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멕시코 상원의장 초청 특강. 중남미 한류의 중심 멕시코 대학과 교육·문화 협력
1]. 대중언론 보도자료
[Edu News] 성균관대, 중남미 한류의 중심 멕시코 대학과 교육·문화 협력
급변하는 세계속 도전 주제…멕시코 상원의장 초청 특강
2018.1.24. 매일경제 김효혜 기자 보도뉴스
...아로요 상원의장은 멕시코 자율공과대학(ITAM)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멕시코 국립 공공 토목공사 및 서비스은행 이사, 에너지사무국 에너지계획 및 기술개발 차관 등을 거쳐 멕시코 사회개발부 장관과 재무 및 공적 신용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금융인이자 관료 출신 정치인이다. 아로요 상원의장은 이날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멕시코:도전과 기회'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거대한 정치·경제적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멕시코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해 나갈 것인지를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한편 아로요 상원의장의 이번 한국 방문은 정세균 국회의장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성균관대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특강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규상 성균관대 총장은 "멕시코는 중남미 지역 한류(韓流)의 중심"이라며 "아로요 의장의 방문을 계기로 멕시코 여러 대학과 교육·연구 부문뿐만 아니라 학생과 문화적 측면에서 실질적 교류 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52788
. 필자의견: 멕시코에서 자율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 취득한 금융인이자, 관료출신 정치인.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성균관대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특강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함.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정치인이 그 나라의 지도자면 그 나라의 미래는 상당히 밝을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밝히는 멕시코의 특징.
...원주민 사회를 정복한 스페인은 원주민 사회를 온존시킨 채, 스페인왕이 파견하는 부왕(副王, Viceroy)을 정점으로 하는 식민사회로 재편하였다.
1810년 9월 16일 신분해방을 원하는 메스티조와 정치권력을 원하는 크리올료가 결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독립전쟁을 이끈 이뚜르비데(Iturbide, A.)의 왕정은 3년 만에 종식되고 1824년 공화제 헌법이 반포되었다. 독립과 더불어 노예의 형식적 해방이 선언되었으나 그 뒤 1세기 동안 대토지소유제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노예제도는 오히려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
멕시코의 정치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지방분권주의자와 보수주의적인 중앙집권주의자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19세기 전반에 멕시코는 캘리포니아·텍사스 등 국토의 절반을 미국에 빼앗기거나 할양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는 디아스(Diaz) 체제라고 불리는 독재체제하에서 광범위한 외국자본의 침투와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을 받았고, 1910년 마데로·까란사·오브레곤·사파타·판초 빌라 등이 각기 이끄는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혁명이 일어났다...
.출처:멕시코[Mexico, United Mexican States]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영국의 왕가(1714∼1901).
1701년의 왕위계승법에 의하여 앤 여왕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영입한 조지 1세에서 시작된다. 동왕(同王)과 조지 2세는 독일 출생으로, 영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적어 의회정치 및 책임내각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다음의 조지 3세는 왕권의 회복을 도모하여 의회를 조종하였으나, 결국 미국독립의 실태(失態)를 초래하였다. 그 뒤 조지 4세, 윌리엄 4세를 거쳐 빅토리아여왕이 즉위하여, 64년의 치세 중에 영국의 최번영기를 맞이하였다. 다음 에드워드 7세의 즉위와 함께 색스 코버그 고타왕조라 개칭하였으나, 그것은 독일계의 명칭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적국이 됨에 따라 조지 5세 시대인 1917년 윈저왕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년 가까운 치세기간 중에 왕권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관행(慣行)이 점차 강하여져서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 ─王家] (두산백과)
나. 하노버 왕조.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의 설명.
하노버 왕조
독일에 뿌리를 둔 영국의 왕가. 1701년 왕위 계승법에 의하여 앤 여왕 사후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1714년 조지 1세로 영국 왕에 즉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지 1세(1714~1727년 재위)를 비롯해 조지 2세(1727~1760년 재위),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재위) 등 6명의 군주를 배출했다. 하노버 왕가 다음에는 1917년 윈저 왕가에서 영국 왕이 배출되었다. 조지 1세는 영어를 못하고 영국 사정에도 눈이 어두워 외국인 취급을 받고는 했다. 또 하노버에 칩거하는 일도 잦아 정치는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조직해 행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내각 책임제의 시원이다. 이렇게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수립되었다.
. 출처: 하노버 왕조(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7. 7. 10., (주)신원문화사)/ 엮은이 임성재다.
다. 미국인 중 가장 많은 인종은 독일인 후손 4800만 명
2013.08.14, 아시아 경제 박희준 기자 보도뉴스.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미국 인구에서 가장 많은 인종은 독일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다.전체 인구의 15.5%인 약 4800만 명으로 나타났다.한국인 후손은 142만여명으로 집계됐다.
미국의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이하 BI)는 미국 통계국이 벌인 ‘2010년도 미국 공동체 설문조사’를 인용해 이같이 나타났다.
미국 통계국은 혈통을 개인의 인종 기원 혹은 혈통, 뿌리와 유산, 혹은 본인이나 부모, 조상이 미국이 오기 전 출생한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다수의 미국인은 17세초부터 미국에 온 유럽 이민자의 후손으로 조사됐다.
독일계(혈통)는 4791만1129명으로 전체 인구의 15.5%로 조사됐다. 독일계 후손이 가장 많은 곳은 아리조나주 마리코파 카운티로 나타났다.
두번째로 많은 인종은 아일랜드계로 3467만9명으로 집계됐다. 1820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45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들중 다수는 뉴욕과 보스턴,필라델피아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에 정착했다.
3위는 멕시코계로 3292만9683명이었다. 1990년부터 2000년 사이에 본인을 멕시코 혈통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두 배로 늘어났다. 주로 로스앤젤레스,휴스턴,피닉스,샌디에이고, 샌안토니오 등에 산다.
영국인 후손은 2592만7345명으로 4위에 그쳤다.1980년 이후 영국인 후손이라고 답한 사람은 2000만 명이나 감소했다.이는 대부분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답한 사람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영국계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텍사스와 뉴욕으로 조사됐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북서부와 서부지역으로 나타났다...
가.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의 자료를 이용하여 매일 덤벼도,조선 성균관=성균관대였었고,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은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495
나.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http://blog.daum.net/macmaca/2375
다. 대학은 Royal대인 성대나 서강대(교황윤허)가 좋습니다. 중요한건 해방이후 현재까지 성대가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학벌이어 왔다는 것.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마.
2. 필자의 유교관련 사상
가.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2489
나.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 44조 제2항 및 제 71조 제 3호에 의해 그렇습니다
교과서 교육 측면에서 본다면 고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유교교육이 주류입니다. 교과서 관련, 한국 민족문화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 다 음 -
우리나라의 교과서 변천은 다음과 같이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통시대의 교과서’이다. 이는 넓게 보아 우리나라에서 교육 제도가 성립된 삼국시대 이후 갑오경장(1894) 이전까지의 전통사회에서 사용된 교과서와 그 변천 과정을 말한다. 이에는 유교사상 내지 유교적 도덕관을 갖추기 위한 교육 수단들로 대표된다.
둘째는 ‘개화기의 교과서’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서양식 교육이 처음으로 도입된 1880년대 초에서 1910년 국권 상실 전까지 각급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교과서가 제도적으로 실현을 보게 된 동인이 갑오경장이다. 당시의 교과서는 개화·계몽적 성격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교육 수단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이 증대함에 따라 그 자주적 위상이 점차 약화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는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이다. 1910년에서 1945년 광복 전까지 사용된 일본 침략 세력에 의해 편찬·발행 및 검정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에는 일제의 식민화 교육 이념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넷째는 ‘광복·정부 수립 이후의 교과서’이다. 1945년 광복에서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교과서를 말한다. 이 역사 구간은 일제의 식민 교육을 청산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교육 주권이 실현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에는 우리의 실정에 부합한 교육 제도와 교육과정이 개정·보완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에 따라 교과서의 편찬·발행 과정도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 조선.대한제국은 유교가 국교였는데, 일본 강점기를 거치고, 종교에 대해 국교가 없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현행헌법을 한국은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강점기로 인해, 종교관련, 혼란한 의견들이 국가 내부에서도 발생되어, 착각의 여지도 있습니다만, 외교부에서 종교관련 사항은 빈칸으로 두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곤란하면 외국인들도 그렇게 한국 종교는 빈칸으로 두고, 유교교육과 유교 대학의 역사는 오래된 나라로 인식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외교부 말고, 국내의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측면으로 보면 모든 한국인은, 유교의 수천년 제도.전통인 호적(戶籍)제도에서 유래된 주민등록에 성명(姓名)과 본관(本貫)을 제출하여 강제로 성과 이름을 등록시키는 행정법상 유교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음력 설날,추석 등에 전국적으로 공휴일을 가지고 유교의 제사나 세배, 성묘를 하기 위해 인구대이동이 발생하는 수천년 유교국입니다. 수천년 유교제사와 유교교육에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그리고 24절기의 각종 제의나 행사, 문중별.가족별 제사, 단체별 제사가 있고, 교육도 학교에서 한문이나 국민윤리등에서 유교의 삼강오륜, 인의예지신,충효, 하늘천(天), 이런 내용을 많이 교육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