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패전국인 일본은 국지적인 일본 신도.불교믿는 Economic Animal일뿐,세계사의 전통기득권인 중국등 동아시아 유교문화권과는 다른 형태의 나라임.

 패전국인 일본은 국지적인 일본 신도.불교믿는 Economic Animal일뿐, 세계사의 전통기득권인 중국등 동아시아 유교문화권과는 다른 형태의 나라임.


I. 2차대전 이후의 경제 선진국중에 섞인 일본은 중국.한국등 유교권의 동아시아국가들(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 전통 유교국 및 신생국가인 대만이나 중국화교들의 싱가포르)과 맞지 않는 특이한 문화를 형성시켜왔는데, 패전국이 아니었다면, 대일본제국이니 뭐니 하는 강제.침략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지금도 아시아를 호령하고 있을 나라임.  


그리고 승전국이 되었다면,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스.영국의 해외식민지도 차지하여 서유럽 및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영토도 지배하고 있을것. 그런데 2차대전을 겪어보니 신대륙의 인구많은 대국이자 공업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것. 미국은 영국.중국과 연합국이 되어, 마음껏 그 군사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 독일의 히틀러는 승승장구하다가(일본도 2차대전 초기 아시아에서 승승장구 했었음), 구소련 본토의 침공에 실패한 이후 그 기세가 꺾여, 결국 연합국에 지게 된것.


일본은 조금 일찍 항복한 이탈리아.독일에 비해 아시아에서, 늦게까지 항전하다가, 히로미사.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가 있고 나서야, 반대의견도 만만치않은 상태에서 항복하게 된것.


여하튼 일본은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을 받아들여 항복하고 여러나라에 항복문서 서명까지 하였음. 일본주권은 한국영토에 없게 되고,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 을사조약이후에 전문학교 정도로 성장한 동국대의 전신 학교, 일본 관립 전문학교수준의 대학들(서울시립대, 부산대.경북대.전남대등), 일본강점기 잔재들인 각종 관립 중.고등학교들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영토에 없게된것.


패전국 잔재들이 미군정시대와 대한민국 출범후에, 주권이나 학벌없이 추첨이나 행정조정으로 정한것으로 여겨지는 전기시험(이전 사람들은 그래서 한국계 학교들이 선택한 후기가 더 좋다고 해 옴)가지고, 서울대가 국립대가 되고 전기시험이니까 전기시험보는 학교들이 더 좋다고 한국영토에 주권이나 학벌없이 성균관대(성균관의 정통 승계)에 덤벼온 것.         



승전국들에 항복하여 한국영토에 주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잔재 학교들(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인 연세대나 고려대등)이 한국영토에 남은 패전국 게릴라처럼 대중언론의 여러가지 경로로, 한국영토에 남아서 주권없고 학벌없이 국사 성균관의 정통승계 대학인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에 대항하며, 덤비는것일뿐 승전국에 항복한 역사는 변경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등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자격도 결코 변경시킬수 없습니다.      


. 일본이나 독일.이태리등 항복한 패전국들을 너무 방치하면 경제력등을 앞세워, 중국.러시아처럼 1인당 GDP가 서유럽.미국.일본등에 비해 높지 않은 승전국.군사강대국.인구많은 대국들도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수 있음.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처럼 정부의 틀이 실질적으로 강력하게 작동되지 않던 정부의 경우,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포고(이후 프랑스.구소련.폴란드에 승인받음)하여, 승전국으로 분명하게 인정되지 않던 미군정시대에, 일본.독일.이탈리아등에 선전포고한 사실때문에, 미군정이 복귀시킨 조선총독부 근무자(한국인들)들과 이의 동조자들의 영향력이 작동되어, 총독부에 근무한 사실때문에 나중에 보복당할까 두려워하여, 대중언론인 친일파 방응모의 조선일보, 친일파 김성수의 동아일보 및 한국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던 경향신문등으로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가 미군정당시의 국립대가 되었다고, 패전국에 항복서명국가인 일본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맨 앞에 놓고, 남북유림들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여하여 성균관 복구형태로 설립한 성균관대에 줄기차게 도전하는 현상도 겪을 수 있습니다.    


. 경향신문은 미군정시대에 한국가톨릭재단에서 발간하여, 대한민국 출범후, 자유당정권의 독재를 강력하게 비판하다가, 폐간도 당하고, 다시 속간도 되고, 1962년에는 경영권이 가톨릭재단에서 다른 일반인에게 넘어갔습니다.


두산백과에서 밝히는 내용입니다.     


1946년 10월 6일 천주교 서울교구가 운영주가 되어 창간되었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74번지에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초대 사장은 양기섭() 신부이다.

처음부터 보수적 성격을 논조를 지녔으며, 자유당의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야당성과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하였고, 특히 가톨릭 교도인 장면() 부통령의 피격사건 후로는 논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야당성 논조로 독자가 크게 늘어, 당시 발행부수 20만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 자유당 정권은 1959년 4월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 《경향신문》을 폐간시킴으로써 국내외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불복한 경향신문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으나, 정부는 폐간처분을 취소하고 무기 발행정지처분으로 바꾸어 발행을 금지하였다. 그 뒤 4.19 이후 1960년 4월 27일자(4327호)부터 속간하였다.

1962년 2월 경영권이 가톨릭 재단에서 이준구()에게로 넘어가 가톨릭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독립지가 되었다. 1964년 6·3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사장 이준구 등이 구속된 바 있었고, 1965년 8월 이사장 등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1966년 4월 기아산업계()가 신문을 인수하였고, 1969년 4월 신진자동차계()로 넘어가는 등 경영자가 자주 바뀌고 경영난을 겪다가, 1974년 7월 24일 한국 문화방송주식회사(MBC)와 통합하기에 이르러 같은 해 11월 1일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개편하여 매스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재출발하였다.


. 출처: 경향신문 [The 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 (두산백과)


 

필자가 볼 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 취임이전에 미군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세력은 일본총독부에 근무하다가 미군정이 다시 불러들인 일본 총독부 근무자들, 친일파 방응모의 조선일보, 친일파 김성수의 동아일보, 신문을 발행하던 한국 가톨릭재단의 경향신문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이 세 신문이 형성한 미군정당시의 대중언론 의견들이 나중에 여러 대중언론과 사설 입시학원 지침, 학원등에 영향력을 끼쳐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대한민국 출범후에 독립운동가 출신의 이승만 대통령(미군정당시 성균관대 설립에, 그 당시 한국 전통신분이 가장 높던 남북유림들이 결의대회를 하였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성균관대 설립의 유림대회에 김구선생과 함께 고문자격으로 참여), 독립운동가 출신의 이시영 부통령, 독립운동가 출신의 신익희 국회의장(국민대 설립에 관여)등이 대한민국의 중요 직책을 차지하였지만, 미군정당시 법률을 만들던 한국인 출신 미군정 당국자들이 만든 서울대 국립대화의 거센 도전을 제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패전국 일본잔재 경성제대를 서울대로 만들고, 다시 국립대로 하는 조치는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학벌없는 서울대에 엄청난 지원을 하게 만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기도 합니다.   


바티칸시티는 전쟁참가국이 아니고, 교황성하제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고, 패전국이 아닌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이 여러나라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로마가톨릭을 오랜동안 포교하여 놓았기 때문에(영국은 성공회 국가지만, 로마 가톨릭을 믿던 역사적 사실이 있어서 로마가톨릭을 부정해 올 수 없던 국가임), 이 역사적 자격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는 한국영토에서 강행법적 자격을 가진 법규의 효력은 없고, 강행법적 자격없이 국제관습법 정도의 학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세계사를 국가기관이자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에서 발행하는 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법적 정설(성균관의 정통을 해방후의 성균관대가 승계)과 연관시켜 세계에 알려왔습니다. 국사나 세계사 교육이 지속되는한 이 방침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령으로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법적 정설을 변경시키기도 어려워 앞으로도 이 법적자격은 이어질 것입니다.      


. 필자는 국사나 세계사 및 여러가지 교과서를 중심으로 하여왔는데, 세계사에서는 중국.황하문명, 유교, 세계 4대 발명품등으로 수천년 역사를 존중받는 중국 및 동아시아 유교가 학문적으로 상당히 만족할만한 과정을 보여서 세계사에 많이 나오는 서유럽학자들의 학설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대중언론 중심이 아니고 교과서(한국사.세계사의 대학역사,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대한제국의 역사, 윤리등의 삼강오륜 교육이나 인의예지신 교육, 유교의 충효교육)나 백과사전, 학술서 중심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앞으로도 이 기본틀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II. 이코노믹애니멀[economic animal]


요약


경제적 동물이라는 뜻.


경제적 실리에 관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여 국제사회에서 일본 및 일본인을 비판하여 부를 때 사용한 말이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일방적인 수출공세에 대한 불만에서 생겨난 말이다.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만은 대개 ① 무역.자본의 자유화를 촉진하지 않고 자국의 경제성장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고 있으며, ② 국제무대에서도 방위·군사 등의 부담을 외면해 버리고 오로지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즉 받기만 하고 갚을 줄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 출처: 이코노믹애니멀[economic animal] (두산백과)



III. 패전국 일본에 대해 2차대전의 승전국.해방국으로서 권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사실을 근거로, 권리행사를 하는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1]. 패전국인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국제법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헌법재판소(또는 최고 재판소), 국가원수(또는 행정수반), 또는 미국이나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캐나다, 뉴질랜드의 최고재판소나 국가원수(또는 행정수반) 혼자서 이를 위반하거나 어길수 없는 특징이 국제법의 조약형식인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에는 있습니다. 포츠담선언의 수락, 그 성실한 이행, 연합국포로와 억류민의 해방 및 보호.수송등 휴전에 따른 군사조치등은 한국(을사조약이 무효라 그 당시부터 주권이 유지되었지만, 을사조약이후 일본에 무력으로 불법강점당한 현실을 놓고 볼때는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때문에, 일본의 무시무시한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국이 된 측면도 있음) 및 다른 승전국.해방국의 전후 위상확보유지에 중요한 단서가 됨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일본의 항복문서에 대한 설명입니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대전중에 항복한 일본이 도쿄만의 미즈리호에서 조인한 문서. 연합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일본은 무조건 서명하였다. 연합국 최고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ㆍArthur, 1880~1964) 외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의 9개국의 대표가 서명하였다. 내용은 8절로 나뉘어져 있으며 포츠담선언의 수락, 그 성실한 이행 외에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일체의 적대행위의 정지, 행정관사 및 군 직원의 명령 준수의무와 이직제한, 연합국포로와 억류민의 해방 및 보호ㆍ수송 등 휴전에 따른 군사조치, 일본의 관리 기본방식(간접의 통일적 관리)을 규정한다.

 

출처:항복문서[Instrument of Surrender by Japan] (21세기 정치학 대사전, 한국사전 연구사).

. 필자 주 1).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당시, 을사조약 무효이론으로 보면 그 당시 한국의 주권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국인은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나,그 당시 확정된 국제법에 의해 보호받는 상태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기 때문(만일 국제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사후적으로 공식 확정한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싸운 연합국이 됨. 그러나 아직까지 국제법상 그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확정된 근거가 없다는 아쉬움이 있는 상태임. 어렵고 힘들겠지만 한국 정부가 이 분야로 노력해 주기 바람), 위안부나 강제 징집자.강제동원 근로자등은 일본에 의해 억류된 사람들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애석하게도 對日本 승전국(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자격을 획득한 나라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에 참여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국가명단이 있기 때문, 한국이 그 당시 승전국이거나 연합국으로 사후 인정받기는 힘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사례나 임시정부의 對日.對獨 선전포고, 카이로 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의 임시정부 승인등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에 의해 "을사조약무효"라는 국제법적 판단이후, 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왔으므로, "을사조약 무효"라는 국제법적 근거로 對日투쟁을 해온 주권국가의 지위정도는 반드시 확보하여야 하겠습니다.    

 

. 필자 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對日.對獨 선전포고 사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출처: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 필자 주 3). 카이로 회담이후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외국 정부는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두산백과)

.필자 주 4). 카이로 회담이후 임시정부 승인국가중 현재의 강대국은 UN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이 된 프랑스와 소련(러시아로 이어짐)입니다. 중국은 한국 임시정부에 영향받아, 장개석 총통이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반영해 준 국가고, 임시정부 근거지가 중국에 있었고, 중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도록 인정해준 나라로 여러가지 지원을 해 준 나라기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준 나라라고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매헌기념관 관장인 윤주씨의 글(재외동포신문 2013.08.07, 오피니언 기고)에서는 장개석 총통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예우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이 교과서, 백과사전,학술서적에 공식적으로 등재되도록 많은 노력을 한국 정부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점은 어디까지나 임시자가 붙은 "임시정부"이기때문, 임시정부 이상으로 그 성격이 확대되기 힘든점도 있다는 것입니다(상징성을 가짐).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고종 당시부터 국제법의 학설이 뒷받침되었고, 나중에 UN국제법위원회에서 "을사조약은 무효"라고 다시 확인하였기때문, UN회원국인 일본은 UN을 탈퇴하기 전에는 국제관습법 형식으로,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국제법 의견을 수용하는게 타당합니다.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UN 국제법위원회의 의견은 UN회원국이면 어느나라든지 존중해야 할 국제관습법 영역의 국제법에 해당됩니다.

 

. 필자 주 5). 카이로선언에서 장개석 총통을 통해 문구가 삽입된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독립! 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정역할이 작용했다는 의견들을 소개함. 경향신문에 발표된 이만열 교수의 칼럼 "임시정부 90주년, 제대로 알자" 외. 

. 필자 주 5-1) 경향신문 2009-03-03, 이만열 칼럼.

 [이만열칼럼]임시정부 90주년, 제대로 알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 1941년 12월,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하자 재빨리 대일선전을 포고했고, 1943년에는 중국의 장개석을 통해 미·영의 거두를 설득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을 끌어냈다. 

 

.필자 주 5-2). 재외동포신문 2013.08.07, 오피니언 기고. 윤주(매헌 기념관 관장)

 

윤봉길, 장제스, 카이로회담, 그리고 독립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100여개 식민지 국가들은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저마다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연합국 정상들은 카이로회담 선언문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독립 보장만을 포함시켜

전 세계에 공포했다. 그 이유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장제스 총통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다.

 

 

.............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윤 의사에 열광하며 상해보위전 순국열사로 추앙했다.

윤 의사 의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조차 없던 장제스 총통도 중국 각지 군관학교를

순회 강연하면서 조선 청년 윤봉길 열사가 중국군 3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때부터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예우하며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고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국인장교훈련반도 개설해주었다. 이후에도 상해의거를 잊지 않고 평소

윤 의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기회를 살피던 장제스에게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43년 6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영중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중국군을 이용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버마(미얀마)를 공격해 일본군을 버마전선에

묶어두고, 호주로 후퇴해 있는 맥아더의 태평양군단을 반격전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최된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은 회담 둘째 날 한국문제에 대해 미영중 3국 신탁통치

안을 제안할 예정이었고, 이 안에 중국도 동의하리라고 믿었다. 이를 간파한 장제스는 회담 첫째 날인

11월 23일 한국 독립의 보장을 선언문에 넣어 발표하자고 기습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크게 당황했다. 특히 처칠은 자국 식민지 인도의 독립요구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한 나머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 논의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중국에 부탁할 일이 많아

회담을 제의한 루스벨트는 절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스벨트의 중재로 ‘적당한 시기’와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라는 내용을 넣는 조건으로 한국독립의 보장을 공포해 종전 후 우리는 즉시

광복을 맞이했고, 이로서 장제스는 윤의사의 은혜에 보답했다. 한국의 독립 이후에도 윤의사에 대한

장제스의 사랑은 각별했다...

 

[2]. 2차대전 승전국이나 해방국들이 패전국에 UN적국이 된 일본,독일,이태리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권익주장을 하는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교과서나 백과사전, 학술서적등에 승전국이나 해방국들의 권익을 위한 학술적 의견들이, 지금까지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를 희망하지만, 아직은 그런 징후가 없는것 같습니다.

 

필자는 UN적국인 일본,독일,이태리등에 대한 조항삭제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 조항을 삭제하면 2차대전으로 인한 승전국.해방국들의 권익은 경제 선진국인 일본.독일.이태리등에 밀려 대폭 위축될것이기때문에 UN적국 조항 삭제는 반대해왔습니다. 다만 神性國家체제인 바티칸시티의 교황청은 전쟁과 상관없는 별도 국가체제기때문 그 전통과 주권을 인정해 왔었습니다. 교황윤허의 유서깊은 대학들도 면책특권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태리 로마대학,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등은 인정해옴.

 

을사조약이 무효기때문, 일본의 강점기는 무효고, 한국은, 강제 불법적인 을사조약 이후부터 각종 의병활동 및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무력투쟁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을 통한 무력항쟁을 해온 나라입니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당시 참가한 연합국 명단(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에는 한국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한 나라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장개석총통의 정부, 카이로 선언 이후의 프랑스.소련.폴란드 정부등입니다. 한국은 2차대전을 통하여 신생으로 독립한 나라가 아니고, 을사조약이 무효기때문, 역사적인 기자조선이후 수천년된 유교.漢字.유교 교육기관(고구려 太學부터 現代의 성균관대까지)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나라입니다. 

 

[3]. 한국은 일본 불법 강점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후

대일 선전포고를 한 연합국으로 보는 견해가 한국 위키백과에 있습니다. 

진주만 공격이후 대일 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한국 헌법에 정통성이 보장됨).

필자는 연합국으로 보는 이 의견에 반대하지 않지만, 학술적 정설로 확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부가설명을 해두고 싶습니다. 위키백과는 개방형 사전으로, 익명의 여러 필자가 글을 쓰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출판하는 학술적 백과사전은 아닌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과서, 국가단체의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 대백과등) 및 학술서적, 한국의 유명한

두산백과, 학습사전류등과 달리 학술적 정설로 채택할 수 있는 백과사전의 견해와 달리, 단지 참고만

하겠습니다. 두산백과에 나오는 내용인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처럼 신뢰도가

충분한 백과사전의 견해들과 대조하는 과정이 한국의 학계에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군정 당시에

임시정부는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어떤 사유인지 이런것도 사후적으로 검토해보고, 미군정이 단지

한국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주둔군(점령군으로 많이 쓰임)이었는지

등도 재조명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을사조약이 국제법상 그 당시부터 무효라는점을 반영하면,

카이로선언 이전 1941년 對日 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처때문, 한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한 연합국이라고 필자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해 봅니다.           

 

       

  

다음은 진주만 공격이후 전쟁선언을 한 연합국 명단입니다.

1). 미국:1941년 12월 7일

2). 파나마:1941년 12월 7일

3). 코스타리카:1941년 12월 8일

4). 도미니카 공화국:1941년 12월 8일

5). 엘살바도르:1941년 12월 8일

6). 아이티:1941년 12월 8일

7). 온두라스:1941년 12월 8일

8). 니카라과:1941년 12월 8일

9). 중화민국:1941년 12월 9일

10). 과테말라:1941년 12월 9일

11). 쿠바:1941년 12월 9일

12). 필리핀연방:1941년 12월 9일

13). 대한민국 임시정부:1941년 12월 10일

14). 체코슬로바키아:1941년 12월 16일

 

.출처: 한국 위키백과


* 국제법은 확정여부를 잘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반영하였기 때문에, 국내법상 대한민국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국가이고 패전국 아닌 승전국 형식을 가질수 있겠다고 조심스럽게 의견 제시해 봅니다.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여서, 국제법상 공식 승전국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IV. 필자는 한국의 국내법(대통령령에 의해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해 서술된 성균관대(국사교육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 승계. 국내외에서 6백년 역사 인정)와 서강대(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 서강대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중 하나)의 자격을 한국사나 세계사의 학설(교황제도의 오랜 자격과 전통)과 연관시켜 Royal.Imperial대로 알려왔습니다.   


[1].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두산백과에서 규정하는 성균관대. 그리고 서강대(교황윤허에서 시작됨). 


1].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1988년부터 시안본을 검토 수정하여 1991년에 전권이 출간되었고, 1995년에는 보유편이 28권으로 나왔으며, 일부 개정증보를 거쳐 2001년에 CD-ROM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200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개년에 걸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터넷에 온라인 서비스되고 있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 유형

단체

  • 시대

현대

  •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 설립일시

1398년

  •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 사립

  • 특성

    종합대학

  • 개교일

    1398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 교목

    은행나무

  • 면적(㎡)

    627,025

  •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내 Royal대학들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에 대한 국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사도 참조)등, 정부자료를 위주로,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說)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2.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성균관대.     

http://blog.daum.net/macmaca/2325     

 



3.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4. 일본항복후,포츠담선언문 8항에 의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기타 동국대,전남대.경북대.부산대.서울시립대)의 한국내 주권이나 학벌은 없어왔음. 한편 국제관습법상 세계사의 정설(定說)은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함.


http://blog.daum.net/macmaca/2375  



5.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