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년 전 이완용의 '망언', 문창극 발언과 똑같네 - 오마이뉴스 모바일 -
95년 전 이완용의 '망언', 문창극 발언과 똑같네 - 오마이뉴스 모바일 -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002880
다음은 위의 기사중 일부입니다.
....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완용은 하느님까지 들먹였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상천(上天) 즉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는 "상천도… 두 땅의 분립을 불허하실 것"이라고 못 박았다. 두 땅은 한국 땅과 일본 땅을 지칭한다. 하느님도 일본의 통치 하에서 조선과 일본이 함께 살기를 바라실 것이라는 게 이완용의 말이었다.
그런 다음에 이완용은 식민통치의 우수성을 찬양했다. "총독 정치 10년의 성적을 볼 때, 인민이 향유한 복지가 막대하다는 점은 내외 국민이 공감하는 바다." 한국인의 10%가 목숨을 걸고 시위에 뛰어든 참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식민 통치 10년간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식민통치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의 교과서였다.
뒤이어 이완용은, 식민통치는 우수한 통치이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총독부에 저항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또 일본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자제하자고도 말했다....
* 필자 의견 1). 하느님(하나님) 뜻 언급한게 이완용 복사판이네요. 문창극씨가 일본 기술 예로들며 일본 찬양한거랑 이완용이 식민통치 우수성 찬양한것도 비슷하군요. 위안부까지 더하면 문창극씨가 이완용이랑 거의 비슷한 사고방식 가진 사람 아닐까요? 친일파 윤치호 모방으로 얘기가 끝날줄 알았더니, 을사오적 이완용 복사판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교과서가 을사오적 이완용이라 하는데, 문창극씨는 친일파 윤치호를 언급하며 조선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비치는것 같습니다. 이완용과 비슷한 논리를 윤치호를 언급하며 문창극 후보자가 전달하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이 무능하게 보여도(전통적으로 야만족 취급받던 왜구 배출처 일본보다 한국이 문명국이라 한자.유교.여러가지 문물전해주며 수천년 앞선 문명국이 한국입니다), 조선(대한제국)은 주권국이라 일본이 강제로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무능해 보이는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강제로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한 일본이 잘못한게 맞습니다. 그 당시는 무력이 약한 조선 왕족을 무능하게 만들고, 비난받게 하는 소리는 옳지 않습니다. 고종을 무능하게 보이게 하는 소리도 옳지 않습니다. 그 당시, 무력이 약했지만, 엄연한 주권국가의 수장입니다. 자기가 믿는 유교로 중국 殷나라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占이나 점장이.솥같은 도구를 이용하여,전통 신앙인 유교에 의지하는것도 초월적인 神을 믿는 인류 전통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양반이 공부하는 강독가지고 나무라면 어떻게 합니까? 학문을 위하여 또는 취직.고시 공부한다고 나무라는 사람 있습니까? 純獻皇貴妃 嚴氏(明成皇后와 달리, 後宮.繼妃 성격이라 황후칭호는 부여치 않음)도 안좋게 전달하는데 을사조약.한일병합 당시, 강도같은 일본에 의해 강제.불법적인 위협상황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나약한 계비가 된 한 여인의 방어본능에 해당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고종이 허가하신 배재학당에서 기독교를 접해서 기독교도 알지만, 그 이전에는 과거공부하던 유교도며 그 당시 조선황실의 먼친척으로, 가난한 선비(가난한 양반) 출신에 해당됩니다. 파평윤가인 필자도 돈은 그리 못벌던 향반출신입니다만, 해방후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이데올로기와 정치문화는 '일민주의'(一民主義)와 '유교문화'였다고 합니다. 하긴 이승만 박사와 김구주석이 해방후 "전국 유림대회"에서 일본에 의해 왜곡된 성균관의 복구(大자를 더 붙여 성균관대 설립 결의)에 고문으로 참여한걸 보면,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는 다시 유교적 행태를 보일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유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後發 局地的 일본 신앙인 神道체제에서 세워진 일본학교입니다. 유교나 기독교 학교 출신도 아니면서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의 일본 강점기 학교 출신이 정의하는 구한말과 유교, 해방후 정국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일본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를 졸업한 현대의 문창극이 이완용.윤치호를 다시 모방하여 친일파 이론가 계보를 잇는것 같습니다.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 어떻게 하실겁니까? 필자의견을 말하자면, 최종적으로는 총리 되지 못하도록, 여러분이 합법적으로 가진 권리내에서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디어다음] 일 우익 "문창극처럼 훌륭한 한국인 있다니" http://m.media.daum.net/m/media/politics/newsview/20140613133015570 …
극우 성향 산케이, '위안부 문제 사과 필요 없다' 대서특필
* 필자의견 2). 국제적으로 문제되는 위안부 문제를 문창극씨의 "위안부문제 사과 필요없다"로 일본인들이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트위터에 글을 쓴 선대인이라는 분의 의견입니다.
문창극은 극우인사가 맞다. 다만, 한국이 아닌 일본의 극우인사다. 세상에 자기 민족을 이토록 비하하는 우익이 어디 있나
@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문창극 총리 자격 없다"
http://www.metroseoul.co.kr/news/newsview?newscd=2014061400026
@ 자. 그러면 이완용은 어떤 성장과정을 거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나온 이완용에 대한 소개입니다.
* 이 완용
1858년(철종 9) ~ 1926년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지·주서가 되었다. 규장각대교·검교·홍문관수찬·동학교수·우영군사직·의정부검상·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고,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의 학원(學員)으로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귀국하여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등을 지냈다. 이해 다시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으로 갔으며,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 돌아와 구미파(歐美派)로 알려졌다.
그 뒤 내부참의·성균관대사성·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육영공원판리·교환서총판 등을 거쳐, 1894년 김홍집(金弘集)내각의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5월 박정양내각에서 학부대신과 중추원의관으로 기용되었으며,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도 학부대신을 지냈다.
.출처:이완용[李完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유명한 사람 중 이완용과 반대의 길을 택한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신채호
1880년 ~ 1936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 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출처:신채호[申采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의견 3). 이를 보면 신채호 선생은 유일무이한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공부한 반면, 이완용은 성균관에는 입학하지 않은걸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이완용은 별시 합격후 육영공원에서 공부를 하였군요. 이완용은 과거 합격후 관운이 아주 좋아 여러 관직을 겸임했군요. 고종당시에는 수백명의 성균관 대사성 중 성균관 출신이 아닌 이완용도 관운이 좋아 대사성에 임명되었군요. 성균관 대사성이라하면 현재의 성균관대 총장급인데, 수백명이 임명된 대사성중 이완용이 있어서 약간 불만이지만, 그래도 명단에서 삭제하는건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라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현대에도 보면 성대(宮 성균관대)출신 아니라해도 성대 총장되고, 서강대(御 서강대) 출신 아니라도 서강대 총장 되는 이치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타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백명 대사성중에 이완용이 대사성을 스쳐갔다고 성균관과 연계시키는건 무리니까, 이런 역사도 있었구나 하고 객관적으로 보시면 됩니다.
과거시험 합격과 별도로 유일무이한 최고대학인 성균관 입학은 다릅니다. 특혜받은 세자의 성균관입학도 있지만, 양반자제라고 해서 모두 성균관에 입학할수 있던건 아닙니다(신채호선생, 이완용의 사례에서 보듯).
@ 과거시험 대과는 독학으로도 공부해서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지방의 초등 학교인 서당을 졸업하면 중등 학교인 지방의 향교나 중앙의 4부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곳을 졸업한 후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나 생원이 되거나 성균관 입학 자격(향교, 4부 학당의 추천을 통해 입학한 경우도 있음)을 주었다. 성균관을 졸업한 후 과거 시험의 대과(독학으로도 응시 가능함)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고급 관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 교육 기관과 과거제도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 출처: 성균관[成均館]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12.10, (주)신원문화사)
* 참고자료. 조선시대 대사성(출처는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 부분적 예시)
太祖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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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宗代
조 용(趙 庸) |
太宗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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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우(權 遇) | 윤회종(尹會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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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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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원(趙錫元) | 조경하(趙敬夏) | 남종순(南鐘順) | 이세기(李世器) | 조성교(趙性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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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승호(閔升鎬) | 강 노(姜 노) | 홍긍주(洪兢周) | 윤태경(尹泰經) | 홍재현(洪在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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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정(宋熙正) | 조 채(趙 埰) | 이인설(李寅卨) | 이계로(李啓魯) | 이병문(李秉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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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직(李鼎稙) | 김연규(金秊圭) | 엄주한(嚴柱漢) | 이수만(李秀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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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을사조약이후 강제.불법으로 한국을 강점한 일본 잔재가 한국에서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때문, 이런 폐해를 시정하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