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은 성년의 날로, 매년 5월 셋째주 월요일에 의례가 이루어집니다.
古者冠禮筮日筮賓 所以敬冠事 敬冠事 所以重禮 重禮所以爲國本也 故冠於阼以著代也
醮於客位 三加彌尊 加有成也 已冠字之 成人之道也
역자가 설명하는 용어들.
서일서빈(筮日筮賓):관례를 행할 날과 관을 씌워줄 현자를 서(筮)로 정하는 것.
. 필자 주 1). 筮(서)는 한국의 한자사전에서는 점이나 점대 서입니다. 중국어사전은 고대에 시초(蓍草)로 점을 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초(蓍草)는 "톱풀.가새풀로 국화과(菊花科)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見於母 母拜之 見於兄弟 兄弟拜之 成人而與爲禮也 玄冠玄端奠摯於君遂以摯見於鄕大夫鄕先生以成人見也
역자가 설명하는 용어들.
관례
정의
전통사회에서의 남자들의 성인의식.
내용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절차로서, 남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관례를 행하고, 그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筓禮)를 행하였다.
이와 같은 관례의식은 『가례』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례』의 유입 이전인 고려시대에도 관례의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광종·예종·의종 때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왕실에서도 유교식 관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와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내려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여자들의 계례만 남아 오늘날 구식 혼례식에 흡수되어 있는 정도이다.
① 택일(擇日):『가례』나 『사례편람』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행하였다. 이는 15세 이상이 되어야 예(禮)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조건은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중이 아니어야 된다고 하였다. 즉, 조부모나 백숙부의 상은 기년상(朞年喪)이기 때문에 이런 친족의 상중에는 관례를 행할 수 없었다.
또한,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상을 당해서 아직 장사를 지내지 않았으면 관례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택일에 대하여는 좋은 날짜를 가려서 예를 행하되, 여의치 않으면 정월에서 날을 정하라고 되어 있다. 그때를 놓치면 4월이나 7월 초하루에 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관을 쓰는 것이 인도(人道)의 출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② 준비:관례일 사흘 전에 주인은 사당에 고하는데, 이때 축문을 읽는다. 다음은 관례일 전에 빈객을 청하는 절차이다. 관례에서 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빈객이다. 예서에는 종손의 친구 가운데 어질고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을 골라 빈객으로 삼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관례일 하루 전에는 대청의 동북쪽에 휘장을 쳐서 관례를 올릴 장소를 마련한다.
관례일이 되면 진설(陳設)을 하며, 아침 일찍 관복(冠服)을 꺼내어 준비를 한다. 그 뒤 주인 이하 차례대로 서서 빈객을 기다린다. 빈객이 찬자(贊者)와 함께 도착하면 주인은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안내한다.
③ 시가례(始加禮):처음 행하는 예를 시가례라고 한다. 시가례는 빈객이 관례자에게 읍을 하면서 시작된다. 관례자는 쌍계(雙紒:쌍상투)를 하고 예복인 사규삼(四衫)에 늑백(勒帛)이라는 띠를 두르고, 채리(彩履:무늬 있는 신)를 신고 자리에 나와 꿇어앉는다.
옆에 시중을 하는 찬자가 관례자의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우면 주례가 치관(緇冠)을 들고 나와 관례자 앞에서 축사를 읽은 뒤, 치관과 계(筓)를 꽂고 건(巾)을 씌운다.
이어 찬자가 관례자에게 띠를 둘러주면 관례자는 방으로 들어가 사규삼을 벗고 심의(深衣)를 입으며, 큰 띠를 두른 다음 그 위에 수(修:실로 된 흰 띠)를 더하고 검은 신[履]을 신고 방에서 나와 남쪽을 보고 앉는다.
④ 재가례(再加禮):관례자가 정해진 장소에 앉아 있으면 빈객이 관례자 앞에 나아가 축사를 한다. 찬자는 건을 벗기고 빈객이 초립(草笠)을 씌운다. 이어 관례자는 방으로 들어가 심의를 벗고 조삼과 혁대를 두르고 혜(鞋)를 신고 나온다.
⑤ 삼가례(三加禮):관례자가 정해진 자리에 꿇어앉아 있으면, 빈객이 나아가 축사를 하고, 찬자가 초립을 벗기면 빈객이 복두(幞頭)를 씌워 준다. 관례자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조삼을 벗고 난삼을 입으며, 혁대를 두르고 신을 신고 나온다.
⑥ 초례(醮禮):술을 마시는 의례이다. 관례자가 정해진 자리에 남향을 하고 앉아 있으면, 빈객이 관례자 앞에 나아가 축사를 한다. 관례자가 두 번 절하고 술잔을 받으면, 빈객이 답례를 한다. 관례자가 상 앞으로 나아가 잔을 상 위에 놓았다가 이것을 다시 들고 물러나 맛을 본 다음, 찬자에게 주고 빈객에게 두 번 절하면 빈객이 답례한다.
⑦ 자관자례(字冠者禮):관례자에게 자(字)를 지어 주는 의례이다. 빈객과 관례자가 마당으로 내려가서 빈객이 관례자에게 자를 지어주고, 이어 자를 부를 때 축사를 한다. 관례자가 간단한 답사를 하고 절을 하면, 빈객은 절을 받되 답례는 하지 않는다.
이상으로 관례는 모두 끝났으나 예서에 의하면, 주인이 관례자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알리면서 고사(告辭)를 읽으면 관례자는 두 번 절한다. 그런 다음 친척들과 빈객에게 두 번 절한 뒤, 밖으로 나와 선생과 아버지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절을 한다.
농촌에 있는 70세 이상의 노인 중에서 가끔 관례를 하였다는 노인을 볼 수 있다. 이들 촌로들의 관례경험을 보면 반드시 예서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예서』에 가까운 관례는 다음과 같다.
15세가 되어 관례를 올렸으며, 아버지가 친한 친구를 빈객으로 맞이하였다. 빈객은 사랑방에서 관례자의 머리를 빗겨 올리고 상투를 틀어올려 주고 모자를 씌워 준 뒤, 자를 불러 주었다. 관례자는 이어,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를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일반적으로 많이 행하여진 관례는 남자집에서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여자집에 보낸 뒤, 좋은 날을 정하여 머리를 올리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때는 아버지가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 뒤 부모에게 절을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실제의 관례는 대부분의 경우 혼례 절차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서의 삼가례는 극히 간소화하여 행하여졌다.
장소는 사랑방에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엄격한 사대부집에서는 예서의 절차에 따라서 관례를 행하였다.
관례는 구조상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례·초례·자관자례가 그것이다.
① 가례:머리를 빗겨 올려 상투를 틀고 모자를 씌우고 옷을 갈아입히는 의례이다. 이는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의식과 어른의 세계로 통합시키며 정화시키는 의식으로 개복(改服)이 있다. 그러나 관례 전체의 구조로 보면 가례는 분리의례의 성격을 띤다.
② 초례:술로써 예를 행하는 것으로 바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경과의례(經過儀禮)이며, 정화의례(淨化儀禮)이다. 의례에서 술을 마시는 의식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행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술을 나누어 마시는 것은 새로운 지위나 관계, 그리고 질서의 형성을 상징하는 의례이다.
③ 자관자례:관례자에게 새로운 이름인 자를 주어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의례로, 기성사회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합의례이다.
이와 같이, 관례는 구조상 분리의례·경과의례·통합의례가 분명한 통과의례이었다. 관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주인 이외의 빈객을 정하고, 그로 하여금 주된 임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즉, 관례는 주인과 대등한 빈객의 지위에 입각한 주인과 빈객의 균형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때의 빈객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대부(代父)에 해당한다. 빈객은 새로운 이름인 자를 지어줌으로써 성인으로서 제2의 탄생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 관례의 보다 큰 특징은 관례가 혼례에 흡수되어 있는 점이다. 이것은 10세가 넘으면 혼례를 서두르는 조혼의 풍속 때문이었다. 관례는 혼례과정에 흡수되어 그 사회적 의의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단발령이 내리자 쉽게 흔적을 감추었다.
이상과 같이 관례는 단발령 이후 크게 쇠퇴한 풍속이었기 때문에 관례에 대한 현지조사보고도 없고 연구는 더욱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도 성행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청년결사(靑年結社)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젊은이들만 동숙하는 와카모노야(若者屋)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示唆)를 한다.
우리의 화랑도는 청년결사와 유사하며, 호남지방의 모정(茅亭)은 그 기능이 와카모노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서의 관례가 아니라, 보다 오랜 전통적 성인의식을 밝혀내는 작업이 있어야 하겠다. 이것은 고대사 이해와 우리 문화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계례
. 출처: 관례[冠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성년의 날에 대한 백과사전적 정의
정의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며, 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하여 지정된 기념일.
내용
매년 5월 셋째 월요일. 우리나라의 옛날 성년례(成年禮)는 고려 광종 때인 965년(광종 16)에 세자 유(伷)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다는 데서 비롯된다. 성년례는 남자의 경우에는 관례(冠禮)를, 여자의 경우에는 계례(筓禮)가 있었으며,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보편화된 제도였으나, 20세기 전후의 개화사조 이후 서서히 사회관습에서 사라졌다.
보통 성년에 달하지 못하는 동안을 미성년이라고 한다. 한국 민법상 만 19세에 이르면 성년이 되고, 연령 산정에는 출생 일을 계산하므로 1981년 1월 1일에 태어난 자는 1999년 12월 31일에 성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년에 관한 입법 예는 유럽의 경우 성년연령을 21세로 하는 독일·프랑스 등과 23세로 하는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도 있다.
아시아의 경우 일본과 같이 일반국민은 만 20세를 성년으로 하고 천황·황태자·황태손의 성년을 18세로 하는 나라도 있으나, 만 20세를 성년으로 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성년의 효과는 공법상으로는 선거권의 취득, 기타의 자격을 취득하며, 흡연 ·음주 금지 등의 제한이 해제된다. 사법상으로는 완전한 행위능력자가 되는 외에 친권자의 동의 없이 혼인할 수 있고, 양자를 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는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처 각각 4월 20일에 성년의 날 기념행사를 하였으나, 1975년부터는 ‘청소년의 달’인 5월에 맞추어 날짜를 5월 6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월 셋째 월요일에 성년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 날은 그 해에 만 19세가 되는 성년을 각 직장 및 기관 단위별로 한자리에 모아 기관장의 훈화와 모범성년에 대한 표창, 그리고 간단한 다과회 등을 가지며, 청소년들을 위한 범국민적인 행사가 개최되는데, 특히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성년례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전통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 출처: 성년의 날[成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 세시풍속사전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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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 왔다. 특히 부족사회나 초기 국가사회에서의 성년식은 사회적 의미가 컸다.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성년의 단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비로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도 성년식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삼한시대 마한에서 소년들의 등에다 상처를 내어 줄을 꿰고 통나무를 끌면서 그들이 훈련받을 집을 지었다.”라는 기록은 당시 성년식의 절차와 내용을 말해 준다. 신라시대에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관복을 입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광종 16년(965)에 태자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다는 대목도 있다. 원복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원나라의 복장이라는 뜻이지만, 당시 어른들의 평상복인 배자(褙子, 덧저고리)를 말하므로 태자에게 성인복을 입혔음을 뜻한다. 태자의 성년식을 거행해서 공식적으로 성년이 되었음을 알렸다. 조선 초기의 성년식은 양반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고려 말에 명나라로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소개되어 사대부 계층에서는 주자가례에 따른 관혼상제 의식을 지키기 시작했다. 관례는 관혼상제의 첫 번째 의식이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관례는 남자아이에게는 15세와 20세 사이에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리고 복건, 초립, 사모, 탕건을 씌워 주는 의식이었다. 관례를 통해서 젊은이들이 아동기를 벗어나 성인으로서의 예절을 알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켜야 함을 알게 하였다.
. 출처: 성년의 날[成年-]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유교 경전과 한국의 유교,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