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략적 의견
필자는 한국의 학교교육에 의거, 한국사,세계사, 한문.국민윤리(삼강오륜이나 인의예지신, 충효등 유교교육 위주)및, 국내법.국제법등을 종합하여 한국과 세계의 대학 및 종교들을 판단해왔음. 따라서 한국사는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세계사는 한나라 태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 베이징대로 승계됨), 중세유럽에 형성된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을 교과서.학술서적의 기득권 대학으로 인정해주면 학술적으로 무리가 없다고 판단함(그러나 강행법 성격의 주권은 국가주권 개념을 가진 나라에는 없음).
종교로는 황하문명을 이어받은 중국 한나라시대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한나라시절 이미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 걸쳐 세계종교화 된 이후, 중국 화교들이 진출한 아시아의 다른나라 일부지역 및 대만.싱가포르가 유교권 국가나 지역들임)가 세계종교화 되었던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
그리고 원래는 에게문명에서 비롯된 헬레니즘문화를 가진 로마제국이었는데,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세계종교화 된 교황중심 서유럽의 로마가톨릭(특히 대항해시대 이후 서유럽국가들이 아메리카,오세아니아등 신대륙등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로마가톨릭의 교세가 확산되어왔음)이었음. 중국.러시아.한국(한국의 경우 한국을 어버이나라로 섬기던 오랜 문명후발국 일본에 의해 일본 강점기를 겪음).일본.태국등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는 서유럽의 지배시기를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은 더욱 더 큰 세계종교로 발돋움하였음.
@ 세계사와 한국의 대학들에 대한 의견
I. 정사(正史)인 세계사의 볼로냐.파리대학에 대한 강력한 배척이나 삭제 및 이론(異論)은 없어왔음. 한편 세계사는 한국에 강행법적인 주권은 없음. 지역적으로 한국사의 경우, 성균관에 대(大)자를 더붙인 성균관대가 법으로 이의없이 최종 확정되는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왔음. 물론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였던건 분명한 사실이며, 향교관련 법률등에 의거 성균관대가 성균관.향교와 같이 보호되는 과정도 있어서, 한국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추종세력들과 대중언론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성균관대가 조선.성균관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것은 관습적.사회적으로는 맞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발간이후에 형성된 성균관대의 자격(대통령령에 의해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정통 승계)처럼 강력한 보호는 받지 못해왔었음. 그러함에도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등에 의거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기에 대중언론에서 서울대.연세대(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고려대(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친일파 김성수가 고려대로 변경)의 카르텔은,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강점기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침략.반란 형태의 도전자들에 불과해왔음.
한국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 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로 법적으로 최종 확정되는것은, 그리
순탄하지 않아왔음. 볼로냐.파리대학처럼 원래 이름 그대로 유지하여 오는 대학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음. 그러나, 승전국이나 한국 임시정부처럼 일본.독일.이태리등의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강력한 국가주권개념을 가진 나라들의 경우에는, 추축국과 동조세력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계사는 해당국에서 강행법성격의 주권을 형성할 수는 없으며, 단지 학술적 개념 정도에 해당됨.
한국의 경우, 국내법과 국제관습법상 받아들여 지지 않던 을사조약(강제.불법의 을사조약이 무효라, 국내법상 한일병합도 무효. 국제법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음)이후,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한 한국의 성균관이 경학원 및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강등되는 고난의 과정이 있었음.
또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한 일본의 주권이 한국영토에 없는게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인데[포츠담 선언 8항. 8)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또 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하위법인 미군정령으로 경성제대가 서울대가 되고, 다시 서울대를 국립대로 하면서, 대중언론등에서 주권없고 학벌없는 패전국 잔재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그리고 서울대의 추종세력들)이 다양하게 국사 성균관의 정통승계대학인 성균관대에 도전해 왔지만,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의 자격은 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자격에 연계된 특성이 있어서, 대중언론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 최고대학은 성균관대였음.
상위법이 포츠담선언이고, 하위법이 미군정령이라 미군정령에 의해 서울대가 되고 국립대가 된 서울대는,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8항의 내용대로, 항복당시의 기준대로, 적용되어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고 학벌이 없어야 옳음[일본국의 주권은 本州, 北海道, 九州, 四國 及 我等이 決定할 諸 小島에 국한됨].
따라서 을사조약 무효나 한일병합무효(을사조약이 무효라)의 대한제국 국내법기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한일병합 무효. 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의 무효등 선언)와 더불어,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에 의해, 일본강점기 당시에 형성된 경성제대등은 기존에 한국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그 정통승계대학이 해방후의 성균관대)의 최고대학자격을 훼손하지 않아야 됨.
해방후 미군정령으로 공자묘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기로 한 이후, 한국 유림[유림(儒林)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전통신분이 높던 계층.조선 대한제국은 황제.왕부터 기본적으로는 유생(儒生)임]들이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차원에서 성균관대를 설립키로 하여, 향교관련 법률등으로 성균관(제사를 전담하는 기구로 됨)과 성균관대(대학교육 전담)의 특성을 구분하여 온게 있었음.
성균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성균관의 최고대학 자격을 승계해왔다면, 큰 무리가 없었을텐데, 성균관에 대자를 더 붙여 약간 복잡하게
되어온 과정도 있었음.
미군정 법령이 공자묘 경학원에서 성균관으로 환원한 성균관의 대학자격에서는, 해방당시 전국 유림대회 결의대로, 성균관대를 미군정에 대학으로 등록하고 성균관은 제사만 전담하여 온 관례를, 제사전담기구인 성균관이 깨뜨리지 않아왔음(그래서 미군정이 환원시킨 성균관의 자격은, 대학교육에서는 성균관대, 제사는 성균관으로 분리해온 관례를 따라왔다고 할 수 있음).
그러다가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에서 성균관의 정통승계 대학이 성균관대이고, 6백년 역사를 법으로 인정받으며, 국내외에서 다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것.
. 필자의견: 한국사나 세계사의 정사(正史)는 옳기때문, 그대로 기득권을 인정해주면 적당함. 세계사의 경우 강행법적 주권은 한국 영토에 없으며, 단지 학술적 의견정도에 해당됨.
II. 필자는 한국의 국내법(대통령령에 의해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해 서술된 성균관대(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 승계. 국내외에서 6백년 역사 인정)와 서강대(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 서강대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중 하나)의 자격을 한국사나 세계사의 학설(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과 연관시켜 Royal.Imperial대로 알려왔습니다.
[1].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두산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그리고 서강대(교황윤허에서 시작됨).
1].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1988년부터 시안본을 검토 수정하여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고, 1995년에는 보유편이 28권으로 나왔으며, 일부 개정증보를 거쳐 2001년에 CD-ROM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200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개년에 걸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터넷에 온라인 서비스되고 있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鳳鳴財團)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2.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3.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4.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동국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서울시립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한편 국제관습법상 세계사의 정설(定說)은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함.
http://blog.daum.net/macmaca/2375
5.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