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에 대한 견해. 고려말에 생긴 삼국유사에서 발췌한 민족신화로서 인정은 해야하지만, 역대문헌에 증빙할 근거가 없어서 고찰할 수가 없다는 문헌고증적 사관이 현실적일것.
I. 역대문헌에 증빙할 근거가 없어서 고찰할 수가 없다는 서술.
단군 조선기(檀君朝鮮記)
동방에 초기에는 군장(君長)이 없어서 백성이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여름에는 나무 위에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서 지냈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영변부(寧邊府) 묘향산(妙香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는데 성스러운 덕[聖德]이 있었으므로 백성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부르기를 단군이라고 하였다. 이때가 당요(唐堯) 25년(서기전 2333년) 무진(戊辰)이고 우리 대한의 개국 기원전 3734년이다. 역대 문헌에 증빙할 근거가 없어서 고찰할 수가 없다.
.출처: 국사편찬위에 나온 역대 국사교과서.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에 편찬된 동국역사 권수(卷首).
II. 민족신화로 언급하는 서술. 역대 국사교과서 중 대한민국 수립후 제1차 교육과정중 고등학교 국사에 나오는 서술.
민족 신화(民族神話)
고려 때 승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우리 민족 신화로 단군(檀君) 얘기를 전하고 있다. 그 얘기는 환인(桓因)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계를 다스리려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베풀고, 풍백(風伯)⋅우사(雨師, 비를 맡은 신) 등과 함께 인간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 보았다. 이 때에 곰(熊)에서 변하여 사람이 된 여자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곧 이 이가 단군(檀君)인 것이다. 단군은 평양(平壤)에 도읍(都邑)을 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를 “조선”이라 부르기는 오래 전부터인 일이다.
이 신화는 앞서 말한 선사 세계를 무대로 하고 살던 우리 조상들이 지니었던 재미있고 아름다운 얘기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지니는 여러 종족들이 일찍부터 널리 동북 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었다. 환인이 신시에 내려오매 여러 종자(從者)들이 곡물⋅사람의 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을 맡아 관리하였다 하여서, 우리들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공동체(共同體)를 이루고 있던 우리 조상들의 사회 생활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그들은 자연(自然) 세계를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살던 때의 정치와 제사(祭祀) 두 가지를 같이 맡아본 이가 단군이며, 그가 이룩한 나라가 조선이니, 곧 오늘 우리들이 말하는 고조선(古朝鮮)이다.
.출처:역대 국사교과서. 대한민국 수립후 제1차 교육과정중 고등학교 국사에 나오는 서술.
@ 삼국유사에 대한 두산백과의 서술.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 출처:삼국유사[三國遺事] (두산백과)
. 필자 주 1). 삼국유사 편찬연대는 1281~1283사이 고려 후반기. 중 일연이 지은 野史.
국어사전에서 有史以來로라는 말은 사용하지만, 일부 언론이 사용하는 단군이래란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없는 상태임. 이런 사항을 참조하여도 삼국유사는 역시 野史임.
삼국사기는 正史고, 삼국유사는 野史라는 전통적 史觀이 지금도 옳다고 판단함.
@ 교육과정에 대한 설명. 대한민국 수립후의 1차 교육과정은 1955년이라고 함.
한국의 교육과정은 ① 8·15광복 후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교수요목을 제정하여 교과서를 편찬하여 쓰던 교수요목시대 ② 정부수립과 6·25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사조에 따라서 신교육이 강조된 1955년의 1차 교육과정 개정 또는 교과과정시대 ③ 5.16 군사정변후 민족주체성과 경제발전이 강조된 1963년의 2차 교육과정 개정 ④ 학문중심의 교육과정에 따라 산업화사회에서의 국민의 자질함양과 인간교육을 강조한 1973년의 3차 교육과정 개정 ⑤ 경제 제일주의로부터 복지사회와 정의사회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실시된 1981년의 4차 교육과정 개정 ⑥ 고도산업화, 국제관계의 다원화, 평화통일 등에 대한 대응으로 실시된 1987년의 5차 교육과정 개정 ⑦ 국제개방화 및 정보화사회 등의 환경에서 도덕성, 공동체의식, 민주성, 창의성 등을 위한 1992년의 6차 교육과정 개정 등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변천되어 왔다. 6차 개정 과정에서는 주요외국 중고교 학생들의 수강 교과목이 10여 개인데 비해 20여 개를 넘는 한국 학생들의 교과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다. 1997년 제7차 교육과정은 21세기의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며 살아갈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출처:교육과정 [curriculum, 敎育課程] (두산백과)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2.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733
3.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4. 2차대전 결과와 상관없이,세계사와 한국사를 바꾸지 못하면, 교과서(백과사전,학습서), 학술서적상의 기득권 대학 학벌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1812
5.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