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절 교육원장,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유교문화권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1]. 신문 보도기사
[호찌민-경주엑스포] 김행자 한국예절교육원장 한국문화존 유교문화전시관서 열리는 한국전통혼례
체험 통해 한국예절문화 베트남에 알리는 역할 톡톡
김 원장 "외국인들 큰 관심에 뿌듯함 느껴"
2017.11.21, 경북신문 장성재 기자 보도뉴스.
...
김행자 원장은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유교문화권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며 “특히 신랑이 신부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르는 것, 양과 음이 만나는 저녁 해질 무렵에 혼례를 치른다는 사실은 여기 와서 알았고 매우 놀라웠다”고 말한다.
http://www.kbsm.net/default/index_view_page.php?idx=191432...
2]. 필자 논평
1. 과거 월남에 미군과 같이 한국군을 파견했던 건에 대한 의견
과거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은 새로운 신생 독립국에 대해 대체로,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2차대전 이전, 강대국이 지배하던 인류 역사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의 경우는 국가주권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다(그래도 과거 강대국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면, 국가주권을 행사하면서도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와 공존해야 할 것. 프랑스는 2차대전 승전국이라 패전국 일본과는 다를것).
2차대전 이후로 볼 때, 세계적으로도 특이하게 베트남은 과거 강대국(프랑스)의 식민통치를 자력으로 종식시킨 나라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2차대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일병합등을 부정하며, 일본에 선전포고하여 나중에 프랑스.구소련.폴란드 등에서 임시정부를 인정한후, 한국 현행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반영되었습니다. 또한 2차대전 당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일본이 항복하였습니다.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대한제국에 불교적인 일본 신도, 일본 불교, 소수의 일본 기독교를 한국에 강제로 포교시키던 일본입니다. 학교측면에서 보면 일본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전문학교급에서 대학이 된 일본 강점기 잔재 동국대,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 일부, 서울시립대등. 그리고 이의 추종자들은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나 친일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고려대로 만든 고려대)나 기타 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중.고등 학교들은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는 채로 한국영토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은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남.북이 분단된 베트남에 자본주의 노선의 월남을 위하여 파월국군을 파견했던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반공노선으로, 월맹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빚어진 일은 대한민국이 사죄하고 그럴 성질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국가와 민족같이 중요한 개념이 수천년 이어져 온 교육제도나 종교입니다.
2. 다시 되짚어보는 전통 유교국들의 역사
1). 중국.한국.베트남같은 전통 유교국의 대학제도
가. 중국의 경우 한나라 태학.국자감.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변함.
나. 한국은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고려말 성균관이 됨).조선 성균관(2차대전 이후 해방후 미군정기 성균관대로 정통승계되어 오늘에 이름)
다. 베트남의 국자감. 공자님을 모시고, 베트남 최초 대학인 문묘국자감에서 이루어진 유교교육이나 통치이념인 유교,그리고 진사(進士)배출등
하노이에 있는 ‘반 미에우 꾸옥 뜨 잠(Văn miếu Quốc tử giám, 문묘국자감(文廟國子監))’ 사적은 11세기에 세워졌으며 유교 및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기원전 551~479)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의 왕들은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건설하였고 유교를 사회적·정치적 기초로 삼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에는 유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반 미에우 꾸옥 뜨 잠’은 베트남 조정에서 일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관료들을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천 명의 띠엔 시(進士)를 배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이곳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여기고 있다.
. 출처:레 왕조와 막왕조(1442~1779)의 과거 시험 관련 석판기록[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한나라이후 세계종교 유교의 문화를 가져온 나라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입니다.
가.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걸쳐,유교명절 전해짐.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http://blog.daum.net/macmaca/2313
나.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 나오는 내용.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지은이: 장종근, 박현준, 최태선
발행일:2003년 1월 10일(초판 1쇄),2011년 12월 10일(9판 1쇄)
. 필자 주 1). 인용 도서에 나타나는 수자의 형상과 필자가 사용한 수자의 형상은 100%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 미리 참작해 주십시오.
Ⅰ역사와 인간 ~Ⅱ 도시 문명의 성립과 지역 문화의 형성
01. 인류 문화의 기원과 문명의 발생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03. 고대 인도.동남아시아.서아시아 세계
04. 고대 지중해 세계
Page 22.
02. 고대 동아시아 세계
탄탄 정리
3]. 중국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한
1. 한의 건국과 발전
(1). 건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장안을 수도로 중국 재통일(기원전 202)...
(2). 한고조(유방):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 실시
(3). 한 무제의 정치
① 중앙 집권 체제 확립:군현제 실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③ 경제 정책:소금.철 전매제, 균수법.평준법, 상인에 중과세, 오수전 주조
(4) 멸망: 무제 사후 외척과 환관의 권력 투쟁→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 건국(8)
2. 후한의 성립과 발전
(1) 배경: 왕망의 급진 정책(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농민 반란으로 신 멸망
(2) 성립: 광무제가 호족의 지원을 받아 뤄양을 도읍으로 건국(25)
(3) 발전: 전한의 정치제도 부활, 유학 존중
(4) 멸망: 환관과 외척의 횡포, 관료들 사이의 당쟁→황건적의 난(184)으로 멸망
3. 한의 경제와 사회
(1) 경제: 철제 농기구 보급, 농업 기술의 발달→농업 생산력 증가, 토지 사유화 진전
(2) 사회: 빈부 격차 심화→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의 등장
① 농민 지배: 대토지와 노비 소유→사회 지배 계층으로 성장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중앙 정치 주도
* 위 본문 중 3. 한의 경제와 사회, (2)사회, ② 정치 장악: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향거리선제: 지방장관이 여론을 참작하여 지방의 덕망있는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관료 선발제도이다. 유학을 공부한 호족들이 선거를 독점하여 지방과 중앙의 관료로 진출함으로써 호족 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유가사상이 황제와 지배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유교로 발전
① 유학 교육: 수도에 태학 설치, 오경박사 제도 마련
② 관리 선발: 유학의 수준을 평가하여 선발
③ 학문 발전: 유교 경전의 해석과 주석에 주력하는 훈고학 발달
(2) 도가 사상: 신선 사상과 결합→태평도, 오두미도와 같은 민간 신앙으로 발전
(3) 불교 수용: 후한 때 비단길(사막길)을 통해 전래
(4) 역사서 편찬: "사기"(사마천), "한서"(반고)→기전체 방식의 역사 서술 확립
(5) 제지술 발달:채륜이 종이 만드는 법 개량→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위 본문 중 4. 한의 문화 (1) 유교의 국교화 관련 사항입니다. 편의상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에서 보충설명하는 내용 그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 유교의 국교화: 한 무제는 제자백가중에서 유학만을 관학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학문과 정치가 일치되면서 학자가 정치가이고 정치가가 곧 학자라는 정치.교육 일치주의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 (주)지학사 발행, 하이라이트 핵심 세계사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에 나타나는 자료.
별책 부록 "정답과 해설" Page 7
#자료분석#
.유가: 유가는 마음에 우러나오는 "인"과 "예"를 바탕으로 도덕 정치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 무제에 의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어 동아시아의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 필자 주 2). 위 본문 중 1. 한의 건국과 발전, (3) 한 무제의 정치, ② 영토 확장: 흉노 정벌, 대월지에 장건 파견(비단길 개척), 고조선.남월 정복 관련 사항입니다.
흉노는 현대의 몽고지역 일부도 포함되며, 중앙아시아 국가의 일대까지 포함됨. 고조선은 현대의 한국 지역 일부, 남월은 현대의 베트남 일부 지역임.
. 필자 주 3). 위 본문에 나오는 흉노를 다시 백과사전이나 중국사 학술서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3-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흉노.
흉노
[ 匈奴 ]
- 요약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 말.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玁狁)·훈육(獯鬻)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鞮: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 출처: 흉노[匈奴] (두산백과)
. 필자 주 4). 위 본문에 나오는 고조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필자 주 4-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고조선
[ 古朝鮮 ]
- 요약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고조선 [古朝鮮] (두산백과)
. 필자 주 4-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고조선 관련사항 필자 의견: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입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지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설화성격이 강하고 한국의 정사(正史)나 세계사적 성격의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 야사(野史)라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 필자 주 4-3).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三國史記 ]
- 요약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
| 구분 | 역사서 |
|---|---|
| 저자 | 김부식 등 |
| 시대 | 1145(고려 인종 23) |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출처: 삼국사기[三國史記] (두산백과)
. 필자 주 4-4).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사기
삼국사기[ 三國史記 ]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기전체의 역사서. 보물 제722호.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정사이다.
| 유형 | 문헌 |
|---|---|
| 시대 | 고려 |
| 성격 | 사서 |
| 편저자 | 김부식(金富軾) |
| 제작시기 | 1145년 |
| 권수·책수 | 50권 |
| 소장처 | 성암고서박물관, 옥산서원, 이병익 |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722호 , 국보 제322-1호 , 국보 제322-2호 |
| 문화재 지정일 | 1981년(보물 제722호) , 2018년(국보 승격) |
정의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
내용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간관(諫官: 諫議大夫·起居注)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현실 비판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신라고사(新羅古史)』·『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郎世記)』·『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진서(晉書)』·『위서(魏書)』·『송서(宋書)』·『남북사(南北史)』·『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 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출처: 삼국사기 [三國史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4-5).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三國遺事 ]
- 요약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 지은 역사서.
| 지정번호 | 부산유형문화재 31호 |
|---|---|
| 지정일 | 1999년 11월 19일 |
| 소재지 | 부산 금정구 청룡동(범어사) |
| 시대 | 고려시대 |
| 종류/분류 | 활자본 |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두산백과)
. 필자 주 4-6). 위 본문에는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정사(正史),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란 문구에 의거,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상식대로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 주 4-7).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에 나타나는 삼국유사
삼국유사[ 三國遺事 ]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하여 현존하고 있는 역사서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 책은 『삼국사기』와 함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단군을 나라의 시조라고 언급한 점은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野史)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
. 출처: 삼국유사 [三國遺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4-8). 위 본문에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 책은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野史)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불국토설에 입각한 불교사관이 잘 반영된 역사서이기도 하다"라는 표현을 그대로 반영하여 삼국사기는 정사의 성격을 가졌고, 삼국유사는 야사를 다루고 있다라는 구분을 그대로 인정하는게 옳습니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는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라는 기존의 우리나라 역사관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필자 주 5). 위 본문에 나오는 남월에 대해 살펴보갰습니다.
. 필자 주 5-1).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남월.
남월[ 南越 ]
- 요약 중국 진말(秦末)∼한초(漢初)의 혼란을 틈타 조타(趙陀)가 광둥[廣東]·광시[廣西]의 양성(兩省)과 베트남 북부지역에 세운 나라(BC 203∼BC 111).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는 남중국을 평정하고 거기에 남해(南海)·계림(桂林)·상(象)의 3군(郡)을 설치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자, 남해군위(南海郡尉)를 대행한 용천현령(龍川縣令) 조타가 BC 203년에 지금의 광둥성 광저우시[廣州市]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계림·상의 2군을 합쳐 남월국(南越國)을 창건하고 무왕(武王)이라 칭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회유책을 써서 조타를 남월왕으로 봉(封)하였으며, 대부분이 월인(越人)이던 남월국의 주민도 그에게 잘 복종하였다. BC 137년에 조타가 죽고, 그의 손자인 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남월에 대한 한나라의 압박이 점차 강화되었다. 호(胡)의 뒤를 이어 손자 흥(興:재위 BC 113?∼BC 112)이 왕위에 올랐으나, 남월에 내란이 일어나 재상 여가(呂嘉)가 권력을 장악하고 한에 입조(入朝)하려는 왕과 왕모(王母)를 살해하였으며, 또한 한의 사신까지도 죽인 뒤 흥(興)의 이복 형인 건덕(建德:재위 BC 112∼BC 111)을 옹립하여 한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무제(武帝)는 남월 토벌을 결심하고, 복파장군(伏波將軍) 노박덕(路博德)과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지휘관으로 삼아 대군을 급파하여 남월을 공략하였다. 드디어 BC 111년 한군은 남월의 국도(國都)를 함락하고 그곳에 9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남월은 5대 93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 남월 평정은 푸젠[福建]·서남이(西南夷)의 평정을 촉진시켜 한의 남방경략에 한 계기를 이루었다.
. 출처: 남월 [南越] (두산백과)
. 필자 주 6). () 속에 나타나는 수자의 이해.
한의 건국(기원전 202). 한의 건국은 ()속에 기원전 202로 표기됨. ()속에 기원전 이란 언급이 없으면 차후 ()속의 수자는 서기 몇 년으로 이해 할것. 예를 들어 신 건국(8)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속의 수자는 서기 8년, 후한의 건국(25)은 서기 25년, 황건적의 난(184)은 서기 184년으로 이해할것.
. 필자 주 7).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한의 역사
한의 역사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무제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 출처: 한의 역사 (두산백과)
. 필자 주 8).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신
신[ 新 ]
- 중국의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
. 필자 주 9).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신
신 왕조의 흥망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 요약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한 기점으로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왕망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왕전제와 사대제도 등을 실시했으나 지방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신나라는 불과 15년에 그쳐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로 남았다.
|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기원전 18년 : 백제시조 온조왕, 위례성에서 즉위 3년 : 고구려,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계속 팽창 8년 : 백제, 마한을 멸망시킴 22년 : 고구려, 부여 공격, 부여민 1만 명 투항 |
|---|
왕망, 왕위를 찬탈해 신나라를 건국하다
한나라는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던 신(新)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전한의 수도는 서쪽의 장안, 후한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이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나라는 왕망 1대 15년에 그친 중국사에서 가장 단명했던 왕조이다. 그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유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된 후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층이 두텁게 자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 출처: 신왕조의 흥망 - 왕망,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 필자 주 10).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에 나타나는 후한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 요약 호족세력이 역사 전면에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며 후한 정권의 시대가 도래했다. 반왕망 움직임의 물결을 타고 후한의 건국자가 된 광무제(유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이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후한 정권의 수립을 성공한 것이다.
|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26년 : 고구려, 개마국을 멸망시킴 42년 : 수로왕, 가락국 건국 49년 : 고구려, 요하 장악 56년 : 고구려 태조왕, 동옥저 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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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지주 청년 유수, 후한을 건국하다
기원후 25년, 유수가 다시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어릴 적부터 그를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문숙(광무제의 자)이 다만 정직하고 유화할 뿐, 농담도 잘하지 않고 얌전한 보통 청년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줄이야···."
이 말을 들은 유수는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유화의 길에 의해서 하고자 하노라"라고 말했다.
. 출처: 후한의 성립- 호족 연합정권이 출현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다.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세계종교 관련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으로 유교, 불교, 기독교등 세계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지침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 한국검인정교과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교육과학기술부
15 Page에 이런 지침이 나옵니다
⑺ 통일 제국의 등장 고대 문명의 형성 이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통일 제국의 정치적 변천과 그 특징을 다룬다. 지역별로 통일 제국이 성립되어 확대되는 모습을 살피고, 이어 제도의 정비 내용 및 문화적 특징을 이해한다. 아울러 각 지역 의 문화 발전이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세계 종교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 을 파악한다. ➀ 춘추ㆍ전국시대, 진, 한에 이르는 정치ㆍ문화적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 탕으로 진ㆍ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한다.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국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였 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당시 활약했던 주요 학자와 그들의 활동을 찾 아보게 한다. 진은 중국 영역을 통일하였으며 한 제국은 진이 세운 중앙 집 권 정치체제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안정시켰음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진․한 제국이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혼란의 시대로 규정하기 보다는 변혁의 시대라는데 유의 한다. 한 고조 시대의 과도적 제도에 관한 서술로 인해 한나라가 진나라와 다른 정치제도를 채택하였다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유의한다.
Ⅶ. 통일 제국의 등장 1. 중국의 통일 제국과 유교.
...유가 사상은 한나라 때 유교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다...
. 필자 주 11). 고대 세계의 세계종교로 성립한 유교, 불교, 기독교 중 인도의 브라만에 대항해 새로 일어난 무신론적 부처의 불교는, 그 때는 강력한 세계종교였지만, 다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배척받게 되어, 동남아시아 약소국과,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에서 단순 포교 종교로 머물며,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이,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고 배척당하기도 하는등 외래 포교종교상태가 길었음. 고려시대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한국 국사 교육은 가르치고 있음. 이씨 조선당시의 한국에서는 갈수록 승려가 천민이었음. 결혼하지 않고 산속에 머물러야 되는 조계종 승려가 이에 해당됨. 이에 비해 막부시대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에 대항해 온 일본은 제도적으로 불교국가화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일본 신도도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종교인데,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는 무신론적 Monkey의 불교사상으로 한국 강점기에 기독교를 배척한 것으로 보아(일본이 유교 국가였다면 외래종교나 이교도로 배척하거나, 조선 조정처럼 조상도 몰라보는 금수로 유교적 배척을 해야 정상임), 창조주 범천을 부정하던 습성의 불교에 토대하니까 나약한 일본 마당쇠(성씨없는 일본 천황이라 한국개념으로 마당쇠.돌쇠임. 부처 Monkey행태를 보이면서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는 일본 부처 Monkey는 유명함)가 일본 천황이 되어 그렇게 하느님보다 높은게 일본 천황이라고 기독교를 탄압한 것 같음. 결혼하는 Monkey 승려가 일본 천황등 그 이하 일본 신도 추종 계급들이고, 또 다른 Monkey가 일본 불교임. 여하튼 일본 강점기에 일본이 다시 일본 신도(일본 신도는 일본 불교에 토대한 후발 국지적 신흥 종교의 하나임), 일본 불교, 극소수 일본 기독교를 강제로 포교하여, 2차대전 패전후에 종교 주권도 없는채로 현재까지 한국 유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없는 강제 포교종교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권없고 학벌없이 대중언론에서 성균관대에 대항하면서 살고 있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와 그 추종세력들(왜놈학교 후신들 포함)과 똑같이 한국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다만, 세계종교 유교로 수천년을 타 종교가 범접치 못하게 굳건하게 지켜오던 중국 유교가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종교 전부가 수난기를 겪었는데, 이 때문에,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필자는 세계사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중국 유교와 다른 공산국가 유교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중국은 서유럽인들이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 세계사에서 참 대단한 혜택을 본 나라입니다. 세계 4대 문명인 황하문명, 세계 종교 유교,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계승됨), 세계 4대 발명품(종이.화약.나침판.인쇄술). 여하튼 근세는 서유럽이 세계의 지배세력이었고 중국은 아편전쟁이후 절대적 군사력 열세로 반 식민지 상태였고, 인도는 분명한 영국 식민지로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사의 오래된 기득권들인 종교나 대학제도에 대한 역사는 변하지 않고 똑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종교로는 세계종교 유교.불교.기독교, 대학으로는 중국의 태학.국자감, 볼로냐.파리대학. 그래서 필자는 세계사 뿐 아니라, 여러 과목의 학술적 이론을 제공해온 서유럽 학자들의 학설은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부처는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브라만교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임은 맞습니다.
* 오래전 필자가 발췌한 역사교사의 중등역사 블로그 내용.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
1. 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1) 춘추 전국 시대
① 시기 : 주의 동천부터 진에 의한 중국 통일까지의 시대
(기원전 770 ~ 기원전 221 )
② 정치 : 주 왕실의 약화 → 봉건제 붕괴 → 제후들의 독립과 세력 다툼
(춘추 5패, 전국 7웅)
③ 사회 ․ 경제 : 철기의 보급
* 철제 농기구 사용 → 농업 생산력 증가 → 상공업 발전 → 시장, 화폐, 도시
* 철제 무기 사용 → 전투력 향상 → 정복 전쟁 활발
④ 제자백가의 출현
* 부국강병을 위해 각국이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 다양한 사상 출현
* 유가 : 공자, 맹자 → 인, 예 강조, 도덕 정치
* 도가 : 노자, 장자 → 무위자연
* 법가 : 한비자, 상앙 →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 진의 통일에 기여
2)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
① 시황제의 통일 정책
* 정치 : ‘황제’ 칭호 사용 →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 (중앙집권 통치)
군현제 실시 → 지방관 파견
* 사상 : 법가 사상 채택, 분서갱유 (사상 탄압, 유가 사상가 생매장)
* 사회 ․ 경제 :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 만리장성 축조 : 흉노 침입 대비
② 멸망 : 지나친 토목 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와 가혹한 통치
→ 진승 ․ 오광의 난으로 멸망 (기원전 206)
3) 한(漢)의 발전과 유교 사회의 형성
① 한의 유방(한 고조)이 항우를 물리치고 수립, 장안에 도읍 (기원전202)
② 한의 성장과 발전
* 고조의 정치
- 군국제 실시 : 중앙은 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로 다스림
* 무제의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군현제의 전국적 실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
- 영토 확장 : 베트남, 흉노, 고조선 정복
- 국가 재정 강화 : 소금, 철 전매제도
- 비단길 개척 : 흉노 격퇴를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함, 대월지와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비단길(실크로드)이 개척됨
③ 신(新) (8~23) : 한 무제 이후 외척인 왕망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건국
④ 후한 (25~220)
* 건국 : 왕망에게 빼앗겼던 한을 광무제(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킴
* 쇠퇴 : 환관과 외척의 횡포 극심 → 농민 생활의 어려움
→ 황건적의 난 + 지방 호족들의 자립 → 위 ․ 촉 ․ 오 삼국으로 분열
⑤ 한의 경제 :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질 좋은 비단, 칠기, 옥제품 생산)
⑥ 한의 사회와 문화
* 사회 : 호족 중심 사회 → 향촌 질서 유지, 교육 담당, 대토지 소유, 관리로 진출
* 문화 : 중국 전통 문화의 기틀 마련
- 한자 정리 :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됨
- 역사학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반고의 ‘한서’
- 지동의 발명 : 후한 때 장형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지진 관측 기구
- 종이 발명 : 후한 때 채륜이 제지법 개량 → 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불교 전래 : 후한 대에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됨
⑦ 유교의 발전과 확산
* 유교의 국교화 : 한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음
- 유학 교육 장려 : 수도에 태학 설치, 지방에 오경박사 파견 → 인재 양성
- 유학의 생활화 : 학문의 중심, 관리 선발과 일상생활의 기준이 됨
- 유학의 주요 경전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 훈고학의 발전 : 유교 경전의 정리와 해석을 중시함
* 유교의 확산 :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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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이나 중국등지의 유교와 전통명절을 되돌아보고,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