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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7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인데,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날입니다.

2019년 8월 7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인데,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날입니다. 




1].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에는 견우()와 직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곡풍지십(谷風之什) 대동(大東)편에는 다음과 같은 시어(詩語)가 있습니다.


維天有漢 하늘엔 은하수가 구비구비

監亦有光 희미한 빛내며 흘러가며

跂彼織女 직녀 바라보며

終日七襄 종일토록 베틀에 일곱번 앉고 지네.

雖則七襄 일곱번 앉고 져도

不成報章 무늬 고운 비단 짜지지 않고

晥彼牽牛 반짝이는 견우조차

不以服箱 소레 끌지 않네.



. 출처: 四書五經 2, 孟子.詩經/責任監修 前 忠南大 大學院 敎授 柳正基/文學堂 刊.(株)東西 供給/1986년 7월 20일 발행 


. 필자 주 1). 谷風之什의 什에 대한 발음. 국내에서 什에 대한 발음은 주로 십.습.집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교학사 중한사전(박영종 저)에 의거 십으로 발음하여 표기하였습니다. 


. 필자 주 2). 위 번역본 본문의 不以服箱(소레 끌지 않네)중, 소레는 수레를 의미합니다. 책임감수하신 유정기 교수님이, 나이가 많으시고, 한학을 주로 배우시고, 한글교육을 받지 않으신 세대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수레를 소레로 표기하신 것 같습니다만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사항입니다. 필자는 헌책방에서 이책을 구입하였습니다. 그 당시 책임감수자인 유정기 교수는 대구사대 전임강사, 이화여대 조교수, 성균관대 전임강사, 대구대학 교수, 충남대학교 대학원 교수의 이력을 가진걸로 책에 나타납니다.


. 필자 주 3). 칠석날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고등학교(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고등학교인 전주 신흥고등학교)때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영어로는, July 7th in the lunar calendar, the sev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독일어로는,

Juli nach dem Mondkalender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는 칠석날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2]. 칠석날에 대한 여러가지 서술내용.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7일.

내용

칠석은 양수인 홀수 7이 겹치는 날이어서 길일로 여긴다. 이 날은 견우()와 직녀()가 까막까치들이 놓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유래담이 있는 날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설화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7월이 되면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이 맑고 푸르며 높다. 북두칠성은 한 쪽으로 몰아 떠있고 비단결 같은 은하수는 금방 쏟아질 것 같다. 그 동쪽에 직녀성이 수줍은듯 희미하게 비치고 서쪽에서는 견우성()이 휘황하게 빛을 발하는데 이는 마치 서로 마주보며 정겨워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두 별을 보게 되는데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별자리를 보고 ‘견우와 직녀’ 설화를 만들어냈음 직하다.

중국의 두목지()의 칠석시에 이러한 정서가 담겨 있다. “요계야색양여수 와착견우직녀성( )”, 즉 “옥 섬돌에 밤빛이 서늘하기 물 같은데 누워서 견우 직녀 두 별을 바라보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남녀간의 정담이 담긴 명절인 까닭에 옛날부터 남녀 상사()나 애정시와 설화도 칠석과 관련된 것이 상당히 있다.

주()나라 왕자 교()가 봉황곡()을 울리며 신선이 되어 도사() 부구공()의 부인과 만났다는 날이 바로 칠석이다. 서왕모(西)가 자운거()를 타고 전상(殿)에 내려와, 장수()를 원하는 한무제()에게 요지 선도()를 올린 날 역시 칠석이다.

또 이 날 양귀비()의 혼이 재생하여 장생전(殿)에서 오매(:깨어있는 때나 자는 때)에 그리워하던 당명황()을 만나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가 되고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일컫는 말)가 되자”고 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우리 나라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가약을 맺어주던 광한루()의 다리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다리와 이름이 같은 오작교였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가정에 따라서는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한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처녀들이 바느질을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라고 한다. 칠석날 밤이면 궁중이나 민가에서 부인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는 이른바 걸교제()를 지내는 일이 한()나라 시대에 이미 행해졌다.

이 풍속이 당()나라 시대에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의 걸교나 일본의 ‘다나바다마쯔리[붕기제=]’는 그 예들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이 날 왕후와 더불어 궁중에서 견우와 직녀성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관들에게 녹(祿:녹봉)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연희를 베풀고 선비들에게 명절 과거를 보게 하는 등 중요 명절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걸교제의 민속화는 실제로 찾기 어렵다. ≪≫에는 인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 쇄의상()이 옛 풍속이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직물이나 바느질은 실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직녀라는 별 이름 자체가 직물()이나 바느질과 관련된다는 관념에서 걸교가 더 중요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근래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점치는 풍속이 행해졌다. 처녀들이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솜씨를 좋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그 이튿날 나가 봐서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칠석날에는 칠석차례라 하여 햇벼가 익으면 사당에 천신하고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우물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 출처:칠석[七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 세시풍속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음력 7월 7일로 세시 명절의 하나. 헤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도 한다.

유래

칠석()의 유래는 중국의 『제해기()』에 처음 나타난다. 주()나라에서 한대()에 걸쳐 우리나라에 유입되기까지 윤색을 거듭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부지런한 목동인 견우가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견우가 부지런하고 착하여 손녀인 직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한 견우와 직녀는 너무 사이가 좋아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그러자 천계()의 현상이 혼란에 빠져 사람들은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이것을 본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니 이것이 오작교()이다.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 한다. 칠석 다음날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를 보면 모두 벗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칠석날에는 비가 내리는데 하루 전에 내리는 비는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내리는 비는 헤어지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또는 낮에 오는 비는 기쁨의 눈물이고 밤에 오는 비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독수리별자리[]의 알타이르(Altair)별과, 거문고별자리[]의 베가(V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별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 운행할 때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날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 무렵이면 천장 부근에서 보이게 되므로 마치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견우성과 직녀성이 일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천문 현상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나라에 이르러서 칠석 설화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풍속이 발전하였다.

내용

우리나라도 일찍이 삼국시대에 이 설화와 풍속이 있었던 듯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덕흥리 고분 벽화에 견우와 직녀 설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고려 공민왕이 왕후와 더불어 칠석날 궁궐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하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다고 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의 과거를 실시한 기록이 있다. 궁중 밖의 민간에서도 칠석의 풍속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모습은 『동국세시기()』 등의 문헌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칠석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풍속이 행해졌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옛날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견우직녀를 시제()로 시를 짓게 하였다. 또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폭의()와 폭서() 풍속이 있었다. 여름 장마철에 장롱속의 옷가지와 책장의 책에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끼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를 비는 걸교() 풍속이 있었는데, 걸교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풍속이다. 칠석날 새벽에 부녀자들이 참외, 오이 등의 과일을 상에 올려놓고 절을 하며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빈다. 저녁에 상 위로 거미줄이 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직녀가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 여기고 기뻐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위에 재를 담은 쟁반을 올려 놓은 뒤, 별에게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빌고 다음날 아침 재 위에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어 바느질을 잘하게 된다고 믿었다.
별과 조상과 자연과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풍속도 지역과 가정에 따라서 행해졌다. 지역에 따라서 칠석제, 용왕제, 밭제 같은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 천신()하며 밀국수, 밀전병, 호박도래전 등 시절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칠석음식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먹고 칠석놀이라 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가무로 밤이 깊도록 놀기도 한다.

지역사례

전북 고창과 태인, 경북 봉화·예천·안동에서는 외와 수박을 차려놓고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 전북 익산과 군산에서는 칠석날 시암제(샘제)를 지냈다. 마을에서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정결하게 한 다음 각 가정마다 시루떡을 쪄서 우물 옆에 두었다. 청년들은 솔불놀이라 하여 달집짓기와 비슷하게 이웃마을과 놀이를 벌여 즐기고 진 마을은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며, 이긴 편의 마을을 함부로 방문할 수도 없었다. 진안에서는 농현이라 하여 김매기를 끝내고 하루를 쉰다.
경북 안동에서는 부인들이 밤에 까마귀밥이라 하여 담 위에 올려놓고 자손의 명()과 복()을 빌고 집안일이 잘 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주에서는 칠성단에 참기름으로 불을 켜서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빌었다. 영일에서는 이날 바닷물을 약물이라며 멱을 감는다.

속신

강원도 양양에서는 으레 비가 오는 날로 되어 있어서 비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를 살펴 농사를 점쳤다. 만약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곡물에 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비가 내리면 견우직녀가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알고 농사에 좋을 것이라 여겼다.
한편 칠석에는 아침에 일찍 논에 나가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날 신이 들에 내려와서 들마다 곡식의 생산량을 정해 주기 때문에 논밭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근신한다. 사람이 바깥에 나와서 돌아다니면 신이 수확량을 감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기도 의왕, 전북 전주, 광주광역시 등 지역에 따라 칠석날은 ‘곡식을 마련하는 날’이라고 하여 남자들은 들에 나가도 되지만, 여자들은 일찍 나가지 않고 오후가 되어서야 들에 나간다. 경북 고령에서는 목동들이 잡귀를 막는다고 복숭아 회초리로 소의 꼬리를 치며 몰고 온다.


.출처:칠석[七夕]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3.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칠석[ ]


음력 7월 7일에 행하여지는 연중행사.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 퍼졌다. 7월 7일을 특별한 제일로 하는 관념은 농경의례에 기원을 두는데, 문헌자료에 남아있는 것으로서는 후한시대의 『사민월령』이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거기에서는 이날에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것 외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화합하는 것에 맞추어서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견우ㆍ직녀). 햇볕에 말리는 것은 의복도 함께 행하여지는데, 의복에 조령이 붙는다는 옛날의 신앙과 함께 7월 7일이 원래 농경의례와 결부된 조령제의 날이었다는 것이 추정된다. 칠석에 점이나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은 것도 원래 농작물의 수확을 점쳤던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한시대의 화상석이나 석조에 보이는 견우ㆍ직녀가 양자 한 쌍으로 우주론적 배치관계를 가지는 것에서 이 시대에도 칠석에 대한 전설이 신앙관념을 배후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북조시대가 되면서 오래된 신앙적 요소는 불식되어서 연중행사의 하나로서 초가을의 행락의 날이 되었다. 남조양의 『형초세시기』는 7월 7일 밤, 견우와 직녀가 회합하는데, 그때 여성들은 7개의 바늘에 실을 꿰어 바쳐서,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견우와 직녀는 부부였는데, 천제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1년에 한 번, 칠석에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후한경부터 서서히 발전하고 있으며, 남북조 중기경에는 직녀가 까치가 하늘에 만든 다리를 건너서 견우를 찾아온다는 줄거리가 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느질 솜씨를 기원하는 풍습을 걸교전()이라고 하며, 근데 도시의 번성기나 궁중의 세시기에 보이듯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성들의 제일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또한 7월 7일은 북두칠성의 제1성인 괴성()의 탄생일이라고 하며, 괴성이 문운(), 특히 과거 시험에서의 운ㆍ불운을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근세의 독서인들은 칠석에 괴성을 제사지냈다.

한국

조선에도 7월 7일에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전설에 의거해서 중국의 걸교전과 마찬가지로 그날 밤 부녀자는 재봉의 능숙을 두 별에 기원한다. 또한 서적이나 의복을 햇볕에 말리기도 하며 한편 농가에서는 이날에는 두 별의 이별의 눈물이 내리기 때문에 이로써 몸을 정결히 하고 머리를 감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서 목욕하거나, 천곡귀신이 내려와서 곡물의 수확량을 정하는 날이라고 하여서 휴업한다. 이처럼 중국풍의 성제() 외에 원래 이 시기에 우리나라 고유의 농경예축의례가 행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 출처: 칠석[七夕]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3-1.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七夕)관련 설명중 나타나는 중국의 걸교전. 


걸교전

[ ]

요약 중국에서,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5색 실을 견우·직녀 두 별에게 바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풍속.

걸()은 빈다는 뜻이고, 교()는 길쌈과 바느질 잘하는 솜씨이며, 전()은 물건을 바쳐 제사지낸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때 장식을 베푼 망루를 세우고, 이를 걸교루()라 했는데 한국에서는 걸교라고 하였다.


. 출처: 걸교전[乞巧奠] (두산백과)



3]. 직녀와 관련된 여러가지 자료들.


1. 직녀[, zhī nǚ ]

.요약
중국 신화, 고사 속 인물
 

1. 고사의 여주인공

중국 신화에서 천제의 딸, 혹은 손녀, 외손녀라고 전해오는 그녀는 직녀성의 여신으로, 별명은 칠성낭랑(), 칠성낭(), 칠서마(), 칠선고(), 천선낭랑()이다. 견우직녀 고사의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직물과 비단을 짰는데, 하서(西, 황하 서쪽을 지칭)의 우랑(, 견우)에게 시집가 직물 짜는 것을 중단했다. 천제가 크게 노하여 이들을 헤어지게 하고는 매년 칠월 칠석에만 만나게 했다. 사람들이 이 날을 명절로 삼았다고 한다.

2. 고문헌의 내용

직녀는 고문헌에 자주 출현하는데, 『시경』 제9편 「소아대동()」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천유한(): 하늘에 있는 은하수
감역유광(): 살펴보니 또 빛이 난다
기피직녀(): 베틀의 저 베 짜는 여자
종일칠양(): 종일토록 일곱 자리 옮기어 앉아 있네

이 밖에 『사기』, 『한서』 등의 역사서에 천제의 외손녀로 소개되어 있다. 또 『회남자』 「숙진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만약 진인(, 도인)이 된다면, 지허()의 경지에서 느긋하게 행동하고, 멸망되어 아무것도 없는 들에서 소요(,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하며······ 우뢰를 신하로 삼고, 과보를 관리로 삼아 부리며, 복희의 딸을 첩으로 두고 직녀를 아내로 둔다!”

당나라 때의 『세화기려()』 권 3에는 『풍속통의』의 글을 인용하여 “직녀는 칠월칠석에 은하수를 건널 수 있는데, 까치를 부려서 다리를 놓는다.”라고 전해진다.

후일 직녀는 애인과 부녀, 아동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출처:직녀[織女, zhī nǚ]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 우랑직녀[ ]

백사전전설(), 맹강녀전설(), 양축전설()과 더불어 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직녀()로 불리며 7월 칠석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난양(, 남양)의 성 서쪽의 우가() 마을에 우랑()이라는 고아가 형과 형수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 형수는 그를 못 마땅이 여겨 그에게 아홉 마리의 소를 내어주고는 10마리의 소를 데려오지 않으면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며 그를 내쫓았다. 우랑은 집을 떠나 낙담해 하던 중 한 도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푸뉴산(, 복우산)에 올라 한 마리의 병든 누렁소를 발견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소를 돌보아 주었고 마침내 이 늙은 소가 원래 천상의 금우성()으로 벌을 받아 인간세계로 내쳐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이 늙은 소의 지시에 따라 우랑()은 선녀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목욕하며 놀던 장소로 가서 몰래 그중 하나의 옷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직녀()의 옷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으나 이는 하늘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어서 직녀는 하늘나라로 불려가게 되었다. 늙은 소는 우랑()에게 그가 죽고 난 후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언덕에 올라가면 구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마침내 우랑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바로 직녀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서왕모(西)가 은비녀를 은하수로 변하게 하여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까마귀가 이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오작교를 만들어 마침내 우랑과 직녀가 다시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서왕모도 이 모습에 감동하여 매년 음력 7월 7일 오작교에서 이들 두 사람의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매년 칠석()에 우랑()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직녀와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서적의 기록에는 민간에서는 직녀가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다재다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7월 7일 저녁에 직녀성을 향해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면 어리석음이 없어지고 눈치가 빨라지며 손재주가 좋아질 수 있다고 전해져 이날은 여자들이 마당에 모여 새 옷을 입고 우랑성()과 직녀성()을 바라보며 절을 하며 상을 펼쳐 과일과 건과 등을 차려놓고 바늘에 실을 꿰며 색실을 잇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나온 것은 시경()의 소아() 다퉁()으로 여기에서는 우랑은 견우()로 칭해지고 있으며 당시의 우랑과 직녀는 하늘나라의 별을 지칭하고 사랑에 관한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서한(西) 시기 우랑직녀는 두 사람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우랑직녀 설화의 발원지에 대해서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곳은 허난성 난양시(, 남양시)로 여겨지며 더불어 시안시 창안구(, 장안구)에서 출토된 우랑직녀상()을 근거로 산시성(西, 섬서성) 시안시(西)라는 설, 최근 우랑직녀의 이야기가 염황대전() 이후 염()씨의 부락이 남쪽으로 천도하며 발생한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출처: 우랑직녀 [牛郎织女]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도서출판 황매희) 

4]. 백제시대의 부사 칠석놀이

부사칠석놀이

[ ]

이칭별칭 부용사득이놀이
유형 놀이
시대 현대
성격 세시풍속놀이
놀이시기


음력 7월 7일

                               

정의

음력 7월 7일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에서 행해지는 마을공동체 놀이.

개설

음력 7월 7일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에서 풍장패를 앞세워 길놀이·합궁놀이·황새샘치기·칠성굿놀이·견우직녀 상봉놀이·장치기놀이로 이어지는 마을공동체 놀이이다. 그 외에도경상남도 김해군 부서(西: 진영읍)의 알촌과 하계()마을의 칠석놀이, 충청남도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및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의 풍년제, 전라북도 정읍의 솔불놀이, 전라남도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칠석날에는 시절음식으로 밀전병과 과일을 먹는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터줏가리·부엌·마루·미당 등 집안의 신들에게 먼저 올린 다음 먹었다. 대감과 성주에게 고사를 지내며 단골만신을 찾아가 빌기도 한다.

이날 여자들은 바느질 솜씨가 늘길 빌었고, 저녁에는 강강술래를 하고 그네를 뛴다. 매년 6월 그믐에서 7월 10일까지 행하는 알촌과 하계마을의 칠석놀이는 집집마다 술과 안주를 갖추고 긴 장대에 깃발을 달아 잡악(아악 이외의 여러 가지 속악)을 베풀어서 태종신()에게 제사지낸다. 모두 모여서 술을 마시며 씨름으로 승부를 가른다. 시기적으로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여러 번 폐지되었지만, 호랑이가 출몰하여 가축을 물어 죽인다고 하여 부득이 재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부사동의 칠석놀이는 백제시대 두 연인 윗말의 부용()과 아랫말의 사득()의 비극적인 연애고사에 기원을 둔 촌락신화에서 유래한다.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은 전장에 나가 전사한다. 부용은 보문산 선바위(아들바위)에 올라 사득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다 실족사 한다. 몇 해 후 마을에 가뭄이 들고 샘물이 마르자 멀리 소재한 황새샘에서 물을 길어온다. 부용이 윗말의 한 노인에게 현몽하여 사득과의 영혼결혼을 원하니 앙숙이던 두 마을은 화해하고 샘고사를 치른 후 이를 성사시킨다. 그러자 샘물이 펑펑 솟았고 이 샘을 부용과 사득의 이름을 따 ‘부사샘’이라고 불렀다.

두 마을은 매년 칠석마다 보문산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선바위 치성)를 올렸고 부녀자를 중심으로 제물을 진설한 후 비손하며 소지를 올린다.

부사샘을 깨끗이 치우고 샘고사를 올리는데, 풍장을 동원하여 길놀이, 기세배, 샘풀이, 샘치기노래, 고사가 결합된 형식으로 전승된다. 이들 두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한 합궁놀이는 마을 전체가 행하는 모의 결혼행위로서 일종의 마을축제로 전승되고 있다.

1938년 이후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계승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그 맥을 잇지 못하였다가 1990년 마을 거주 장택수씨가 동네 어른들의 고증에 기반을 두고 발굴하여 이후, 1993년 대전대학 국문학 교수 한상수씨의 고증을 받아 부활시켰다.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되었고, 1993년 10월 대전시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1994년 10월 21일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부사칠석놀이보존회를 결성하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놀이방법

길놀이와 합궁놀이로부터 출발한다. 일반적인 기싸움처럼 용기()를 세우기 위해 농악을 동원하여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만나는 과정으로 깃봉싸움이 전개된다. 이는 농경모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합궁은 양쪽 마을의 기를 통해 화합을 표시하는 기세배의 일종으로 상견례이다. 농악에 맞춰 음양 현상의 결연을 통해 풍농을 기원하는 것인 듯하다. 다음은 황새샘치기와 칠성제로, 황새샘은 부사동 논에 물을 대는 수원으로 매년 칠석 무렵 농기와 풍장을 앞세워 샘을 다시 치우고 고사를 올린다. 황새샘치는 노래를 부르며 이 소리에 맞춰 고사의 참여자는 다함께 물을 퍼낸다. 샘고사가 끝나면 칠성제를 행하는데 마을의 번영을 칠성신에게 기원한다.

부사동에선 부용제()라고 하며 선바위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견우직녀 상봉놀이는 부사동에선 흔히 ‘부용·사득이놀이’라고 한다. 풍장에 따라 오작교 대열을 만들고 견우와 직녀로 가장한 놀이꾼이 각각 오작교 뒤쪽에서 앞으로 오면서 만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놋다리밟기처럼 노래를 부른다.

내용은 남녀상사가 주종을 이루며 깃봉싸움처럼 음양의 화합을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어 장치기놀이는 견우 쪽과 직녀 쪽이 나누어 지게줄로 만든 공을 지게작대기로 치며 상대편 깃대를 맞추는 민속경기이다.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자기편을 응원하며 풍물에 따라 다양한 종목의 노래를 부른다. 율동은 흔히 지게 장단이나 물박 장단이며, 풍물은 대전 지역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는 웃다리농악과 대체로 일치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칠석날은 걸교()라고 하여 처녀들이 견우와 직녀성에 대고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 유생들은 두 별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으면 문장이 숙달된다고 믿었다. 또 ‘칠석차례’라 하여 올벼를 사당에 천신()하였고, 샘을 깨끗이 치우고 샘고사를 지냈다. 칠석제 또는 칠성제()라 하여 부인들이 밤에 칠석단을 모아놓고 집안의 부귀와 자손의 명()과 복을 빌었다.

논산 지역에서는 두레의 김매기를 마치고 온 동민이 한자리에 모여 품값의 결산을 겸한 두레 먹이를 했다. 또한 떡을 해서 논에 용신제()·밭제()를 모셨고, 김매기와 밭매기가 끝났다 하여 하루를 쉬었다.

부사동 칠석놀이는 순차적인 놀이가 관행화된 성장의례의 생산성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다. 이는 견우직녀 설화와 유사한 부용·사득 상봉놀이가 바탕이 된 것으로 농작물 성장의례에 부합되는 공동체 놀이라고 하겠다.


. 출처: 부사칠석놀이 [芙沙七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부사 칠석놀이, 경남 김해군 부서(西)의 알촌과 하계()마을의 칠석놀이, 충남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충남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에서 칠석날 행했던 풍년제,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


칠석놀이

[ - ]

분야 놀이
계절 가을(음력 7월)
날짜 음력 7월 7일
다른이름 송계놀이, 풍년제, 솔불놀이, 진세놀이
관련정일

칠석(七夕)                                


정의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풍장패를 앞세워 길놀이, 합궁놀이, 황새샘치기, 칠성굿놀이, 견우직녀 상봉놀이, 장치기놀이로 이어지는 공동체 놀이.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의 칠석놀이를 비롯하여 경남 김해군 부서(西)의 알촌과 하계()마을의 칠석놀이, 충남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충남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에서 칠석날 행했던 풍년제,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 등이 칠석놀이로 보고된 바 있다.

유래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에서는 칠석날 칠석놀이를 행하는데, 부사동은 보문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보문산을 경계로 남쪽으로 대사동과 호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 문창동, 동쪽으로 석교동, 서쪽으로 대사동과 대흥동 일부가 동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전승되는 칠석놀이는 백제시대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종의 촌락신화()의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전체적인 서사 내용을 화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백제시대에 부사동은 윗말과 아랫말로 나뉘어져 있다. 두 마을은 항상 갈등을 겪는다. ② 윗말의 부용()이라는 처녀와 아랫마을의 사득()이라는 총각이 사랑에 빠진다. ③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이는 백제군으로 징집되어 전장에서 전사한다. ④ 부용이는 매양 보문산 선바위에 올라 사득이를 그리워하다 실족하여 죽는다. ⑤ 몇 해 후, 마을에 가뭄이 들어 샘물이 마른다. 그래서 황새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온다. ⑥ 윗말의 한 노인 꿈에 부용이가 현몽하여 가뭄 해소의 대가로 사득이와 영혼결혼을 시켜줄 것을 원한다. ⑦ 아랫말의 한 노인 꿈에 사득이가 현몽하여 부용이와 같은 말을 건넨다. ⑧ 윗말과 아랫말 사람들이 화해하고 칠석날에 함께 모여 샘고사를 지낸 후 영혼결혼을 성사시킨다. ⑨ 샘물이 펑펑 솟는다. ⑩ 샘을 부용과 사득의 첫 자를 따서 ‘부사샘’이라고 일컫는다.
부사동이라는 마을의 이름도 이 촌락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촌락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부사동의 칠석놀이가 구비설화에서 삼국시대부터 형성(③참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사()』권38 세가()38 공민왕() 2년(1353)에 “임신일에 칠석이므로 왕과 공주가 내정 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냈다( ).”라는 것으로 보아 칠석놀이는 칠석제()에 근거하고 있다. 칠석놀이가 부용과 사득이라는 두 영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두 마을의 결합(화합)까지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전승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마을은 매년 칠석에 보문산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부사샘을 깨끗이 치운 후에 샘고사를 올렸으며, 부용과 사득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합궁놀이를 하였다. 오늘날에는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를 선바위 치성이라고 하며, 부녀자를 중심으로 제물을 진설한 후 비손하며 소지를 올리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샘고사는 풍장을 동원하여 길놀이, 기세배, 샘풀이, 샘치기노래, 고사가 결합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합궁놀이는 마을 공동체가 행하는 모의 결혼 행위로서 일종의 마을축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부사동의 칠석놀이는 1930년대까지 온전한 형태로 전승되다가 단절된 후 최근에 재현을 시도하였다.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된 이래 1993년에 대전시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사칠석놀이보존회(회장 김준헌)가 결성되어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내용

현재까지 조사 보고된 칠석놀이를 살펴보면,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는 두 동네가 달집짓기를 다투는 성장의례 관련 놀이이며,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는 칠석날을 ‘진세먹는 날’이라고 하여 3세나 5세가 된 아이가 있는 집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노는 날이다.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칠석놀이의 놀이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길놀이와 합궁놀이: 길놀이는 마을 축제유희()에 기본적으로 있는 부수놀이인데, 합궁놀이와 한 단위로 묶을 수 있다. 여느 지역의 일반적인 기싸움처럼 용기()를 세우기 위해 농악을 동원하여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만나는 과정이다. 이른바 ‘깃봉싸움’이 전개되는데, 그 자체를 농경 모의축제라고 할 수 있다. 부사동 칠석놀이에서 주목되는 것은 ‘합궁()’인데, 이는 양쪽 마을의 기를 통해 화합을 표시하는 기세배의 일종이다. 이를 흔히 ‘상견례’라고 부른다. 기를 통한 인사굿인 셈이다.
합궁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농악에 맞춰 대열을 이루고 농악소리에 따라 양쪽의 기를 숙이는 인사굿이다. 합궁이 남녀 결합방식을 모의하여 마을의 화합을 재확인하듯, 집단놀이의 겨루기 방식과 동일하게 음양 현상의 결연을 통해 풍농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듯하다. 지역의 제보자들도 합궁을 성행위의 모의적 발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두 마을이 힘을 모아 농사짓기를 합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② 황새샘치기와 칠성제: 황새샘은 부사동의 논에 물을 대는 수원()이다. 매년 칠월 칠석 무렵에 지역의 농민들은 농기와 풍장을 앞세워 샘을 다시 치우고 고사를 올린다. 샘은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한 요인이기 때문에 장마가 지난 음력 7월에 샘을 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때 ‘황새샘치는 노래’를 부르는데, 고사의 참여자들은 소리에 맞추어 다함께 물을 퍼낸다.
샘치우세 샘치우세,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칠월이라 칠석날에,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샘치움을 잊었던가,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한바가지 두바가지,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정성으로 치운물로,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추석명절 돌아오면,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햇곡으로 밥을지어,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조상님전 제올리고,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부모님께 봉양하면,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이샘으로 합수되어,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만 복 이 기틀터니,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상하부사리 벗님들아,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유왕제를 지내로세, 우려러차하 우려러하차
풍장과 더불어 ‘메기고 받는 소리’를 통해 샘 주변에서 일종의 우물굿을 하는 방식이다. 칠성님의 도움으로 농사가 잘 되고 만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사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설이다. 작업노동요나 작업의식요가 그러하듯이 메기는 사설은 2음보 연속이고, 후렴은 행위의 의성어와 감탄어구가 결합된 형태이다
샘고사가 끝나면 칠성제()를 행한다. 본디 칠성제 자체가 공동으로 거행된 경우가 드물지만, 부사동에서는 공동제의로서 칠성제를 통해 마을의 번영을 칠성신한테 기원한다. 칠성단의 제단에는 물동이에 정수를 다른 제물과 함께 진설한다. 제차()는 일반 동제와 동일하다. 부사동에서는 칠성제를 ‘부용제()’라고 하여, 선바위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③ 견우직녀 상봉놀이와 장치기놀이: 칠석놀이의 핵심은 견우직녀 상봉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알려져 있다. 부사동에서는 흔히 ‘부용·사득이놀이’라고 한다. 이 상봉놀이는 풍장에 따라 오작교 대열을 만들고 견우와 직녀로 가장한 놀이꾼이 각각 오작교 뒤쪽에서 앞으로 오면서 만나는 것이다. 만나는 과정에서 놋다리밟기처럼 노래를 부른다. 칠석놀이의 ‘부용·사득이 노래’는 다음과 같다.
봄나비 꽃잎에 쌍쌍 (왼쪽), 봄나비 꽃잎에 쌍쌍 (오른쪽)
꾀꼬리 버들에 쌍쌍 (왼쪽), 꾀꼬리 버들에 쌍쌍 (오른쪽)
바위에 다람쥐 쌍쌍 (왼쪽), 바위에 다람쥐 쌍쌍 (오른쪽)
시냇가 가재가 쌍쌍 (왼쪽), 시냇가 가재가 쌍쌍 (오른쪽)
날짐승 길버러지 (왼쪽), 제각각 쌍쌍인데
어이해 부용사득은 (왼쪽), 혈혈이 단신인고
어이해 부용사득은 (왼쪽), 혈혈이 단신인고
칠석날 견우직녀, 오작교 만나듯이
부용사득 칠석날에, 오작교에 만났네
어헤야 놀아나보세, 어헤야 놀아나보세
오작교 대열을 이룬 양쪽 놀이꾼들은 ‘주고받는 소리’를 통해 대열의 길이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다. 사설은 견우직녀 설화가 그러하듯이 남녀상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형성된 오작교놀이인 셈이다. 곧 견우직녀의 고사를 통해 상부사리인 견우쪽과 하부사리인 직녀쪽 양편이 결합하는 모의 행위인 것이다. 곧 음과 양의 싸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의 깃봉싸움처럼 음양의 화합을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의 생장을 기원한다. 양쪽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움으로써 견우와 직녀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듯이 농민의 상부상조와 협동단결을 이루자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그 바탕은 제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칠석 풍속의 농경의례와 맞물려 있는 대표적인 전승물이 아닌가 한다.
장치기놀이는 견우직녀 상봉놀이에 이어 견우쪽과 직녀쪽이 나누어 지게줄로 만든 공을 지게작대기로 치며 상대편 깃대를 맞추는 민속경기이다. 장치기에 참가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자기편을 응원하며, 풍물에 따라 다양한 종목의 노래를 부른다. 율동은 흔히 지게 장단이나 물박 장단이며, 풍물은 대전 지역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는 웃다리농악과 대체로 일치한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는 칠석이 여인들의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여아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국 전통 명절 중의 부녀절이다. 일본의 타나바타마츠리()는 중국의 경우와 직녀성의 전설 그리고 걸교전(: 지혜를 구하는 행사)의 풍습이 전해져서 일본 고유의 ‘타나바타쯔메()’ 신화로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소원을 적은 ‘탄자쿠(: 글씨를 쓰거나 표시로 물건에 매달거나 하는 데 쓰는 조붓한 종이)’를 매단 세죽()을 장식하는 것이 주된 행사이다. 타나바타란 선반 구조가 있는 베틀로 베를 짜는 여자를 타나바타쯔메라고 하는데, 이는 신에게 인간의 더러움과 액을 실어 가져가게 하는 선녀였다. 타나바타는 이와 같이 액을 떨치는 일본 고유의 행사로 에도시대에는 5대 명절로 성행하였으나, 메이지 6년에 공식 행사로서의 칠석이 폐지되고부터 민중들 사이에서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는 센다이()나 히라즈카() 같은 관광에서 명물로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의의

여름철 세시풍속과 관련한 놀이가 백중놀이 외에 별로 보고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전 중구 부사동 칠석놀이는 성장의례의 생산성을 기원하는 세시놀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부사동 칠석놀이의 핵심 단위는 견우직녀 설화와 유사한 부용·사득 상봉놀이가 바탕이 된 것인데, 백중놀이와 함께 농작물 성장의례에 부합하는 공동체 놀이이다. 연인이 이루지 못한 인연을 맺어주고 달래주는 놀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마을의 화해와 화합을 기하고 있다. 촌락신화가 전승 지역의 세시풍속과 결부하여 길놀이, 합궁, 샘치기 같은 형태로 놀이화된 것인데, 칠석세시에 순차적인 놀이가 관행화되어 전승되고 있는 점은 여느 지역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이다. 다만 설화의 놀이화라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농악의 경우에도 대전 지역의 웃다리농악과 동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농악과 어울려 불리는 ‘황새샘치는 노래’나 ‘부용·사득이 노래’는 놀이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사칠석놀이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수상한 후 보존회를 통해 관리되는 공동체 유산이다.


. 출처: 칠석놀이 [七夕-] (한국세시풍속사전)


6].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견우와 직녀.


견우직녀설화

[ ]

유형 작품
성격 설화, 유래설화


정의

견우와 직녀가 한 해에 한 번 만나게 된다는 칠월칠석의 유래설화.

내용

시기적으로 매년 칠월칠석이 되면, 두 별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화가 생겨났다.

이 설화의 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후한() 때에 만들어진 효당산()의 석실 속에 있는 화상석(: 장식으로 신선, 새, 짐승 따위를 새긴 돌)의 삼족오도()에 직녀성과 견우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한()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 설화의 가장 오래된 예는 진()나라 종름()의 『형초세시기()』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408년(광개토왕 18)에 축조된 대안 덕흥리(: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고구려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앞에는 견우, 뒤에는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 공민왕조에 왕이 몽고인 왕후와 더불어 안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낸 기사가 처음 보인다. 이 설화는 신앙과 함께 우리나라 전국에 전승되어 있다.

원래 직녀는 하느님[]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하느님이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러졌으므로 하느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 해에 한 번 칠월칠석날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라 하며,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또한, 이날 오는 비는 ‘칠석우()’라 하여,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견우직녀설화」는 예로부터 동양권에서 무수히 많은 문인들의 시문의 주제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이 고려 때 이인로()의 「칠석우」, 이제현()의 「칠석」, 이곡()의 「칠석소작()」, 조선시대 정철()의 「차광한루운()」, 김정희의 「칠석칠률()」, 여류 시인들의 것으로 이옥봉()의 「칠석가」, 삼의당()의 「칠월칠석」, 운초()의 「강루칠석()」, 정일헌()의 「칠석」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고전소설, 「규원가()」·「해조가()」·「과부가」·「농가월령가」·「화조가」·「사미인곡」과 같은 가사, 또는 시조·민요들에도 「견우직녀설화」가 주제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이 설화는 칠월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로 평가된다.


. 출처: 견우직녀설화 [牽牛織女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과 세계의 유교에 대해 되돌아보고, 더 잘 이해하고,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60


2. 한국은 유교나라임. 불교는 한국 전통의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 http://blog.daum.net/macmaca/2632


3.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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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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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와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가 가장 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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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는 불가피함. 그 동안의 한국 공교육 전통을 감안하면, 지엽적인 마찰이 생겨도 수천년 인류역사를 담은 세계사와의 연계는 가장 옳은 정답에 해당됩니다. 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하여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75 


7.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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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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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 한자의 사용, 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 불교는  중국불교형태로 받아들였지만,거센 반발때문에,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포교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가 유교, 수신의 도가 불교였는데, 유교의 각종 명절과 제사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음.

 새롭게 종교인구 산출을 어떻게 해도,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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