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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 제목: 해방후 미군정당시부터 미군정 당국과 성균관, 전국 유림, 임시정부 요인들 입장은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승계대학이 성균관대였음.


대학의 격을 판단하는 방법은 교과서.백과사전.학술서적에 나오는 유서깊은(또는 Royal)대학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이 가장 학문적이고 교과서적 正說에 근접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1.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이라는 강제.불법의 무효조약을 겪으면서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대학이던 성균관이 일본 강점기와 해방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 많은 대학들(전문대학에서 승격된 대학포함)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세계사에 나오는 중국 漢나라 太學(태학이후는 國子監으로 명칭변경됨. 元.明.淸의 國子監은  淸나라말기 京師大學堂이 되고 경사대학당은 다시 북경대로 변화됨), 중세 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과 파리대학.

 

이 대학들은 세계사란 교과영역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대학들로, 세계사를 배우게 되는 수 많은 새로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시 그 내용을 반복학습시키며 학문적인 정설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고 할 수 있는 대학들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교육되는 위치를 굳혀 국제관습법으로 보호받아야 되는 역사적인 대학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국의 옥스포드나 캠브리지대학도 이런 중세시대의 대학으로 교과서 영역에서 거론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세계사의 정설로 자리잡은 중국의 태학.국자감을 모델로, 한국의 태학.국자감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자감의 명칭은 원나라의 압력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변경되는 과정을 가집니다. 

 

국자감의 명칭은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되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성균감이라 고쳤고(1298년은 충렬왕 24년이지만 이해 1월부터 8월까지는 충선왕이 통치하고 있었던 기간임),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하였다. 그 뒤 1356년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따라 다시 국자감이라 하였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출처:국자감 [國子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균관(국자감은 천자국인 중국만 사용하려는 의도였다고 판단됨)으로 명칭변경되고, 다시 조선초기에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개성에 있던 성균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조선 성균관을 건학하였습니다(개성의 성균관은 당연히 향교격인 고등학교 과정이 되었지요. 조선의 성균관은 유일무이한 최고 대학이었습니다). 이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은 일본강점기에 격하.폐지되는 왜곡을 겪다가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넘은 역사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볼로냐나 파리대학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캠브리지대학), 스페인의 살라망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체코의 프라하대학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대학의 형성이후 교황령의 그레고리오 대학등을 필두로 한 교황청 산하의 예수회 대학들은 세계 최대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아왔다고 합니다. 예수회 대학들로는 한국의 서강대, 미국의 조지타운등 전세계에 분포한 예수회 대학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대륙이지만, 미국같은 경우 2차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화라는 기축통화 발행국으로, UN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가지면서 군사적 초 강대국(군사적으로는 이에 버금가는 나라가 러시아)이 되어 하버드대학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1636 설립) 일류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하나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적 요소를 같이 가진 러시아는 모스크바대학이 수도 모스크바에 소재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분제가 희석되고 기존의 전문대급 대학이었던 학교들이 대학으로 승격되거나 수많은 비신분제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역사적이고 전통적(또는 Royal대학)인 위치로 경쟁상대가 없던 대학들이 여러가지 평가지표로, 또는 대중언론의 기준으로 수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3. 그런데, 한국사에서 배우는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은 해방후에 문교부에 공식 등록된 성균관대가 정설입니다. 성균관(일본강점기에 경학원이나 명륜전문학교등으로 격하되었다가 해방후에 성균관으로 복구됨)이 복구되어 김창숙 선생이 1945년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설립결의된 성균관대를 성균관대신 1946년, 대학 교육기구로 미군정당시의 문교부에 공식 등록시켰습니다. 이런 과정때문에, 성균관대 역사, 성균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리고 두산백과 및 종교학 대사전, 그리고 여러가지 학습사전, 시사 상식사전들은 이의없이 성균관대를 조선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 우선 조선시대 성균관과 이름이 동일한 현재의 성균관에서 언급하는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 성균관의 역사

 

 

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禮』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同)지사 2인은 겸관(兼官)이었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司藝) 3인, 정5품 직강(直講)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博士) 3인, 정8품 학정(學正) 3인, 학유(學諭) 3인, 정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ㆍ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정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大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ㆍ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또 『실록 實錄』의 기록에 나타난 교수의 한 방법은, 즉 태종 13년(1413) 대사성 권우(權遇)의 상서로 정부가 결의한 것인데, 성균관 학생은 1개월 가운데 20일은 경서를 읽고, 4일간은 배운 것을 고강(考講)하고, 6일간은 과거의 문장인 제술을 실시하여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경서의 다소(多少)와 고강 및 제술의 분수(分數:9등급의 점수)를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식년에 이르러 분수를 총계하여 상등 5명 내지 10명을 ‘대성(大成)’이라 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전계(轉啓)하여 관시(館試: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會試:覆試)를 보게 하였다. 그 이하는 모두 관시를 보게 하였다. 그리나 사학에서 승보(升補)된 기재생은 소성(小成)ㆍ대성을 막론하고 모두 생원시를 보도록 하였다. 이 방법은 후에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성균관의 교수방법에 있어서 한 표준이 되었다. 또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식당에 참여하는 점수를 원점(圖點)이라 하는데 아침ㆍ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윈칙이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례(相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ㆍ『맹자』는 각 4개월, 『시경』ㆍ『서경』ㆍ『춘추』는 각 5개월, 『주역』ㆍ『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독서할 때는 글 뜻을 명백히 이해하여 응용에 통달하도록 하였고 장구(章句)에 얽매여 글의 뜻을 해치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후기로 갈수록 지켜지지 않고 주자장구(朱子章句)에 얽매이는 태도로 경직화되었다.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ㆍ재뢰(財賂), 그리고 주색(酒色)을 말하면 안 되고, 시세에 따라 권세에 아부하여 벼슬길을 찾아도 안되었다. 또한 유생들은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 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 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되었다 유생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재(齋)였다. 상재생은 하재생이 과실이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였다. 벌의 종류는 식손(食損:식당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 輕重에 따라 날수를 달리함)과 출재(黜齋:재에서 퇴거하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엄한 편이었다. 자치 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재회의 임원으로 장의(掌議)ㆍ색장(色掌)ㆍ당장(堂長)ㆍ조사(曹司) 등이 있었다. 당장은 회의 석상에서 선출되는 임시 의장의 구실을 하였고 조사는 좌중에서 최연소자로 뽑아 서기 구실을 하였다. 장의는 회장이고 동ㆍ서재 각 1명으로 2명, 색장은 4명으로 식당에서의 검찰(檢察)을 맡았다. 성균관의 대내적인 문제는 대개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대외적인 문제 가운데서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치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여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면 일종의 수업거부인 권당으로 맞섰으며, 권당으로도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공관(空館)을 하였다. 공관(空館)은 유생들이 문묘의 신삼문(神三門) 밖으로 네 번 절을 하고 일제히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권당의 횟수는 중종때 1, 명종 때 4, 광해군 때 2, 인조 때 2, 효종 때1, 현종 때 2, 숙종 때 16, 경종 때 2, 영조 때 18, 정조 때 16, 순조 때 14, 헌종 때 4, 철종 때 5번 있었다. 초기에는 유학의 근본 이념에 맞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행하여졌지만 후기에 갈수록 우세한 당파(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제 여론의 데모화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장의가 노론 1인, 소론 1인이 뽑혔던 데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변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책 결정이나 인사 문제, 문묘의 승무(陞廡)문제 등에 유소와 권당의 영향은 크게 작용하였고, 관리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년(1601)에 재건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후대 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말기의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96칸(間)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ㆍ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성(四聖:顔子ㆍ曾子ㆍ子思子ㆍ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宋)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廡)에는 주ㆍ한(漢)ㆍ진(晋)ㆍ당(唐)ㆍ원(元)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북쪽에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남향으로 18칸[間]이다. 동ㆍ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 가운데서 활쏘기[射]에 관련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 존경각ㆍ비천당을 비롯하여 진사 식당(進士食堂)ㆍ정록청(正錄廳)ㆍ향관청ㆍ양현고(養賢庫) 등 넓은 교육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양현고는 성균관 학생의 식사와 등유(燈油)ㆍ돗자리[(鋪席)] 등 여러 가지 교육 기구와 석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 예종 14년(1119)에 안유(安裕)의 건의로 창설한 일종의 장학 기관이다. 그 재원은 학전(學田)과 노비(奴婢)에 있었다. 그 규모는 태종 때 1,000결(結:1결은 약 3,000평. 토지의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의 토지와 300구(口)의 노비가 있었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감이 있었다. 현재에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에서는 양현재(養賢齋)를 그대로 두고 교육과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ㆍ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나타나는 616년 역사

 

600년 민족교육의 산실 성균관대학교-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민족의 얼을 계승해 나아가는 민족의 대학으로 남아있으리라!

현대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나, 그 중에서 제1 시기로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李錫九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3).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및 , 두산백과, 기타 여러 사전 및 학술서등에 서술된 600년 역사의 성균관대 역사

 

http://blog.daum.net/macmaca/733


4). 성균관대학교는 일본 강점기때, 최고대학 지위가 상실되면서 명륜학원등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런 왜곡과정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을사조약이나 한일병합을 이 출판사가 인정하고 있는건가?" 오해가 생길수 있는 어법도 있습니다. 대학이었는데 일제시대에 명륜학원이 되고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니? 이와 관련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어법을 중심으로 그 어법을 분석하고 설명하여 오해를 방지할까 합니다.  

 

가).일본 강점기 관련, 두산백과에서 성균관대학교 역사에 대해 사용하는 어법.   

 
성균관대학교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 출처: 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두산백과)
 
* 필자 주 1). 위의 본문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국권피탈후 일제가 교육기능을 박탈하였다가,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이런 설명입니다. 교육기능을 박탈했다가, 일제가 주체가 되어 전문학교 미만격의 명륜학원을 설립하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킨것입니다. 그러다가 명륜전문학교도 폐교시켜버리니까, 해방후 미군정당시 성균관의 명칭복구이전까지는, 불가피하게 명륜전문학교도 임시로 부활시켜야했습니다. 필자가 조금 더 설명하면, 1945년 11월의 전국 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를 설치키로 결의(형식논리상 1946년 가을에 복구 설치된것)한 후, 1946년 봄 전국 유림대회(1945년 11월의 전국 유림대회와 시기가 다름) 당시 김창숙 선생은 성균관의 관장직위를 가지고 계셨는데(이 때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도 선출되심), 1946년 가을(9월 25일)에 김창숙 성균관장이 미군정 문교부에서 성균관대(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 결의로 성균관대 설치 결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주 복잡한 복구과정을 거쳤습니다.   

* 필자 주 2). 위의 내용 관련한 자료입니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 출처:김창숙[金昌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 1945년 11월 전국 유림대회에서 사용한 용어는 성균관대학 설립보다 설치라는 용어를 다시 쓰는게 더욱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유림들이 결의하기는 성균관대학 설치였는데, 신문기사는 설립이라는 용어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 25일의 인가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는 용어보다는 성균관대학이 사용하는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는 용어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나). 조금 더 부가설명해 둡니다. 위의 과정과 행간에 숨은 뜻을 이해하고, 용어를 제대로 인식하셔야 다른 사전이나 서적을 읽을때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두산백과에서 사용한 어법인 "일제는 부득이"란 단어를 염두에 두시고, 일제가 주체가 되어 교육기능을 박탈했고, 격하된 명륜학원을 설립했고, 격하시킨 상태에서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마저도 다시 폐교시키고 청년연성소같은 기구로 끈질기게 전락시켜버립니다. 이런 격하.왜곡.폐교상태를 겪어서 해방후 미군정 때, 최고대학 성균관을 복구시키기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1946년 봄은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장 직위를 가지고, 최고대학 성균관의 명목상 대학 타이틀도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성균관장이 주체가 되어 공식적인 인가를 받은 대학은 아닌상태의 성균관에서, 성균관대를 1946년 9월 25일 미군정의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것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인해 성균관대가 전문대학 이하의 상태도 겪다가 1946년 9월 25일에야 성균관대를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받아, 형식논리상 이 때부터 다시 제대로 대학으로 공식 복구되었다는것을 이해하셔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 성균관(성균관대) 복구과정입니다.   

 

 

5). 그러면 왜 해방후 미군정 당시 성균관(문묘제사 기관, 문묘제사는 석전대제라고도 함)과 성균관대(대학교육 전담)를 분리하였을까요? 아마 고종때의 조치를 이어받은 듯 합니다. 성균관의 근대 학제로의 변천편에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 필자 주 4). 고종 32년에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 필자 주 5). 여기서의 경학과는 성균관 경학과가 가장 옳은 표현임)]에서 전담하게 하였던 사례를 이어받은 듯 합니다.   

 

 

6). 경학과를 다룰때 성균관경학과라는 명칭이 옳으니, 이에 상당히 주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다음은 국가기록원에 나타난 성균관관제(1895. 7. 2칙령136),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학부령2)입니다.  


성균관관제(1895. 7. 2칙령136)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학부령2)

 

 


배경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공포된 일련의 근대교육법령에 의해 소학교 중심의 학교제도가 구축되면서기존의 교육기관에 대한 법령도 필요하게 되었다대표적으로 기존의 최고 유교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그 대상이 되었다성균관의 전통적 교육을 유지하면서도근대적인 교과를 부분적이나마 도입하고새로운 시대에 성균관 운영을 담당할 직제 개정 등이 요청된 것이다이와 같은 성균관의 부분적인 개혁은 당시 동도서기적 입장에서 서구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개혁의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이들 법령에 의해서 성균관에는 경학과가 설치되었고일제식민지기에는 경학원으로 변경되었다.

 


경과

 

성균관 개혁 법령은 우선 1895년 7월 2 발표된 성균관관제 제정부터 시작되었다이 법령에 의해 성균관은 학부대신의 관리 하에 운영되는 것이 명시되었고문묘의 봉사와 경학과 설치·운영이 규정되었다직원으로는 성균관장(1주임), 교수(2인 이하주임 혹은 판임), 직원(2판임)을 두었다이러한 관제가 마련된 지 1달 후성균관경학과규칙 발표되어 경학과의 운영에 대한 세부내용이 정해졌다이후 성균관관제 1차 개정(1896. 1. 15), 2차 개정(1898. 5. 26), 3차 개정(1908. 10. 29)이 이어졌고성균관경학과규칙 1차례 개정(1896. 7. 16)이 있었다.

 


내용

 

성균관경학과규칙 주요내용은 교육과정수업연한학년입학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특히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경학교육을 유지하면서도본국 및 만국역사지리산술을 부가함으로써 근대적인 교과교육을 도입하려 했다는 특징을 갖는다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업시수를 42매주 28시간 이내로 규정하는 등 학교운영 면에서도 근대적인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입학지원자는 20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로 하고입학시험을 보는 경우와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경우로 구분하였다시험은 임시시험정기시험졸업시험의 3종류로 하였는데임시 및 정기 시험은 이전의 성균관에서도 시행하던 것이었으나 졸업시험은 이제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격의 시험이었다즉 이전에는 성균관에 학적을 두면서 과거에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졸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된 당시로서는 졸업시험이라는 별도의 단계를 두고 이들의 자격을 공인할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다이 졸업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문묘관리 직원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충원되는 자격이 주어졌다.

 


    참고자료


    한기언·이계학·이길상 공편,《한국교육사료집성-개화기편Ⅳ》일반자료총서 93-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이만규,《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7
    정재철,《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일지사, 1985 


    집필자

    최광만(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일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일

    2007. 12. 01


    하위주제
    • 1. 경학원

      「경학원규정」(1910. 6. 15,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관련주제

      

     

     

    4. 교과서.백과사전.학술서적상,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적(대부분은 Royal) 대학들의 전통적 역사와 달리, 현대에는 대중언론의 신문.잡지가 생겨나 이 대중언론들의 시각이 새로운 기준으로 작용하여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언론의 종류로는 TV, Radio, 신문.잡지, 대중의 단체행동, 말로 표현하는 개인들의 의사전달, 대자보등 수 없이 많은 언론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론들의 기사나 보도.표현에, 구독자.시청자가 많아지면 대중언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대중언론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매체들은 많으며, 정부정책과 관계없이 대중들의 의사표현을 단체행동, 신문.잡지, TV.Radio를 통하여 구현시킬수도 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당시의 국대안 반대운동(경성제대등을 국립대로 한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다시 국립 서울대로 바뀌어짐), 얼마전 서강대출신 방송인.가수 양희은씨의 방송중 의견으로 표현되어, 10년 넘게 공중파를 탄 100번 서울대, 국시110브(여기서의 브는 연세임), 중앙일보의 대학평가, 그리고 공식적인 친일파로 불리워지는 방응모의 조선일보식 의견, 친일파 김성수(보성전문 인수 고려대로 변경)의 동아일보식 의견, 그리고 이에 영향받은 다른 대중언론 의견들등, 대중언론의 의견은 아주 다양합니다.

     

    최근의 대중언론으로는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여러가지 블로그, 다음아고라 등 다양하겠습니다.

     

    5. 그런데 대중언론들의 의견과 달리 교과서.백과사전.학술서 중심의 학설로 할때는 국사에서 가르치는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진 성균관대가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는만큼 국사 성균관 중심이어야 합니다. 세계사에 강한 서유럽과 교황청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때문에, 필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의 Royal대학체제는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성균관대 중심의 대학의 학벌부분은 조선왕조 후손들의 제사와는 별개문제입니다.

     

    *  이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차원의 글입니다. 을사조약이후 일본의 불법강점기로 인해,  조선(대한제국)의 교육.종교주권등은 크나큰 피해를 보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피해국 한국인, 피해 당사자인 성균관(성균관대), 유교도의 자격을 가지고 주권회복의 일환으로 자료를 인용하였으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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