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나 국사의 대학들및 전통 세계종교(유교, 로마가톨릭)들을 후발대학들이나, 후발 신흥종교들이 현대기준으로 판단하면 않됩니다.
유교나 로마가톨릭은 세계종교였고, 특히 유교는 漢나라때 중국, 한국, 베트남, 흉노(몽고)에 걸쳐 세계종교로 성립되었습니다.
1. 중국사 다이제스트는 유교가 역대왕조의 지배이념으로 거의 흔들림없는 지위를 누렸다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1).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기원전 136년)
중국 문화를 얘기할 때 유교를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공자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는 한 무제 때 국교로 채택되었다. 물론 시대 상황에 따라 공자의 사상은 재해석되고 변천을 겪었지만 역대 왕조의 지배이념으로 거의 흔들림 없는 지위를 누렸다. 점차 중국의 향촌사회에도 뿌리를 내림으로써 중국인들의 사고 및 풍습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유교가 전파된 아시아 각국 사회에도 공통된 문화적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진나라가 몰락하고 한나라가 성립되자 다시 제자백가의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정치가 안정되는 휴식의 정치에 힘입어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이 세상을 풍미했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와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요청되었다. 마침내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립하고 교수직인 오경박사를 두었으며,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孝廉制)를 개설함으로써 유교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출처: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기원전 136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가람기획)
2). 물론, 유교가 국교이긴 하지만, 우리들이 학교다닐때 배우는 고대 중국 사상가들의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도가, 법가등)도 유교와 융합해서 유교를 국교로 하면서 그 하위 사상으로 도가나 법가등도 같이 공존해 왔습니다. 인간의 특성은 모두를 仁이나, 性善說로만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법도 출현하고, 性惡說도 나온것이겠지요. 다음은 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하면서도, 한때 황노무위사상에도 영향받았었고, 법가사상도 가미한 정책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 다 음 -
아울러 한 무제는 한 초기의 '황노무위(黃老無爲)' 사상에서 벗어나 동중서(董仲舒)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러나 황제지배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비록 유교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기에 법가 사상을 가미한 '내법외유(內法外儒)' 방식을 표방하게 된다....
.출처: 중국 고대 역사(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2011. 9. 7., 다락원)
3). 명절, 기념일등은 과거 유교의 국교전통에서 이어진 날들입니다. 중국의 경우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있으므로, 수천년 왕조의 국교인 유교는 그대로 종교의 자유속에 관습법과 역사적인 국교의 지위가 유지됩니다. 물론 군권을 쥐고 있는 공산당 기준으로 보면 소멸시켜야 할 종교가 유교 아닌 도교 및 외래종교인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일수도 있어, 교단에 등록된 이들 소수신앙 신자를 관리하는 형태도 보이고 있지만, 종교의 자유가 헌법상 보장되면, 이는 국가주권을 가진 나라의 주권행사에 속하므로 다른나라가 간섭하면 않됩니다. 중국의 헌법상 종교의 자유조항을 놓고 보면 중국은 고대부터 수천년동안 중국의 전통 국교인 유교를 중국의 명절, 각종 유교제사, 한문성씨등을 통하여 계승해 오고 있는것입니다. 13억 5천만 중국인은 전통 명절을 통하여 국교인 유교를 계승하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중국의 헌법 제34조 및 제36조, 민법통칙 제36조, 제37조, 제71조 및 제77조에서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법에 따른 종교활동의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종교계 인사의 단결 및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당(黨)과 정부의 종교활동에 대한 지도도 강화하고 있다.
.출처: 중국의 종교(중국 개황, 2012. 1. 3., 외교부)
2. 세계종교 유교의 성립과 더불어 서양에서는 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립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1).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은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사실상 국교로 선언하면서 더 부각되었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5대 교구, 즉 로마·콘스탄티노플·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로마의 중심도시에 있는 로마 교회와 동로마의 중심 도시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문제나 교리적인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는 사실상 게르만인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해서 그 뒤로도 천 년 이상 유지되었다. 로마 교회는 새로운 정복자들인 게르만인들을 기독교화해서 라틴 기독교 세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의 주교는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순교지에 세워진 교회로서 모든 교회에 대해서 수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수위권 주장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비잔티움 황제나 동로마 교회의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출처: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그리스와 로마, 2004. 7. 30., ㈜살림출판사)
2). 중세시대(313-1517년) :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교회가 합법화되었고, 392년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교회를 가리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누스 교회'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3세기에 수도원이 소개되어 5세기경에는 수도원 운동이 체계화되었다. 또 1054년에는 동방교회와 분열이 일어났고, 7세기에 형성된 이슬람으로 인해 11세기에는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출처:로마 가톨릭 교회[-敎會, Roman Catholicism]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 필자의견: 현대에 들어와 헌법에 국교가 없다고 정의되기도 하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만, 관습법이나 교육, 전통은 과거의 국교전통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절, 기념일등은 과거 유교나 로마가톨릭의 국교전통에서 이어진 날들입니다.
3. 세계사나 한국사의 역사적인 대학들은 과거 최고대학이고 Royal.Imperial대학인데, 현재까지 그 지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역사깊고 위대한 대학들에 利權이나 명예.지위등이 결부된 동 아시아, 서유럽의 역사깊은 대학들은 주로 왕당파(국왕,왕족,귀족), 성직자로 이해관계를 같이하며,수천년 역사와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습니다.
중국 베이징대는 태학.국자감.경사대학당을 거친 대학교 선배들이 국가를 통치해 오던 역사때문에, 그 선배들로 현대사의 고위 관료나 학자.문인.기업인들이 많습니다. 또는 태학.국자감 및 중국의 베이징대, 한국의 성균관대(성균관 계승)는, 졸업한 선배로 이전의 황제나, 제후국 왕, 士大夫등 고위 관리, 학자, 교육자, 문필가등이 있는데 이 분들은 중국이나 한국을 통치해 온 사람들입니다. 베트남의 국자감 졸업자도 그렇습니다. 유교의 성직자며 통치자(황제.제후국 왕,고위 관리, 학자, 문필가, 유교제사의 주요 간부)들이 태학.국자감, 중국의 경사대학당(베이징대), 한국의 성균관(성균관대) 출신들입니다.
1). 유가가 다른 학파보다 우위에서 중국 사상계와 교육계의 주류를 이룬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유가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있는 '경전(經典)'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가경전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인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윤리를 강조한 장점도 있었다. 공자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경전교육을 통해 유가사상을 지닌 수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논어』 「학이(學而)」 편의 첫 구절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내용은 바로 자신의 수양은 물론 세상을 향한 유가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공자는 교육을 통해 보다 나은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은 최초의 교사였던 것이다. 둘째, 공자는 제자들이 당시에 사회를 향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공헌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예컨대 염유(閻柔)는 재정관리, 자로(子路)는 국방안보, 자하(子夏)는 문서관리, 자장(子張)은 제후를 보필하는 역할, 안회(顔回)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학문에 정진하였고, 자공(子貢)은 외교에 유능함을 보였다.
중국 고대문헌 중에서 교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에 보면,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여기에서 고대의 뛰어난 인재교육 양성에 대한 교육의 가치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1) 고대 관학교육
제자백가 사상 이외에 고대의 학문으로 문학, 사학, 예술이 있었다. 군자의 교육으로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던 공자의 유가사상은 한나라 때 국교가 되면서 의식과 예법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때(기원전 136) 고대 관학(官學)교육의 최고 학부(學府)의 하나인 태학(太學)이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에 처음 설치되었고, 오경[五經,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박사를 두어 오경을 전문적으로 교육하였다. 오경을 교육받은 학생 가운데 우수한자는 낭중(郎中, 관리후보)으로 선발하였고, 지방에서도 효렴을 선발해 중앙관리로 등용시켰다.
한대에는 학자가 곧 관리가 되었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서 다시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유교이념에 따른 교육은, 소인을 군자로 교육하는 것이고 군자가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시 관학교육은 관료가 되는 과거시험의 교육이 되었기에, 순수학문이나 진리탐구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唐)대에 이르면 중앙의 관학은 국자학(國子學), 태학,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의 6학과 홍문관(弘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의 2관이 있었다. 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신분제도에 따랐다. 예컨대, 국자학 정원이 300명이면, 3품 관료 이상 귀족자손을 선발했다. 특히 숭문관은 당 고종(高宗) 때부터 학사와 생도를 두어 황족과 재상의 자녀들만 입학시켰다.
교육과정을 보면 수업연한이 6년인 율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9년이었고, 졸업 후 관리가 되려면 국자감(國子監)에서 시행하는 책시(策試)에 합격해야 했고, 책시 후에도 예부(禮部)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당대의 관학은 태종 때에 가장 발전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 서역 등 외국에서도 유학생이 밀려들 정도였고, 6학 2관의 수강생이 8,000여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송대의 학교 교육 역시 문신관료제의 발달로 인해 과거 시험의 합격에 중점을 두었기에, 일반교육이나 학문연구로서의 진리탐구는 어려웠다. 송대의 관학은 국자감 아래 경학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四門學)과 각종 전문지식을 가르쳤던 기술학교[율학, 산학, 서학, 화학(畵學), 의학(醫學), 무학(武學)]가 있었다. 당대와 달리 송대에는 국자학 이외에는 일반 평민도 입학할 수 있었다. 인종(仁宗) 때는 범중엄(范仲淹)의 학교진흥정책으로 새로 태학을 설립하면서 학생수도 늘어났고, 이로 인해 관학이 더욱 발전하였다. 신종(神宗) 때는 왕안석(王安石)도 태학진흥책을 실시하며, 300여 명에 불과했던 태학생이 적게는 2,400명에서 많게는 3,800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말해 이 시기가 송대 태학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명대의 학교 교육은 송대의 제도를 계승하면서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명대의 학교 교육은 과거 시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당시 과거 시험은 팔고문(八股文) 형식으로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복고주의 유가경전에서 팔고문과 관련된 부분만 암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사상과 학문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처럼 고대 관학교육은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여 '사서(四書)'와 '오경'을 위주로 한 유가경전을 가르쳤고, 이를 통해 통치에 적합한 인재를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유가사상을 기반으로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국의 교육(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2011. 9. 7., 다락원)
2). 베이징대학교.Peking University, 北京大學(북경대학)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는 중국 최초의 국립 종합대학교.
....1898년, 원·명·청 시대에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國子監)을 대체하여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으로 창설하였다. 1902년 경사대학당의 교육학원이 오늘날의 베이징사범대학교로 떨어져 나갔고 1912년 중화민국 성립에 수반하여 국립 베이징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17년 학장으로 취임한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개혁으로 신문화운동의 중심이 되어 근대 학술연구와 토론의 자유 학풍을 확립하였고, 특히 1919년의 5·4운동이 재학생들에 의해서 추진된 이후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0년 난징대학교에 이어 중국에서 2번째로 여학생 입학을 받아들였다. 중일전쟁 중인 1937년에 국민정부가 칭화대학, 난카이[南開]대학과 함께 후난성 창사[長沙]의 오지(奧地)로 모아서 합병하여 창샤임시대학교로 만들었다가 1938년 다시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으로 옮겨 시난[西南]연합대학을 조직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연합대학은 해산되어 각각의 학교로 분리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2년의 대학 재편성에 의하여 옌징[燕京]대학을 합병하고 칭화[淸華]대학과의 조정이 단행되어 문·이과계의 기초이론을 중심으로 한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52년 베이징 도심에서 옛 옌징대학 캠퍼스 자리로 옮겼으며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1970년까지 3년 동안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1977년부터 국가통일 입시제에 의하여 입학자를 선발하고 있으며 2000년 베이징의과대학교를 합병하여 베이징대학교 보건 캠퍼스를 조성하였다.
.출처: 베이징대학교[Peking University, 北京大學(북경대학)] (두산백과)
3). 베이징대가 태학.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은 내용
가). 경향신문 홍인표의 차이나 투데이 2011.4.26 보도기사임. 홍인표는 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경향신문 기자임.
베이징대가 태학, 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은 국립대학이다...
나). 중국어판 북경대학 소개자료.
http://wenku.baidu.com/view/3c077fda6bec0975f465e290.html
위에 나타난 baidu. 필자가 첨언하면 Baidu는 중국의 百度文库(백도문고)입니다.
북경대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北京大学
北京大学,
中国最高学府,
创办于
1898
年,
初名京师大学堂,
是中国第一所国立大学,
也是中国近代最早以
“
大学
”
北大传承着中国数千年来国家
最高学府
——
太学(国子学、国子监)的学统,既继承了中国古代最高学府正统,又开创了
中国近代高等教育先河,可谓
“
上承太学正统,下立大学祖庭
”
。在中国近现代史上,北大始
终与国家民族的命运紧密相连,深刻的影响了中国百年来的历史进程。
필자가 주안점을 두는 문구는 다음 문구임.
北大传承着中国数千年来国家
最高学府
——
太学(国子学、国子监)的学统,既继承了中国古代最高学府正统,
북경대는 중국 수천년의 국가 최고학부를 전승해오고 있다. 태학(국자학, 국자감)적 학통-
중국고대 최고학부정통을 이전에 계승했었다.
4. 서유럽은 교황, 각국 국왕, 로마가톨릭의 성직자들이 대학을 세우는데 관여를 해서, 교과서상의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은 Royal.Imperial대학입니다.
1). 너무 잘 아는 정설상의 대학이름이지만, 볼로냐 대학의 설립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봅니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공인이나 칙령도 중요합니다.
....1088년 페포네(Pepone)와 로마 법학자 이르네리오(Irnerio)가 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교회법(Canon)과 민법을 가르침으로써 볼로냐 법학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115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1190)는 이 지역의 학생집단을 자치단체로 공인하고 칙령을 내렸다. 당시 학생들은 도시로부터 독립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볼로냐대학의 핵심이 되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사(校舍)를 짓고, 법학뿐 아니라 신학·철학·의학도 강의하게 되었는데, 특히 의학부는 세계 최초로 해부학을 교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1802년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이전까지는 프리드리히 1세가 칙령을 내린 1158년을 대학 설립일로 삼았지만, 19세기의 역사학자인 조수에 카르두치(Giosuè Carducci)가 1088년에 처음으로 교육기관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밝혔고, 2000년 세계 최초의 대학임을 강조하기 위래 ‘모든 학문이 퍼져 나간 곳(Alma Mater Studiorum)’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지었다. 주정부가 재정을 지원한다.
.출처: 볼로냐 대학교[University of Bologna, ─大學校] (두산백과)
2). 볼로냐 대학관련, 수도원의 대강당에서 강의가 이루어진 역사도 언급됩니다.
11세기에 생긴 볼로냐대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교 중 하나로, 12~13세기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원래 이 대학교는 고정된 장소가 없이, 교황 피우스 4세하에서 아르키진나시오 팔라초가 건립될(1562) 때까지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큰 강당에서 강의가 이루어졌다. 1803년 팔라초첼레시로 대학교가 옮겨갔고 아르키진나시오 팔라초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되었다.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들 가운데는 유명한 법학자인 이르네리우스와 프란체스코 아쿠르시우스(아쿠르시오)를 비롯하여 울리세 알드로반디, 마르첼로 말피기, 루이지 갈바니, 조수에 카르두치 등이 있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 너무 잘 아는 정설상의 파리대학이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 봅니다.
1215년 파리공교회(公敎會)의 부속학교 등을 모체로 하여 설립되었다. 설립 당초에는 모두 같은 성직자 신분을 가졌던 교수와 학생의 연구·교육을 목적으로 한 길드(동업조합)였으나, 13세기에 자치권 획득을 위하여 몇 차례 투쟁을 벌인 결과 로마 교황과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었다...
유럽 전역에서 많은 영재들이 이들 학문을 배우기 위해 파리대학교로 몰려왔으며, 특히 신학부가 유명하였다....르네상스 이후 파리대학교는 근대과학의 발전에 따라가는 능력을 잃고 점차 정체되었다. 프랑스혁명후인 1790년대에는 혁명의회로부터 국권이 미치지 않는 학자와 학생들의 경직된 길드라는 비난을 받고 학부(faculté )라는 명칭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의 '제국학제(帝國學制)'가 확립되면서 다시 학부라는 명칭이 부활되었다.
또한, 국가를 대신하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 인정되고, 1806년에는 교회와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1893년과 1896년에 제정된 2개의 법률에 의하여 1개의 대학구(大學區)에 있는 몇 개의 대학의 집합체에 '유니베르시테(université )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게 되면서 법인격과 재정면에서 자치권을 가진 학부의 통합체로서 파리대학교가 성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지방에도 1개 대학구에 1개 대학교(유니베르시테)라는 시스템이 확립되어 20세기 들어 크게 발전하였다.
1966년 11월에 열린 '제2회 칸회의'(고등교육과 학술 연구 개혁을 위한 최고 전문가회의)에서는 당시 전국 대학생의 30%에 해당하는 20만 명의 재학생을 갖고 있던 파리대학교의 개혁을 중심으로 전국 23개 대학의 학생수를 적정규모(최대 2만 명)로 억제하기 위한 과제가 토의되었다. 여기에서 파리 지역에는 15개 전후의 대학을 설치하는 안이 제출되었다. 그후 '포르 개혁'이라고 불리는 교육제도 개편의 결과 1970년대 초까지 파리대학교를 비롯한 전국 23개 대학의 해체·재편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70여 개의 신제 대학이 구제의 학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교육·연구단위기관으로 발족하였다.
파리대학교가 해체되면서 파리 시내의 '파리대학구'에 파리 제1대학에서부터 파리 제9대학까지가, 시외의 '베르사유대학구'에 파리 제10대학과 파리 제11대학이, 역시 같은 시외의 '크레테유대학구'에 파리 제12대학과 파리 제13대학이 설치되어 모든 국민에게 개방된 신제 국립종합대학교로 재출발하였다.
.출처:파리대학교[─大學校] (두산백과)
4).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파리대학교에 대한 설명입니다.
파리대학교, Université de Paris
1170년경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전형적인 유럽의 대학교.
파리대학교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중세기 대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교수와 학생 조합이었다. 교황의 지원으로 파리대학교는 곧 알프스 산맥 이북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정통 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말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대학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교육 중심지였다. 이 대학의 명망 있는 교수들로는 알렉산더 오브 헤일스, 성 보나벤투라,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처음에는 4개 학부, 즉 3개 '상급과'인 신학·교회법·의학과 1개 '하급과'인 예과 등이 있었으며, 예과에서는 3학(문법·수사학·논리학), 4과(산수·기하·천문학·음악), 일반과학·문학·일반문화 등을 가르쳤다. 예과에서 특별히 중요한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다. 각 과는 학장에 의해 감독되었으며 예과 학장은 14세기에는 대학구 총장(rector)이라는 직책 아래 대학 집합체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많은 단과대학이 설립되었는데, 파리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단과대학은 1257년에 신학자 로베르 드 소르봉이 설립한 소르본대학이었다. 그 강의실들은 수많은 신학 논쟁의 장이었기 때문에 소르본이라는 이름은 파리대학교 신학부를 일컫는 일반 용어가 되어버렸다.
파리대학교는 정통 로마 가톨릭의 대변자였으며,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에 기초한 교육 프로그램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결과 이 대학은 르네상스기의 인문학에는 거의 기여한 바 없으며, 종교개혁과 그에 잇달아 일어난 반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1789~99)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도 재조직에 의해 파리대학교는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대학교의 한 아카데미가 되었다. 1886년 신학부가 없어진 것을 비롯해서 파리대학교의 몇 개 학과는 나중에 폐지되었으며, 과학이나 약학 같은 과들이 새로 신설되었다. 대학 교육은 정치적·종교적 교의와는 독립하여 세속화되었다. 교육을 총괄·조직화하는 중앙본부로서의 프랑스대학교가 공교육부에 자리를 내어준 20세기 중반 파리대학교는 다시 과학적·지적 중심지로서 명성을 되찾았다. 뛰어난 교수들이 강의를 맡았으며 그 수는 600명을 넘었다. 1968년 5월에 소르본 대학생들이 시작한 저항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를 분권화하고 학생들을 대학 행정에 보다 많이 참여시킨 교육개혁이 일어났다. 이것의 결과로 1968년 프랑스 고등교육법이 재정·시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파리대학교 및 파리지역의 대학들이 파리제1대학교, 제2대학교 등 13개의 국립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5. 성균관대는 세계사의 정설 대학들인 국자감 후신 베이징대(Peking University, 1998-09-25부터. 국자감에서 대체되어 경사대학당, 베이징대로 변천 계승), 볼로냐 대학(University of Bologna, 1998-09-25부터), 파리 1대학(University of Paris I, 1998-09-25부터)과 학술교류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학 명칭은 인터넷에 나타나는 바, 그대로 성대 국제교류처(국제교류팀 이충일 )에서 사용하는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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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2.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http://blog.daum.net/macmaca/1900
3.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4.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733
5.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6. 2차대전 결과와 상관없이,세계사와 한국사를 바꾸지 못하면, 교과서(백과사전,학습서), 학술서적상의 기득권 대학 학벌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812
7.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