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少壯) 문학인들 동정. 문학평론가 허희 사회로 젊은 소설가들과 시인들을 만나봄.
@ 한국문학 기대주들 모인 예스24 여름문학학교, 소설가와 시인으로부터 듣는 문학 이야기
2017.08.25, 뉴스페이퍼 김상훈 기자 보도뉴스
한국문학 기대주들 모인 예스24 여름문학학교, 소설가와 시인으로부터 듣는 문학 이야기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한국문학의 기대를 흠뿍 받고 있는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금희, 임현, 손보미 소설가와 박준, 김민정 시인이 독자들을 찾아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 서점 예스24는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 참여한 독자 300명을 초청하여 예스24 여름문학학교를 개최했다. 예스24는 지난 7월 10일부터 8월 15일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를 진행했으며 27만 명 이상의 독자가 참여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예스24는 투표 후보였던 작가들을 포함 6명의 소설가, 시인이 참여하는 여름문학학교를 개최했으며 1, 2강을 마치고 3강 개최를 앞두고 있다.
8월 22일 진행된 1강에서는 허희 평론가가 사회를 맡아 김금희, 임현, 손보미 소설가와 함께 “지금,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주제로 강의가 이뤄졌으며, 24일 진행된 2강에서는 박준 시인과 김민정 시인이 참여하여 “시인의 삶, 삶 속의 시”라는 주제로 두 시인의 삶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05
@ 성균관대에서 국문학과 사학을 공부한 문학평론가 허희에 대한 소개
민음사 출판 그룹
제6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 수상 소감 – 허희
날짜: 2012.4.4
허희│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 —김경주론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문과 및 사학과를 졸업했다.
문학을 짝사랑해 왔다. 물론 문학이 나를 괴롭게 할 때는 미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문학에 대한 애증으로 평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학을 향한 나의 마음을 공식적으로 밝히려고 하니, 후련하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여하튼 힘겨운 고백을 한 만큼, 잘 해내고 싶다. 나는 내가 가진 전부를 걸고, 문학과 관계 맺고 있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낼 작정이다.
당선에 부쳐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이 많다. 우선 나의 가능성을 믿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가능성의 여부에 상관없이 항상 나를 응원해 준 우리 가족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늘 애정 어린 조언을 해 주시는 전상기 선생님, 매혹적인 글을 통해 나를 비평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황호덕 선생님, 그 외에도 많은 가르침을 주신 성대 국문과·사학과 선생님들께 깊이 머리를 숙인다.
나에게 신승건 형·박형진·강호선은 끊임없이 문학적인 자극을, 솔메이트 한효주는 무한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이들이 있어 나는 풍진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김경주 시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의 작품을 비평하는 작업은 ‘즐거운 고통’이었다. 비평이 창작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좋은 작품을 쓴 시인에게 평자로서 감사의 인사 정도는 건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내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할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제 ‘문학평론가’로서, 나도 힘껏 분발하겠다.
@ 최근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균관대 출신 문학평론가 허희씨(영화칼럼니스트 이기도 함)를 통해, 본인이 대학생이던 청춘시절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시를 쓰고 고치고 원고지를 버리고 하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전공공부(성균관대 경상대학 무역학과에서 무역학 전공에, 필요에 의해 법학등 여러가지 학문들을 몇 과목씩 공부해 봄. 그러나 성대는 반드시 유학을 배워야 하고, 기초교양으로 국어.영어.수학.윤리.역사등을 배워야 했음)가 달라 가지 못한 문학의 길이었지만, 성대 출신 후배를 통해 한국문학을 가끔 다시 접해보고 싶습니다. 필자의 증조할아버지는 일본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에서 향반의 벼슬을 하셨던 분이시고, 할아버지는 일본 강점기를 거치시고, 아버지는 일본 학교 교육을 받으시고 해방을 맞으신 세대고(글씨를 아주 반듯하게 잘 쓰시는 능력을 가지셨음), 형님들은 서당공부에 현대식 한국교육을 받으신분들인데, 향반출신에 선거관련 지출이 많으셔서 아버지는 조금 곤궁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양반가문 출신이십니다. 어릴때부터 파평윤가 양반 소리를 학교 선생님들과 , 마을 어른들, 주변의 친인척들을 통해 수시로 듣고 자랐습니다. 전형적인 조선.대한제국의 파평윤씨 양반.유교가문입니다. 그러나 청산하지 못한 일본강점기 잔재는 필자의 대학졸업시절에, 대중언론의 일본강점기 잔재학교 출신들의 창궐처럼, 법적으로는 남남인 유모(한국은 왕족과 양반들이 일부다처제로 살아온 관습. 최근에는 이런 관습이 없어지는 것 같음)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 뇌염같은 전염병처럼 필자의 주변을 간접공략하는 시도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해방후 일본 신사는 전부 불태워 버렸으니까, 유모가 알고 지내던 부녀자들(그 자녀들이 일본 강점기 잔재 서울대 출신들임)을 통해 절에도 다니기 시작하고, 일본 불교를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조계종 산중 불교는 한국 불교, 결혼하거나 시중에 나온 불교는 일본 불교). 일본 신도나 일본 불교는 한국에 주권이 없습니다(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다른 왜놈 학교들처럼).
필자의 가문은 향반 출신이라 일본과 일본강점기 잔재의 공략(신문등 대중언론, 전파기술, 멘트, 뇌파 기술등 고급기술)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만, 청산하지 못한 일본 강점기 잔재[일본은 유교국가 아님.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시켜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국가화 되었고, 이 불교적 토대에서 하급무사들이 옹립하여 부처의 깨달음 같은 성씨없는(한국식 돌쇠?. 여하튼 일본은 유교국가 한국과 너무 다른데, 이질적 불교나 불교적 신도, 성씨없는 일본 천황의 문화를 널리 퍼뜨림)일본 천황이 옹립되었으며, 일본의 종교는 불교적 일본 신도, 일본 불교, 소수로 기독교 극소수인데, 일본 강점기에 한국에 이 일본 종교들을 강제로 포교시켜서 한국인들은 모두 전염병에 걸린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들은, 항복후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는채로, 미군정기에 강력한 힘(일본총독부에 근무하던 관료들을 재등용. 어렵게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들의 행정을 바라만 보아야 했었음)을 얻게되어, 주권이 없는 일본 잔재 학교들의 영향력이나 일본 강점기 잔재 종교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미군정이 일본 총독부 기구나 인원을 그대로 이양받은 증거
사실상 미군은 서울에 진주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확실한 정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는 총독통치를 그대로 두려고 생각하기까지 했으며, 총독부의 행정기구와 그 조선인 관리를 그대로 인계받아 운영했다. 진주 다음날인 9월 9일, 진주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는 항복조인식을 가졌고, 이로부터 3년간에 걸친 미 군정이 시작되었다.
.출처:미군진주[美軍進駐]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미군정은 14일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미군장교를 각 국장에 임명하고,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명칭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다.
. 출처:미군정[美軍政] (두산백과)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기 통치조직보다 더 중앙집권화 되고, 효율적인 조직을 추구했고, 미군정 기구 개편은 그러한 의도를 반영했다. 경찰은 이른 시기에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중앙집중화 되고, 확대되었다. 각급 행정기구는 중앙의 군정청으로부터 도(도지사)-군(군수)-읍·(읍장, 면장)-리·동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었으며, 점령 당국인 미군정의 요구를 지방에 그대로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점령 초기 한국인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각종 자치기구들이 미군정에 의해 부정된 이후 밑으로부터 한국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구는 없었다. 이들 행정기구를 움직이는 관료의 충원은 ‘훈련되고 경험 있는 관리들의 재임명’이 일반원칙이었고, 따라서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 또는 우파 보수세력 중심으로 충원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에 미국인한국인 양국장제도를 시행했고, 1946년 3월부터 군정의 한인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이는 점령당국이 충원한 구식민지관료 및 우익세력에게 행정실권을 부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7년 6월 과도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일종의 간접통치를 실시하게 된다. 과도정부 수립은 남한만의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가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전히 미군정 예하의 한인 행정조직에 불과했고, 최종적 권한의 이관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사령부 및 군정장관, 그리고 각 부서에 배치된 미국인 고문들이 중요 인사 임면, 법령 포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과 최종 결재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미군정기 내내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이 최고 실권을 행사했다. 과도정부 설치 후에도 미군정은 재정, 귀속재산 관리, 원조물자 배분 등 점령통치의 물적 기반에 대한 부분은 행정권 이양에서 제외하여 최후까지 직접 관리하였으며, 치안분야에 대한 통제권도 계속 장악했다.
.출처:미군정청[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 美軍政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의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법령, 관료제,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하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경찰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수립을 앞두고 새로 제정된 헌법도 그 부칙에서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지닌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현재 재직하고 있는 공무원은 헌법에 의해 선거 또는 임명된 자가 그 직무를 계승할 때까지 계속 직무를 수행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일제시기의 법령, 행정기구, 관료, 부속기관의 직원 대부분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남한은 일제시기와 단절적인 ‘혁명’이 아니라 연속적인 ‘개량’을 통해 사회를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
. 출처:해방과 분단국가 수립, 그리고 일제의 유산(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2014. 3. 3., 역사비평사)
인적 유산의 계승과 처벌
한 세대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는 사람, 제도, 물자, 습관, 의식 등에서 남북한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새로 수립된 남북한 정부는 ‘나라 만들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제가 도입하고 생성한 여러 부문의 유산을 곧바로 쉽게 청산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유산 중에서 인적 유산, 곧 관리·군인·경찰 등은 처리하기가 곤란한 문제였다. 사람은 목숨을 끊지 않는 한 다음 시대로 연결되고, 그가 체득한 지식, 기술, 의식, 경험 또한 다음 사회에 전수되기 마련이다. 새로 나라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는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의 노하우조차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민족반역자로 지탄받는 이들을 그대로 임용하는 것은 나라의 정통성에 큰 흠이 되었다.
일제 말기에 고위관료 중 한국인이 차지했던 비중은 칙임관 25%, 주임관 20%, 판임관 34% 정도였다. 일제는 한국을 직접 지배했기 때문에 전체 관료의 3분의 2를 일본인으로 채웠다. 그 비중은 고위층일수록 높았고 하위층일수록 낮았다. 한국인 중에서 친일파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대개 고위관료들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는 일제 유산의 청산운동이 전개되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금지되고, 한글본 교재가 보급되었다. 인명과 지명이 한국식으로 환원되거나 새로 제정되었다. 예를 들면 서울의 메이지초는 명동으로, 고가네마치는 을지로로, 다케조에초(竹添町)는 충정로로 변경되었다. 인적 청산, 곧 친일파에 대한 정리도 추진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조한 반민족행위자가 주요대상이었다.
북한에서는 경찰 등의 친일파를 현직에서 추방시켰다. 여기에는 반일 정부를 수립하라는 소련의 지시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생산에 종사하는 기술자나 실무에 능숙한 관리 등은 그대로 활용했다. 북한 지역은 중화학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남한보다 기술자가 많았다. 반면 남한은 관공서에 근무하는 관리가 더 많았다.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5,675명을 억류하여 공장 등을 운영하고 기술을 전수하도록 했다. 일제하에서는 민족차별 정책으로 한국인 기술자가 복잡한 기계나 장비를 운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일본인 기술자가 북한에서 대부분 철수한 것은 1947년 7월경이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말까지 대부분의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남한의 미군정은 한국인 관료의 기능과 능률을 중시했다. 우익 진영도 국가건설을 우선해야 한다는 뜻에서 친일파를 현직에 활용한 경우가 많았다. 1948년 9월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등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좌익과 싸우며 나라의 기틀을 잡기에 급급했던 이승만 정부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친일파 처벌을 방해했다. 그리하여 1960년 1월 현재 이승만 정부의 경제관료 중 60.2%가 일제시기의 관료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빠른 속도로 교체되어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1965년 무렵에는 16.8%만 존속했다. 해방 이후 세대가 고위관료층에 속속 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국 초기에 두드러진 친일파조차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던 부작용은 오랫동안 남한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2004.) 친일파를 다시 조사·규명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설립법을 제정해(2005.)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럼에도 친일파 처리 문제는 오늘날까지 국민 사이에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출처:해방과 분단국가 수립, 그리고 일제의 유산(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2014. 3. 3., 역사비평사)
@여하튼, 필자는 국사와 세계사로 대처해왔습니다. 그리고 상위법인 포츠담선언으로, 패전국 일본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왜놈학교 잔재를 청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문등도 같이 활용해야 함). 그리고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무효(따라서 한일병합도 무효), 국제법학계의 을사조약 무효, UN등 국제기구의 을사조약 무효를 영구적용하며 활용해야만, 패전국 일본잔재들을 한국 영토에서 축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주장해 왔습니다.
유모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식 불교 전염병에 노출된 측면은 어쩔 수 없지만, 미군정때 전국민에게 조선성명 복구령을 내려,행정법상 다시 유교국가로 복구된 나라가 한국입니다.
필자의 출신 대학이 유교대학 성균관대기 때문,세계사(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한나라 태학.국자감 가르침, 중국의 세계 4대 발명품을 가르침. 그리고 에게문명, 로마제국.로마교황청, 볼로냐.파리대학등을 수록)와 한국사를 결합하여 교황윤허 서강대를 필요로 하여 궁(宮)성균관대(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 승계하여 6백년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음)와 어(御. 교황윤허 대학이라 서강대가 원하는 칭호를 필자가 인정해 옴)서강대만 Royal대로 하여 한국과 세계에 10년 넘게 알려오고 있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에 어떻게 대처하는것이 승전국과 해방국의 권익을 지키는 방법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해방때 성균관과 별도로,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도 있었음. 漢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http://blog.daum.net/macmaca/2313
2.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 44조 제2항 및 제 71조 제 3호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3. 1983년 사설 기업인 한국 갤럽의 종교인구 표본조사(1,946명)이후, 전염병으로 번진 패전국에 전범국가 일본 강점기 포교종교(일본 신도, 일본 불교, 개신교.가톨릭)식 종교관에 의한 통계조사 방법에 대하여!
http://blog.daum.net/macmaca/1952
4.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5.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동국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서울시립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한편 국제관습법상 세계사의 정설(定說)은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함.
http://blog.daum.net/macmaca/2375
6.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