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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경제성장보다 전통주권(세계사에 나오는 문명,종교,교육등)에 주안점을 둔다면, 당연히 그 수천년 역사와 전통은 인정되고 존중

1. 필자의 의견.  

 

돈.경제성장보다 전통주권(세계사에 나오는 문명,종교,교육등)에 주안점을 둔다면, 당연히 그 수천년 역사와 전통은 인정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필자는 Sales Man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체질이나 Sales문화등은 다른 나라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좋은 경제환경으로 파악하고 있지만($화가 기축통화이기도 하여 세계의 우수한 인적 자원과 생산품등을 구입하는 데 아주 유리하기도 함), 만약 세계사에 나오는 다음의 역사나 전통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이 있다면, 그 세계사 자격은 보호받아야 마땅합니다.

 

해당지역이나 국가들은 세계사의 학술적.제도적 규정이 있기 전에는, 그런 문명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하고 수천년 오랜 세월을 그저 자기 영토에서 의미부여를 인정받지 못한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그런 문명을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왔어도, 오래된 흔적 몇가지로도 특정지역에 문명이 존재했다고 학자들이 참여하여 인정해 준 이상, 그 문명은 세계사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그 시점부터 해당지역 사람들의 역사가 되었고, 공식적인 문명이 된 것입니다.

 

아시아.아프리카(이집트) 및 유럽의 에게문명을 학술적으로 규정하기 전에는, 자기들의 오랜 선조가 어떻게 살아온 정도로만 대략적으로 파악하였거나, 전해들었을 것입니다만, 학자들이 참여하여 오래된 인간의 생활을 어떤 문명으로 학술적으로 규정한 이상, 이를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교사, 교수 및 학술서 편찬자나 집필자, 독자들은 필자를 포함하여 학교나 학외의 시험문제까지 나오는 세계 4대 문명이나 에게문명및, 여러가지 오래된 종교, 대학교육에 대하여 충분히 타당하다고 가장 신뢰해 온것입니다. 대중언론이나 비학술서들이 가지지 못한 신뢰도와 정확도를 교과서와 참고서.백과사전등은 가졌습니다.              

 

2. 세계 4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1).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는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문명, 중국 황허 유역의 중국 문명(황허 문명)이 있다.  

 

.출처: 고대문명의 발상지(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2). 에게 문명[ Aegae civilization , - ] : 세계 4대 문명은 아니지만, 세계사로 접하는 문명      

에게 해 주변의 청동기 문명으로, 최초의 해양 문명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볼 수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과 접하여 일어났다. 에게 문명은 에번스가 발견한 크레타 문명과 슐리만이 발견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으로 나뉜다. 크노소스 유적이 대표적인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5세기 미케네 인에게 넘어갔고, B.C. 12세기에 제2차 그리스 인의 침입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본토에 남하하여 정주한 그리스 인이 크레타 문명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하였다. 미케네 문명은 성채 유적과 무기가 훌륭하지만, B.C. 12세기에 제2차로 남하한 그리스 인(도리아 인)에게 파괴되었다.

.출처:에게문명[Aegae civilization, -文明]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3. 세계사에 나오는 종교들.  

 

1) 유교: 한나라때 유교가 국교가 됨.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한나라 때에는 진나라 때 마련된 통일 제국과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라는 바탕 위에 유교가 국교로서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신적 바탕이 마련되었다. 진대 국가 구조의 틀과 한대의 유교 문화는 줄곧 발전을 거듭하며 중국 역대 왕조의 기본 정치 제도로 자리 잡았다.

 

.출처: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011. 9. 5., 휴머니스트)

 

2). 기독교. 로마가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Arius)를 쫓아냈고, 급기야 성부와 성자가 영원히 동질적이라고 하는 아타나시우스파(Athanasius)의 교리가 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다. 392년에는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대한 숭배가 금지되었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출처: 기독교의 기원(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2008. 7. 15., 평단문화사)

 

 

3). 브라만교와 힌두교

 

힌두교의 출현

 

육식을 금하라

힌두교를 다른 말로 인도교()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 도교라 함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힌두(Hindū)’라는 말 자체가 인더스강에 대한 산스크리트어의 이름 ‘신두(Sindhu)’1)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똑같은 어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원전 2500년 무렵의 인더스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기원전 2000~기원전 1500년?) 이후 형성된 브라만교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브라만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기원후 300년경부터 종교학파의 모습을 갖추며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힌두교는 어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 성전()2) · 전설 · 의례 · 제도 ·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카스트 제도다. 그 기원은 브라만에 규정된 사성()3)제도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 직업 · 종교적인 여러 가지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 사람들의 종교와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 사람들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일컬어지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그렇다면 힌두교와 고대 브라만교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를 두며 희생제를 중심으로 신전이나 신상()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힌두교에서는 신전 및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인격신()4)이 믿어진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5)를 반대해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된다.

 

.출처: 힌두교의 출현(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2009. 1. 30., 평단문화사)

4). 불교

 

1. 교과서 속 주개념

동남 아시아의 불교문화

불교는 크게 보아 동북아 지역으로 전파된 대승 불교와 동남아 지역으로 전파된 소승 불교로 분류될 수 있다. 본래 동남아는 중국보다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불교 외에 힌두교 등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아서 앙코르 톰이나 앙코르 와트 등과 같은 건축물 등의 유적들도 남겼다. 그러나 소승불교의 영향을 받아 미얀마의 파간 왕조 등은 많은 불탑을 남겼으며,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조 등은 불교학의 수준이 인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자바의 사이렌드라 왕조로서,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승 불교를 받아들여 보로부두르 유적지 등을 남겼다. 그러나 13세기 원의 침입 이후 동남아시아는 커다란 격변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문화가 인도 상인들을 통해 점차 전파되게 되었다.

 

.출처: 동남 아시아 각국의 성장(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청서출판)

 

5). 이슬람교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예언자로서 세운 종교이며, 유대와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일신교이다. 이 종교 안에서 여러 종파와 종교 운동이 일어났고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지역마다 문화적 · 종교적으로 큰 편차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신도들은 공통된 신앙으로 묶여 있고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교리 및 실천의 기본은 ‘6신()’과 ‘5주(, 오행())’로 되어 있다. 6신은 신 · 천사 · 성전 · 예언자 · 내세 · 예정() 등 여섯 가지의 신앙 개조를 말하며, 5주란 신앙 고백 · 예배 · 자카트(희사()) · 단식 · 순례 등 다섯 가지의 주요 의무를 가리킨다.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와 1개월에 이르는 단식, 또 남편 외의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 돼지고기와 음주 금지 등이 그 예이다. 이슬람교는 단순히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생활 체계로서 사회와 국가의 틀까지도 규정하였다. 신자들은 무슬림이라 불린다.

 

.출처: 이슬람교[Islam, -敎]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4.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들

 

1). 중국 한(漢) 태학(太學)과 국자감. 

 

가). 한 태학.

그러나 한 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요청되었다. 마침내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립하고 교수직인 오경박사를 두었으며,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를 개설함으로써 유교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기원전 136년 조정에 처음으로 설치된 오경박사는 각자 오경 중에 1경씩을 전공했다. 처음에 50명의 관선학생으로 출발한 태학의 졸업생은 후한 말에 이르면 3,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효렴제에서 시작한 중국의 관리등용법은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학자적 관료로서의 중국적 지식인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자는 일찍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동중서는 이를 이렇게 치환하였으니, 이것이 유교도덕의 기본 덕목인 삼강()이다.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이다.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다."

공자가 인간사회의 위계적인 질서를 인정한 상태에서 인륜을 얘기한 것을 동중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 사회 왕 중심의 신분질서는 하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하통일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이고,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군주와 신하는 본()과 말(), 즉 줄기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이다. 유가의 사상에 종교성을 부여하고 여기에 음양오행적인 천인론()을 가미함으로써 마침내 군주권을 합리화시키는 데 성공한 동중서의 유교는 무제에게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무제가 반드시 유교로서만 통치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사기》나 《한서》의 〈혹리전()〉에는 한 무제 때의 법가적 관료에 의해 벌어진, 이른바 '유혈 십리에 미치는' 주살이 거듭 기록되고 있다.

얼핏 법가와 유교는 서로 상충하는 사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표방한 중국의 역대왕조들 중에서 어떤 왕조도 법가적 통치를 포기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 두 사상은 상호보완적으로 왕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의 전제왕조를 2,000년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는 군주의 전제권력을 합리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득에 의한 자발적인 복종'을 실현시킴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높여 주었다.

 

.출처: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기원전 136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가람기획)

 

나). 중국 수나라때 국자감으로 처음 만들어짐.

 

국자감

출처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 국자감
  • 고려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중국의 수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려 시대에는 국자감,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으로 명칭만 바뀌어 계승되었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의 유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을 공부하였다. 《효경》과 《논어》가 공통 과목이었고 《주역》이나 《예기》 등을 공부했다.

.출처: 국자감(용어 해설) 

 

다). 한나라 태학부터~ 당.송시대의 국자학(국자감)을 통한 고대 관학교육

 

 

(1) 고대 관학교육
제자백가 사상 이외에 고대의 학문으로 문학, 사학, 예술이 있었다. 군자의 교육으로 예()와 악()을 중시했던 공자의 유가사상은 한나라 때 국교가 되면서 의식과 예법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때(기원전 136) 고대 관학()교육의 최고 학부()의 하나인 태학()이 수도 장안(, 지금의 시안)에 처음 설치되었고, 오경[,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박사를 두어 오경을 전문적으로 교육하였다. 오경을 교육받은 학생 가운데 우수한자는 낭중(, 관리후보)으로 선발하였고, 지방에서도 효렴을 선발해 중앙관리로 등용시켰다.

한대에는 학자가 곧 관리가 되었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서 다시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유교이념에 따른 교육은, 소인을 군자로 교육하는 것이고 군자가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시 관학교육은 관료가 되는 과거시험의 교육이 되었기에, 순수학문이나 진리탐구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에 이르면 중앙의 관학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학과 홍문관()과 숭문관()의 2관이 있었다. 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신분제도에 따랐다. 예컨대, 국자학 정원이 300명이면, 3품 관료 이상 귀족자손을 선발했다. 특히 숭문관은 당 고종() 때부터 학사와 생도를 두어 황족과 재상의 자녀들만 입학시켰다.

교육과정을 보면 수업연한이 6년인 율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9년이었고, 졸업 후 관리가 되려면 국자감()에서 시행하는 책시()에 합격해야 했고, 책시 후에도 예부()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당대의 관학은 태종 때에 가장 발전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 서역 등 외국에서도 유학생이 밀려들 정도였고, 6학 2관의 수강생이 8,000여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송대의 학교 교육 역시 문신관료제의 발달로 인해 과거 시험의 합격에 중점을 두었기에, 일반교육이나 학문연구로서의 진리탐구는 어려웠다. 송대의 관학은 국자감 아래 경학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각종 전문지식을 가르쳤던 기술학교[율학, 산학, 서학, 화학(), 의학(), 무학()]가 있었다. 당대와 달리 송대에는 국자학 이외에는 일반 평민도 입학할 수 있었다.

 

.출처: 중국의 교육(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2011. 9. 7., 다락원)

 

라). 원.명.청의  국자감을 대체한 경사대학당과 북경대학.

 

1898년, 원·명·청 시대에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을 대체하여 ‘경사대학당()’으로 창설하였다. 1902년 경사대학당의 교육학원이 오늘날의 베이징사범대학교로 떨어져 나갔고 1912년 중화민국 성립에 수반하여 국립 베이징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17년 학장으로 취임한 차이위안페이[]의 개혁으로 신문화운동의 중심이 되어 근대 학술연구와 토론의 자유 학풍을 확립하였고, 특히 1919년의 5·4운동이 재학생들에 의해서 추진된 이후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출처: 베이징대학교[Peking University, 北京大學(북경대학)] (두산백과)

 

2). 중세 유럽의 볼로냐, 파리대학

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볼로냐 대학. 

 

볼로냐의 법률 학교에서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성장한다.

1088년은 볼로냐 대학이 교회의 관리에서 독립된 기관으로 태어난 해로 널리 간주된다. 볼로냐 대학은 세계 최초의 대학 중 하나이며, 서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학자는 이르네리우스로, 1084년에서 1088년 사이의 한때에 법학부를 창설했다. 이르네리우스는 이 학교에서 수업을 했으며 『로마 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법전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29년에서 534년에 걸쳐 집필하게 했으며, 최근 11세기에 들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르네리우스의 최고 업적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에 대한 주석서 『숨마 코디키스』를 저술한 것으로, 이는 유럽 사회의 문화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단계였으며,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문법 체제의 초석이 되었다.

볼로냐 대학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탁월함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로마법을 편찬하고 그 권위를 신성 로마 황제의 권위와 연계시킨 업적을 기려,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1158년 볼로냐 대학에 특권을 부여했다. 외부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학문과 연구의 전당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준 것이다. 볼로냐 대학은 당시로서는 특별할 정도로 개화된 편이었다. 11세기 후반에는 베티시아 고차디니라는 한 여성이 수업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교편을 잡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9세기에는 잠시 쇠퇴기를 거쳤으나, 1988년에는 전 세계의 학계 대표자가 볼로냐 대학이 지닌 모든 대학의 모태라는 영광스런 지위를 경축했다.

"모든 대학은… 학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유럽 대학 대헌장, 1988년

 

.출처: 볼로냐가 학생 도시가 되다(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나). 중세 유럽의 대학

중세의 대학

중세 초기의 교육 기관은 교회나 수도원에 설치되어 주로 자유 7과목인 기초 과목과 교리를 가르쳤다. 대학은 중세 유럽의 교사·학생들 간의 일종의 길드에서 시작되었다. 대학 성립은 당시의 지적 활동과 도시의 발흥을 배경으로 하였다. 중세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으로, 전자는 교수 길드, 후자는 학생 길드가 다스려 다른 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13세기에 제도가 완성된 파리 대학에서는 학장 밑에 독자적인 재판소를 갖는 완전한 자치제를 구현하였다. 학과는 문법, 수사, 논리 세 과목과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의 네 과목이었다.

.출처: 중세의 대학(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학술적.연구적인 측면에서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교과서적 기득권 대학들의 자격을 바탕으로, 필자가 주관적인 World Class Universities들을 정의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습니다.    

  

 World Class Universities. 

http://blog.daum.net/macmaca/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