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일본강점기때 폐지된 최고대학 성균관. 성균관대학교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본 블로그에 대한 사이버테러는 국제법과 국내법에 저촉될 수 있음. 이 블로그는 UN적국 일본(패전국, 전쟁범죄국가)에 대한 규제조항을 어기려는 현상개변 저지, 한국내 일본 잔재 청산을 위한 블로그임.  이전 야후 코리아 블로그에 써놓았던 글 중 필요한 부분은 다시 手作業으로 본 블로그에 옮겨 적을 계획입니다. 아주 힘들고 벅찬 작업이 될것입니다. 인용자료는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공공성을 가지고 Report자료로 사용하오니 이 점 충분한 양해 바랍니다. UN적국 일본 강점기의 죄상규명과, 한국인의 주권회복용으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Report 제목: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백과사전, 성균관대학교 학교당국의 학술적 서술내용 고찰.   

 

I. 序論.

 

기본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일본과 친일파등에 적대적 일 수 밖에 없는 독립투사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계한 측면도 있으므로, UN적국 일본(패전국, 전범국)과 한국내 일본강점기 학교 및 여러 잔재들은 사회운동이나 국회차원의 결의, 정부조치등 어떤 형태로든 올바르게 제재.청산해 주는게 제대로 된 자세임.

 

일본강점기때 강제로 설립된 대학교의 대표 경성제대 후신이며, 해방후 미군정서 패전처리용으로 재편된 Monkey서울대.

 

1945,11.30 임시정부 요인들과 남북 유림들의 결의로 성균관대를 설립(조선시대에 설립된 국사영역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 후신으로 600년 전통의 한국 최고대학 학벌. 그 이전의 유교 최고대학으로는 王朝가 각각 다른 고구려 태학, 백제의 오경박사,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이 있었음. 불법적인 강제 한일병합이후 야만족 일본의 강점기에 교육기능이 폐지되어, 1945년 11월 재건형식 설립결의)키로 결의한것을 보았으면 경성제대나 일본 강점기학교들을 재활용하지말고 폐쇄하여 방치하여두는게 한국인에 대한 사죄인데, 그 당시 문교부장이던 친일파 유억겸(유성준.유만겸.유억겸 3명의 가족이 친일파) 주도로, 일본강점기학교 경성제대등을 다시 규합하여 아웃사이더같은 점령대상 일본잔재 친일파들의 국립대로 만들려고 하니까, 전국적인 국립대 설치안 반대운동(國大案 반대운동, 해방민족 한국인의 대한민국 공식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이고 일본 통치기구는 점령상태기 때문에 시기가 맞지 않는다고 반대함)이 일어난것임. 

 

경성제대나 일본 국.공립 중고들은 재활용하지말고 방치.폐교조치했어야 민족정기가 제대로 회복되는것은 자명한 일이었음.   

 

일본 강점기학교,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 친일파로 두 번에 걸쳐 거론한 친일파, 일본강점기잔재에 대한 면죄부 부여는 불가하며, UN적국 등록처럼 방어조치를 해놓아야 됨. 한국정부가 없을때 헌법역할을 하던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서 한국을 해방시키기로 하여, 하위법인 미군정령이 준거법으로 작용하던 당시 해방 한국인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인 총독부 인원을 재활용한것은 한국에대한 몰이해나 실수처럼 돌발변수로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보이지 않는 비극이었음. 점령대상 패전국 일본의 통치기구 잔재인 총독부에 남은 친일부왜배들이 하부 실무인력으로 해방한국의 하부토대를 공고하게 구축한것은 지금까지 한국유교와 성균관대, 한국 학교, 한국 전통과 반대작용을 하며 대립되고 있는 양상임. 한국인을 해방민족으로 대우하고, 일본 통치기구들(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강점기 국.공립대학, 국.공립 중고등학교, 일본 총독부 포교종교인 신도.불교.기독교잔재, 총독부 및 행정기구, 군.헌병.경찰, 친일언론, 관변 억압기구등)은 점령대상으로 이분하여 대우하는것은 포츠담선언과 미군정의 입장이 다를수 없으므로, 경성제대가 주축인 그 후신 Monkey 서울대나 일본강점기 관립대학, 국.공립 중고등에 대한 행정처리는 승전국인 미군정 점령행정당시 3년정도 기간에 변경되거나 적용된 패전처리업무의 하나로 적용하는것이 옳음.     

 

II. 本論.

 

1].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최고학벌 성균관대(Royal, Imperial학벌)의 정통성에 대한 학술적 서술자료 검토. 

 

각종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동아, 파스칼대백과,한국의 세계 대학사전등)을 보면 사립대학이 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한 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는데,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의 승계대학은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임은 분명함(泮宮.學宮.芹宮.태학의 宮 성균관대).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 필자 주1). 1979년이면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당시인데, 임시정부에서는 위관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상황을 가장 잘 반영하던 당시의 임시정부 요인 기준으로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적인 친일파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음. 필자는 특정 정당의 정치인은 아니고, 그때 그때 정책과 공약을 보고 지지정당을 정하는 보통 유권자중의 한명인데, 민주통합당이 아시아 대륙지향 한국의 경제현실과 미래에 더 적합한 정당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民主.自由 특성이 강한 민주통합당을 양당제하에서 차기선거부터 새누리당보다 더욱 지지할것같음.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연혁)

 

그 전신은 조선초인 1398년(태조 7) 현재의 위치인 숭교방(숭교방)에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성균관은 최고의 국립 대학으로서, 국가에 필요하고, 유능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갑오경장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여 성균관은 제향기능을, 경학과는 교육기능을 맡게 되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며, 교육과정은 유학경전을 위주로 하되, 역사학.지리학.수학등 근대적인 교과목이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만 담당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경학원에 명륜학원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 명륜전문학원으로, 1939년에 명륜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4년 일제의 강요로 명륜연성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광복과 함께, 같은 해 9월 명륜전문학교로 재개교하였다. 명륜전문학교는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것은 아니었지만,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

 

1946년에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여, 같은 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초대학장에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으며,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였다. 1953년 2월에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으로 편성하였다.

 

같은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이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변경하고, 1963년에 다시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조직 변경하였다. 

 

이하생략....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1398년(조선 태조 7)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것이 그 시초이다.

 

이하 생략....  

 

2). 파스칼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種路區)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398년(태조 7) 현재 위치인 숭교방(崇敎坊)에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출발하였다. 광복뒤인 1946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가 열려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석구(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재산을 희사하고,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 같은해 9월 성균관대학으로 인가되었다.

 

이하 생략....  

 

3). 한국의 세계 대학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1398년(조선 태조 7) 이 성계가 조선의 국립 최고학부로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한것이 이 대학의 시초이다. 1895년(을미년) 칙령에 의해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됐고, 학제상 근대 교육체제를 확립함에 따라 근대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개편되었다.

 

.....중략.....

 

조선시대 이황, 정약용, 신채호, 김창숙 선생등 한국사에 남을 많은 위인을 배출하였다.

 

* 필자 주 2). 세계 대학사전은 굿모닝 미디어란 신생 미디어와 관련되었음.<네이버 지식백과>등에서 세계대학사전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그 명칭이 대학사전으로 바뀌어서 서비스 되고 있음.

 

4). 위키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다. 1398년 조선이 유교 건국이념에 따라 숭교방(崇敎坊)에 설립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成均館)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 후 1895년 고종의 칙령에 따라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였으며, 이 경학과는 성균관의 고전적 대학에서 근대적 대학으로의 변혁을 상징한다. 경학과는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하되, 역사학.지리학.수학등의 근대적 학문을 부가하였다. 1911년 일제가 성균관을 폐지하고 기능을 축소하였으며, 이름을 경학원(經學院)으로 변경, 1930년에 조선인들의 강렬한 열망에 따라 그 부속으로 

'명륜학원'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는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하였고, 1944년 친일 유림 양성소격인 '명륜 연성소'로 개편되어 민족 고등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 전국 유림대회가 열려 일제가 박탈한 고등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대학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김창숙을 대표로 삼았다. 이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면서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김창숙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 필자 주 3). 위키백과에 서술된 내용은 국내 백과사전들과 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한국사적 입장과 약간 달리, 세계사적 측면도 가지고 있음.     

 

3. 성균관이란 문구로  성균관대학교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봄.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성균관과 현대 성균관대학교와의 관계를 살펴봄.

 

성균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

우리 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이와 같은 성균관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존치되었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漢陽遷都)에 따라 새 도읍지의 동북부지역인 숭교방(崇敎坊) 부근(지금의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터가 정해져서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에 대성전(大聖殿 : 단종 때 大成殿으로 개칭됨.)과 동무(東廡)·서무(西廡)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정록소(正錄所)·식당·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조선 건국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지면이 넘쳐 next 블로그로 분할하여 연재합니다. 블로그 아래로 쭉 따라가서 Daum 블로그 번호가 매겨진 끝부분까지 읽어보세요. 현재 그 페이지 번호가 2번이라고 나와있지요. 그러면 그 이전 page번호를 클릭해서 이어지는 내용을 읽으시면 됩니다.  

1~몇백번 번호 매겨짐. To be continued....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출처] 성균관 | 두산백과
<dd>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dd>
[출처] 성균관 | 두산백과

두산백과

성균관

[ 成均館 ]
요약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js/flashObject.js?20130419"></script>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성균관 명륜당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출처] 성균관 | 두산백과

 

두산백과

성균관

[ 成均館 ]
요약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js/flashObject.js?20130419"></script>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성균관 명륜당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출처] 성균관 | 두산백과
두산백과

성균관

[ 成均館 ]
요약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js/flashObject.js?20130419"></script>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성균관 명륜당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출처] 성균관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