 대한 문묘제사 기능은 그대로 남겨져서, 그 제사 기능을 성균관이 이어왔고, 성균관대 명륜캠퍼스가 과거 성균관의 위치에 그대로 있어서 그러한 역사적 근거들도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와 전통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적절한 시기에, 일본강점기 잔재(교육분야 일본강점기 피해는 京城帝大및 일본 강점기 官立 전문대나 國.公立 中高 설립임, 京城帝大가 중심된 후발대학이 서울대임), 친일파나 친일언론등이 제재당하지 않아, 그들에서 비롯된 대중언론세력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成均館의 승계대학인 성균관대학교의 최고학벌 지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언론의 동태기때문에, 國史 성균관의 최고대학(Royal자격도 있음) 學閥을 승계한 해방후의 사립 성균관대학교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최고대학이며, Royal.Imperial대학의 學閥지위를 가졌다는것은 국가차원 및 학술적 차원에서는 분명합니다. 敎皇聖下 제도는 계속 이어지는 제도기때문에 韓國史의 최고대학인 성균관대학교(宮 성균관대)와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예수회 산하 서강대학교(御 서강대)가 연계하여 국내와 해외에서 동등한 Royal.Imperial 學閥을 확립하는것은 필요하며, 서강대는 세계사에 강한 특성으로 성균관대와 상호 의존적 Royal.Imperial대학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 상호 교류 확대와 상호 지원등은 두 Royal대학사이에 필요한 조치로 판단됩니다.
*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논문이 아니니까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