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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가 세계 4대 종교. 4대성인은 공자,예수,소크라테스,석가. 세계 4대 성인(聖人), 세계 4대 종교(宗敎).

유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가 세계 4대 종교. 4대성인은 공자,예수,소크라테스,석가. 세계 4대 성인(聖人), 세계 4대 종교(宗敎).



[1]. 세계 4대 성인



1]. 소크라테스가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이라고 서술하는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소크라테스(기원전 470~기원전 399년)철학의 모든 문제를 평생 동안 토론을 통해 풀었어요.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지요.

욕심 없이 진리만 좇으며 열성과 지혜를 쏟는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참지혜와 진리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라고 칭송했어요.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의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물어 응답을 받는 신탁이 이루어졌어요. 이 델포이 신탁이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응답했다고 해요.


. 출처: 너 자신을 알라!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 2014.10.20., 가나출판사)


 

2]. 세계 4대 성인의 공통점과 차이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에 거론된 세계 4대 성인. 이 책은 세계 4대 성인을 예수.공자.석가.소크라테스로 제시하고 있음.

목차

1. 탁월한 제자들, 그리고 고단한 삶

2. 고향과 조국에서 배척을 당하다


탁월한 제자들, 그리고 고단한 삶

예수 · 공자 · 석가 · 소크라테스, 이들 사이에는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활동 기간이다. 예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 석가모니는 기원전 566년에서 기원전 486년,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서 기원전 399년이 생존 연대이고, 다만 예수만 기원전 4~5년에서부터 기원후 30년 무렵까지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을 인류 역사상 가장 정신문화가 발달했던 아주 특이한 시기로 간주하여 이때를 주목한다.

이들 세 성인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제자들이 또한 이 시기에 함께 활동했음을 볼 수 있다. 공자에게는 안연 · 안회 · 자로 · 자장과 같은 제자들이 있었고, 석가모니에게는 열 제자로 불리는 사리불 · 목건연 · 대가엽 · 아리루다 · 수부티 · 부루나 · 가시연 · 우파리 · 라후라 · 아란 등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과 같은 특출한 제자와 크리톤 등이 있었으며, 예수에게는 열두 사도로 일컬어지는 베드로 · 요한 · 야고보 · 안드레 · 빌립 · 도마 · 바돌로매 · 마태 · 야고보 · 시몬 · 유다 · 맛디아1) 등의 제자가 있었다.

둘째,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출생지를 보면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공자는 중국의 황하 유역을, 석가모니는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을 대표하며, 예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신하는데, 다만 소크라테스는 이집트의 나일강 대신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출생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지중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권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셋째, 네 사람의 가정환경을 살펴봤을 때 석가모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난했다. 먼저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낳은 아들로,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오랜만에 벼슬자리에 앉아 현실정치를 펴면서도 철저하게 실패했고, 말년에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눈물과 회한 속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결국 사마천은 그가 쓴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 개’라 표현했는데, 이 말은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이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원래 가난한 석수장이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한 데다 직업조차 없었다. 더욱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녁 한 끼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전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가난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돈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그를 구박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소크라테스와 아내 크산티페어느 날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앞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며 물벼락을 안기자, 그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는 결과적으로 철학에 몰두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큰아들로 태어나 역시 아버지가 일찍 운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모친과 많은 동생들의 부양에 대한 책임감으로 잠시 목수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공생애라 일컬어지는 기간을 포함하여 그의 삶 전체가 고난의 역사였기에,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경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사촌 요한에게 부탁해야만 했던 상황은 그의 절박한 심정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석가모니는 인도의 카필라에서 성주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나, 결국 출가함으로써 곤고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고향과 조국에서 배척을 당하다

넷째, 이들 네 사람은 조국과 고향에서 배척을 당했다. 공자는 자신의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이나 외국(중국 안의 다른 나라들)을 떠돌아다녀야 했고, 말년까지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1919년 5 · 4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한때 공자를 비판하는 시대마저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였다. 불교는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그 교세가 성장했지만, 정작 교조 석가모니가 태어난 인도에서는 지금도 불교 대신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또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부터 야심적인 정치가들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고, 결국 동족인 아테네 시민들의 고소와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해야 했다.

예수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제사장 · 바리새인 · 유대파 장로)에게 핍박을 받고, 결국 그들의 고소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를 죽이라고 소리 높이 외친 사람들은 동족들이었다는 뜻이다. 이를 빌미로 히틀러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그의 선동에 도취된 당시 독일인들은 거의 미친 듯이 이에 동참했다.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해야 했던 가톨릭의 교황청에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최근 들어 “예수님 역시 유대인이었다.”라는 요지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지난날의 피 어린 역사가 지워질 리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도 예수의 조국 이스라엘에서는 그를 메시아(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곳 국민들은 여전히 초림()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독교 대신 전통적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다.

(1577~1579)이라는 작품이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가 로마 군인과 성난 군중들에 에워싸인 채 옷이 벗겨지고 있다. 예수의 자세는 당당하며, 그 시선은 하늘을 향해 간절히 응시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는 수난 현장의 슬픔과 고통, 처절함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엎드려 통곡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가 보인다." hastitle="N" source="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origin_height="1156" origin_width="606" origin_src="http://dbscthumb.phinf.naver.net/4164_000_1/20151202180438651_CCYY0V0Q1.jpg/ab87_61_i3.jpg?type=m4500_4500_fst_n&wm=Y" data-seq="3" data-title="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엘 그레코의 <예수의 옷을 벗김>(1577~1579)이라는 작품이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가 로마 군인과 성난 군중들에 에워싸인 채 옷이 벗겨지고 있다. 예수의 자세는 당당하며, 그 시선은 하늘을 향해 간절히 응시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는 수난 현장의 슬픔과 고통, 처절함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엎드려 통곡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가 보인다.

다섯째, 이들 네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공자에 대한 묘사는 차라리 전설처럼 들린다.

“그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황제()의 모습이요,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로 크다. 몸 둘레는 아홉 아름이나 되고, 앉으면 용이 서린 것 같으며, 일어서면 견우성을 대하는 것 같다.”

석가모니 역시 지금의 불상을 보건대, 상당히 원만한 풍모가 아니었나 싶다. 한편 소크라테스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크고 둥근 얼굴에 벗겨진 이마, 툭 불거진 눈,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땅딸막한 키, 불거진 배,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걸음 등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추남에 가까웠다.

예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키도 작고 몸도 약했으며, 얼굴 역시 그리 잘난 편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뜻인데, 그는 가난했고 그다지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록 키가 작고 몸이 약했으나 얼굴만큼은 그런 대로 잘생겼다는 설이 있다.

여섯째, 공자를 제외한 세 성인에게는 저서가 없다. 모두 제자들에 의해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고 봐야 하겠는데, 가령 《대화록》에 나오는 모든 저작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 소크라테스 자신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역시 사정은 같으며, 예수도 책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령 예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복음서(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만 해도 그의 말과 행동에 관한 기록일 뿐, 그가 스스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예수가 썼다거나 불경을 석가모니가 썼다는 식의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다만 공자만 예외여서 그가 직접 쓴 책으로 《역경》 《시경》 《서경》이 있으며, 여기에 《춘추사기》 《예기》를 합쳐 오경()이라 부른다. 흔히 말하는 《논어》 《대학》 《중용》 《맹자》 등 이른바 사서()는 그 이후에 나온 책들이다.

보리수 아래의 붓다보리수 아래에 합장한 채 앉아서 명상에 잠긴 붓다의 모습이다.

일곱째,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네 성인의 가르침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공자는 어질 인()을, 석가모니는 자비를,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뜻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 강조하는 오계는 기독교의 십계명 가운데에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살인 · 간음 · 도적질 · 거짓말 등은 동서고금의 모든 윤리학에서 공통적으로 금지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여덟째, 마지막으로 죽음의 형태를 살펴보자면, 동양의 두 성인과 서양의 두 성인이 매우 대조적이다. 먼저 공자와 석가모니는 천수()를 누리다가 자연사한 데 반해,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제명을 누리지 못한 채 사형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잔을 마셨고,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 죽음의 형태들을 놓고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한 폭의 동양화에서 볼 수 있듯 동양 문화가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 데 반해, 로마의 수많은 분수대가 상징하듯 서양 문화는 늘 자연을 거슬러 거꾸로 흐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 출처: 세계 4대 성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2009. 1. 30., 평단문화사)

 



[2]. 세계 종교 유교.



1]. 세계종교 유교의 전통 대학제도. 중국.한국.베트남같은 전통 유교국의 대학제도.


1. 중국의 경우 한나라 태학.국자감.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변함.


2. 한국은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고려말 성균관이 됨).조선 성균관(2차대전 이후 해방후 미군정기 성균관대로 정통승계되어 오늘에 이름)


3. 베트남의 국자감. 공자님을 모시고, 베트남 최초 대학인 문묘국자감에서 이루어진 유교교육이나 통치이념인 유교,그리고 진사(進士)배출등    


하노이에 있는 ‘반 미에우 꾸옥 뜨 잠(Văn miếu Quốc tử giám, 문묘국자감())’ 사적은 11세기에 세워졌으며 유교 및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기원전 551~479)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의 왕들은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건설하였고 유교를 사회적·정치적 기초로 삼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에는 유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반 미에우 꾸옥 뜨 잠’은 베트남 조정에서 일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관료들을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천 명의 띠엔 시()를 배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이곳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여기고 있다.


. 출처:레 왕조와 막왕조(1442~1779)의 과거 시험 관련 석판기록[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중등역사에 나타나는 세계종교 유교.

1.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세계종교 관련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으로 유교, 불교, 기독교등 세계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지침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 한국검인정교과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교육과학기술부


15 Page에 이런 지침이 나옵니다


⑺ 통일 제국의 등장 고대 문명의 형성 이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통일 제국의 정치적 변천과 그 특징을 다룬다. 지역별로 통일 제국이 성립되어 확대되는 모습을 살피고, 이어 제도의 정비 내용 및 문화적 특징을 이해한다. 아울러 각 지역 의 문화 발전이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세계 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 을 파악한다. ➀ 춘추ㆍ전국시대, 진, 한에 이르는 정치ㆍ문화적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 탕으로 진ㆍ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국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였 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당시 활약했던 주요 학자와 그들의 활동을 찾 아보게 한다. 진은 중국 영역을 통일하였으며 한 제국은 진이 세운 중앙 집 권 정치체제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안정시켰음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진․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혼란의 시대로 규정하기 보다는 변혁의 시대라는데 유의 한다. 한 고조 시대의 과도적 제도에 관한 서술로 인해 한나라가 진나라와 다른 정치제도를 채택하였다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한다.



2. 위 지침에 의거한 듯 교학사 자료는 다음 자료 Ⅶ. 통일 제국의 등장 1. 중국의 통일 제국과 유교에서 유교가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 다 음 -

Ⅶ. 통일 제국의 등장 1. 중국의 통일 제국과 유교. 


...유가 사상은 한나라 때 유교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


. 필자 주 1). 고대 세계의 세계종교로 성립한 유교, 불교, 기독교 중 인도의 브라만에 대항해 새로 일어난 무신론적 부처의 불교는, 그 때는 강력한 세계종교였지만, 다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배척받게 되어, 동남아시아 약소국과,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서 단순 포교 종교로 머물며,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이,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고 배척당하기도 하는등 외래 포교종교상태가 길었음. 고려시대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한국 국사 교육은 가르치고 있음. 이씨 조선당시의 한국에서는 갈수록 승려가 천민이었음. 결혼하지 않고 산속에 머물러야 되는 조계종 승려가 이에 해당됨. 이에 비해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에 대항해 온 일본은 제도적으로 불교국가화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일본 신도도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종교인데,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는 무신론적 Monkey의 불교사상으로 한국 강점기에 기독교를 배척한 것으로 보아(일본이 유교 국가였다면 외래종교나 이교도로 배척하거나, 조선 조정처럼 조상도 몰라보는 금수로 유교적 배척을 해야 정상임), 창조주 범천을 부정하던 습성의 불교에 토대하니까 나약한 일본 마당쇠(성씨없는 일본 천황이라 한국개념으로 마당쇠.돌쇠임. 부처 Monkey행태를 보이면서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는 일본 부처 Monkey는 유명함)가 일본 천황이 되어 그렇게 하느님보다 높은게 일본 천황이라고 기독교를 탄압한 것 같음. 결혼하는 Monkey 승려가 일본 천황등 그 이하 일본 신도 추종 계급들이고, 또 다른 Monkey가 일본 불교임. 여하튼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 다시 일본 신도(일본 신도는 일본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 종교의 하나임), 일본 불교, 극소수 일본 기독교를 강제로 포교하여, 2차대전 패전후에 종교 주권도 없는채로 현재까지 한국 유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없는 강제 포교종교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권없고 학벌없이 대중언론에서 성균관대에 대항하면서 살고 있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세력들(왜놈학교 후신들 포함)과 똑같이 한국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다만, 세계종교 유교로 수천년을 타 종교가 범접치 못하게 굳건하게 지켜오던 중국 유교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종교 전부가 수난기를 겪었는데, 이 때문에,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필자는 세계사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중국 유교와 다른 공산국가 유교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중국은 서유럽인들이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 세계사에서 참 대단한 혜택을 본 나라입니다.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 세계 종교 유교,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계승됨), 세계 4대 발명품(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여하튼 근세는 서유럽이 세계의 지배세력이었고 중국은 아편전쟁이후 절대적 군사력 열세로 반 식민지 상태였고, 인도는 분명한 영국 식민지로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의 오래된 기득권들인 종교나 대학제도에 대한 역사는 변하지 않고 똑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종교로는 세계종교 유교.불교.기독교, 대학으로는 중국의 태학.국자감, 볼로냐.파리대학. 그래서 필자는 세계사 뿐 아니라, 여러 과목의 학술적 이론을 제공해온 서유럽 학자들의 학설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부처는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브라만교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임은 맞습니다.                



3.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 나오는 내용.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지은이: 장종근, 박현준, 최태선

발행일:2003년 1월 10일(초판 1쇄),2011년 12월 10일(9판 1쇄)  



. 필자 주 2). 인용 도서에 나타나는 수자의 형상과 필자가 사용한 수자의 형상은 100%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 미리 참작해 주십시오.   


역사와 인간 ~Ⅱ 도시 문명의 성립과 지역 문화의 형성 


01. 인류 문화의 기원과 문명의 발생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03. 고대 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 세계

04. 고대 지중해 세계


Page 22.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탄탄 정리


3]. 중국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한  


1. 한의 건국과 발전


(1). 건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장안을 수도로 중국 재통일(기원전 202)...


(2). 한고조(유방):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 실시 


(3). 한 무제의 정치


① 중앙 집권 체제 확립:군현제 실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③ 경제 정책:소금.철 전매제, 균수법.평준법, 상인에 중과세, 오수전 주조


(4) 멸망: 무제 사후 외척과 환관의 권력 투쟁→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 건국(8)


2. 후한의 성립과 발전


(1) 배경: 왕망의 급진 정책(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농민 반란으로 신 멸망

(2) 성립: 광무제가 호족의 지원을 받아 뤄양을 도읍으로 건국(25)

(3) 발전: 전한의 정치제도 부활, 유학 존중

(4) 멸망: 환관과 외척의 횡포, 관료들 사이의 당쟁→황건적의 난(184)으로 멸망


3. 한의 경제와 사회


(1) 경제: 철제 농기구 보급, 농업 기술의 발달→농업 생산력 증가, 토지 사유화 진전

(2) 사회: 빈부 격차 심화→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의 등장

① 농민 지배: 대토지와 노비 소유→사회 지배 계층으로 성장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중앙 정치 주도


* 위 본문 중 3. 한의 경제와 사회, (2)사회,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향거리선제: 지방장관이 여론을 참작하여 지방의 덕망있는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관료 선발제도이다. 유학을 공부한 호족들이 선거를 독점하여 지방과 중앙의 관료로 진출함으로써 호족 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유가사상이 황제와 지배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유교로 발전

① 유학 교육: 수도에 태학 설치, 오경박사 제도 마련

② 관리 선발: 유학의 수준을 평가하여 선발

③ 학문 발전: 유교 경전의 해석과 주석에 주력하는 훈고학 발달

(2) 도가 사상: 신선 사상과 결합→태평도, 오두미도와 같은 민간 신앙으로 발전

(3) 불교 수용: 후한 때 비단길(사막길)을 통해 전래

(4) 역사서 편찬: "사기"(사마천), "한서"(반고)→기전체 방식의 역사 서술 확립

(5) 제지술 발달:채륜이 종이 만드는 법 개량→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위 본문 중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유교의 국교화: 한 무제는 제자백가중에서 유학만을 관학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학문과 정치가 일치되면서 학자가 정치가이고 정치가가 곧 학자라는 정치.교육 일치주의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에 나타나는 자료.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 Page 7


#자료분석#


.유가: 유가는 마음에 우러나오는 "인"과 "예"를 바탕으로 도덕 정치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 무제에 의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어 동아시아의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 필자 주 3). 위 본문 중 1. 한의 건국과 발전, (3) 한 무제의 정치,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관련 사항입니다.


흉노는 현대의 몽고지역 일부도 포함되며, 중앙아시아 국가의 일대까지 포함됨. 고조선은 현대의 한국 지역 일부, 남월은 현대의 베트남 일부 지역임.  


. 필자 주 4). 위 본문에 나오는 흉노를 다시 백과사전이나 중국사 학술서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4-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흉노.


흉노

[ ]

요약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 말.

주대()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 씨족의 족장() 두만()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 출처: 흉노[匈奴] (두산백과)

. 필자 주 5). 위 본문에 나오는 고조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5-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고조선

[ ]

요약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에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에는 조선이 보하이만[]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미송리식토기   랴오허강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谿)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谿)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고조선 [古朝鮮] (두산백과)


. 필자 주 5-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관련사항 필자 의견: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입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지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설화성격이 강하고 한국의 정사(正史)나 세계사적 성격의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 야사(野史)라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 필자 주 5-3).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    

요약 고려시대 김부식() 등이 기전체()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

            
구분 역사서
저자 김부식 등
시대1145(고려 인종 23)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 등 8명의 참고()와 김충효() 등 2명의 관구()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와 머리말, 논찬()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출처: 삼국사기[三國史記] (두산백과)


. 필자 주 5-4).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기전체의 역사서. 보물 제722호.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정사이다.

            
유형 문헌
시대 고려
성격 사서
편저자김부식()
제작시기1145년
권수·책수50권
소장처 성암고서박물관, 옥산서원, 이병익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722호 , 국보 제322-1호 , 국보 제322-2호
문화재 지정일1981년(보물 제722호) , 2018년(국보 승격)


정의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내용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 정덕임신본()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이온문()·허홍재()·서안정()·박동계()·이황중()·최우보()·김영온() 등 8인의 참고()와 김충효()·정습명() 2인의 관구()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간관(: ·)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현실 비판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삼한고기()』·『신라고사()』·『구삼국사()』와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및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후한서()』·『진서()』·『위서()』·『송서()』·『남북사()』·『신당서()』·『구당서()』 및 『자치통감()』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 사료의 취사 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출처: 삼국사기 [三國史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5-5).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    

요약 고려 충렬왕() 때의 보각국사() 일연(: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31호
지정일1999년 11월 19일
소재지부산 금정구 청룡동(범어사)                                
시대 고려시대
종류/분류 활자본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두산백과)


. 필자 주 5-6). 위 본문에는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정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란 문구에 의거,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상식대로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 주 5-7).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    

의의와 평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하여 현존하고 있는 역사서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 책은 『삼국사기』와 함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단군을 나라의 시조라고 언급한 점은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5-8). 위 본문에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반영하여 삼국사기는 정사의 성격을 가졌고, 삼국유사는 야사를 다루고 있다라는 구분을 그대로 인정하는게 옳습니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라는 기존의 우리나라 역사관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필자 주 6). 위 본문에 나오는 남월에 대해 살펴보갰습니다.


. 필자 주 6-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남월.


남월[ ]    

요약 중국 진말()∼한초()의 혼란을 틈타 조타()가 광둥[]·광시[西]의 양성()과 베트남 북부지역에 세운 나라(BC 203∼BC 111).

진나라 시황제()는 남중국을 평정하고 거기에 남해()·계림()·상()의 3군()을 설치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자, 남해군위()를 대행한 용천현령() 조타가 BC 203년에 지금의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계림·상의 2군을 합쳐 남월국()을 창건하고 무왕()이라 칭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회유책을 써서 조타를 남월왕으로 봉()하였으며, 대부분이 월인()이던 남월국의 주민도 그에게 잘 복종하였다. BC 137년에 조타가 죽고, 그의 손자인 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남월에 대한 한나라의 압박이 점차 강화되었다. 호()의 뒤를 이어 손자 흥(:재위 BC 113?∼BC 112)이 왕위에 올랐으나, 남월에 내란이 일어나 재상 여가()가 권력을 장악하고 한에 입조()하려는 왕과 왕모()를 살해하였으며, 또한 한의 사신까지도 죽인 뒤 흥()의 이복 형인 건덕(:재위 BC 112∼BC 111)을 옹립하여 한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무제()는 남월 토벌을 결심하고, 복파장군() 노박덕()과 누선장군() 양복()을 지휘관으로 삼아 대군을 급파하여 남월을 공략하였다. 드디어 BC 111년 한군은 남월의 국도()를 함락하고 그곳에 9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남월은 5대 93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 남월 평정은 푸젠[]·서남이(西)의 평정을 촉진시켜 한의 남방경략에 한 계기를 이루었다.


. 출처: 남월 [南越] (두산백과)


. 필자 주 7). () 속에 나타나는 수자의 이해.


한의 건국(기원전 202). 한의 건국은 ()속에 기원전 202로 표기됨. ()속에 기원전 이란 언급이 없으면 차후 ()속의 수자는 서기 몇 년으로 이해 할것. 예를 들어 신 건국(8)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속의 수자는 서기 8년, 후한의 건국(25)은 서기 25년, 황건적의 난(184)은 서기 184년으로 이해할것. 


. 필자 주 8).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한의 역사


한의 역사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는 그를 한왕()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무제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평준법()에 의한 상업관영()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선제()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 이후는 외척()·환관() 등 근신()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 왕망()이 8년에 평제()를 독살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의 6대 자손인 유수()가 남양(:)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을 수도로 하여 후한()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 때에는 한제국()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의 난으로서, 도교()의 시초인 태평도()의 주창자 장각()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손책()·조조()·유비()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여 하북()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 출처: 한의 역사 (두산백과)


. 필자 주 9).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신


신[ ]    

 중국의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 

. 필자 주 10).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신


신 왕조의 흥망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요약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한 기점으로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왕망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왕전제와 사대제도 등을 실시했으나 지방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신나라는 불과 15년에 그쳐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로 남았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기원전 18년 : 백제시조 온조왕, 위례성에서 즉위
3년 : 고구려,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계속 팽창
8년 : 백제, 마한을 멸망시킴
22년 : 고구려, 부여 공격, 부여민 1만 명 투항

왕망, 왕위를 찬탈해 신나라를 건국하다

한나라는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던 신()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전한의 수도는 서쪽의 장안, 후한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이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나라는 왕망 1대 15년에 그친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했던 왕조이다. 그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유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된 후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이 두텁게 자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 출처: 신왕조의 흥망 -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 필자 주 11).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후한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요약 호족세력이 역사 전면에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며 후한 정권의 시대가 도래했다. 반왕망 움직임의 물결을 타고 후한의 건국자가 된 광무제(유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이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후한 정권의 수립을 성공한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26년 : 고구려, 개마국을 멸망시킴
42년 : 수로왕, 가락국 건국
49년 : 고구려, 요하 장악
56년 : 고구려 태조왕, 동옥저 통합


평범한 지주 청년 유수, 후한을 건국하다

기원후 25년, 유수가 다시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어릴 적부터 그를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문숙(광무제의 자)이 다만 정직하고 유화할 뿐, 농담도 잘하지 않고 얌전한 보통 청년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줄이야···."

이 말을 들은 유수는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유화의 길에 의해서 하고자 하노라"라고 말했다.


. 출처: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4. 오래전 필자가 발췌한 역사교사의 중등역사 블로그 내용.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

 

 

1. 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1) 춘추 전국 시대

       ① 시기 : 주의 동천부터 진에 의한 중국 통일까지의 시대

                    (기원전 770 ~ 기원전 221 )

       ② 정치 : 주 왕실의 약화 → 봉건제 붕괴 → 제후들의 독립과 세력 다툼

                    (춘추 5패, 전국 7웅)

       ③ 사회 ․ 경제 : 철기의 보급

           * 철제 농기구 사용 → 농업 생산력 증가 → 상공업 발전 → 시장, 화폐, 도시

           * 철제 무기 사용 → 전투력 향상 → 정복 전쟁 활발

       ④ 제자백가의 출현

           * 부국강병을 위해 각국이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 다양한 사상 출현

           * 유가 : 공자, 맹자 → 인, 예 강조, 도덕 정치

           * 도가 : 노자, 장자 → 무위자연

           * 법가 : 한비자, 상앙 →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 진의 통일에 기여 

 

   2)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

      ① 시황제의 통일 정책

          * 정치 : ‘황제’ 칭호 사용 →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 (중앙집권 통치)

                       군현제 실시 → 지방관 파견

          * 사상 : 법가 사상 채택, 분서갱유 (사상 탄압, 유가 사상가 생매장)

          * 사회 ․ 경제 :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 만리장성 축조 : 흉노 침입 대비

     ② 멸망 : 지나친 토목 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와 가혹한 통치

                   → 진승 ․ 오광의 난으로 멸망 (기원전 206)

 

   3) 한(漢)의 발전과 유교 사회의 형성

      ① 한의 유방(한 고조)이 항우를 물리치고 수립, 장안에 도읍 (기원전202)

      ② 한의 성장과 발전

           * 고조의 정치

              - 군국제 실시 : 중앙은 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로 다스림

           * 무제의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군현제의 전국적 실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

             - 영토 확장 : 베트남, 흉노, 고조선 정복

             - 국가 재정 강화 : 소금, 철 전매제도

             - 비단길 개척 : 흉노 격퇴를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함, 대월지와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비단길(실크로드)이 개척됨

     ③ 신(新) (8~23) : 한 무제 이후 외척인 왕망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건국

     ④ 후한 (25~220)

         * 건국 : 왕망에게 빼앗겼던 한을 광무제(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킴

         * 쇠퇴 : 환관과 외척의 횡포 극심 → 농민 생활의 어려움

                     → 황건적의 난 + 지방 호족들의 자립 → 위 ․ 촉 ․ 오 삼국으로 분열

 

     ⑤ 한의 경제 :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질 좋은 비단, 칠기, 옥제품 생산)

 

     ⑥ 한의 사회와 문화

         * 사회 : 호족 중심 사회 → 향촌 질서 유지, 교육 담당, 대토지 소유, 관리로 진출

         * 문화 : 중국 전통 문화의 기틀 마련

                    - 한자 정리 :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됨

                    - 역사학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반고의 ‘한서’

                    - 지동의 발명 : 후한 때 장형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지진 관측 기구

                    - 종이 발명 : 후한 때 채륜이 제지법 개량 → 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불교 전래 : 후한 대에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됨

 

     ⑦ 유교의 발전과 확산

          * 유교의 국교화 : 한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음

            - 유학 교육 장려 : 수도에 태학 설치, 지방에 오경박사 파견 → 인재 양성

            - 유학의 생활화 : 학문의 중심, 관리 선발과 일상생활의 기준이 됨

            - 유학의 주요 경전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 훈고학의 발전 : 유교 경전의 정리와 해석을 중시함

         * 유교의 확산 :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음

 


​위 자료외에 구글에서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자료를 검색해보시면 됩니다. 


https://www.google.co.kr/search?newwindow=1&source=hp&ei=9yW4XNHjM6GvmAWV86C4Aw&q=%ED%86%B5%EC%9D%BC%EC%A0%9C%EA%B5%AD%EC%9D%98+%ED%98%95%EC%84%B1%EA%B3%BC+%EC%84%B8%EA%B3%84%EC%A2%85%EA%B5%90%EC%9D%98+%EB%93%B1%EC%9E%A5&oq=&gs_l=psy-ab.1.1.35i39l6.0.0..4790...1.0..0.154.154.0j1......0......gws-wiz.....6.LK8LP_GHrRo

                                                                                               




3]. 한국 유교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국에 유교 문화가 전승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음.

 

- 다 음 -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2. 기자조선에 대한 필자의견. 두산백과의 서술을 인용함.

 

고려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필자 주 12). 고려.조선이 인정하던 기자조선이기 때문에, 최근에 부정하는 이론이 지배적이 되었어도, 위만조선에 멸망당한 기준(箕準) 왕이라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므로, 고려.조선이 인정한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일본강점기 이후의 부정적인 견해에 의해 그렇게 부정당한 측면이 있는지등도 검토하여야 할 것 같음.

 

. 필자 주 13). 기준 [箕準]에 대한 민중서관의 설명. 

 

기자 조선 최후의 왕. 기부()의 아들. 기자의 41대손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중국의 연()ㆍ제()ㆍ조()로부터 많은 사람이 피난해 왔다. 연의 위만이 망명하여 온 후, 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금마( 지금의 전북 익산군)에 남천, 한왕()이라 하여 마한()의 시조가 되었다.

 

. 출처: 기준 [箕準]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3.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유교교육을 시켜왔는데, 고려시대는 유교 교육에도 불구하고 이전부터 불교의 국교적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여 가르쳤습니다.  



필자가 보기에 고려시대는 조금 특이한데, 유교 국자감 교육에,유교적인 사상에 입각한 삼국사기가 정사로 편찬되고, 치국(治國)의 도(道) 유교,수신(修身)의 도 불교로 유교와 불교가 혼재된 사회였음.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며 유교만 국교(國敎)로 인정.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등학교 국사 참고서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의 발달편에 나오는 중세의 문화[. 필자 주 3). 고려시대의 문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다 음 -


VI. 민족문화의 발달


...2. 중세의 문화...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1). 유학의 발달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⑩ ⑪ ⑫ ⑬ ⑭ ⑮


① 특징: 유교(치국의 도)와 불교(수신의 도)가 서로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며 발전


② 초기: 유교주의적 정치와 교육의 기틀 마련


. 태조: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 건의(최언위, 최응, 최지몽등)

. 광종: 과거제도 실시-->유학에 능숙한 사람을 관료로 등용

. 성종: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유교 정치사상 정립, 자주적.주체적 성격


③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유교 사상의 보수화


. 최충:해동공자, 9재 학당 설립,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 가미

. 김부식:보수적.현실적 성격의 유학 대표

. 특징:시문을 중시하는 귀족적 경향, 유교 경전에 대한 전문적 이해 심화


④ 무신정변 이후: 문벌 귀족 세력 몰락-->유학 위축


(2). 교육기관


① 관학


. 국자감(국학): 중앙의 국립대학, 유학부(국자학, 태학, 사문학)와 기술학부(율학, 서학, 산학)


. 향교: 지방에서 지방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 담당


② 사학의 발달: 고려 중기에 최충의 문헌공도등 사학 12도 융성-->관학교육 위축


③ 관학 진흥책


. 예종: 국자감 재정비, 전문 강좌 설치, 장학재단 설립

. 충렬왕: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 문묘 건립

. 공민왕: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 유학 교육 강화


(3). 역사서의 편찬


① 건국 초기: 왕조실록과 7대 실록 편찬-->전하지 않음


② 중기: 삼국사기(인종 때 김부식)-->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 신라 계승의식 반영...


. 출처: 두산동아 발행 고등학교 국사/지식창고 254p, 발행:2007년 10월 1일, 지은이:윤 영호,김 용석, 엄 기환, 펴낸데:(주)두산동아 




4].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 종교 유교와 한국 유교에 대한 필자의 총체적 견해.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면 이렇습니다.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걸쳐,유교명절 전해짐.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됨.



세계사 개념으로, 제자백가이후,한(漢)나라때 국교(國敎)로 성립된 공자님의 유교(儒敎). 제자백가중 한 파인 공자님의 유가(儒家)가 국교인 유교로 형성됨. 공자님이전의 유교는 은.주시대의 천(天)이나 천자(天子)개념등 여러가지 숭배대상을 가진 시원유교(始原儒敎)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음. 한나라의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되어, 현재까지 이름. 한자와 유교 및 중국의 교육제도인 태학.국자감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함. 동아시아인들(중국,한국,베트남, 몽고 및 2차 대전후의 대만.싱가포르인 및, 세계 각국의 화교)에게 국교화 된 수천년 유교전통, 한자(漢字)에 기반한 언어생활, 음식문화, 의(衣)생활, 주거문화, 대학교육인 국자감 교육(한국은 고려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변화됨), 사고방식등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국가들의 생활에 체화되어  현재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게 아주 많음. 한국은 위만조선, 더 구체적으로는 한사군(漢四郡) 이후, 수천년동안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

 

이전부터 전해지던 중국의 여러 신앙체계에 대해, 유가나 도가, 음양가, 묵가등 여러 사상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국교로 채택된 유교는 공자님의 유가사상으로 교육되어오다가 채택된 것임. 공자님과 맹자님에게서 배운 여러 제자들이 고대 중국의 종교적 토대를 형성하였고, 서양은 로마제국이 받아들인 헬레니즘사상에서 살다가, 숭배대상으로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받아들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종교나 신앙체계는 고대 태동기에 정형화시키면, 후세사람들이 보기에 다소 불만족.불합리해 보여도 지배적인 종교.신앙으로 유지되는 특성이 있음.  동아시아의 유교는 황하문명과 한자를 토대로 유교를 국교로 유교교육으로 태학등을 설립하여 교육.전파.계승시켜옴. 단순하게 중국에 포교된 인도의 불교는 국교인 유교와 달리, 창조주를 부정하는 부처를 숭배하면서, 무군무부의 금수로 배척당하면서 중국.한국이나 동아시아 국가에서 연명하여 왔지만, 어디까지나 국교인 유교나 유교교육의 지배자들 밑에서, 산간에 숨어든 외래신앙 정도로, 유교를 중심으로 하면서, 유교의 하위신앙형태로 유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 중국 도교나 중국 불교의 특성이 국교인 유교의 국교상태를 존중하면서, 주변부 신앙으로 이어져 온 것에 해당되며, 한국이나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그러함. 다만, 후발국지적으로 새로 신앙체계를 형성한 일본은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면서 기독교에 대항하다가, 오랫동안 선진문명국이자 어버이나라로 섬겨온 한국과 달리, 불교적 특성이 강한 신도를 국교로 하여, 일본 민중불교를 같이 믿다가, 일본 강점기에 이러한 일본 신도.불교 및 일본에 포교된 기독교를 한국에 포교시켰음. 2차대전 패전후 일본의 근대적 의미의 수장(일본이 천황으로 호칭.한국은 일왕으로도 호칭)이 인간선언을 하였음.     



위만조선.한사군을 거쳐서, 한국에 전래된 유교는 지금까지, 수천년동안 제도적.관습적 유교국가입니다. 일본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후에는 유교국가이던 조선의 한문성씨와 본관을 국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와, 행정법상 유교 국가.


학교 교육은 삼강오륜 유교교육 실시하면서 유교의 다른 가르침인 인.의나 충.효교육등을 위주로 함. 그리고 설날.추석등 전국민적 전통 유교명절을 지켜옴.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교는 없고, 종교의 자유도 있음. 





 

[3]. 세계 종교 유교와 세계 4대 종교. 세계사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이론으로, 시중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음.   



1]. 한국의 주요서적이나, 논문, 신문 및 외국의 서적등에서는 그렇게 서술하는 내용이 많음. 현재의 세계사영역은 세계의 4대 종교를 서술하지 않고 있는것으로 여겨지며, 세계의 4대 종교에 대한 논란은 많을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4대 성인으로보면 이전처럼 유교,기독교,불교,이슬람교가 관습상의 세계 4대 종교라고 판단합니다. 관습상 세계 4대 종교는 이전처럼 유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사 교과서 영역(참고서 포함)에서 세계 4대 문명만 표시하고, 4대 종교는 표시하지 않기때문에,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지역의 종교를 언급하고만 있습니다.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세계사의 선발종교인 유교는 공자님(원시유교의 계승자이자 전달자) 이전의 원시종교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원시기독교처럼(유교의 五經은 기독교의 舊約聖經에 해당하고 유교의 四書는 기독교의 新約聖經에 해당됩니다). 창조주인 하늘천이 인간을 창조한 유신론 종교(天生蒸民)인 유교는 창조주의 인간창조에서 기독교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브라만교에 대항해 생겨난 불교는 인간 부처가 창조주를 가르치고 창조주가 부처 발밑에서 무릎꿇고 배우는 방식이라 이런점이 분명하게 다릅니다.

 

 

 

2]. 세계 4대 종교를 유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로 보는 서적들의 견해

 

A]. 배려와 학습. 신창호 저/박영사/2013.03.05, 페이지 224

 

CHAPTER 04 세계 4대종교에 나타난 배려의사유

 

1. 유교:인(仁)의 관계망, 2.불교:줄탁동시(啐啄同時)의 소통, 3.기독교:사랑의 계명, 4. 이슬람교:평화의 메시지

 

B].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세계 여성의역사.

로잘린드 마일스 저/신성림 역/동녘/2005.10.15, 페이지 454

책소개

 


이 책은 유럽과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제3세계 여성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해주고 있다. 고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선사시대 여성의 지위마저 남성의 눈으로 왜곡해온 점을 다양한 근거 사료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1부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고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다룬다. 2부에서는 세계 4대 종교로 꼽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가 지배하는 시기를 다룬다.

 

C].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단식의 기적).

 

폴 씨 브래그 지음/김태수 옮김/건강신문사/2005.09.15

 
감각 세계로부터 정신을 분리하는 것이 정신 세계의... 전에 40일간 사막에서 단식을 했다.오늘날 세계의 4대종교-기독교, 유교, 회교, 불교-의 창시자들은 몸과 마음과...
(301페이지)

 

D]. 유학 경영에 답하다.

 

권경자지음/원앤원북스 펴냄/2010.02.18. 본문중 1부 경영, 유학에서 길을 찾다-33 페이지  

 

...중국의 놀라운 부상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등의 궁금증을 자아내며 동아시아는 주목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이러한 국가들이 경
제성장을 통해 급부상한 사유가 유교였다는 점에서 유교와 자본주의를 결합해 ‘유교자본주의’라고 명명했다.세계지도를 펼쳐보면 가장 넓
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대륙이 아시아다. 또한 기독교· 불교·이슬람교·유교 등 세계 4대종교와 황하 · 인도·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이 ..

 

E]. 세계사 100장면.

 

박은봉 지음/실천문학사 펴냄/1998.12.18

54페이지,

 

21. 알라 앞에선 만인이 평등-마호메트, 이슬람교 창시(610년) 세계 4대 종교로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를 꼽는다. 그중 가장 늦게 창시된 것이 이슬람교이다. 현재...

 

F]. 재미있는 논어 이야기.

 

이 언호지음/큰방 펴냄/2010.06.05

 

G]. Palgŭn sahoe yŏnʼgu, 17-18호

 

Palgŭn Sahoe Munje Yŏnʼguso(* 밝은 사회 문제 연구소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걸로 나타남, 인터넷 검색 요망)/
1996

194 페이지,

 

그러나 오늘날 세계4 대종교 라고 불리고 있 는 기독교 - 불교 - 이슬람교 - 유교등 의 지도자 들을 한자리 에 모이 도록 주선 하여 세계 평화 와 인류 사회 의 발전 에 대하여 토의 하여 그 결과 로 새로운 긍정적 인 방향 으로 인류사 회 를 이끌어 ...  

 

 

 

신월지음/뿔미디어 펴냄/2011.08.25

 

210페이지,

 

우리에게 맡긴 곳은 한 종교단체.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생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교리를 살펴보면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등 세계4대 종교의 교리를 모아 짜집기 한 곳이다.

 

I].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아시아사 1.

 

김상훈/다산에듀/2011. 인터넷으로 검색해 볼것.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통아시아사 1


books.google.co.kr/books?isbn=8963706400

김상훈 - 2011 - ‎미리보기 - ‎에디션 더보기
세계 역사를 이끈 대륙 아시아의 고대∙중세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 있어. 같은 아시아인 ... 이 가운데 이집트 문명을 뺀 나머지 3대 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모두 아시아야. ... 인류의 4대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야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은 유교나라임. 불교는 한국 전통의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 http://blog.daum.net/macmaca/2632


2.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3.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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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는 불가피함. 그 동안의 한국 공교육 전통을 감안하면, 지엽적인 마찰이 생겨도 수천년 인류역사를 담은 세계사와의 연계는 가장 옳은 정답에 해당됩니다. 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하여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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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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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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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 한자의 사용, 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 불교는  중국불교형태로 받아들였지만,거센 반발때문에,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포교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가 유교, 수신의 도가 불교였는데, 유교의 각종 명절과 제사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음.

 새롭게 종교인구 산출을 어떻게 해도,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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