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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5일(음력 3월 5일)은 유교문화권의 24절기인 청명(淸明)입니다. 식목일이기도 함. 한식(寒食)은 2022년 4월 6일(음력 3월 6일). 중국은 청명절에, 한국은 한식에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제..

2022년 4월 5일(음력 3월 5일)은 유교문화권의 24절기인 청명(淸明)입니다. 식목일이기도 함. 한식(寒食)은 2022년 4월 6일(음력 3월 6일). 중국은 청명절에, 한국은 한식에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강합니다.

 중국에서는 명(明)나라이후 한식이 폐지되고 다시 청명절을 쇠는데, 한국은 신라(新羅)시대 이후 중국에서 한식을 받아들인 이후, 그대로 한식날에 조상에 성묘등을 하는 풍습이 강합니다.일반적으로 한식날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찬 음식을 먹습니다. 한식(寒食)은 숙식(熟食)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불을 사용하지 않는 한식날에는 미리 익혀둔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국 세시풍속사전은 냉절(冷節)편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볼 때, 한식날 찬 음식을 먹는 전통을 지키겠다면, 미리 익혀서 차게 해둔 찰밥이나 약밥, 떡, 식혜, 전(煎), 국, 김치, 나물, 김, 발효시켜둔 음식, 익혀서 차게 해둔 채소, 육류 및 냉면, 콩국수등을 드시면 좋겠습니다.중국 한족전통의 청명절의 역사는 대략 주나라때부터로, 지금부터 약 2천5백여년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역서(历书)>에 "춘분후 15일을 청명이라 하니,이 시기 만물이 맑고 청명해진다." 하여 청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합니다.

특히 중국은 답청(踏靑)이라 하여 청명절에 교외(郊外)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풍습이 있습니다. 

 


[1]. 24절기중 하나이며 주요 명절인 중국의 청명절, 그리고 중국 당나라때 신라에 들어온 한식에 대한. 개괄설명. 

 

청명(淸明)은 24절기(節氣)중의 하나입니다. 24절기는 한(漢)나라 이후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 동아시아 한국등 오래된 유교국들에 전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청명과 한식은 음력 2월에 있을 수도 있고, 음력 3월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청명(春分)절기때는 유교에서 최고신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 다음의 하위신이신 오제[五帝. 다신교 전통의 유교에서 조상신 계열로 승천하여 최고신 하느님(天)다음의 하위신이 되심]중의 한분이신 봄의 신[춘(春)의 제(帝)] 태호(太皥)께서 다스리는 절기입니다.

 

참고로 예기(禮記) 월령(月令)의 오제(五帝)는 다음분들입니다.

 

춘(春)의 제(帝)는 태호(太皥), 하(夏)의 제(帝)는 염제(炎帝), 추(秋)의 제(帝)는 소호(少皥), 동(冬)의 제(帝)는 전욱(顓頊). 그리고 계하(季夏)의 달인 음력 6월에는 중앙에 황제(黃帝)를 넣고 있습니다.

 

중국은 청명절(淸明節)에, 한국은 한식에 조상의 묘(墓)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강합니다. 특히 중국은 답청(靑)이라 하여 청명절에 교외(郊外)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풍습이 있습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거의 같은 춘분(春分)을 지나서 청명은 낮이 확실하게 더 길어지는 때로서,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성묘(省墓)도 하고 들놀이등의 답청(靑)도 하는 날입니다. 이 날부터 날이 풀리기 시작해 화창해지기 때문에 청명이라고 한다고 두산백과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 다 음 -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을 일절 금단하던 예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의 옛 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또한, 개자추전설()이 있는데...

 

한편, 한식에 대해 두산백과는 이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식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주과()를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만일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고 한다. 또 묘 둘레에 나무도 심는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이날 성묘하는 습속은 당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며,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신라 때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 내병조()에서는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전 안에 있는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주었다...

 

한국 세시풍속사전에 의하면 청명과 한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국에서 한식은 산서(西)지방에서 시작되어 남북조시대 말부터 전국적인 행사로 확대되었다. 시행 초기에는 날짜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후한()시대부터 동지 후 105일 전후 3일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4절기의 하나로 한식과 날짜가 겹치는 청명()은 동지 후 107일로 밀려났으며 한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그리고 한식은 농사의 시작과 겹치므로 풍년을 기원하여 제기차기, 그네타기, 갈고리 던지기 같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으며 당나라 무렵부터는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묘()가 중요한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남송 때부터 한식의 금화() 풍속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명나라 때에는 한식 자체가 폐지되었다. 대신 청명이 다시 부각되었으며, 청명의 날짜도 다시 동지 후 105일로 환원되었다...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자 문장가, 관료였던 김종직( )은 청명과 한식에 대해 이렇게 한시(漢詩)를 지었습니다.

 

 (청명한식일년춘 절물반반입안신 ; 청명 한식은 1년의 봄이라, 시절 물건들이 골고루 눈에 들어 새롭네.)<김종직 한식>

 

. 출처: 청명[淸明]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한국 고전 용어사전은 청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다 음 -

청명1

[  ]

24절기() 중 제5 절기로서 춘분(春分)과 곡우() 사이. 곧 양력 4월 5일 혹은 6일에 해당됨. 청명일().

용례

  • 예조에서 여제의를 상정하여 계문하기를, “경중과 외방의 각 고을에서 매년 봄 청명일과 가을 7월 15일, 겨울 10월 초1일에 제사가 없는 귀신을 제사하되, 그 단은 성북의 교간에 설치하고, 그 제물은 경중에서는 희생으로 양 3마리, 돼지 3마리를 쓰고 반미는 45두로 하소서.…” 하였다. ; 禮曹詳定勵祭儀以聞 京中及外方各官 每歲春淸明日 秋七月十五日 冬十月初一日 祭無祀鬼神 其壇設於城北郊間 祭物京中牲用羊三豕三 飯米四十五斗… [태종실록 권제7, 24장 앞쪽, 태종 4년 6월 9일(무인)]

. 출처: 청명1 [淸明]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 청명(淸明)에 대한 여러가지 사전류.자료들의 설명 

 

1]. 청명(淸明)에 대한 표준 국어대사전의 설명.

 

청명(淸明)

이십사절기의 하나. 춘분() 곡우() 사이에 들며, 4 5 무렵이다.

. 필자 주 1). 답청(踏靑)에 대한 표준 국어대사전의 설명

  중국에서, 청명절에 교외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던 .  

 

2]. 청명절(淸明節)에 대한 중국 시사문화사전의 설명.

 

청명절

[  , ngmíng Festival , ngmíngjié ]

동지가 지난 후 104일이 되는 날로 24절기의 5번째이며, 태양 황경이 15도가 되는 때. 음력으로 3월 경이며, 양력 4월 5일 전후로 조상의 묘를 돌보는 풍습이 있다.

 

. 출처: 청명절[清明节, Qīngmíng Festival, Qīngmíngjié]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 2. 20., 이현국)

 

3]. 중국 신화망의 청명절에 대한 소개.  

http://kr.xinhuanet.com/2018-04/02/c_137082686.htm

청명절의 전통풍습, 당신은 아시나요?

.출처: 신화망/2018-04-02/편집:박금화

 

<신화망 베이징 4월 2일>

지금까지 2,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청명절은 중국의 중요한 전통적인 명절 중 하나로서 답청절(踏靑節, 들놀이 하는 명절)이라고도 부른다. 양력 4월 5일 전후가 청명절이고 24절기 중 하나다. 청명절에 관해 어떤 전통적인 풍속이 있는지 함께 알아보기로 하자.

 

* 성묘

조상에게 제사지내고 성묘하는 것은 청명절의 가장 중요한 습속이다. 청명절에 성묘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 들놀이

고대에는 탐춘(探春), 쉰춘(尋春, 봄을 찾다)등이라고 불렀다. 봄이 대지를 찾은 4월 청명절은 봄날 들놀이 하기에 아주 적합한 시즌이다.

 

* 연날리기

청명절 전후는 1년에서 연날리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로 간주되고 있다.

 

* 그네타기

이것은 고대 청명절의 습속이다. 사람들은 그네를 타면 모든 병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네가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풍족한 생활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 버드나무 가지 꽂기

청명절 때, 민간에는 버드나무 가지 꺾기, 버드나무 가지 달기, 버드나무 가지 꽂기등 습속이 있다. 고대 사람들은 버드나무 가지가 액막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 식수

청명절 전후 쯤이면 봄날 햇볕에 따스하고 봄비가 많이 내려 심은 묘목의 활착률이 높고 성장이 빠르다.

 

. 원문출처: 신화망

 

4]. 청명절[淸明節,清明节 qīngmíngjié]에 대한 베이징관광국의 설명

 

칭밍제(清明节 qīngmíngjié 청명절 )
청명절은 음력 24절기 중의 하나로, 이 시기 만물이 맑고 청명해진다하여 청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 전통적으로 밭갈이 파종을 하는 시기이며, 성묘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청명절은 음력 24절기 중의 하나로, 음력 2월 중춘(仲春)과 음력 3월 늦봄(暮春)사이이며 동지(冬至)로부터 108일후다.

중국 한족전통의 청명절의 역사는 대략 주나라때부터로, 지금부터 약 2천5백여년전의 역사를 가졌다. <역서(历书)>에 "춘분후 15일을 청명이라 하니,이 시기 만물이 맑고 청명해진다." 하여 청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청명시기는 기온이 오르고 밭갈이와 파종에 적합한 시기다. 그런탓에 청명전후로 파종을 하였다.

또 청명절은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성묘를 가는 날이다.

 

2006년 5월 20일, 청명절은 국무원의 비준에 의해 중국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 필자 주 2).  여기서 언급하는 历书(역서)는 역사서(歷史書)가 아니고, 책력(冊曆)이나 역법(曆法)에 관한 서적인 역서(曆書)를 의미합니다. "춘분후 15일을 청명이라 하니, 이 시기 만물이 맑고 청명해진다"라는 曆學的 의미가 청명절의 본래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해와 달의 운행, 기상변동의 과정을 관찰한 결과 봄날씨가 화창하여 청명하니, 기온이 오르고 밭갈이와 파종에 적합한 것으로 오랜 관찰을 하여 선택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조에 대한 제사가 꼭 날씨 좋은 날에만 하는건 아니지만, 본격적인 봄날씨로, 밖에서 선조에게 제사지내기 좋은 날임은 분명합니다.         

 

5]. 청명절에 대해 인민넷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인민넷 | http://korea.cpc.people.com.cn/74090/15402083.html

4월 5일은 중국의 전통명절인 청명절입니다. 2천5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고있는 청명절은 지금도 해외 화교들을 포함한 모든 중화민족의 중요한 전통명절의 하나입니다. 현재 청명절은 단순히 조상에게 제를 올리거나 선인들을 기리는 의미를 넘어, 봄철 야외 소풍을 나가는 등 자연과 가까와지는 봄철 행사로도 인식되고있습니다.

중국에서는 25개 민족이 청명절 풍습을 가지고있습니다. 비록 풍습에서 각자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있기는 하지만 성묘나 조상제, 야외 소풍 등 기본적인 내용은 서로 비슷합니다....

청명절은 주로 조상을 추모하는 명절인데 행해지는 주요 전통 의식으로는 성묘나 제례 등이 있습니다. 이런 행사들은 조상에 대한 례의, 가족간 화목, 효의 구체적인 표현으로도 해석됩니다. 한족과 일부 소수민족들은 모두 청명절에 성묘하는 풍습을 가지고있습니다.

옛 풍속에 따르면 성묘때 사람들은 술과 식품, 지전 등을 준비하는데 소지한 식품을 조상묘에 공봉하고 나서 지전을 태웁니다. 다음 분봉에 새흙을 올리고 거기에 파란싹이 움튼 나무가지 몇개를 꺾어다 꼽아놓고 절을 올리며 제를 지냅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술과 차린 음식을 그 자리에서 전부 음복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청명절의 또 다른 풍습으로 사람들은 이날 취사를 금하고 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이는 "청명절"과 "한식절"의 화합으로 유래한것입니다. 성묘는 원래 한식절의 주요 행사 내용이였습니다. 한식절은 2600여년전 진문공(晉文公)이 충신 개자추(介子推)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낸것입니다. 그후, 한식과 청명이 린접한 관계로 취사 금지의 성묘 풍습이 점차 청명 행사에 합쳐져서 치러지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한식이 청명의 별칭으로 정착하게 되였고 청명절의 주요 풍습으로도 변모하게 되였습니다.

성묘와 취사 금지를 제외하고 청명절의 기타 풍습으로는 또 소풍, 연날리기, 그네타기와 오락게임 등이 있습니다. 중국의 남부 지방에서는 "누에 아가씨"가 수많은 양잠민들에게 에워싸여 연도에 누에 고치를 뿌리는 "누에 고치 축제"와 누에신 제례행사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청명절에는 성묘에서 보여지는 슬픔과 쓰라림의 눈물도 시야에 들어오고, 소풍과 오락게임에서 전해지는 즐거운 웃음소리도 들려옵니다. 추모와 애도를 바탕으로 봄철 건강단련 까지 이중 색채를 가지는것입니다.

청명때면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날씨가 따뜻해 지면서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데 봄갈이와 봄철 파종의 호시절입니다. 옛날부터 "청명을 전후해서 파종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농작지마다 농민들의 일손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청명절은 가지고있는 문화적 의의도 남다릅니다.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면서 혈육의 정을 더한층 돈독히 합니다. 오늘의 청명절은 선인들에 대한 후손들의 추모는 물론 이들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전통문화의 미덕 고양을 다시 한번 깊이 반성해 보는 좋은 계기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 필자 주 3). 지전에 대해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전[  ]

 

요약: 동전을 본떠서 만든 돈 모양의 종이.

 

명전()·조전()·제천정() 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은()나라(?∼ 1100) 때 비롯한 중국 민속이라고 하나, 문헌에 의하면 위진() 남북조시대( 3∼6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종이를 돈 모양으로 만들어 죽은 사람의 시체와 함께 묻는 명기()로서 사용하였다. 이미 한()나라 때 실제 돈을 묻는 풍습이 있었고, 이것이 점차 종이로 만든 돈으로 바뀌었다. 당나라 때부터 북송()시대(7∼12세기)에는 더욱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 무렵에는 명기로서만이 아니라 상제() 때도 지전을 태워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병이 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면서 태워 재해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출처: 지전[紙錢] (두산백과)

 

6]. 청명(淸明)에 대해 한국 민족 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

 

내용

춘분과 곡우 사이에 들며, 음력 3월, 양력 4월 5일경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15°에 있을 때이다. 이날은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동시에 오늘날의 식목일과도 대개 겹치게 된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청명을 기하여서 봄일을 시작하므로 이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둑의 손질을 하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작업이 된다. 다음 절기인 곡우 무렵에는 못자리판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많이 짓는 경우에는 일꾼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청명·곡우 무렵이면 서둘러 일꾼을 구하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 청명조에 “대궐에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주는데, 이것은 중국의 주나라 이래 당나라·송나라에서도 행하여지던 예로부터의 제도이다.”라고 하였다. 『열양세시기』에서는 이와 같이 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식조에 기록하고 있고, 청명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불은 한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한식조에 기록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최남선()은 한식의 풍속을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여, 해마다 봄에 신화()를 만들어 구화()를 금지하던 예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청명과 한식은 흔히 같은 날이 되기 때문에 뒤섞이는 경우가 많으나,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이므로 농사관계사항을 기록하는 것이 옳다.

.출처:청명 [淸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청명(淸明)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청명

[  ]

요약 24절기 중 하나로 춘분과 곡우 사이에 든다. 이 날 부터 날이 풀리기 시작해 화창해지기 때문에 청명이라고 한다. 농가에서는 이 무렵 바쁜 농사철에 들어간다.

24절기 가운데 다섯째에 해당하며, 춘분()과 곡우() 사이에 든다. 음력으로는 3월이지만, 양력으로는 4월 5·6일 무렵이므로 태양의 황경()이 15˚에 있을 때이다. 보통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한식과 같은 날이 많고, 오늘날의 식목일()과도 겹치는 경우가 흔하다.

청명일()의 준말로, 이때부터 날이 풀리기 시작해 화창해지기 때문에 청명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청명에서 곡우 이전까지의 15일 동안을 다시 3후()로 나누어 1후에는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2후에는 들쥐 대신 종다리가 나타나며, 3후에 비로소 무지개가 보인다고 하였다.

농가에서는 이 무렵부터 바쁜 농사철에 들어가 논밭의 가래질, 논밭둑 다지기, 보리밭 매기, 채소 파종 등을 시작하느라 일손 구하기가 힘들다. 또 《동국세시기()》 청명조에 따르면, ‘이 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로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 뒤 다시 각지의 관청에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이 불을 다음날인 한식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 바로 한식이다.

이 무렵을 전후해 찹쌀로 빚은 술을 청명주()라 하여 담근 지 7일 뒤 위에 뜬 것을 걷어내고 맑은 것을 마신다. 또 이때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한 해 동안 먹을 장을 담그기도 하고, 서해에서는 곡우 무렵까지 작지만 연하고 맛이 있는 조기잡이로 성시()를 이루기도 하였다. 청명과 관련된 속담에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가 있는데, 청명과 한식이 겹치거나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아 별 차이가 없음을 나타낼 때 흔히 쓴다.

 

. 출처: 청명[淸明] (두산백과)

 

8]. 청명(淸明)에 대한 한국 세시풍속사전의 설명

정의

음력 3월에 드는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 청명()이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내용

청명은 음력으로는 3월에, 양력으로는 4월 5~6일 무렵에 든다. 태양의 황경()이 15도에 있을 때이다. 이날은 한식()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 있으며,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다.
중국에서는 청명 15일 동안을 5일씩 3후()로 나누어 초후()에는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후()에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말후()에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 청명조()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며, 임금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라 한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이라고 한다. 『열양세시기()』에서는 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식조()에 기록하고, 청명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청명과 한식은 흔히 같은 날이 되기 때문에 뒤섞이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 민간에서도 뚜렷한 구분 없이 전해지고 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봄밭갈이를 한다.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로 날씨와 관련된 속신이 많다. 청명이나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좋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점친다. 바닷가에서는 청명과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어종이 많아져서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하여 날씨가 좋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이날 바람이 불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파도가 세게 치면 물고기가 흔하고, 날씨가 맑아도 물밑에서 파도가 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경남 사천에서는 청명날의 날씨가 좀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에 풍년()이 들고, 너무 맑으면 농사()에 시원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청명에 나무를 심는데, 특히 ‘내 나무’라 하여 아이가 혼인할 때 농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날 성묘()를 가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지상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을 해도 좋다고 믿는다. 또 이날은 손이 없기 때문에 묘자리 고치기, 비석 세우기, 집 고치기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한다.

의의

청명이란 말 그대로 날씨가 좋은 날이고, 날씨가 좋아야 봄에 막 시작하는 농사일이나 고기잡이 같은 생업 활동을 하기에도 수월하다. 곳에 따라서는 손 없는 날이라고 하여 특별히 택일을 하지 않고도 이날 산소를 돌보거나, 묘자리 고치기, 집수리 같은 일을 한다. 이러한 일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겨우내 미루어두었던 것들이다.

 

. 출처: 청명[淸明] (한국세시풍속사전)

 

 

[3]. 한식(寒食)에 대한 여러가지 사전류.자료들의 설명 

 

1]. 한식(寒食)에 대한 표준 국어대사전의 설명.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로서 4 5일이나 6일쯤이 되며, 민간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사초()하는  묘를 돌아본다

2]. 한식절(寒食節)에 대한 중국 시사문화사전의 설명.

한식절

[  , Cold Food Festival , Hánshíjié ]

동지()가 지난 후 105일이 되는 날로 청명절() 전후 3일 중의 한 날과 겹치며, 양력으로 4월 4일 또는 5일에 해당한다. 이 날에는 조상의 묘를 돌보고, 불을 쓰지 않고 차가운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다.

 

. 출처: 한식절 [寒食节, Cold Food Festival, Hánshíjié]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 2. 20., 이현국)

 

3]. 한식(寒食)에 대해 한국 민족 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

 

정의

명절의 하나.

 

내용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든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다. 그래서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아 3월 한식에는 꽃이 핀다.’는 말이 전한다.

한식은 어느 해나 청명절() 바로 다음날이거나 같은 날에 든다. 이때는 양력 4월 5, 6일쯤으로 나무심기에 알맞은 시기이다. 우리 나라에서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나무를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4절후 속에 들어 있지는 않으나 습속으로 전해 내려오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을 일절 금단하던 예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의 옛 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또한, 개자추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나라의 문공()이 국란을 당하여 개자추 등 여러 신하를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할 때, 배가 고파서 거의 죽게 된 문공을 개자추가 자기 넓적다리살을 베어 구워먹여 살린 일이 있었다.

뒤에 왕위에 오른 문공이 개자추의 은덕을 생각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면산()에 숨어(혹은 19년을 섬겼는데 祿을 주지 않으므로 숨었다고도 전한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개자추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면산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또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이날 문에 버드나무를 꽂기도 하고 들에서 잡신제()인 야제()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기도 한다. 특히,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고 하며, 한식날 비가 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제사)하고, 민간에서는 술·과일·포·식혜·떡·국수·탕·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지낸다. 이를 명절제사, 곧 절사()라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주과()를 마련하여 성묘하고,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식수도 하고 사초()도 한다.

만일 조상의 묘가 멀 때에는 묘지기가 대리로 제향(제사)를 올려준다. 이날 성묘하는 습속은 당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며,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신라 때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 내병조()에서는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전 안에 있는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주었다. 한식날부터 농가에서는 채소 씨를 뿌리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든다. 흔히,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국가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어 매우 꺼린다.

 

. 출처: 한식  [寒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식(寒食)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

 

한식

[  ]

요약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

청명절() 당일이나 다음날이 되는데 음력으로는 대개 2월이 되고 간혹 3월에 드는 수도 있다. 양력으로는 4월 5·6일경이며, 예로부터 설.단오.추석과 함께 함께 4대 명절로 일컫는다.

한식이라는 명칭은 이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옛 습관에서 나온 것인데, 그 기원은 중국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자추는 문공()과 19년간 망명생활을 함께하며 충심으로 보좌하였으나, 문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른 뒤 그를 잊어버리고 등용하지 않았다. 실망한 개자추는 면산()에 은거한 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문공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문공은 개자추를 산에서 나오게 하기 위하여 불을 질렀는데, 그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여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과 함께, 고대에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을 만들어 쓸 때 이에 앞서 일정 기간 구화()를 일체 금한 예속()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한식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주과()를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만일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고 한다. 또 묘 둘레에 나무도 심는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날 성묘하는 풍습은 당()나라 때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해진 것으로 신라 때부터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민속적 권위가 더욱 중시되어 조정에서는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근세에는 성묘 이외의 행사는 폐지되었다. 농가에서는 이날 농작물의 씨를 뿌린다.

 

. 출처: 한식  [寒食] (두산백과)

 

5]. 한식(寒食)에 대한 한국 세시풍속사전의 설명

한식

[  ]

 

. 분야   정일 

. 계절   봄(음력 3월)

. 날짜   양력 4월 5일경

. 다른이름   고초일(苦草日), 금연일(禁煙日), 숙식(), 냉절(冷節)   

. 관련속담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 관련풍속   성묘(), 산신제(서울지역), 개사초(改莎草), 제기차기, 그네타기, 갈고리던지기

. 관련속담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정의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는 4월 5일 무렵이다.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이다. 일정 기간 불의 사용을 금하며 찬 음식을 먹는 고대 중국의 풍습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금연일(), 숙식(), 냉절()이라고도 한다. 한식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명절이 아니다. 따라서 한식은 음력 2월에 있을 수도 있고, 음력 3월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2월 한식과 3월 한식을 구분하는 관념이 있다. 그래서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세월이 좋고 따뜻하다고 여기며, 3월에 한식이 있으면 지역에 따라서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

유래

한식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춘추시대의 인물인 개자추[, ] 설화이다. 개자추는 망명해 있던 진()나라의 공자 중이()를 위해 헌신했고, 중이는 마침내 진 문공(: 재위 .C. 636~628)으로 즉위했지만, 개자추에게는 아무런 벼슬을 내리지 않았다. 분개한 개자추는 면산()으로 은둔했고, 뒤늦게 이를 깨달은 진 문공이 개자추를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진 문공은 개자추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타죽고 말았다. 그래서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만을 먹는 한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대의 개화() 의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이 생명을 가지며, 생명이란 오래되면 소멸하기 때문에 주기적 갱생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불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오래된 불은 생명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오래 사용한 불을 끄고 새로 불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개화 의례를 주기적으로 거행했는데, 한식이란 구화()의 소멸과 신화() 점화까지의 과도기란 설명이다. 그리고 한식이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인 것도 28수(宿)의 하나이며 불을 관장하는 심성()이 출현하는 것이 이때이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개자추의 죽음은 구화를 끄면서 제물을 태우는 관습을 반영한 설화라고 한다. 이 중 개화의례와 관련짓는 후자의 설이 더 유력하다.

내용

한국에서 한식을 언제부터 명절로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문종 24년(1070) 한식과 연등 날짜가 겹치므로 연등을 다른 날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늦어도 고려 전기에는 한식이 중요한 명절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식에는 금화()와 성묘의 풍습, 투란(: 계란 위에 누가 그림을 더 잘 그리는지를 겨루는 유희) 놀이가 있었으며, 소나기가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로 여겨졌다. 고려시대에 한식의 시기가 변하였는데, 고려 후기에는 동지 후 105일이었지만, 전기에는 그보다 7일 정도 빠른 양력 3월 30일 무렵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도 한식은 중요한 명절로 지켜졌다. 한식을 주제로 한 많은 시가 전해지는 사실도 이를 반영한다. 한식에는 금화와 개화가 행해졌다. 세종 13년(1431)에 한식 사흘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으며, 매년 임금은 내병조()에서 바친 버드나무를 마찰하여 일으킨 불을 궁중에 있는 관청과 대신 집에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 숭배였다. 왕실에서는 종묘 제향을 지냈고, 종묘에서 제외되었거나 후손이 없는 왕과 비빈 등에 대해서는 성묘를 했다. 허물어진 능묘를 보수하기도 하였다.
또 민간에서는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절사()라 하여 산소로 올라가 성묘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식과 추석이 가장 성하여 교외로 향하는 길에 인적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농가에서는 이날을 기하여 밭에 파종을 했다.
이렇듯 한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요한 명절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특별한 행사 없이 지내는 경우도 많다. 특히 불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조상 숭배와 관련한 많은 행사들을 하고 있다. 집안에 따라서는 사당에서 조상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성묘를 하고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이때 서울 지역에서는 제사에 앞서 먼저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 성묘의 대상은 기제사를 받는 조상도 있지만,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 먼 조상이나 후손이 없는 사람인 경우도 많다.
또 손 없는 날 또는 귀신이 꼼짝 않는 날로 여겨 산소에 손을 대도 탈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소에 개사초(: 잔디를 새로 입힘)를 하거나 비석 또는 상석을 세우거나 이장을 한다.
한편, 한식은 농사를 준비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소를 부려보기도 한다. 또 한식 무렵이면 볍씨를 담근다. 그러나 씨를 뿌리면 말라죽거나 새가 파먹는 고초일()이라 하여 씨를 뿌리지는 않는다. 또 강원도 지역에서는 과일나무의 벌어진 가지 사이로 돌을 끼워넣는 과일나무 장가보내기를 하는데, 열매를 잘 열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한식의 날씨를 살펴서 그 해 시절의 좋고 나쁨이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곧 한식에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하면 시절이 좋거나 풍년이 든다고 하며, 어촌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러나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리면 그 반대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식날 새벽에 천둥이 치면 서리가 일찍 오고 저녁에 천둥치면 늦게 온다는 믿음도 있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 한식은 산서(西)지방에서 시작되어 남북조시대 말부터 전국적인 행사로 확대되었다. 시행 초기에는 날짜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후한()시대부터 동지 후 105일 전후 3일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4절기의 하나로 한식과 날짜가 겹치는 청명()은 동지 후 107일로 밀려났으며 한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그리고 한식은 농사의 시작과 겹치므로 풍년을 기원하여 제기차기, 그네타기, 갈고리 던지기 같은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으며 당나라 무렵부터는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묘()가 중요한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남송 때부터 한식의 금화() 풍속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명나라 때에는 한식 자체가 폐지되었다. 대신 청명이 다시 부각되었으며, 청명의 날짜도 다시 동지 후 105일로 환원되었다.

 

. 출처: 한식 [寒食] (한국세시풍속사전)

 

 

 6]. 한식(寒食)에 대한 시사 상식사전의 설명

 

한식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을 말한다. 한식은 24절기의 하나인 동지를 기준으로 하여 정한 명절이기 때문에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들고 양력으로는 매년 4월 5일이나 6일 무렵에 들게 된다.

한식(寒食)에는 글자 그대로 찬 음식을 먹는다. 이는 이 날은 비바람이 심해서 불을 금하고 찬 밥을 먹었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중국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에 관한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개자추가 간신에게 몰려 면산(山)에 숨어 있었는데 문공(文公)이 그의 충성심을 알고 찾았으나 산에서 나오지 않자, 나오게 하기 위하여 면산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여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고대에 종교적 의미로는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이에 앞서 일정 기간 구화(舊火)를 일체 금한 예속(禮俗)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식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여러 세시기(歲時記)에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삼월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아침,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을 쫓는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상고하면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의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관한 기록된 문헌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서 제사 지내는 것을 채택했으므로 이른바 묘제는 이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한식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이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우리의 풍속에 맞게 사대명절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조선의 역대 왕 및 비)와 각 능원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만일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라고 한다. 또 묘 둘레에 식목을 하는 것도 이 날이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농가에서는 이 날 농작물의 씨를 뿌린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 민속적 권위가 중시되어 조정에서는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근세에 들어와서는 성묘 이외의 행사는 폐지되었다.

 

. 출처: 한식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4]. 불교는 하느님.창조신에 대항하는 무신론적 Monkey입니다. 실제로 인도창조신 브라만에 대항하여 부처 Monkey가 만든 불교는 그 발상지 인도에서도 불가촉천민계급입니다. 오래 겪어보면 인간이나 침팬치과의 불교 Monkey가 하느님이나 창조신을 이길수는 없습니다. 

 

1. 침팬치과의 Monkey부처는 인도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브라만계급 다음의 세속 신분으로, 창조신 브라만보다 높다고 옆길로 빠졌는데, 불교발상지 인도는 다시 불교를 배격하고 힌두교(브라만숭배)를 믿는 나라입니다. 왕의 칭호도 얻지 못한 배척받는 네팔출신 왕자태생이며, 인도는 불교신자를 가장 밑의 천민계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불교Monkey 일본 항복후 미군정령인 조선성명복구령을 발효, 전국민이 조선 국교인 유교의 한문성명과 본관을 의무등록하게 하여, 해방이후 한국인은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세계종교 유교가 위기에 빠져, 세계사의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필자는 국사(성균관, 해방후의 성균관대)와 세계사(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된 귀족사제 이나시오의 예수회 산하 서강대.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를 병합하여 한국의 Royal.Imperial대학을 유지해왔으며 앞으로도 不變사항입니다. 패전국 일본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원래 을사조약이 무효(국내법 우선시 강제의 한일병합도 무효)고, 2차대전 패전국으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그 때부터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은 없어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으로도 한국에 주권이 없고, 1988년에 발효된 현행헌법으로 보면 임시정부 조항(을사조약.한일합방 무효, 대일선전포고)에 의해 선전포고한 적국의 잔재로, 주권.자격.학벌없는 패전국 奴隸.賤民대학이기도 합니다. 교과서나 국내법.국제법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데, 적산재산 국유화처럼 국립 서울대로 변신해, 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 및 사설 입시지등에서 그 뒤의 奴卑.下人카르텔을 형성해 최고대학 성균관대에 항거해오고 있습니다. 

 

2. 인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국도 조선시대에 조계종 승려(산속에 머물러야 하고, 시중에 나오면 않되며 혼자 살아야 함. 5,000만 유교성명 한국인 뒤의 존재들임)를 천민으로 만들어서, 필자는 그 역사적 사실을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에 주권없는 일본 승려는 일본습속대로 결혼도 하고 절도 사고 팔고, 시중에 불교마크 달고 진출해 있습니다.

 

3. 다음은 인도의 오랜 불가촉 천민인 불교신자들에 대한 기사입니다. 물론 그후의 이슬람.기독교도 신분은 높지 않습니다만, 불교신자는 오랫동안 천민계급이 인도입니다. 출처는 불교평론 2002년 3월 10일. 기사작성자:이지은. 

 

- 다 음 -

 

....인도는 비록 불교의 발상지이며 고대에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었으나, 마지막 불교 왕조인 굽타 왕조의 몰락과 힌두교의 재기, 뒤를 이은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으로 불교는 탄생의 땅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종교의 ‘불교 죽이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불교로의 개종에 크게 동참하며 개종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 ‘달리뜨’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 중 가장 미천하다고 하는 ‘수드라’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제5의 신분으로 그림자에만 닿아도 더러워진다는 이른바 ‘불가촉천민’이다...

 

...인도에서는 지난해 11월에 약 10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수도인 뉴델리에서 불교로의 개종행사가 열렸고, 그 이후로도 주변의 우따르 쁘라데쉬 주와 비하르 주의 여러 마을에서 수백, 수천 명 규모의 개종식이 조용히 뒤를 잇고 있다.

최근 나타나는 인도인들, 특히 기존 힌두교도들의 불교로의 개종은 이와 같이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집단성’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여러 명이 모여서 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카스트 또는 몇몇 카스트 집단의 성원들이 함께 모여서 개종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개종을 결정하는 방식은 자기 카스트 내에서 나름대로 발언권이 있는 구성원의 건의로 마을 단위의 카스트 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개종을 결정한다. 그러한 절차를 거치다 보니, A마을의 X카스트가 개종을 한다면 원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X카스트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앞으로 X카스트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에 동참하는 카스트는 거의 예외 없이 달리뜨에 속하는 카스트, 과거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인도의 전통과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개종’이란 과거나 권위와의 절연을 의미하며 이를 결심하고 감행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신분제와 신분제의 타파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지대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일이다. 이는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부터 일어나고 있는 하층민들의 기독교, 이슬람교로의 개종 또는 힌두교 개혁종파의 창시 등도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북인도 지방에서의 불교 개종 움직임도 역시 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최근의 개종운동은 1956년 이래 마하라슈트라를 휩쓸었던 암베드까르 이후의 개종운동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불교는 인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악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과거의 카스트 제도나 온갖 불평등과 절연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인도의 종교였고, 더구나 고대 인도의 ‘황금기’에 널리 퍼져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종교이기도 했다. 암베드까르는 독특한 인도사 해석을 통하여 빛나는 불교의 전통을 달리뜨들과 연결시켰다.1)

 

그는 불가촉천민제의 기원을 4세기경 불교와 브라만교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던 당시, 끝까지 불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일부 부족민들에 두고 있다. 브라만들은 불교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사제의 권위로 더러운 직업을 강제적으로 부과하고 사회와 격리시켰다. 훗날 승려와 사찰이 점차 사라지고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면서 이들도 힌두교화했지만 이미 대대로 이어지던 더러운 직업 때문에 이들은 불가촉천민으로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베드까르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타당하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지만,2)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잡아 그들이 조상들의 종교를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로 믿어진다.

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681

 

4. 중앙일보 2020.09,17 서 유진 기자 보도뉴스.

 

... "힌두교 불가촉천민들이 불교도로 개종을 많이 하다 보니 최근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이 강제로 불교도를 힌두교로 '재개종'시키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중앙일보] “개도 먹는 우물물, 왜 못먹나” 인도 힌두교 천민들 개종 붐

 

5. 현대불교 2013.02.15. 우명주 박사(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이것은 단지 그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라 많은 힌두교 신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신불교를 힌두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로 인식시키기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불가촉천민을 무시하던 시선을 그대로 불교에 투영해 신불교를 천한 불가촉천민들이 믿는 천한 종교로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불교도라는 것이 곧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6. 일본은 인도와 달리 동남아 패전국.약소국들인 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처럼 불교국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대중언론에서 최근 유교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일본 불교), 기독교의 주권이 없는 법리적 측면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7. 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가가 되어, 성씨없는 賤民 점쇠를 새롭게 일본 천황으로 옹립하여 불교국답게 점쇠賤民.불교 Monkey점쇠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하였습니다. 점쇠賤民.불교Monkey천황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그 후신이 마당쇠賤民.불교 Monkey서울대)를 설립하였고, 일제 강점기의 불교전문학교(동국대), 초급대(부산대,경북대,전남대,이리농림고 후신인 전북대 농대, 서울시립대등)와 전국 각지의 공립 중고등학교를 만들어서 주권.자격.학벌없이 서울대 뒤의 카르텔이 되어 대중언론에서 발호하여왔습니다. 서울대, 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고려대(구한말 서민출신 이용익이 만든 사설 보성전문 후신. 보성전문은 이후 동학란을 일으킨 천도교 소속이다가, 해방후 친일파 김성수가 인수하여 대학교로 변경)의 대중언론 카르텔뒤에 새로 생긴 해방후의 대학들은 주권.자격.학벌없이 그 한참뒤에서 억눌려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국사 성균관 자격가진 해방후의 성균관대에 대항해, 대중언론에서 성균관대를 오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카르텔 및 왜구 잔재학교들은 현행헌법이나 조선.대한제국 관습으로 볼 때는 패전국 잔재로 한국영토에 남은 奴隸.賤民이며, 하느님을 부정하고 창조신에 항거하는 침팬치.Monkey류이거나 그 뒤의 奴卑.下人일 뿐입니다. 해방후에 새로생긴 대학들이나 중고등학교중 서울대가 가장 좋고 연세대.고려대가 그 다음이며 그 뒤에서 순번따지는 대학들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주장을 믿고 현혹된  奴卑.下人입니다. 

 

8. 불법.강제의 일제 강점기를 청산하지 못해, 대중언론.입시지.학원.학교교사들의 무지나 사기에 속아 살아온 분들을 구제하기는 해야합니다만, 대학학벌은 영원토록 국사 성균관자격 성균관대를 최고대학으로 하면서, 세계사를 반영하여 교황윤허 서강대를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로 예우하는 방법을 지속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기만에 속은것을 인지하고 성황폐하, 서왕전하를 법으로 만드는 공로자들은 개인적으로 중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는 서강대 출신 양희은님의 의견을 반영하여 성황폐하.서왕전하(두 칭호 모두 정신적인것)만 Royal학벌로 하면서, 이이제이식으로 그 뒤에서 주권.자격.학벌없이 여러 대학을 넣고, 패전국 잔재 奴隸.賤民 서울대(100번), 국시 110브(연세대), 고려대(111번)의 개혁도 시도해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잔재에 전염되거나 볼모로 잡힌 왕족.양반(명백한 족보,주민등록.호적.조상의 벼슬사실등 반영)들은 구제하면서 전주이씨,파평윤씨,안동권씨등 조선.대한제국 명문 문벌이나, 한국 성씨의 원류인 서씨.한씨같은 유교 한문성명들을 문벌(門閥)로 계승하는 방법도 병행해 보겠습니다. 

 

* Royal성균관대(한국최고대)와 서강대(성대다음)는일류,명문. 法.교과서>입시점수 중요. 미군정法(미군정때 성균관복구 법령발효)에 의해, 국사 성균관 자격은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해방후 국사교육으로 현재까지 성균관대 자격으로 이어짐.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때 시작해 노태우대통령때 발행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되어 행정법상 자격가짐)에서 해방후 성균관대가 조선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공식화하여 성균관대의 국사 성균관 자격승계는 법으로 더 보강됨.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임. 국내법과 달리 강행법은 아니지만 국제관습법이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9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전통의 해방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행태등(수천년 유교문화 전통이라, 국가나 집권정부 차원에서 제재하지 않는한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전통문화들임)에 대해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중국 24절기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임.

http://blog.daum.net/macmaca/2524

 

2.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3.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한국에서는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입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국제관습법으로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http://blog.daum.net/macmaca/2560

 

4.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음.

http://blog.daum.net/macmaca/2967

 

5.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 일제강점기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유교를 인정않았음.

http://blog.daum.net/macmaca/2632

6. 한국은 수천년 동아시아세계종교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나라.최고제사장은 고종후손 황사손(이원).5,000만이 조선성명 유교한문성씨.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주권없음.일제강점기 유교를 종교로 불인정.해방후 교육은 유교가 주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승만)연설문.우리나라 종교 유교 강조,유교 교훈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설파.아세아 동방 모든나라가 다 유교의 덕화 입었다고 하시며,유교의 교훈 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훈시.삼강오륜 중시연설.

http://blog.daum.net/macmaca/2803

 

7. 하느님에 대드는 불교일본의 성씨없는 점쇠賤民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

http://blog.daum.net/macmaca/3044

 

8. 한국인은 행정법.관습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9.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10.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http://blog.daum.net/macmaca/2632

11.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12. 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도 성대 다음 Royal대로 두 대학이 가장 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http://blog.daum.net/macmaca/2260 

13.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800

 

14.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http://blog.daum.net/macmaca/2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