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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없는 일본 신도수장(일본만의 천황)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유교였던 과정이 없었고, 성씨가 없어서 유교종주국인 중국의 오제나 왕족 및 주요성씨


성씨없는 일본 신도수장(일본만의 천황)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유교였던 과정이 없었고, 성씨가 없어서 유교종주국인 중국의 오제나 왕족 및 주요성씨와 연관성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1]. 성씨없는 일본 신도수장(일본만의 천황)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유교였던 과정이 없었고, 근대에 일본의 하급 무사들이 옹립하여 일본천황이 되었는데,성씨가 없어서 유교종주국인 중국의 오제나 왕족 및 주요성씨와 연관성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계쪽에서 무언가 중국.한국의 고대 종교지도자나 왕족의 후손이라는 성씨를 가지면서 수천년 족보가 나와야 하는데 이게 없습니다. 성씨가 없으면 한국의 마당쇠나 돌쇠 하층 천민취급 받습니다. 원래 한국보다 수천년 문명 후발국인 일본은 한국을 어버이나라로 섬겨오던 문명 후발국이었습니다. 중국.한국.베트남.몽고처럼 세계사적으로 세계종교 유교라는 역사적 과정이라도도 있었다면 유교국으로 인정해 주겠는데, 유교의 조상제사나 가족제도를 무너뜨리는 근친상간등이 유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너무 불교적인 요소가 강해 후발국지적인 불교적 일본 신도와 불교가 주종인 나라로 판단합니다.   


패전국까지 되어서 법적으로 한국영토에서 권리를 행사할 아무런 근거도 없고,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 왜놈학교들은 마당쇠 땡추 일본 천황이 낳은 돌쇠 땡추 왜놈 학교들입니다. 일본은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면서 제도적으로 불교국가화 된 나라라 유교적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서양문물을 일찍 수입하여 과학기술은 발전한 패전국 일본! 


한국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한나라시절 중국.한국.베트남.몽고와 함께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이 된 수천년 유교 국가입니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 강제로 포교시킨 일본 신도, 일본 불교, 기독교(개신교가 주종, 가톨릭 몇 몇 성당)의 종교주권은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국영토에 없어진채, 종교주권없이 유교에 도전하는 정도입니다.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국교인 유교의 자격을 행정법측면으로 복구한 한국인들입니다. 


세계사는 정사(正史)로 유지되고 있으니까  한나라 태학.이후의 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 베이징대로 승계), 중세유럽에 설립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프랑스 파리대학의 자격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황하문명.유교의 세계종교 유교도 그대로 교과서.학술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사적 견지에서 한국의 Royal대학은 궁(宮) 성균관대[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6백년 역사를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음], 어(御 서강대[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교황 윤허 대학 중 하나]임은 변치 않습니다.       



* 일본 신도 수장인 일본 천황이 성씨가 없다는 자료들입니다.


a. 이를 보면서 천황은 호적도 없고 성도 없고 선거권도 없고 다만 이름만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일본인은 모두 화장을 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지만 오직 천황만 땅에 묻힐 수가 있다. 그만큼 천황은 사람이면서 신과 같은 존재로 되어 있다.

. 출처: 성씨와 근친혼 (시집가고 장가가고 - 가족과 의식주, 2009. 12. 25.,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b. 2010.08.29, 뉴데일리 조양욱 기자 보도기사


<15>일본 왕족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다른 항목에서도 다뤘지만 일본 천황은 성씨가 없다. 황족들도 다 마찬가지다. 이름만 있다. 예컨대 대다수 한국인들이 잊으래야 잊지 못하는 히로히토 천황이 있었다. 못 잊는다함은 그가 1921년에 아버지이던 다이쇼 천황의 섭정이 되었고, 5년 뒤인 1926년에 즉위했으므로 한반도 강점기의 절반 이상이 그의 치세였던 탓이다.
히로히토 천황이 역사상 가장 긴 64년 동안 왕위에 있을 때의 연호가 쇼와(昭和)였다. 그런데 막상 천황이 타계하면 생전에 통용되던 이름마저 역사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연호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히로히토 천황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그의 이력을 사전에서 찾으려면 ‘히로히토’ 대신 당시의 연호를 붙여 ‘쇼와 천황’을 뒤져야 나온다(하기야 불경하다는 생각에서인지 생시에는 인명록에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신화에서 출발한 초대 천황으로부터 따져 제125대 째인 지금 천황의 이름은 ‘아키히토’이다. 그가 1989년 1월8일 왕위에 오르면서 정해진 연호가 ‘헤이세이(平成)’이다. 연호는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宮內廳)을 비롯한 일본정부, 그리고 관계 전문가들의 밀실 논의를 통해 정해진다. 헤이세이는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오는 ‘내평외성(內平外成)’과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지평천성(地平天成)’에서 뽑아낸 말이라고 한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아키히토 천황이 재위하는 한 이어질 연호 헤이세이. 놀랍게도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연호가 서기보다 더 잘 통한다. 이런 식으로....
 
“뭐라고, 서기 2010년? 그러니까 헤이세이 22년이란 말씀이렸다!”

고지키(古事記).   712년에 오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가 43대 겐메이(元明) 천황의 명을 받아 편찬한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 3권으로 엮어져 있다. 상권은 천지개벽에서 시작되며, 중권이 초대 진무천황에서 15대 오진(應神) 천황까지, 하권은 16대 닌토쿠(仁德) 천황에서 33대 스이코(推古) 천황까지를 다루었다. 신화와 전설에다 가요(歌謠)까지 섞여 있어 역사서라기보다 이야기책에 가깝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여신이자 태양신으로 일컬어진다. 일본 왕실이 조상신으로 떠받든다.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일본이라는 나라를 만든 뒤  여러 신을 낳은 이자나기노미코토의 딸로 되어 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 y2cho88@hotmail.com


c. 고대 성씨고(古代 姓氏考) 結論 - 백제역사유적지구 디지털 아카이브


또 중국이나 한국의 왕은 모두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천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특이한 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대륙에 있어서도 이른바 복성의 예를 흔히 볼 수 있으나 부계의 혈연관계 ...


.출처: 고대 성씨고(古代 姓氏考), 권호수:제 3집, 저자:손 대준, 발행일:1991년 6월, 게재지:한국의 농경문화, 발행처:경기대 박물관


d. 구글에서 발췌한 자료


한류 열풍과 좀비 사무라이의 천 년 비밀세계

송성표 - 2015 - ‎Political Science

넷째, 일본서기 는 백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서 일왕의 성姓씨를 황을 위해(역사 조작) 당시 사람들이 만들어 없애버렸다. 일본을 제외한 고대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국성이 없었 던 경우 없었고, 세계 어떤 나라, 어떤 왕실도 족보와 성씨가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자문화권 국가이면서도 역대 왕들의 이름이 제124대 히로히토裕仁, 125대 아키히토明仁와 같이 외자가 아닌 복자 이름만 있고 성씨가 없다.

https://books.google.co.jp/books?id=nNLKCgAAQBAJ&pg=PA310&lpg=PA310&dq=%EC%9D%BC%EB%B3%B8%EC%B2%9C%ED%99%A9+%EC%84%B1%EC%94%A8+%EC%97%86%EC%9D%8C&source=bl&ots=UuAmhu1kXq&sig=ruem7tvVeRc6gdxj-jtxLWx0CV0&hl=ko&sa=X&ved=0ahUKEwiOrN6klojYAhVHE5QKHW3WABQQ6AEIRDAE#v=onepage&q=%EC%9D%BC%EB%B3%B8%EC%B2%9C%ED%99%A9%20%EC%84%B1%EC%94%A8%20%EC%97%86%EC%9D%8C&f=false



     




2]. 필자는 오제중의 한 분이신 소호 금천씨의 후예입니다. 尹씨는 중국의 소호(少皥)씨에서 유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 고려.조선의 귀족.양반가문 후손인 파평윤씨(坡平尹氏)입니다. 궁 유(宮 儒)  윤진한. 성대 1983학번, 1962년생, 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주간)에, 퇴계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공부함. 10년도 넘게 정신적인 궁 성균관대 임금으로 세계와 한국에 알려옴. 아버지(윤 기섭) 어머니(송 계순) 모두 양반임.


서강대 기록보존소 교수인 서 진교 교수는 필자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어(御) 서강대 임금으로 알려옴.




* 尹씨는 중국의 소호(少皥)씨에서 유래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윤씨는 통일신라 말기에 태어나신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하는 성씨인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서 개국공신으로 三韓功臣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의 명문 문벌로 살다가 조선시대에도 전주 이씨 다음으로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1천년 이상 한국의 명분문벌로 살아온 성씨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착은 늦은편 같습니다. 윤씨는 파평윤씨가 가장 많습니다.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지습(節南山之什)에는 윤(尹)씨가 태사(大師)와 함께 자주 언급됩니다. 주(周)나라시절의 지배성씨중 하나가 윤씨로 판단됩니다(태사라는 벼슬과 함께...). 고대 한국의 신라나 고려초기에도 윤씨는 태사벼슬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시경의 윤씨와 태사벼슬과 연관되어 그런 벼슬을 수여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만, 정확하게 알수는 없습니다. 고대 중국 주(周)나라등에서 지배성씨중 하나가 윤(尹)씨였던건 맞는데, 전 국민인이 우러르며 숭상할 정도로  통치에 성공했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다음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지습(節南山之什)에 나오는 윤(尹)씨와 태사(大師)에 대한 구절입니다.


- 다 음 -   


詩經 小雅


節南山之什(절남산지습)


저 높은 남산(節彼南山)

節彼南山<절피남산>이여

높이 솟은 저 남산에는


維石岩岩<유석암암>이로다

바위 첩첩 쌓여있네


赫赫師尹<혁혁사윤>이여

빛나는 태사와 윤씨여


 民具爾瞻<민구이첨>이로다

백성들은 그대들을 우러러보네 


憂心如惔<우심여담>하며

걱정이 마음에 불타고


不敢戲談<불감희담>하니

감히 농담도 못하게 됐으니


國既卒斬<국기졸참>이어늘

나라는 마침내 망하였거늘


何用不監<하용불감>고?

어찌 살펴 보지도 않는고? 

 節彼南山<절피남산>이여

높이 솟은 저 남산에는


有實其猗<유실기아>로다  

넓직하니 기울어진 언덕이 있네 

赫赫師尹<혁혁사윤>이여

빛나는 태사와 윤씨여

不平謂何<불평위하>오?

고르게 다스리지 않으니 어찌할 것이요?

天方薦瘥<천방천차>라

하늘은 무서운 고통 계속 내리시니  

喪亂弘多<상란홍다>하여

백성들 상란 너무 심하여

民言無嘉<민언무가>어늘

그 원망이 자자하도다

慘莫懲嗟<참탁징차>로다
어찌해 막을 생각도 않는고?  


尹氏大師<윤씨태사>이

윤씨와 태사는

維周之氐<유주지저>니

주나라의 주춧돌이니...



* 한편 효월드 족보박물관에 등록된 윤씨성 관련사항입니다.



윤(尹)

문중

윤(尹)


  • 유래

    윤소종은 이 색(李 穡)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급제병조전서(兵曹典書:조선초기의 직제로 후에는 병조판서로 정2품 국방장관)를 지낼 때고려사(高麗史)편찬에 참여무송윤씨(茂松尹氏)는 원래 소호씨라고 한다.상고시대에 소호금천씨 차비의 아들 반이 궁정이 되었는데,왕이 옹주의 윤성에 봉해서 윤씨(尹氏)로 삼았다고 한다.그 후 중국 오계시대에 후손인 윤경이 병란을 피하여 무송(전북 고창)에 정착하여 살면서 본관을 무송으로 하였다고 한다.그러나 이후의 기록을 잃게 되어 알 수가 없다.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때 보승낭장(?將:무관 정6품으로 중랑장의 아래)으로 무장현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냈다. 무송(茂松)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두었던 행정구역으로,경덕왕 때 무송현으로 개명하였으며,1417년(태종17) 장사현과 합하여 무장현(茂長縣)으로 하다가 변천을 거쳐 고창군에 편입되었다.무송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를 잃어 알 수 없다가 고려 예종때 윤양비(尹良庇)가 보승낭장(保勝?將:고려때 무관의 정6품)에 올라 무장현 호장(茂長縣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을 역임하게 되자 윤양비를 시조로 받들고 무송(茂松)을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  

    3].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다음의 서적을 소개 하겠습니다.

     

    조상성씨의 세계 내가만난

    저자:김 문순/답게/2009.03.25

     

    위 책은 무송 윤씨와 칠원윤씨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송윤씨 

     

    원 성씨는 원래 소호(少皥)씨였으나, 소호 금천씨의 아들 선(船)이 옹주의 윤성에 봉해져 윤씨가 되었다. 후손인 경(鏡)이 병란을 피하여 무송(전북 고창)에 세거하여 이어져 오고 있다...

     

    * 칠원윤씨

    태종 무열왕때 태자 태사 역임.

     

    . 필자 주 1). 향토문화대전에 나타난 무송 윤씨의 시조와 칠원윤씨의 시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a). 한국에서의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윤양비(尹良庇)에 대한 설명.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설명편에 나옴.


    [연원]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보승낭장(保勝郎將)·호장동정(戸長同正)을 지냈다. 윤양비의 선계(先系)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에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무송(茂松)[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지방에 정착하면서 무송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윤양비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장령공파(掌令公派)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b). 한국에서의 칠원윤씨(漆原尹氏) 시조 윤시영(尹始榮)에 대한 설명.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에 있는 칠원윤씨 上良齋
    설명편에 나옴.

     


    [개설]
    칠원윤씨 대언공파(代言公派) 양산 소문중(小門中)이 임진왜란 전에 남하하여 양산 상삼 및 양동에 세거의 터를 잡았는데 26세조 윤승원(尹承元)을 모시는 재사이다. 「상량재기」는 1997년 5월 18일 38세손 윤정삼(尹政三)이 근찬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태사로서 고명원로(顧命元老)에 이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로 삼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27세조 윤옥(尹沃)은 무과중추부사(武科中樞府事)였으며, 윤발(尹潑)은 무과에 급제한 만호(萬戶)였다. 두 사람은 임진왜란시에 형제가 창의(倡義)한 공으로『양산읍지』, 『양산향안』에 실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c). 한국에서의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윤신달(尹莘達)에 대한 설명. 

    성씨의 역사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龍淵寶鑑)》 등에 의하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坡平山)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옥함(玉函)이 물위에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나왔다고 한다. 윤신달 이전의 자세한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출처:파평윤씨[坡平尹氏] (성씨와 본관, 2011.1.14,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2). 이로볼때 무송윤씨 시조 윤양비의 선계(先系)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에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한반도로 건너와 무송(茂松)[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지방에 정착한것으로 판단됨.  칠원윤씨의 시조 윤시영(尹始榮)도 신라 태종무열왕 때 태사로서 고명원로(顧命元老)에 이른점을 보면, 태종무열왕재위시 중국을 통치하던 당나라 때 칠원윤씨가 한국에 정착한것으로 파악됨.

     

    결국 소호씨에서 유래된 중국 尹씨는 唐나라때와 後唐시대(역사적으로 923~936 존립) 한국에 정착한 성씨라 할 수 있음. 정착순서로 보면 칠원윤씨가 태종 무열왕때, 파평윤씨가 고려 건국(918년)에 참여한 전후시기에, 무송윤씨가 후당(923∼936)시대에 한국에 정착한 것이라 판단됨.    

     

    . 필자 주 3). 태종무열왕, 당나라, 후당(後唐)의 시대 설명.

     

    a).신라시대 태종무열왕의 출생.사망 및 재위기간

     

    ㄱ). 출생~사망: 603(진평왕 25)∼661(문무왕 1).

    ㄴ). 재위기간: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신라 제29대왕.

     . 출처: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b). 당(唐)나라 존속기간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출처: 당[唐] (두산백과)

     

    c). 후당(後唐)에 대한 설명

     

    중국 고대의 오대(五代) 중의 한 왕조(923∼936).

     

    통칭 후당(後唐)이라 한다. 돌궐(突厥) 사타부(沙陀部)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이 당(唐:618∼907)에 봉사(奉事)하며 황소(黃巢)의 난(875∼884) 진압에 공을 세워 895년 진왕(晉王)으로 훈봉(勳封)을 받았는데, 아들 이존욱(李存勖:재위 923∼926)은 923년 후량(後梁: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國號)를 당(唐)이라 칭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였다...

    .출처:당[唐] (두산백과)

     

     

    . 필자 주 4). 유교사회는 자손번성을 위해 부인을 여러명 두며 살아온게 역사적 현실인데, 이는 그대로 반영하여야 합니다. 왕족이나 양반은 대개 그렇게 여러명의 부인들 두고 一夫多妻制로 가문의 번영을 도모했습니다. 현대는 一夫一妻制지요. 

     

    . 필자 주 5). 五帝의 姓.

    태호, 염제, 황제, 소호, 전욱은 하나의 칭호에 해당됩니다. 중국은 姓氏제도를 발달시켜 한국도 殷나라의 왕족출신 箕子조선의 출현이후 기자의 후손들이 성을 사용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부터 역사적 조선으로 보여지는데, 기자조선을 불명확한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음. 물론 아직까지 단군은 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野史로보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음. 세계사 영역과는 맞지 않는 야사와 전설이 단군조선 이라 할 수있음. 최근에 급작스럽게 단군조선도 교과서에 넣기는 넣었지만 世界史.正史로서가 아니라 신화와 전설 차원으로 넣은것이라 이는 학계에서 많은 검토를 해야 함. 국어사전이나 한자사전에서 유사이래(有史以來)란 말은 있어도 단군이래라는 말이 등재되지 않은걸 보면 正史에 근거한 역사적 자격이 중요하기는 중요한 것 같음. 그런데 기자조선 기준(箕準)王은 분명한 正史시대의 위만이 멸망시켜 출생.사망이 부정확한 인물이면서 역사적 인물에 해당되기도 함.  

     

    . 필자 주 6). 준왕(準王), 즉 기준(箕準)은 출생.사망은 불명인데, 재위기간은 명확하고 정사시대 인물인 위만에 멸망당하는 역사에는 분명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준왕

    재위기간: BC 3세기~BC 2세기.

     

    고조선의 왕. 중국의 진(秦)나라 말기와 한(漢)나라 초기에 걸치는 시대에 재위(在位)하였으며, 지금의 랴오둥[遼東]지방에서 도망해 온 위만(衛滿)을 받아들여 한씨조선의 서북변(西北邊) 지방을 지키게 하였다. BC 194년 위만이 왕검성(王儉城)을 공취(攻取)하자, 준왕은 마한(馬韓) 땅으로 도망하여 그 전에 이미 그 지역에 이주해 있던 유민(流民)을 수습하여 그들을 지배하면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출처:준왕[準王] (두산백과)

     

    . 필자 주 7). 기자조선의 실체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인정하였다고 하는데, 최근에 부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성씨의 유래나 기준왕의 역사적 등장으로 볼때 기자조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근대와 현대 일부분 시기는 일본 강점기인데, 학술서나 백과사전.교과서 등 많은 학술서에서 유교 아닌 일본 신도.일본불교적 시각과 일본 기준 역사관이 강점기 한국에 작용한점을 염두에 두어 장기적 재검토가 필요한 분야라 생각합니다.   

     

    기자조선(箕子朝鮮)

     

    .요약: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출처:기자조선[箕子朝鮮] (두산백과)

     


    4]. 여하튼 한국 성씨를 보면 기자조선의 후손들이 徐氏나 韓氏등으로 姓을 자연스럽게 적용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고적에 성이란건 꼭 父의 성을 따르지 않고도 그 후손이 地名등을 활용해 姓을 사용하여 전승되어온 부분도 많습니다. 한국의 경우 기자조선 후손들은 姓을 사용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기자조선 후손이 아니면 자생적인 부족연맹체의 수장들이 姓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 나중에 추증형식으로라도 姓을 사용하며 확대시켜 온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막부시대를 타도하며 하급무사들이 추대한 日王이 아직도 姓이 없는게 좀 특이합니다.  한국에서 漢字나 유교 및 도교.중국불교 여러 문물을 수입해간 나라가 일본이며 한국을 어버이 나라로 알던 나라가 일본인데 느닷없이 중국.한국이 모르고 인정치 않던 천황칭호를 강요하니까 해방후 한국은 日王이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필자 주 8). 유교 경전에서 보면 윤씨가 나오는점으로 보아 중국에서 발생한 姓인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소호씨가 尹성을 사용한게 아니고 次妃(둘째 왕비)에게서 난 후손이 尹성을 사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성씨는 몰라도 필자가 尹氏라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든 책 [조상성씨의 세계 내가만난/김문순 저]에서 무송윤씨의 원래 성씨가 소호씨라고 한것은 칭호를 성씨로 혼동하여 그렇게 서술한 것 같기도 합니다. 상고시대의 일로, 좀 복잡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5]. 그래서 五帝의 姓을 밝혀주는 자료를 근거로 五帝의 姓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오래된 태고시대의 인물들이라 여러가지 설이 많아 후세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혼란한 측면도 있으니까 이런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유교 경전에서 태호 복희씨등의 형상을 신화적.동물적 혼합형태로 서술한 내용을 필자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인더스문명에서 계승된 인도에서도 뱀이나 소를 숭배하는 현상이 지금도 있음. 문명교류기에 중국에 영향을 주어 俗書들 및 이에 영향받은 그림에서 인간과 동물의 혼합형태인 신화적.전설적 형태로 묘사되고 있는것 같음. 문명은 상호 영향을 주는 특성이 있음. 동물의 모습을 혼합하여 신적으로 여기는 특성은, 인도 서북일대를 석권한[* 출처: 인도사(2005.2.25, 미래엔). ...알렉산더가 기원전 327년에 인도의 서북부로 진격하였다. 그의 침공 루트는 카불을 넘어 힌두쿠시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는 북부 인도를 횡단하여 서북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정복군과 교류하던 인도가 알렉산더 정복군에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렉산더 정복군이 인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가능성이 존재함. 또는 중국의 태고적 믿음이 인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음. 나일문명지역의 스핑크스도 인간과 동물의 혼합체인 점도 주의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6]. 五帝나 三皇에 대한 설은 한국의 여러 백과사전이나 학술서적들도 아직, 통일된 의견을 보이지 않고 있어 제 각각 다양한 상황인데, 이는 현대 중국도 큰 차이가 없는것 같음. 그러나 유교종주국이자 발생지인 중국이 모든 내용들을 가장 잘 알것임. 필자의 견해로는 백과사전이나 중국.한국의 俗書보다 禮記 月令에서 五帝를 발견하는게 가장 正道라 판단함(아주 오래된 태고적의 신적.신화적 인물들이 이 분들이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밖에 없겠는데, 혼선을 빚기보다는 유교 경전을 통하여 통일된 오제의 모습을 판단해보는게 적절할 것 같음). 한국에서는 정보가 부족하므로 불가피하게 백과사전이나 중국 인물사전등을 통하여 五帝에 대해 알아보는게 옳을것 같습니다.   

     

    1. 태호. 그 성씨는 風씨라고 함. 태호씨는 복희씨로도 인식되고 있음.

     

    * 복희씨(伏戱)

     

    동방의 천제, 복희씨

    복희씨는 전설 속에서 상고시대 동이족의 유명한 수령으로 태호로 불리기도 한다. 성은 풍()으로 전한다. 성기(, 지금의 간쑤성 타이안현 북쪽)에서 출생하여 진(, 지금의 허난성 화이양현)에서 죽고 화이양성(, 지금의 허난성 화이양현 서남) 북쪽 3리 지점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50년간 재위했다.

    전설 속에서 복희는 사람 머리에 뱀의 몸통(일설에는 용의 몸통)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이끌던 부족이 뱀이나 용을 숭배하는 토템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이는 모두 아홉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구이()’라고도 불렀고, 그는 최대 부족을 이끌던 공동 수령이자 동이족 상상 속의 선조로 받들어졌다.

    복희씨는 음양변화의 이치에 근거하여 ‘팔괘()’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여덟 종류의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부호를 사용하여 천지간의 사물을 개괄한 것이 8괘다. 그는 또 거미줄을 본떠 그물을 창조하여 백성에게 물고기 잡이와 목축을 가르쳤다. ‘슬()’이라는 악기도 만들고 악곡 ‘가변()’을 창작했다고도 한다. 이런 발명과 창작들은 당시 인류 문화생활의 서광으로 해석한다.

     

    .출처:복희씨[伏羲氏, fú xī shì]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필자 주 9). 복희씨의 모습은 감숙성 천수 복희묘에 나타난 바로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보이는데, 투루판 아스타나 무덤에서 출토된 복희와 여와의 모습은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해당지역의 토템신앙을 반영한 듯 뱀(필자가 보기에는 용으로도 보여짐)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유교 경전에서는 태호 복희씨의 모습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교 경전상으로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다, 또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뱀의 모습도 부분적으로 복합되었다고 하는 설명이 없습니다.

     

    중국 인물사전에 나타난 전통적인 복희 초상화로 판단하면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로 이르면 발은 사람의 발이고, 다리는 뱀의 얼룩무늬 가죽으로 치장한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토템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보면 사람이 뱀의 얼룩무늬 가죽으로 하의를 입은 모습으로도 보여집니다.    

     

    그런데, 복희의 초상화에서 나타난 발로 판단해보면, 선사시대 중국인들이 공룡류의 고생물을 경험하여 사람과 공룡의 복합적인 형상으로 토템신앙을 가져 복희씨의 모습을 형상화 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자가 추정하는 증거로는 중국의 북동부지방에 남아있는 공룡의 화석이 있습니다만, 신화적으로 추정만 할 수 있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에 중국 북동부지방에 상당히 많이 나타난 공룡의 화석사례가 있습니다.

     

    - 다 음 -

    ...중국의 북동부 지방에서는 소형이면서 2다리로 걸어다닌 열하공룡()의 발자국이 64m2에 4,000개 이상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어, 이들이 당시에 동쪽으로 대이동을 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의 애리조나주()나 유타주에서도 대형 공룡 발자국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한국에는 공룡시대인 중생대, 특히 쥐라기와 백악기의 지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 출처: 공룡의 화석 (두산백과) 

     

    필자가 신화나, 선사시대의 화석, 역사, 유교경전등을 종합하여 볼때, 고대의 신화적 인물인 복희씨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을 참고할 수 있겠지만, 아주 오래된 신적이고 신화적인 분이라 시중의 여러모습을 확정하지는 않으면서 유교경전에서 특정적 형상을 묘사하지 않는 상태로 받아들이는게 무난하다고 여겨집니다.   

     

     

    . 필자 주 10). 복희씨의 여러가지 모습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42980&cid=56777&categoryId=56777

     

     

    2. 염제. 그 성씨는 姜씨라고 함. 

     

     

    신농씨는 허베이성() 쑤이저우시() 열산() 사람으로 상고시대 부락연맹의 이름난 수령이다. 강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이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에서 살다가 곡부(, 지금의 산둥성 취푸현 쪽)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그는 중국 고대 전설시대에 불을 다스렸던 신으로 염제라고도 부른다. 적제, 열산씨(일설에는 여산씨)라고도 부른다.

    황제와 더불어 중국인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의약(), 쟁기와 보습, 도기(), 활을 발명했고,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고 알려진다. 전설에 따르면 140년간 재위했다고 하며, 백성을 위해 수많은 약초를 맛보았는데 맹독 성분을 가진 단장초를 맛보다 중독되어 죽어서 다릉(, 지금의 후난성 차링현)에 장사지냈다.(이 역시 여러 설들 중 하나다.)

     

    .출처: 신농씨[神農氏, shén nóng shi] -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중국 인물사전에 나타난 전통적인 염제의 모습은 중화삼조당(허베이성 줘루현)내의 중화삼조상으로 보면 사람의 모습입니다. 중국인의 조상으로 불리는 염제와 황제상(허난성 정저우시 황하 풍경구)으로 보면 상체만 보이는데, 사람의 모습으로 보여지며, 머리부분에 뿔이 난 다른 속설의 형상이 아닙니다. 중국인물사전에 나타난 신농씨는 풀을 맛보고 있는 신농씨 초상화인데, 사람의 얼굴에 머리부분에 무언가 작은 관을 쓴 형상입니다. 토템신앙을 반영하면 소의 뿔모습형상으로 만든 작은 관 같기도 함.  

     

    필자가 볼때, 고대의 신화적 인물인 염제 신농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을 참고할 수 있겠지만, 이 분도 역시 아주 오래된 신적이고 신화적인 분이라 시중의 여러모습을 확정하지는 않으면서 유교경전에서 특정적 형상을 묘사하지 않는 상태로 받아들이는게 무난하다고 여겨집니다.   

     

    예기에 나타나는 오제(五帝) 중에서는 태호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가 경전에서는 특정 형상이 없는데, 시중의 속설에서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일부에서는 상고시대의 토템신앙을 반영하여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어느정도 복합된 형상으로도 서술됩니다.  

     . 필자 주 11). 염제 신농씨의 모습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42982&cid=56777&categoryId=56777

      

    3. 황제

     황제는 염제 신농씨와 더불어 ‘염황’이란 용어로 중국인의 조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중국 상고사 전설시기의 가장 이른 조종신()이다. 황하 유역 일대에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황제와 염제 부락을 중심으로 화하족()이 형성된 뒤로는 전 부족의 시조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성은 공손(), 호는 헌원씨이다.

    상고시대에 희수일대에 형성된 황제족이 바로 이 걸출한 시조 때문에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황제족은 강수일대의 강성() 염제족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왔다.

    그 뒤 황제족 후예의 한 갈래가 지금의 산시(西)성 남부로 진출하여 하() 문화를 창조하면서 마침내 하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하족은 중원에 들어와 중국 최초의 왕조 하()를 세웠다. 그 후 산시(西)성 경내에서 살았던 희()라는 성을 가진 주족()이 중국 두 번째 왕조 상()을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세웠는데, 이 주족이 먼 조상 황제족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들의 성인 희()를 황제족에 갖다 붙였다.

    황제족은 염제족과 더불어 하 · 주 두 시대와 기타 다른 종족들과의 충돌 · 교류 · 융합을 거치면서 각 방면의 융화와 발전을 통해 전국시대에 이르러 통일된 화하족을 형성하게 된다. 『세본()』 및 『대대례기()』의 ‘세계()’에 각 종족의 선조와 조종신을 황제의 갈래로 편성하여 완전한 혈연체계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황제와 염제는 함께 거론되었고 염 · 황에서 시작하여 여러 씨족의 통합을 거쳐 중국민족의 조상인 화하족이 된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 출처: 황제[黃帝, huáng dì] - 중국인의 시조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4. 소호

    소호(), 소호(), 소호()라고도 불린다. 역사책에서는 청양씨(), 금천씨(), 궁상씨(), 운양씨() 혹은 주선(), 현효()로 일컬어진다. 황제()의 장자()이다. 상고시대 화화부족연맹()의 수령이자, 동시에 동이족()의 수령이기도 하다.

    비록 고대 사람들을 그를 오제()의 한 사람으로 열거했지만 실제로 제왕()은 아니고 단지 중국인의 공동 조상() 중에 한 사람이다. 고대 중국의 신화 중에서는 서방대제(西)로 존숭된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는데, 원시 봉문화()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의 자손은 여러 성씨()로 분화되었는데, 예컨대 영(), 상(), 진(), 담(), 서(), 황(), 강(), 이(), 조(), 소()씨 등이다.

     

    .출처: 소호 [少昊, shǎo hào]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5. 전욱

     

    전설 속 염 · 황 연맹의 중요한 수령 중의 하나로, 고양씨라 부르며 이를 호로 칭하기도 한다. 

     

    ... 황제의 자손이라 전하며, 중국 서부 화하() 부족집단이 동방 동이() 부락집단과 융합한 뒤 형성된 전욱 부족의 수령이다. 아래로 8개 씨족을 거느리고 제구(, 허난성 푸양 서남쪽)를 거점으로 삼았다. 세력 쟁탈의 와중에 공공을 물리쳤다.

    전욱은 10세 때 소호씨를 보좌했고, 12세에 머리를 묶었으며, 20세에 제위에 올라 재위 78년만인 98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동군() 복양() 돈구성() 밖 광양리(, 허난성 푸양 서남)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전욱은 사람과 일을 잘 다스리는데 중점을 두었고 농업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남정()의 중()과 화정()의 려로 하여금 하늘과 땅을 갈라 통하게 함으로써 인간과 신의 일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원시종교가 신권으로 넘어가는 표지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는 여자가 길을 가다 남자를 만나면 한 쪽으로 비켜섰다가 남자가 먼저 지나간 다음 지나가게 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를 어기면 황량한 땅으로 추방했다고 한다.

     

    .출처: 전욱 [顓頊, zhuān xū]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에 어떻게 대처하는것이 승전국과 해방국의 권익을 지키는 방법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