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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入室 不可不思其瞰也(방에 들어와서는 귀신이 볼것을 생각해야 한다).

고전산책. 入室 不可不思其瞰也(방에 들어와서는 귀신이 볼것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 고전번역원의 고전산책 중 고전명구(이백여든 네번째 이야기)를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정승의 정자

 

높은 곳에 있으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방에 들어와서는 귀신이 볼 것을 생각해야 한다.

居高 不可不念其危也 入室 不可不思其瞰也
거고 불가불염기위야 입실 불가불사기감야

 

- 김육(金堉, 1580~1658)
『잠곡유고(潛谷遺稿)』권9
「구루정기(傴僂亭記)」

 

이 글은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위해 평생 노력했던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70살이 지나 자기 집 뒤편에 구루정(傴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쓴 글이다. 이 정자는, 가까이로는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목멱산ㆍ백악산ㆍ낙산ㆍ인왕산, 멀리로는 북한산의 인수봉까지 바라다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돌 틈 사이로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연못에는 연꽃도 심어져 있으니, 노년의 잠곡이 몸과 마음을 쉬기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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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귀신은 가득 찬 것을 싫어하여 부귀한 자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방 안에 혼자 있을 때에도 살펴본다고 하였다. 당시 잠곡은 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인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처신을 더 엄격하게 단속하여 정자 하나 짓는 데까지도 이렇게 자신을 낮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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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옥(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필자 주). 김육. 그 당시에는 당쟁에 휘말린 분으로도 여겨지지만, 조광조나 이황선생등을 후대의 우리들이 존경하는것은 이 분 덕택인것 같습니다. 증광문과 장원으로 복귀했군요.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 : ····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뒤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 :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 ≫와 ≪벽온방 ≫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다.

 

.출처:김육 [金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 필자의견: 현대 成均館(成均館大) 유생(儒生)의 노후대책은? 재직시 저축.보험.부동산등에도 눈을 돌려야 노후가 불안하지 않을것입니다. 어느정도 미래대비가 있어야,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좋아하는 학문도 익힐것 아니겠습니까? 또는 늙어서도 어느정도 노후를 보장해주는 일거리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하늘天)께서는 많은 인간(백성)을 낳으셨는데, 낳으실 당시에는 인간에 귀천이 없었을 것입니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경에서 가르치는 말씀. 天生蒸民.

 

그러나,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법과 제도, 종교, 어느정도의 신분제, 학교의 지위등은 수천년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전통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