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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제질서 수호자 될 것". 이제 수천년 세계사의 주역중 하나인 황하문명.유교 중국의 오랜 국제적 기득권이 다시 반영되어야!

시진핑 "중국, 국제질서 수호자 될 것". 이제 수천년 세계사의 주역중 하나인 황하문명.유교 중국의 오랜 국제적 기득권이 다시 반영되어야!   



[1]. 2018.1.1. 한국 YTN보도 뉴스


시진핑 "중국, 국제질서 수호자 될 것"


http://www.ytn.co.kr/_ln/0104_201801010244072583



[2]. 필자의 개략적 의견


1]. 선사시대(先史時代)도 있지만, 수천년 인류문명이 반영된 세계사의 기득권을 토대로 하시면 좋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어 침체기를 겪다가, 다시 중국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UN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지위는 정치.군사적으로도 문명.역사의 오랜 기득권자 중국을 국제사회의 강대국으로 다시 올려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개혁.개방의 선도자 고 등소평 지도자의 이념을 다시 구체화시키신 중국 지도부의 오랜 정책이 열매를 맺는 단계가 되어 위안화가 국제적 기축통화도 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인구대국 중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근대이후 세계적 지배세력으로 작용해 온 서유럽의 교황청및 주요 강대국(프랑스,영국등), 2차대전 이후의 슈퍼 군사강대국인 미국.구소련(러시아로 승계됨)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란 역사.문화.정치적 사상이 함축된 국호로 중국이 다시 본격적으로 국제질서의 수호자가 되겠다면 환영합니다.    


  

2]. 필자(한국 성균관대 출신 윤진한, 宮 儒, 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졸업. 성균관대 1983학번. 1962년생)는 문필가며 사상가로 한국의 궁(宮)성균관대 임금입니다. 필자는 어(御) 서강대 임금(서강대 기록보존소 서 진교 교수)과 함께 한국내의 임금자격을 정신적으로 획득하여 그 임금 자격을 세계에 알려왔는데, 국내외에서 상당히 정신적으로 임금자격을 인정받는 부분이 형성되었습니다. 필자는 개략적으로 유교나 대학관련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 다 음 -


한국의 학교교육에 의거, 한국사,세계사, 한문.국민윤리(삼강오륜이나 인의예지신, 충효등 유교교육 위주)및, 국내법.국제법등을 종합하여 한국과 세계의 대학 및 종교들을 판단해왔음. 따라서 한국사는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세계사는 한나라 태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 베이징대로 승계됨), 중세유럽에 형성된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을 교과서.학술서적의 기득권 대학으로 인정해주면 학술적으로 무리가 없다고 판단함(그러나 강행법 성격의 주권은 국가주권 개념을 가진 나라에는 없음).


종교로는 황하문명을 이어받은 중국 한나라시대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한나라시절 이미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 걸쳐 세계종교화 된 이후, 중국 화교들이 진출한 아시아의 다른나라 일부지역 및 대만.싱가포르가 유교권 국가나 지역들임)가 세계종교화 되었던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 


그리고 원래는 에게문명에서 비롯된 헬레니즘문화를 가진 로마제국이었는데,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계종교화 된 교황중심 서유럽의 로마가톨릭(특히 대항해시대 이후 서유럽국가들이 아메리카,오세아니아등 신대륙등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세가 확산되어왔음)이었음. 중국.러시아.한국(한국의 경우 한국을 어버이나라로 섬기던 오랜 문명후발국 일본에 의해 일본 강점기를 겪음).일본.태국등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는 서유럽의 지배시기를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은 더욱 더 큰 세계종교로 발돋움하였음.  


3]. 세계사와 한국의 대학들에 대한 의견


정사(正史)인 세계사의 볼로냐.파리대학에 대한 강력한 배척이나 삭제 및 이론(異論)은 없어왔음. 한편 세계사는 한국에 강행법적인 주권은 없음. 지역적으로 한국사의 경우, 성균관에 대(大)자를 더붙인 성균관대가 법으로 이의없이 최종 확정되는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왔음. 물론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였던건 분명한 사실이며, 향교관련 법률등에 의거 성균관대가 성균관.향교와 같이 보호되는 과정도 있어서, 한국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추종세력들과 대중언론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성균관대가 조선.성균관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것은 관습적.사회적으로는 맞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발간이후에 형성된 성균관대의 자격(대통령령에 의해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정통 승계)처럼 강력한 보호는 받지 못해왔었음. 그러함에도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등에 의거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기에 대중언론에서 서울대.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고려대(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변경)의 카르텔은,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강점기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침략.반란 형태의 도전자들에 불과해왔음.    


 

한국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 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법적으로 최종 확정되는것은, 그리

순탄하지 않아왔음.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원래 이름 그대로 유지하여 오는 대학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음. 그러나, 승전국이나 한국 임시정부처럼 일본.독일.이태리등의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강력한 국가주권개념을 가진 나라들의 경우에는, 추축국과 동조세력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계사는 해당국에서 강행법성격의 주권을 형성할 수는 없으며, 단지 학술적 개념 정도에 해당됨.  

 

한국의 경우, 국내법과 국제관습법상 받아들여 지지 않던 을사조약(강제.불법의 을사조약이 무효라, 국내법상 한일병합도 무효. 국제법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음)이후,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한 한국의 성균관이 경학원 및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강등되는 고난의 과정이 있었음.

 

또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일본의 주권이 한국영토에 없는게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인데[포츠담 선언 8항. 8)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하위법인 미군정령으로 경성제대가 서울대가 되고, 다시 서울대를 국립대로 하면서, 대중언론등에서 주권없고 학벌없는 패전국 잔재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그리고 서울대의 추종세력들)이 다양하게 국사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에 도전해 왔지만,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자격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자격에 연계된 특성이 있어서, 대중언론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 최고대학은 성균관대였음.      

 

상위법이 포츠담선언이고, 하위법이 미군정령이라 미군정령에 의해 서울대가 되고 국립대가 된 서울대는,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대로, 항복당시의 기준대로, 적용되어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고 학벌이 없어야 옳음[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따라서 을사조약 무효나 한일병합무효(을사조약이 무효라)의 대한제국 국내법기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한일병합 무효. 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의 무효등 선언)와 더불어,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에 의해, 일본강점기 당시에 형성된 경성제대등은 기존에 한국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그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의 최고대학자격을 훼손하지 않아야 됨.  

  

 

해방후 미군정령으로 공자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기로 한 이후, 한국 유림[유림(儒林)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전통신분이 높던 계층.조선 대한제국은 황제.왕부터 기본적으로는 유생(儒生)임]들이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차원에서 성균관대를 설립키로 하여, 향교관련 법률등으로 성균관(제사를 전담하는 기구로 됨)과 성균관대(대학교육 전담)의 특성을 구분하여 온게 있었음.

 

성균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성균관의 최고대학 자격을 승계해왔다면, 큰 무리가 없었을텐데,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약간 복잡하게

되어온 과정도 있었음.

 

미군정 법령이 공자묘 경학원에서 성균관으로 환원한 성균관의 대학자격에서는, 해방당시 전국 유림대회 결의대로,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고 성균관은 제사만 전담하여 온 관례를, 제사전담기구인 성균관이 깨뜨리지 않아왔음(그래서 미군정이 환원시킨 성균관의 자격은, 대학교육에서는 성균관대, 제사는 성균관으로 분리해온 관례를 따라왔다고 할 수 있음). 

 

그러다가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대학이 성균관대이고, 6백년 역사를 법으로 인정받으며, 국내외에서 다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것.   

 

 

. 강조하여 의견을 간략히 하면, 한국사나 세계사의 정사(正史)는 옳기때문, 그대로 기득권을 인정해주면 적당함. 세계사의 경우 강행법적 주권은 한국 영토에 없으며, 단지 학술적 의견정도에 해당됨.   

 

 

[3]. 필자는 한국의 국내법(대통령령에 의해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해 서술된 성균관대(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 승계. 국내외에서 6백년 역사 인정)와 서강대(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 서강대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중 하나)의 자격을 한국사나 세계사의 학설(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과 연관시켜 Royal.Imperial대로 알려왔습니다.   


1].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두산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그리고 서강대(교황윤허에서 시작됨). 


1.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A.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1988년부터 시안본을 검토 수정하여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고, 1995년에는 보유편이 28권으로 나왔으며, 일부 개정증보를 거쳐 2001년에 CD-ROM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200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개년에 걸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터넷에 온라인 서비스되고 있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

    종합대학

  • 개교일

    1398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

    은행나무

  • 면적(㎡)

    627,025

  •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C.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되어 수천년을 이어옴. 




1]. 신문 보도기사


[호찌민-경주엑스포] 김행자 한국예절교육원장 한국문화존 유교문화전시관서 열리는 한국전통혼례
체험 통해 한국예절문화 베트남에 알리는 역할 톡톡
김 원장 "외국인들 큰 관심에 뿌듯함 느껴" 


2017.11.21, 경북신문 장성재 기자 보도뉴스.    


...

김행자 원장은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유교문화권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며 “특히 신랑이 신부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르는 것, 양과 음이 만나는 저녁 해질 무렵에 혼례를 치른다는 사실은 여기 와서 알았고 매우 놀라웠다”고 말한다.

http://www.kbsm.net/default/index_view_page.php?idx=191432...



2]. 이에 대한 필자 논평


1. 과거 월남에 미군과 같이 한국군을 파견했던 건에 대한 의견


과거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은 새로운 신생 독립국에 대해 대체로,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2차대전 이전, 강대국이 지배하던 인류 역사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의 경우는 국가주권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다(그래도 과거 강대국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면, 국가주권을 행사하면서도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와 공존해야 할 것. 프랑스는 2차대전 승전국이라 패전국 일본과는 다를것).


2차대전 이후로 볼 때, 세계적으로도 특이하게 베트남은 과거 강대국(프랑스)의 식민통치를 자력으로 종식시킨 나라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2차대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일병합등을 부정하며, 일본에 선전포고하여 나중에 프랑스.구소련.폴란드 등에서 임시정부를 인정한후, 한국 현행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반영되었습니다. 또한 2차대전 당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일본이 항복하였습니다.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대한제국에 불교적인 일본 신도, 일본 불교, 소수의 일본 기독교를 한국에 강제로 포교시키던 일본입니다. 학교측면에서 보면 일본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전문학교급에서 대학이 된 일본 강점기 잔재 동국대,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 일부, 서울시립대등. 그리고 이의 추종자들은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친일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고려대로 만든 고려대)나 기타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중.고등 학교들은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는 채로 한국영토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은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남.북이 분단된 베트남에 자본주의 노선의 월남을 위하여 파월국군을 파견했던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반공노선으로, 월맹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빚어진 일은 대한민국이 사죄하고 그럴 성질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국가와 민족같이 중요한 개념이 수천년 이어져 온 교육제도나 종교입니다.



2. 다시 되짚어보는 전통 유교국들의 역사 


 

1). 중국.한국.베트남같은 전통 유교국의 대학제도


가. 중국의 경우 한나라 태학.국자감.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변함.


나. 한국은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고려말 성균관이 됨).조선 성균관(2차대전 이후 해방후 미군정기 성균관대로 정통승계되어 오늘에 이름)


다. 베트남의 국자감. 공자님을 모시고, 베트남 최초 대학인 문묘국자감에서 이루어진 유교교육이나 통치이념인 유교,그리고 진사(進士)배출등    


하노이에 있는 ‘반 미에우 꾸옥 뜨 잠(Văn miếu Quốc tử giám, 문묘국자감())’ 사적은 11세기에 세워졌으며 유교 및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기원전 551~479)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의 왕들은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건설하였고 유교를 사회적·정치적 기초로 삼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에는 유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반 미에우 꾸옥 뜨 잠’은 베트남 조정에서 일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관료들을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천 명의 띠엔 시()를 배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이곳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여기고 있다.


. 출처:레 왕조와 막왕조(1442~1779)의 과거 시험 관련 석판기록[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한나라이후 세계종교 유교의 문화를 가져온 나라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입니다.     


 가.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걸쳐,유교명절 전해짐.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http://blog.daum.net/macmaca/2313



나.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중등 역사 / 중고등학생 공부방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

 

 

1. 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1) 춘추 전국 시대

       ① 시기 : 주의 동천부터 진에 의한 중국 통일까지의 시대

                    (기원전 770 ~ 기원전 221 )

       ② 정치 : 주 왕실의 약화 → 봉건제 붕괴 → 제후들의 독립과 세력 다툼

                    (춘추 5패, 전국 7웅)

       ③ 사회 ․ 경제 : 철기의 보급

           * 철제 농기구 사용 → 농업 생산력 증가 → 상공업 발전 → 시장, 화폐, 도시

           * 철제 무기 사용 → 전투력 향상 → 정복 전쟁 활발

       ④ 제자백가의 출현

           * 부국강병을 위해 각국이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 다양한 사상 출현

           * 유가 : 공자, 맹자 → 인, 예 강조, 도덕 정치

           * 도가 : 노자, 장자 → 무위자연

           * 법가 : 한비자, 상앙 →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 진의 통일에 기여 

 

   2)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

      ① 시황제의 통일 정책

          * 정치 : ‘황제’ 칭호 사용 →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 (중앙집권 통치)

                       군현제 실시 → 지방관 파견

          * 사상 : 법가 사상 채택, 분서갱유 (사상 탄압, 유가 사상가 생매장)

          * 사회 ․ 경제 :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 만리장성 축조 : 흉노 침입 대비

     ② 멸망 : 지나친 토목 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와 가혹한 통치

                   → 진승 ․ 오광의 난으로 멸망 (기원전 206)

 

   3) 한(漢)의 발전과 유교 사회의 형성

      ① 한의 유방(한 고조)이 항우를 물리치고 수립, 장안에 도읍 (기원전202)

      ② 한의 성장과 발전

           * 고조의 정치

              - 군국제 실시 : 중앙은 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로 다스림

           * 무제의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군현제의 전국적 실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

             - 영토 확장 : 베트남, 흉노, 고조선 정복

             - 국가 재정 강화 : 소금, 철 전매제도

             - 비단길 개척 : 흉노 격퇴를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함, 대월지와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비단길(실크로드)이 개척됨

     ③ 신(新) (8~23) : 한 무제 이후 외척인 왕망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건국

     ④ 후한 (25~220)

         * 건국 : 왕망에게 빼앗겼던 한을 광무제(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킴

         * 쇠퇴 : 환관과 외척의 횡포 극심 → 농민 생활의 어려움

                     → 황건적의 난 + 지방 호족들의 자립 → 위 ․ 촉 ․ 오 삼국으로 분열

 

     ⑤ 한의 경제 :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질 좋은 비단, 칠기, 옥제품 생산)

 

     ⑥ 한의 사회와 문화

         * 사회 : 호족 중심 사회 → 향촌 질서 유지, 교육 담당, 대토지 소유, 관리로 진출

         * 문화 : 중국 전통 문화의 기틀 마련

                    - 한자 정리 :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됨

                    - 역사학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반고의 ‘한서’

                    - 지동의 발명 : 후한 때 장형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지진 관측 기구

                    - 종이 발명 : 후한 때 채륜이 제지법 개량 → 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불교 전래 : 후한 대에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됨

 

     ⑦ 유교의 발전과 확산

          * 유교의 국교화 : 한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음

            - 유학 교육 장려 : 수도에 태학 설치, 지방에 오경박사 파견 → 인재 양성

            - 유학의 생활화 : 학문의 중심, 관리 선발과 일상생활의 기준이 됨

            - 유학의 주요 경전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 훈고학의 발전 : 유교 경전의 정리와 해석을 중시함

         * 유교의 확산 :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음


  

           http://blog.naver.com/sajalee7/50182752973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일본총독부가 강제로 포교시킨 일본 신도, 불교, 기독교(주로 개신교, 가톨릭 약간)의 종교주권이 없기때문에 모든 한국인은 대한제국(조선)의 국교였던 유교도가 됩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