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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8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인데,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날


2017년 8월 28일은 음력으로 7월 7일인데,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날입니다. 



1].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에는 견우()와 직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곡풍지십(谷風之什) 대동(大東)편에는 다음과 같은 시어(詩語)가 있습니다.


維天有漢 하늘엔 은하수가 구비구비

監亦有光 희미한 빛내며 흘러가며

跂彼織女 직녀 바라보며

終日七襄 종일토록 베틀에 일곱번 앉고 지네.

雖則七襄 일곱번 앉고 져도

不成報章 무늬 고운 비단 짜지지 않고

晥彼牽牛 반짝이는 견우조차

不以服箱 소레 끌지 않네.



. 출처: 四書五經 2, 孟子.詩經/責任監修 前 忠南大 大學院 敎授 柳正基/文學堂 刊.(株)東西 供給/1986년 7월 20일 발행 


. 필자 주 1). 谷風之什의 什에 대한 발음. 국내에서 什에 대한 발음은 주로 십.습.집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교학사 중한사전(박영종 저)에 의거 십으로 발음하여 표기하였습니다. 


. 필자 주 2). 위 번역본 본문의 不以服箱(소레 끌지 않네)중, 소레는 수레를 의미합니다. 책임감수하신 유정기 교수님이, 나이가 많으시고, 한학을 주로 배우시고, 한글교육을 받지 않으신 세대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수레를 소레로 표기하신 것 같습니다만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사항입니다. 필자는 헌책방에서 이책을 구입하였습니다. 그 당시 책임감수자인 유정기 교수는 대구사대 전임강사, 이화여대 조교수, 성균관대 전임강사, 대구대학 교수, 충남대학교 대학원 교수의 이력을 가진걸로 책에 나타납니다.


. 필자 주 3). 칠석날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고등학교(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고등학교인 전주 신흥고등학교)때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영어로는, July 7th in the lunar calendar, the sev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독일어로는,

7. Juli nach dem Mondkalender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는 칠석날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2]. 칠석날에 대한 여러가지 서술내용.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7일.

내용

칠석은 양수인 홀수 7이 겹치는 날이어서 길일로 여긴다. 이 날은 견우()와 직녀()가 까막까치들이 놓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유래담이 있는 날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설화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7월이 되면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이 맑고 푸르며 높다. 북두칠성은 한 쪽으로 몰아 떠있고 비단결 같은 은하수는 금방 쏟아질 것 같다. 그 동쪽에 직녀성이 수줍은듯 희미하게 비치고 서쪽에서는 견우성()이 휘황하게 빛을 발하는데 이는 마치 서로 마주보며 정겨워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두 별을 보게 되는데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별자리를 보고 ‘견우와 직녀’ 설화를 만들어냈음 직하다.

중국의 두목지()의 칠석시에 이러한 정서가 담겨 있다. “요계야색양여수 와착견우직녀성( )”, 즉 “옥 섬돌에 밤빛이 서늘하기 물 같은데 누워서 견우 직녀 두 별을 바라보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남녀간의 정담이 담긴 명절인 까닭에 옛날부터 남녀 상사()나 애정시와 설화도 칠석과 관련된 것이 상당히 있다.

주()나라 왕자 교()가 봉황곡()을 울리며 신선이 되어 도사() 부구공()의 부인과 만났다는 날이 바로 칠석이다. 서왕모(西)가 자운거()를 타고 전상(殿)에 내려와, 장수()를 원하는 한무제()에게 요지 선도()를 올린 날 역시 칠석이다.

또 이 날 양귀비()의 혼이 재생하여 장생전(殿)에서 오매(:깨어있는 때나 자는 때)에 그리워하던 당명황()을 만나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가 되고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일컫는 말)가 되자”고 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우리 나라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가약을 맺어주던 광한루()의 다리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다리와 이름이 같은 오작교였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가정에 따라서는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한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처녀들이 바느질을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라고 한다. 칠석날 밤이면 궁중이나 민가에서 부인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는 이른바 걸교제()를 지내는 일이 한()나라 시대에 이미 행해졌다.

이 풍속이 당()나라 시대에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의 걸교나 일본의 ‘다나바다마쯔리[붕기제=]’는 그 예들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이 날 왕후와 더불어 궁중에서 견우와 직녀성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관들에게 녹(祿:녹봉)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연희를 베풀고 선비들에게 명절 과거를 보게 하는 등 중요 명절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걸교제의 민속화는 실제로 찾기 어렵다. ≪≫에는 인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 쇄의상()이 옛 풍속이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직물이나 바느질은 실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직녀라는 별 이름 자체가 직물()이나 바느질과 관련된다는 관념에서 걸교가 더 중요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근래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점치는 풍속이 행해졌다. 처녀들이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솜씨를 좋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그 이튿날 나가 봐서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칠석날에는 칠석차례라 하여 햇벼가 익으면 사당에 천신하고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우물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 출처:칠석[七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 세시풍속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음력 7월 7일로 세시 명절의 하나. 헤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도 한다.

유래

칠석()의 유래는 중국의 『제해기()』에 처음 나타난다. 주()나라에서 한대()에 걸쳐 우리나라에 유입되기까지 윤색을 거듭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부지런한 목동인 견우가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견우가 부지런하고 착하여 손녀인 직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한 견우와 직녀는 너무 사이가 좋아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그러자 천계()의 현상이 혼란에 빠져 사람들은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이것을 본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니 이것이 오작교()이다.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 한다. 칠석 다음날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를 보면 모두 벗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칠석날에는 비가 내리는데 하루 전에 내리는 비는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내리는 비는 헤어지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또는 낮에 오는 비는 기쁨의 눈물이고 밤에 오는 비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독수리별자리[]의 알타이르(Altair)별과, 거문고별자리[]의 베가(V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별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 운행할 때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날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 무렵이면 천장 부근에서 보이게 되므로 마치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견우성과 직녀성이 일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천문 현상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나라에 이르러서 칠석 설화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풍속이 발전하였다.

내용

우리나라도 일찍이 삼국시대에 이 설화와 풍속이 있었던 듯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덕흥리 고분 벽화에 견우와 직녀 설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고려 공민왕이 왕후와 더불어 칠석날 궁궐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하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다고 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의 과거를 실시한 기록이 있다. 궁중 밖의 민간에서도 칠석의 풍속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모습은 『동국세시기()』 등의 문헌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칠석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풍속이 행해졌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옛날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견우직녀를 시제()로 시를 짓게 하였다. 또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폭의()와 폭서() 풍속이 있었다. 여름 장마철에 장롱속의 옷가지와 책장의 책에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끼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를 비는 걸교() 풍속이 있었는데, 걸교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풍속이다. 칠석날 새벽에 부녀자들이 참외, 오이 등의 과일을 상에 올려놓고 절을 하며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빈다. 저녁에 상 위로 거미줄이 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직녀가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 여기고 기뻐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위에 재를 담은 쟁반을 올려 놓은 뒤, 별에게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빌고 다음날 아침 재 위에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어 바느질을 잘하게 된다고 믿었다.
별과 조상과 자연과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풍속도 지역과 가정에 따라서 행해졌다. 지역에 따라서 칠석제, 용왕제, 밭제 같은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 천신()하며 밀국수, 밀전병, 호박도래전 등 시절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칠석음식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먹고 칠석놀이라 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가무로 밤이 깊도록 놀기도 한다.

지역사례

전북 고창과 태인, 경북 봉화·예천·안동에서는 외와 수박을 차려놓고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 전북 익산과 군산에서는 칠석날 시암제(샘제)를 지냈다. 마을에서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정결하게 한 다음 각 가정마다 시루떡을 쪄서 우물 옆에 두었다. 청년들은 솔불놀이라 하여 달집짓기와 비슷하게 이웃마을과 놀이를 벌여 즐기고 진 마을은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며, 이긴 편의 마을을 함부로 방문할 수도 없었다. 진안에서는 농현이라 하여 김매기를 끝내고 하루를 쉰다.
경북 안동에서는 부인들이 밤에 까마귀밥이라 하여 담 위에 올려놓고 자손의 명()과 복()을 빌고 집안일이 잘 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주에서는 칠성단에 참기름으로 불을 켜서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빌었다. 영일에서는 이날 바닷물을 약물이라며 멱을 감는다.

속신

강원도 양양에서는 으레 비가 오는 날로 되어 있어서 비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를 살펴 농사를 점쳤다. 만약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곡물에 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비가 내리면 견우직녀가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알고 농사에 좋을 것이라 여겼다.
한편 칠석에는 아침에 일찍 논에 나가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날 신이 들에 내려와서 들마다 곡식의 생산량을 정해 주기 때문에 논밭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근신한다. 사람이 바깥에 나와서 돌아다니면 신이 수확량을 감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기도 의왕, 전북 전주, 광주광역시 등 지역에 따라 칠석날은 ‘곡식을 마련하는 날’이라고 하여 남자들은 들에 나가도 되지만, 여자들은 일찍 나가지 않고 오후가 되어서야 들에 나간다. 경북 고령에서는 목동들이 잡귀를 막는다고 복숭아 회초리로 소의 꼬리를 치며 몰고 온다.


.출처:칠석[七夕]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3.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칠석[ ]


음력 7월 7일에 행하여지는 연중행사.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 퍼졌다. 7월 7일을 특별한 제일로 하는 관념은 농경의례에 기원을 두는데, 문헌자료에 남아있는 것으로서는 후한시대의 『사민월령』이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거기에서는 이날에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것 외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화합하는 것에 맞추어서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견우ㆍ직녀). 햇볕에 말리는 것은 의복도 함께 행하여지는데, 의복에 조령이 붙는다는 옛날의 신앙과 함께 7월 7일이 원래 농경의례와 결부된 조령제의 날이었다는 것이 추정된다. 칠석에 점이나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은 것도 원래 농작물의 수확을 점쳤던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한시대의 화상석이나 석조에 보이는 견우ㆍ직녀가 양자 한 쌍으로 우주론적 배치관계를 가지는 것에서 이 시대에도 칠석에 대한 전설이 신앙관념을 배후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북조시대가 되면서 오래된 신앙적 요소는 불식되어서 연중행사의 하나로서 초가을의 행락의 날이 되었다. 남조양의 『형초세시기』는 7월 7일 밤, 견우와 직녀가 회합하는데, 그때 여성들은 7개의 바늘에 실을 꿰어 바쳐서,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견우와 직녀는 부부였는데, 천제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1년에 한 번, 칠석에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후한경부터 서서히 발전하고 있으며, 남북조 중기경에는 직녀가 까치가 하늘에 만든 다리를 건너서 견우를 찾아온다는 줄거리가 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느질 솜씨를 기원하는 풍습을 걸교전()이라고 하며, 근데 도시의 번성기나 궁중의 세시기에 보이듯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성들의 제일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또한 7월 7일은 북두칠성의 제1성인 괴성()의 탄생일이라고 하며, 괴성이 문운(), 특히 과거 시험에서의 운ㆍ불운을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근세의 독서인들은 칠석에 괴성을 제사지냈다.

한국

조선에도 7월 7일에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전설에 의거해서 중국의 걸교전과 마찬가지로 그날 밤 부녀자는 재봉의 능숙을 두 별에 기원한다. 또한 서적이나 의복을 햇볕에 말리기도 하며 한편 농가에서는 이날에는 두 별의 이별의 눈물이 내리기 때문에 이로써 몸을 정결히 하고 머리를 감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서 목욕하거나, 천곡귀신이 내려와서 곡물의 수확량을 정하는 날이라고 하여서 휴업한다. 이처럼 중국풍의 성제() 외에 원래 이 시기에 우리나라 고유의 농경예축의례가 행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 출처: 칠석[七夕]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3-1.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七夕)관련 설명중 나타나는 중국의 걸교전. 


걸교전

[ ]

요약 중국에서,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5색 실을 견우·직녀 두 별에게 바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풍속.

걸()은 빈다는 뜻이고, 교()는 길쌈과 바느질 잘하는 솜씨이며, 전()은 물건을 바쳐 제사지낸다는 의미이다. 당()나라 때 장식을 베푼 망루를 세우고, 이를 걸교루()라 했는데 한국에서는 걸교라고 하였다.


. 출처: 걸교전[乞巧奠] (두산백과)



3]. 직녀와 관련된 여러가지 자료들.


1. 직녀[, zhī nǚ ]

.요약
중국 신화, 고사 속 인물
 

1. 고사의 여주인공

중국 신화에서 천제의 딸, 혹은 손녀, 외손녀라고 전해오는 그녀는 직녀성의 여신으로, 별명은 칠성낭랑(), 칠성낭(), 칠서마(), 칠선고(), 천선낭랑()이다. 견우직녀 고사의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직물과 비단을 짰는데, 하서(西, 황하 서쪽을 지칭)의 우랑(, 견우)에게 시집가 직물 짜는 것을 중단했다. 천제가 크게 노하여 이들을 헤어지게 하고는 매년 칠월 칠석에만 만나게 했다. 사람들이 이 날을 명절로 삼았다고 한다.

2. 고문헌의 내용

직녀는 고문헌에 자주 출현하는데, 『시경』 제9편 「소아대동()」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천유한(): 하늘에 있는 은하수
감역유광(): 살펴보니 또 빛이 난다
기피직녀(): 베틀의 저 베 짜는 여자
종일칠양(): 종일토록 일곱 자리 옮기어 앉아 있네

이 밖에 『사기』, 『한서』 등의 역사서에 천제의 외손녀로 소개되어 있다. 또 『회남자』 「숙진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만약 진인(, 도인)이 된다면, 지허()의 경지에서 느긋하게 행동하고, 멸망되어 아무것도 없는 들에서 소요(,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하며······ 우뢰를 신하로 삼고, 과보를 관리로 삼아 부리며, 복희의 딸을 첩으로 두고 직녀를 아내로 둔다!”

당나라 때의 『세화기려()』 권 3에는 『풍속통의』의 글을 인용하여 “직녀는 칠월칠석에 은하수를 건널 수 있는데, 까치를 부려서 다리를 놓는다.”라고 전해진다.

후일 직녀는 애인과 부녀, 아동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출처:직녀[織女, zhī nǚ]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 우랑직녀[ ]

백사전전설(), 맹강녀전설(), 양축전설()과 더불어 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직녀()로 불리며 7월 칠석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난양(, 남양)의 성 서쪽의 우가() 마을에 우랑()이라는 고아가 형과 형수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 형수는 그를 못 마땅이 여겨 그에게 아홉 마리의 소를 내어주고는 10마리의 소를 데려오지 않으면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며 그를 내쫓았다. 우랑은 집을 떠나 낙담해 하던 중 한 도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푸뉴산(, 복우산)에 올라 한 마리의 병든 누렁소를 발견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소를 돌보아 주었고 마침내 이 늙은 소가 원래 천상의 금우성()으로 벌을 받아 인간세계로 내쳐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이 늙은 소의 지시에 따라 우랑()은 선녀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목욕하며 놀던 장소로 가서 몰래 그중 하나의 옷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직녀()의 옷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으나 이는 하늘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어서 직녀는 하늘나라로 불려가게 되었다. 늙은 소는 우랑()에게 그가 죽고 난 후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언덕에 올라가면 구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마침내 우랑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바로 직녀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서왕모(西)가 은비녀를 은하수로 변하게 하여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까마귀가 이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오작교를 만들어 마침내 우랑과 직녀가 다시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서왕모도 이 모습에 감동하여 매년 음력 7월 7일 오작교에서 이들 두 사람의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매년 칠석()에 우랑()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직녀와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서적의 기록에는 민간에서는 직녀가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다재다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7월 7일 저녁에 직녀성을 향해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면 어리석음이 없어지고 눈치가 빨라지며 손재주가 좋아질 수 있다고 전해져 이날은 여자들이 마당에 모여 새 옷을 입고 우랑성()과 직녀성()을 바라보며 절을 하며 상을 펼쳐 과일과 건과 등을 차려놓고 바늘에 실을 꿰며 색실을 잇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나온 것은 시경()의 소아() 다퉁()으로 여기에서는 우랑은 견우()로 칭해지고 있으며 당시의 우랑과 직녀는 하늘나라의 별을 지칭하고 사랑에 관한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서한(西) 시기 우랑직녀는 두 사람의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우랑직녀 설화의 발원지에 대해서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곳은 허난성 난양시(, 남양시)로 여겨지며 더불어 시안시 창안구(, 장안구)에서 출토된 우랑직녀상()을 근거로 산시성(西, 섬서성) 시안시(西)라는 설, 최근 우랑직녀의 이야기가 염황대전() 이후 염()씨의 부락이 남쪽으로 천도하며 발생한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출처: 우랑직녀 [牛郎织女]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도서출판 황매희)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과 세계의 유교에 대해 되돌아보고, 더 잘 이해하고,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