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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독부가 강제로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던

일본 총독부가 강제로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던 범죄사실이 있음. 출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일본 위안부 문제는 UN에서 문제 제기한 중요한 문제.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것.



1. 한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hermuseum.go.kr/

2. 일본 총독부가 강제로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던 범죄사실. 출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다.

한국을 강제.불법.무단 점령했던 일본 강점기 마지막 총독 아베노부유키!

 

1). .............정신대와 관련하여 그의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서술.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다.

 

이러니, 정신대(군 위안부)관련, UN차원에서 문제 제기를 한 것이고, 2차대전 당시에 군사재판도 받은것 아니겠습니까?

 

* 필자 주 1). 필자가 볼 때, 아베 노부유키가 그 당시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그는 무혐의로 풀려날 대상이 아닌것으로 판단됩니다. 전쟁범죄는 시효만료가 없습니다. 한국은 원래부터 을사조약 체결당시부터 국내법상 을사조약이 강제.불법이라 인정하지 않아왔던 나라입니다. 이는 프란시스 레이 교수의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국제관습법적 의견으로도 표출되었던 바 있습니다.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였던 한국의,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對日 선전포고한 승전국(확정된 건 아니며, 가설상태 의견으로,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에 대한 패전 협정을 이끌어 내는 노력도 해볼 필요가 있음. 그러나, 일본이 응해줄 가능성은 없음) 입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상호협정을 맺은 패전국은 아니며,  UN에서 을사조약은 무효라고 국제법 의견이 제시되었고, 한국헌법은 임시정부 조항이 반영되어 대일선전포고 조항이 유효하며, 한일병합등이 무효입니다. 아베 노부유키 뿐만 아니라, 일본 강점기 경성제대 강제 설립(경성제대 후신이 해방당시 말 많던 현재의 국립 서울대. 한국 영토에서 주권이 성립되지 않고 축출해야 되는 일본 강점기 잔재)등 여러가지 교육조치 및 유교국가이던 대한제국(조선.한국)에 대해 일본 총독부가 펼치던 강제 종교 포교 정책(일본 신도, 불교, 개신교 중심 기독교 및 가톨릭 극소수 성당), 일본인화하려던 민족 말살정책(각종 외교권.군사권.치안권.행정권.교육주권의 약탈, 신사참배 강요, 일본어 사용, 일본교육 강제, 일본 교육기구 설립, 창씨개명, 자원수탈, 강제 징용.징집등)에 대해 지금이라도 다시 패전국 일본의 전쟁범죄로, 대한민국의 자격(일본에 선전포고도 한 임시정부 조항이 헌법에 반영됨)으로 행정처분, 특별재판부 구성(일본 강점기 잔재청산을 위한 상설 위원회도 구성해야 됨)에 의한 특별재판, 군사재판등 다양한 청산방안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자세한 서술

 

Abe Nobuyuki , 阿部信行

출생 1879, 이시카와 현[石川縣]
사망 1953
국적 일본

1879 이시카와 현[石川縣]~ 1953. 
일본의 제9대 조선총독.

..그후 중국파견 전권대신을 거쳐 익찬정치회(翼贊政治會) 총재, 귀족원의원을 역임했고, 1944년 7월에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徵兵)·징용(徵用) 및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의 기피자 색출에 광분했으며, 심지어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다.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9월 9일 이후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 필자 주 2).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다. 정신대에는 위안부가 포함되므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린 그 강제 행위 그 자체로, 위안부 관련 일본의 전쟁범죄는 책임을 피할수 없음.

2-1). 군대 위안부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서술.

정신대

挺身隊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한 여성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역사적 배경

태평양전쟁 당시의 군인들과 정신대원들

한일합병이 된 1910년부터 조선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넘겨 매춘행위를 시키는 일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빈발하자 그 대책으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중장은 나가사키[長崎]의 지사에게 군대위안부 유치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 위안부를 끌어들인 첫 시기로 보여진다. 그후 1937년 난징[南京] 대학살 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시민을 강간하는 포악행위가 드러났으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종군위안부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여성이 전통적인 유교교육 등으로 성병의 위험이 없으리라는 판단으로 미혼의 조선 여성을 종군위안부의 적절한 대상으로 정했다. 근로정신대의 경우는 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제사·방직공장 등에 조선 여성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다.

모집과 동원

중일전쟁이 전면전쟁으로 확대된 후인 1937년 8월 24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통해 '국민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을 가결했다. 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따라 여성의 활동이 장려됨으로써 여성의 전쟁 참여가 촉진되었다. 1941년 11월 '국민근로보국 협력령'에 따라 14~25세의 여성에게 연간 30일 이내의 국민근로보국 대협력활동을 하도록 했다. 1942년 8월 국민징용령 제2차 재정에 따라 여성의 징용은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나 자주적 참여를 원칙으로 여성의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1943년 9월에는 17개 직종에 관한 남자취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고 여성을 취업하게 함과 동시에 일제는 '여자 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 '여자근로정신대'를 자주적으로 편성시켜 모든 여성의 동원을 도모했다. 정신대는 1~2년간에 걸친 장기동원이었다.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이 공포됨으로써 1년 동안의 정신근로를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여성에 대해서는 국민등록이 시행되지 않아 원칙적으로는 법적 강제력을 갖는 징용은 행해지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이 행해졌다.

1941년 12월 이후 조선에서의 여자몰이가 본격화되어 지원과 동원을 위한 강연회와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라는 문서에 의하면 병사 29~35명당 1명의 군대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군부는 필요한 인원수를 산출해 면사무소 등을 이용해 폭력을 사용하거나 "군인의 심부름을 한다"는 말로 속여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조선 여성을 수송해갔다. 현재 정신대에 여성들이 언제부터 끌려갔고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37년 중일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예상되며 정신대의 전체규모는 17만~20만 명으로 이중 80% 정도가 조선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신대의 활동

정신대는 노동력을 주로 착취당한 근로정신대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종군위안부로 나뉘는데, 몇 가지의 증언으로 미루어 근로정신대로 차출되었으나 뒤에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근로정신대는 일본의 도야마[富山]·시즈오카[靜岡] 등지와 대구·부산·광주 등의 군수공장과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임금도 받지 못하고 굶주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종군위안부의 경우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가 군의 감시와 통제 아래 군인들의 성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미얀마, 트랙 섬, 필리핀, 테니안 섬, 마리아 군도, 수마트라, 셀레베스, 인도네시아, 오키나와[沖縄] 등에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유지와 관리, 위안부의 배치와 막사 등도 군이 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안소의 규정을 보면 군인이 위안소 안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고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자는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위안부들은 보통 하루 12시간 정도 군인을 받는데, 이른 시간에는 병사·하사관을 밤에는 장교를 주로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월 3회가량 성병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고 외출 등의 사적인 행동은 엄하게 규제되었다. 전쟁에 지쳐 있는 군인들의 유일한 '놀이감'으로 제공되는 위안부에는 매춘업을 하던 일본인 여성도 있었으나 이들은 돈을 선불받고 그 돈을 갚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인 위안부는 "흰밥을 배불리 먹고 돈을 번다"는 말에 속아 갔거나 강제로 끌려간 나이 어린 미혼여성으로 하루 30~10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과 수치심에 많은 수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출처: 정신대(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필자 주 3).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라는 문서에 의하면 병사 29~35명당 1명의 군대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공적 문서 하나만 가지고도 일본의 위안부 관련 전쟁범죄는 심판을 받을 증거에 해당됩니다.  

 

3). 두산백과의 서술

 

아베 노부유키

Nobuyuki Abe(아부신행) ]
요약
일본의 정치가·군인. 히라누마 내각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어, 중일전쟁의 조기 타결, 제2차 세계대전 불개입정책을 세웠으나 군부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부임,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제 36대 일본 수상을 역임하였다.
 
출생-사망 1875. 11. 24. ~ 1953. 9. 7.
국적 일본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일본 이시카와현[]

.... 이후 여러 직을 거치다가 1944년 제 10대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또한 미혼 여성을 강제로 끌고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전선에 보내 위안부로 만들었다.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로 들어오자 미군 사령관 J. R. 하지 중장 앞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A급 전범자로 체포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설 예정이었으나 개정 직전에 증거 불충분으로 전범자 리스트에서 빠졌다. 육군항공대에 들어간 아들은 영국 함대와 교전 중에 죽었다. 1953년 79세로 사망하였다.

 

.출처:아베 노부유키[Nobuyuki Abe, 阿部信行(아부신행)] (두산백과)

 



3. 다음은 한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서 발췌한 최근 기사들입니다. 일본은 현 정부 들어 너무 국가적으로 일본의 위안부 문제등을 왜곡하며 그들의 잘못을 국가차원에서 덮어버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반성하려는 자세가 전혀 없으니까 민간인들도 이런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서, 국제사회의 질타와 동 떨어진 길을 가도록 오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 유엔 토론회서 "군위안부 가해자 처벌" 한목소리

2015/03/13 연합뉴스 기사.

(유엔본부=연합뉴스) 이강원 특파원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시 성폭력의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http://www.hermuseum.go.kr/sub.asp?pid=38&formtype=view&code=1079&category=&target=&keyword=&page=1

2). 일본정부, 군 위안부 다룬 독일교과서도 문제삼나

2015/03/13 연합뉴스 보도

http://www.hermuseum.go.kr/sub.asp?pid=38&formtype=view&code=1077&category=&target=&keyword=&page=1

3). 박 대통령 "군 위안부 문제해결, 한일관계 개선 첫걸음"


http://www.hermuseum.go.kr/sub.asp?pid=38&formtype=view&code=1079&category=&target=&keyword=&page=1


4).<朴대통령, 日에 역사직시 촉구…北엔 교류협력 손짓>


연합뉴스 2015/03/01 기사.




http://www.hermuseum.go.kr/sub.asp?pid=38&formtype=view&code=1060&category=&target=&keyword=&page=2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윤 진한입니다. 성균관대 1983학번, 성대 경상대학 무역학과 입학하여 1988년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