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결과라는게 정설.
1].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에 기여한 사실.
1. 집현전의 학자들은 한글 창제에 큰 기여를 하였고, 팔도지리지, 농사직설, 고려사, 국조오례의 등의 수많은 책을 편찬했어요.
.출처: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용어사전
2. 조선 세종 때 설치한 학문 연구 기관.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학문 연구를 통한 왕의 자문 역할이다. 경연, 서연을 담당하였고, 사관(史官)의 일도 맡아보았다. 세종 때 한글 창제 등에 많은 일을 맡아 처리하기도 하였다.
. 출처: 집현전(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3.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편찬 사업인 『운회언역(韻會諺譯)』·『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동국정운(東國正韻)』·『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은 우리 나라의 문화 유산으로서 귀중한 것이라 하겠다. 집현전의 이 같은 고제 연구와 편찬 사업은 세종대의 황금시대를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출처: 집현전[集賢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집현전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의 협력한 일과 《훈민정음 해례》 편찬이었지만, 이 밖에도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 (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우리나라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루게 하였다.
. 출처: 집현전[集賢殿] (한글글꼴용어사전, 2000. 12. 2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5.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편찬사업인 《운회언역(韻會諺譯)》 ·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 ·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 《동국정운(東國正韻)》 · 사서언해(四書諺解)》 등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으로서 귀중한 것이라 하겠다. 집현전의 이 같은 고제연구와 편찬사업은 세종대의 황금시대를 이룩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 집현전 [集賢殿]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2]. 한국어
한국어[ Korean language , 韓國語 ]
- 요약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이며, 주로 한반도 전역과 제주도를 위시한 한반도 주변의 섬에서 사용한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중화권 국가에서는 조선어로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에서 약 7700만 명(2010)이 사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어의 어휘체계는 순수한 고유의 말과 한자어(漢字語) 그리고 차용어(借用語)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고유의 한국어 속에 침투되어 있는 한자어는 고대로부터 이미 중국과의 문화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이 언어에도 미친 결과이며 현재 한국 언어재(言語財)의 절반 이상(약 60%)이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에 이미 한문이 삼국의 문자생활의 기반이었고 이와 같은 상태는 19세기 말 근대화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민족은 말은 국어로 하면서 쓰기는 한문으로 하는,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의 불일치(不一致)에서 오는 2중 체제의 기형적 상태를 오랫동안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문적 요소가 대량으로 국어 속에 침투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5세기 중엽에 독창적인 고유의 문자를 제정한 이래 전해 내려오는 상당한 수의 국어 문헌에서 이와 같이 국어 속에 한문 요소가 침투된 실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차용어는 각 시대에 따라 문화 접촉의 양상을 반영해 주고 있거니와 고려시대에는 몽골어에서, 조선시대에는 주로 중국어를 차용하였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근대화 과정 이래 구미어(歐美語)가 차용어의 주류를 이루었다.
. 출처: 한국어 [Korean language, 韓國語] (두산백과)
3]. 두산백과에 서술된 훈민정음
훈민정음
[ 訓民正音 ]
- 요약 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에 대한 한문해설서.《훈민정음예의본(訓民正音例義本)》과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例義)·해례(解例)·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출처: 훈민정음 [訓民正音] (두산백과)
4].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서술된 훈민정음.
정의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1446년(세종 28)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명으로 설명한 한문해설서.
개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집필자들은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의 8학자이다.
서지적 사항
전권 33장 1책. 목판본.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1446년 9월 상한(上澣:초하루에서 초열흘까지의 기간)에 완성되었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고(故) 전형필(全鎣弼) 소장본(현 간송문고 소장)이며,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아직까지는 국내유일본이다.
광곽(匡郭)은 가로 16.8㎝, 세로 23.3㎝이고, 본문(예의) 부분은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의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耳)’가 ‘의(矣)’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내용
먼저,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성내용을 약술하면아래와 같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혔다.)
② 예의(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2) 해례
①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②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하였다.)
④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하였다.)
⑤ 합자해(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⑥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제시였다.)
3) 정인지서문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찬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다음으로 위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② 예의
어제서문에 이어서 중국 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전래자음(傳來字音)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改新)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東國正韻)』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 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표 1] 훈민정음23자모표
훈민정음
區分 | 牙音 | 舌音 | 脣音 | 齒音 | 喉音 | 半舌音 | 半齒音 |
---|---|---|---|---|---|---|---|
全淸 | ㄱ君 | ㄷ斗 | ㅂ彆 | ㅈ卽 | ㆆ挹 | ||
次淸 | ㅋ快 | ㅌ呑 | ㅍ漂 | ㅊ侵 | ㅎ虛 | ||
全濁 | ㄲ蚪 | ㄸ覃 | ㅃ步 | ㅉ慈 | ㆅ洪 | ||
不淸 | ㆁ業 | ㄴ那 | ㅁ彌 | ㅇ欲 | ㄹ閭 | ㅿ穰 | |
不濁 | |||||||
全淸 | ㅅ戍 | ||||||
全濁 | ㅆ邪 |
전청·차청과 같은 술어는 제자해에 나오고, 예의편에서는 단지 아음·설음과 같은 오음(五音) 분류만 표시하였고, 전탁은 병서(竝書)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초성자의 설명을 위하여 이용한 한자들은 중성자와 종성자도 그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고른 것이었다.
중성자는 ‘ㆍ·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로 정하였는데, 분명히 이중모음인 ‘ㅛ·ㅑ·ㅠ·ㅕ’도 기본단위자로 삼은 것이 특색이었고, 종성자는 초성글자를 다시 써서 표시하도록 규정하였다.
예의편의 끝에서는 연서(連書)와 병서·합용(合用) 등의 표기방식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초성·중성·종성 글자를 자소(字素)처럼 써서 음절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각 음절마다 방점으로 성조를 왼쪽에 표시하도록 하였다.
2) 해례
해례편은 새로 만든 글자의 제자원리를 주로 밝히고, 그 음가·운용법, 이 문자가 표시하는 음운체계 등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다만,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는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통하여 송학사상(宋學思想)을 고도로 섭취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해례편의 기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송학이론을 적용하여 일종의 언어철학을 전개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① 제자해
제자해에서는 『태극도(太極圖)』·『역학계몽(易學啓蒙)』·『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 송학계통의 서적에서 이론을 섭취하여, 제자해의 첫머리부터 태극·음양(陰陽)·오행(五行)과 결부된 언어관을 제시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도 성음(聲音)에 따라 음양의 이치를 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가 상형(象形)에 있음을 말하고, 자음자(子音字)의 제자에 있어서는 먼저 조음위치별(調音位置別)로 기본이 되는 초성자(初聲字)를 정하고, 이 기본자들은 각각 그 조음방식 또는 조음위치를 상형하여 제자된 것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각 조음위치에서 발음되는 자음은, 그 발음이 세게 나는(‘厲’로 표현) 정도에 따라 이 기본문자에 획을 더하여 제자한다고 하였다(보기, ㄴ→ㄷ→ㅌ). 계속하여 다시 오행설을 가지고 각 자음을 오행·계절·음계(音階)·방위(方位) 등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音相)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한 다음, 중국의 전통적인 어두자음(語頭子音) 분류법인 36자모표의 분류방식에 따라 훈민정음의 자음자를 분류 설명하였다.[표 2]
[표 2] 오행설에 따른 자음 분류
훈민정음
五聲 | 牙 | 舌 | 脣 | 齒 | 喉 |
五行 | 木 | 火 | 土 | 金 | 水 |
五時 | 春 | 夏 | 李夏 | 秋 | 冬 |
五音 | 角 | 徵 | 宮 | 商 | 羽 |
五方 | 東 | 南 | 中央 | 西 | 北 |
또한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였다.[표 3]
[표 3] 오성의 음상
훈민정음
오성 | 오행 | 발음기관 | 음상 | 오행과 음상과의 연관 |
---|---|---|---|---|
牙 | 木 | 錯而長 | 聲似喉而實 | 如木之生於水而有形也 |
舌 | 火 | 銳而動 | 聲轉而槎 | 如火之轉展而揚揚也 |
脣 | 土 | 方而合 | 聲含而廣 | 如土之含蓄萬物而廣大揚也 |
齒 | 金 | 剛而斷 | 聲屑而滯 | 如金之屑暉而鍛成也 |
喉 | 水 | 邃而潤 | 聲虛而通 | 如水之虛明而流通也 |
다음에 전탁(全濁)의 음가는 ‘전청소리가 엉긴 것(凝)’이라고 설명하고, 훈민정음 28자와 따로 제정한 순경음(脣輕音)의 음가는, “가벼운 소리를 가지고 입술을 잠깐 합하고 목구멍소리(숨소리)가 많다.”고 하였다.
중성글자는 초성글자와는 달리 천(天)·지(地)·인(人) 삼재를 상형하여 기본모음자 ‘ㆍ·ㅡ·ㅣ’를 제자하였음을 말하고, 이들 기본모음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표 4]
[표 4] 기본모음자
훈민정음
자형 | 상형내용 | 발음상태 | 소리(聲) |
· | 天圓 | 혀를 옴츠림(舌縮) | 깊음(深) |
ㅡ | 地平 | 혀를 조금 움츠림(舌小縮) | 깊지도 얕지도 않음(不深不淺) |
ㅣ | 人立 | 혀를 옴츠리지 않음(舌不縮) | 얕음(淺) |
이 세 기본모음자는 중세국어의 7단모음체계를 세 갈래로 인식하고 제자한 것으로서, ㅣ모음을 별도로 보고, ‘ㆍ’모음계열과 ‘ㅡ’모음계열로 나누어서 나머지 모음자들[ㅗ·ㅏ·ㅜ·ㅓ, 이를 초출자(初出字)라고 하였음]을 제자하였음을 설명하였다.[표 5]
[표 5] 초출자의 제자원리
훈민정음
자 형 | 성 격 | 음 양 |
---|---|---|
ㆍ + ㅡ → | 閤 | 陽 |
ㅣ + ㆍ → | 闢 | 陽 |
ㅡ + ㆍ → | 閤 | 陰 |
ㆍ + ㅣ → ㆎ | 闢 | 陰 |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ㅗ ㅜ 입을 오므림[구축(口蹙)]
↑ ↑
· ㅡ
↓ ↓
ㅏ ㅓ 입을 벌림[구장(口張)]
중성 11자 가운데 나머지[‘ㅛ·ㅑ·ㅠ·ㅕ’, 이들을 재출자(再出字)라고 하였음]는 ㅣ에서 시작되는 음으로 보고(起於ㅣ), 이어 또다시 역(易)의 수(數)나 위(位)를 가지고 중성글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초성·중성·종성 세 글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표 6]
[표 6] 위수도(位數圖)
훈민정음
方位 | 五 行 | 定 位 | 成 數 |
---|---|---|---|
북 | 수 | 천 一 | 지 六 |
남 | 화 | 지 二 | 천 七 |
동 | 목 | 천 三 | 지 八 |
서 | 금 | 지 四 ㆎ | 천 九 |
중앙 | 토 | 천 五 · | 지 十 ㅡ |
② 초성해
초성해에서는, 초성이란 운서의 자모에 해당한다고 하고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
중성해에서는, 중성이란 한자음의 개음(介音)+운복음(韻腹音)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설명하였는데, 중국음운학에서 음절말음[운미(韻尾)라고 함]으로 다루는 반모음 〔j〕 까지도 중성에 포함시켜, 제자해에서 설명한 11자 이외에, 다음과 같이 여러 모음자가 합용되어 중모음으로 쓰일 수 있음을 말하였다.
기본자 ㆍ ㅡㅣ
초출자 ㅗ ㅏ ㅜ ㅓ
재출자 ㅛ ㅑ ㅠ ㅕ
합용자 ㅘ ㅝ ㆇ ㆊ
일자중성+ㅣ ㆎ ㅢ ㅚ ㅐ ㅟ ㅔ ㆉ ㅒ ㆌ ㅖ
이자중성+ㅣ ㅙ ㅞ ㆈ ㆋ
④ 종성해
종성해에서는 종성이란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말음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고, 중세국어의 성조를 우선 종성만 가지고 설명하였다. 즉, 불청불탁자(不淸不濁字)는 평성·상성·거성의 종성이 되고, 전청자·차청자·전탁자는 입성의 종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어의 종성은 ‘ㄱ·ㆁ·ㄷ·ㄴ·ㅂ·ㅁ·ㅅ·ㄹ’ 8자면 족(足)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자음의 입성 가운데, ‘ㄷ’종성음을 일반에서 ‘ㄹ’로 발음하고 있는데, 이를 ‘ㄷ’음으로 발음해야 된다고 하였다.
⑤ 합자해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 글자를 자소처럼 인식하여, 이들 3요소를 좌로부터 우로, 위로부터 아래로 써서 음절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합용병서·각자병서의 서법(書法)을 초성·중성·종성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어 당시의 국어성조를 다시 설명하여, 입성은 중세국어의 성조단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즉, 긷:깁 몯 등이 종성만을 가지고 볼 때는 입성이지만, 성조로서는 평성·상성·거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설경음(半舌輕音) ‘ᄛ’도 반설중음(半舌重音)인 ‘ㄹ’과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중모음 !ㅗ의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⑥ 용자례
용자례에서는 중세국어에서 90단어의 예를 들어, 그 표기법을 보였다. 초성 ‘ㄱ·ㅋ· ㆁ, ㄷ·ㅌ·ㄴ, ㅂ·ㅍ·ㅁ, ㅸ·ㅈ·ㅊ, ㅅ·ㅎ·ㅇ, ㄹ·ㅿ’의 표기례를 각각 2 단어씩 들었는데, 각자병서와 ㆆ의 표기례가 제외되고, ㅸ의 표기례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중성은 ‘ㆍ·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의 표기례를 각각 4단어씩 보였으며, 종성은 ‘ㄱ·ㆁ·ㄷ·ㄴ·ㅂ·ㅁ·ㅅ·ㄹ’의 8종성의 표기례만을 각각 4단어씩 보였다.
3) 정인지서문
정인지의 서문에서는, 제 말의 소리는 있어도 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 씀이 아무래도 어거지라는 것, 한자로 씌어진 책의 뜻을 깨치기 어렵다는 것, 한문으로는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것, 이두(吏讀) 사용이 불편하다는 것 등을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로 들었다.
이어 세종이 1443년(세종 25) 겨울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것, 훈민정음은 간단하여 깨치기 쉬운 글자이면서 여러가지로 응용이 가능하여, 대개의 음(음악, 한자음, 자연음까지)을 표기할 수 있고, 이 글자의 창제로 한문책의 해석도 쉬워졌으며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례본의 저술자가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 8명이라고 하였다. 이 서문을 쓴 날이 1446년 9월 상한이므로, 이 책의 완성일을 알려준 데도 이 서문의 가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 때는 모든 분야에 걸쳐서 우리 것을 존중하고 밝혀보려는 기운이 충만되어 있던 시대였으므로, 이러한 기운이 국어의 문자화(文字化)를 위한 훈민정음 창제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도 자기 언어를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훈민정음』 같은 서적을 펴낸 일은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책으로써 1997년 1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첨부자료.
1.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60
2. 한국은 유교나라임. 불교는 한국 전통의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 http://blog.daum.net/macmaca/2632
3.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4.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5.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와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가 가장 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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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는 불가피함. 그 동안의 한국 공교육 전통을 감안하면, 지엽적인 마찰이 생겨도 수천년 인류역사를 담은 세계사와의 연계는 가장 옳은 정답에 해당됩니다. 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하여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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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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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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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 한자의 사용, 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 불교는 중국불교형태로 받아들였지만,거센 반발때문에,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포교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가 유교, 수신의 도가 불교였는데, 유교의 각종 명절과 제사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음.
새롭게 종교인구 산출을 어떻게 해도,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