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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전통에서, 2차대전 승전국중 미국의 권리행사는, 軍權을 쥔 장군의 개념으로 그 이익을 구현시키면 좋겠습니다.

세계사의 전통에서, 2차대전 승전국중 미국의 권리행사는, 軍權을 쥔 장군의 개념으로 그 이익을 구현시키면 좋겠습니다.

 

@ 장군이나 특별한 실력자가 군사권력을 쥐었어도, 역사적 전통은 형식상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중국: 祭政一致의 사회(종교적인 天子와, 정치적인 황제의 제정일치 전통이 오래됨).

2) 로마제국: 황제가 최고 권력자. 동로마제국도 그러함.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후에는, 로마제국의 기득권인 로마 교황이 세속의 새로 생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와 다투다가, 나중에 세속의 황제권력을 능가한 것 같음.  

 

수천년 세계사 전통으로 볼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하여 2차대전 승전국을 거쳐, 군사적으로 세계 최고 강대국이 되었지만, 인류의 수천년 역사로 보면, 기독교 사회인 미국은 교황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고, 영국의 국왕전통도 존중하면서, 군사적 최고 실력자가 된 신대륙 국가의 새로 생긴 초 강대국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군사적으로 최고 실력자는, 절차를 거쳐, 본인이 직접 황제나 교황에 오르든지, 마음에 드는 존경받는 인물을 옹립하여 천자(황제).교황.국왕으로 옹립할수는 있겠습니다.   

 

 

@ 필자(성균관대 출신 윤진한, 宮 儒)는 다음의 한국 公敎育전통을 반영하여 교과서적 정설을 중심으로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한국은 공교육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는 세계사나, 한국사, 기타 여러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전문학술서적.논문의 저자가 아니므로, 교과서나 참고서, 학교 公敎育, 백과사전, 정부방침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에 따라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학이나 종교, 왕의지위, 역사등에 관련하여서는 대중언론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중국황제나, 로마황제, 동로마황제,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대부분 祭政一致의 황제)가 높지만, 서유럽의 경우에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새로 생긴 국가의 왕에 공식적으로 왕의자격을 인정해주는 대관식을 행해준 교황의 역할이 있었던 사실로 볼때, 서유럽은 정신적으로는 교황을 존중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여러나라의 왕들이 새로 개별 국가의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중에, 교황권과 대립하면서도 지속적인 공생을 해온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한때는 교황이 서유럽만의 지역적인 황제보다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해도, 점차적으로, 지역적 개별 국가내에서는, 서유럽 개별국가의 황제권이 교황권과 대립.공존하는 형태로도 보여집니다.

 

다음은 서유럽의 황제권력/교황권력에 대한 서술입니다.

 

황제권력/교황권력

[ imperial power/papal power ]

로마 황제에서 유래하는 칭호를 갖는 세계제국의 지배자라고 하는 황제와 이 세상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기독교 세계에서 보편적 권위를 주장하는 로마교황이라는 2개 권력간의 긴장관계는 중세 정치사상의 중심적 논제였으며 동시에 정치 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비정치적 영역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서유럽 정치사회 고유의 특성을 형성하였다.

초기에는 황제권력 쪽이 더 강력했다. 5세기말에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 I)가 ‘양검론()’을 제창하여 황제의 물()적 검과 교황의 영()적 검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서술하였던 것은 정치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과 거기에서의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교황은 프랑크족 중 정치적 후원자를 찾아내어 800년에는 그 왕 샤를마뉴(Charlemagne)(카알대제)에게 로마황제의 관을 수여하였다. 거기에서는 로마의 높은 문화를 계승한 교회 및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리하여 황제는 교회의 보호자라는 이념이 성립한다. 그러나 동일한 보편성을 주장하는 양자의 대립은 필연적이었으며 11세기의 성직자 서임권투쟁()은 그 전형이었다. 그 후 교황권은 더욱 강해져 13세기초의 이노센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시대에 정점에 달하지만 후의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Bonifacius Ⅷ)가 프랑스 왕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교황권이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지역국가의 성장을 나타내는 그 사건은 동시에 보편성을 주장하는 황제권력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출처: 황제권력/교황권력[imperial power/papal power]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연구와 학술, 비영리적 목적으로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