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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의상학과 복식사 연구실 참가. 7.2~7.4까지 대구시와 밀라노시의 MOU체결기념 '2015 밀라노 엑스포 특별전시회'

성균관대 의상학과 복식사 연구실 참가. 7.2~7.4까지 대구시와 밀라노시의 MOU체결기념 '2015 밀라노 엑스포 특별전시회'

 

성균관대에서 발행하는 성대뉴스에 보니까 이 내용이 나옵니다. 엑스포나 조선시대 궁중여성의 복식에 관심있으신분이 학술이나 문화생활에 반영할 목적으로 참가하시면 도움될것이라 판단합니다.

 

@ 엑스포 설명

각 나라의 문화와 정보를 교환하는 축제의 장. 엑스포 기원은 2500년 전 페르시아제국 때 개최된 ‘부()의 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BC 5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아하스에로스왕은 제국의 부와 영화를 과시할 목적으로 각국 대표를 초청해 6개월간 전시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 후 과학기술 발달과 함께 1569년 독일 뉴렌베르크 시청에서 개최된 박람회가 산업박람회 효시로 간주된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일명 수정궁 박람회)가 꼽힌다. 엑스포는 인류 문명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는데 1889년 파리 엑스포를 위해 건설된 에펠탑을 비롯해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벨의 전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미국의 자동차, 비행기가 실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BIE라고 하는 국제박람회기구가 엑스포를 관장하고 있다.

. 출처: 엑스포(매일경제).

@ 2015 밀라노 엑스포

 

2015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은 진행중입니다. 

. 기간
2015.05.01(금) ~ 2015.10.31(토)
 
. 장소
이탈리아 밀라노

@ MOU

 

예스폼 서식사전에 의하면 MOU는 memorandum of understanding의 약자로 나타납니다. 일반적인 한국 용어로 양해각서로 표현되는군요. 

 

@ 성대 뉴스에 나타나는 영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2015 MILANO EXPO

 

2015 July 2nd(Thu)-4th(Sat).

 

Urban Center,Milano,Italy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Royal대 체제. 


.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이전, 유일무이의 최고(最高, 最古)대학이던 성균관(泮宮.學宮으로도 불림). 고종때 과거시험대신 졸업시험에 통과하도록 하던 제도 변경등이 있었음. 일본강점기때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강등되는 왜곡도 겪었지만, 을사조약이 무효라 성균관 경학과(성균관)의 최고대학 자격은 유지해온 성균관임. 해방후 그 당시 한국사회에서 전통적 신분이 가장 높던 유림 양반들이 모여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독립투사이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현직의 김구주석을 고문으로 하고, 박은식 선생등과 함께 경학원에서 강의하시던 당대의 대 유학자 중 한 분인 심산 김창숙 선생(임시정부 독립투사 출신이라, 그 당시 국내 정서상 국내에 있던 관학파들보다 유리한 자격을 가졌던 분 같음)을 위원장으로 하여, 과거의 성균관에 大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가 된것임. 원래 성균관(성균관 경학과)이었으나, 일본강점기에 격하된 명륜전문학교를 토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대학자격을 복구시켜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결의하여, 600년 역사를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대학이 성균관대임.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출판전에는 민주공화정 체제가 된 정부의 공식방침이라기보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참여와, 역사.사회적 관습의 성균관장 및 유림양반들이 복구시킨 대학이 성균관대였음.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을사조약 당시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라는 국내법적 태도와, 국제관습법 영역에서 프랑스 프란시스 레이교수의"을사조약 무효"이론이 있었으므로, 국내법과 국제관습법상 을사조약은 무효였고, 부분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일본의 논리가 있어도 이는 당사자인 주권국 대한제국의 국내법과, 국제관습법상 무효이므로, 을사조약및 그뒤의 한일병합은 무효고 강제로 맺은 불법적 주권약탈에 해당됨.

 

1963년 UN 국제법위원회가 1905년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법리적 의견을 제시하고, 박정희 대통령때 한일 기본 조약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이전에 체결된 조약.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반영하면서, 단지 관습상의 유림양반들만 역사적으로 설치복구시킨 성균관대로 머물지 않고, UN차원의 을사조약 무효이론을 차용할 수 있게 됨.      

 

. 필자 주 1). 한일 기본조약 제 2조에 대한 필자 의견.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일본의 주장은 한국과 다릅니다. 한국은 불평등조약으로 강제.협박에 의해 그 당시부터 무효인 을사조약 및 그 후에 이어진 한일병합 자체를 불법으로 보고 원천무효임을 주장하는 상황인데, 필자는 한국의 입장을 당연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2조에서 나타나는 "이미 무효"는 그 당시부터 원천무효라는 입장으로 필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두산백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협정 제2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 을사조약의 효력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고 보지만, 일본에서는 1965년 협정 이후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한국은 국제 관습법()에서 강제와 위협에 기초한 조약 체결은 무효로 하므로 을사조약도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본다. 당시 국가를 대표했던 고종()의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종이 친서()와 밀사(使) 등으로 국제 사회에 조약이 무효임을 꾸준히 밝혔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출처: 을사조약의 영향과 반대투쟁(두산백과)

 

한편, 1988년에 시행된 현행 헌법[시행 1988.2.25., 헌법 제10호, 1987.10.29., 전부개정]

에는 임시정부 조항이 반영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조항으로 이전의 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 및 한일병합이 헌법상 무효고, 일본및 추축국에 선전포고한 강행법 형식의 헌법조문으로 반영된 과정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박정희 대통령때 시작하여, 그 후 노태우 대통령때인 1988~1991년까지 순차적으로 전 27권이 발간됨.

여하튼 대통령령으로 발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한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은 해방후 설치(복구 설치)된,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임.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대해 두산백과는 이렇게 설명함.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9268호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이 공포되면서 사업수행을 위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추진위원회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업무를 위탁, 1980년 4월 15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가 발족하였다.

정부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받은 편찬부는 편찬업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연인원 7,000여 명의 전문분야 학자들을 집필에 참여시켰다. 수록항목은 민족문화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약 6만 5,000항목을 선정하였다. 1980∼1987년을 편찬 준비기간으로 정하고 원고집필과 자료수집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88∼1991년에는 순차적으로 전27권을 발간하였다.

이 기간에 175억 원의 국가예산이 투입되었고, 200자 원고지 42만 장이 원고 작성에 쓰였다. 사전 1권의 분량은 950쪽 안팎이며, 부록 1권은 편람이고, 나머지 1권은 총색인이다. 수록된 도판은 4만여 장이다.

   



. 필자는 한국에서는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세계사 반영. 세계적 지명도와 네트워크의 교황청산하 예수회 서강대인데, 그 능력으로 국내에서 성균관대에 협력)의 Royal대학으로 필자가 세계에 발표하여왔으며, 다른 대학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며 이 Royal대 체제에 넣을 대학도 없음. 


그러나 대중언론에서는 宮 성균관대에 항거하는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한국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되는)뒤에서 연세대.고려대 대중언론 카르텔을 형성해왔음.   

 

@ 그래서 궁 성균관대=어 서강대의 공식적 Royal대학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박정희 대통령이나 그 뒤의 육사출신 노태우 대통령등의 Power가 성균관대 역사를 복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판단하여 한국 국내에서는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 체제에서 육사 출신들을 지속적으로 중용하는 방책이 옳은것 같음. 방송으로 의견표시하는것은 차후부터 인정치 않겠으며, 철저히 무시하겠음. 다만, 대중언론에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의 왜놈학교 후신들은 축출하고, 한국 영토에서 주권이 없게하는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정신은 지속적으로 국가차원에서 적용하여야 할 것임.  

 

포츠담선언 8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 카이로선언의 조건은 이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 및 우리가 이미 결의한 바와 같은 작은 섬들로 제한되어야 한다.

     

    위키백과에서 한국관련 카이로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 필자 주 2). 필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을사조약은 그 당시부터 무효였으므로,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축출)될 것이다. 그리고 UN 국제법위원회도 그렇게 법리적 의견을 제시하여서 이 조항을 적용하여야 할것입니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임시정부가 일본등에 선전포고하여 프랑스.러시아.폴란드 정부로부터 승인받아서, 임시정부는 국내법과 국제법상 그 당시부터 자격이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일본등에 선전포고하면서

    일체의 불평등조약과 한일병합(한일합병)등이 무효라고 하였습니다.

     

    한국 헌법상으로는 1988년에 반영된 임시정부 조항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엑스포의 역사와 전통을 더 잘 이해하고, 한국 궁중여성의 복식을 통하여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도움이 되라고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