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자흐스탄 국립고려극장이 준비한 설날 연극,
http://www.newsis.com/pict_detail/view.html?pict_id=NISI20140202_0009294159
2. 필리핀 대통령이 "자신의 몸에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중국과의 친밀감을 강조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는 기사外 ...........
1). 필리핀 대통령이 "자신의 몸에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중국과의 친밀감을 강조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중국 방문 당시 아키노 대통령은 본적인 중국 푸젠(福建)성 훙젠촌(鴻漸村)을 찾아 기념식수를 통해 조상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그 모친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도 임기 동안 이곳을 방문한 적 있다. 아울러 아키노 대통령은 '봄(春)'을 언급하면서 봄은 만물 소생의 계절을 의미한다며 춘절(음력설)을 계기로 양국 간 대화와 협력의 기회가 열리길 기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968190
2). 미국 로스엔젤레스 차이나타운 춘절풍경.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2/03/13371293.html?cloc=olink|article|default
3). "오늘은 내가 공주" - 시드니의 춘절 풍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5&aid=0002089419
4). 용춤을 추는 쿠바인들 - 쿠바 아바나의 춘절 풍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5&aid=0002089414
5). 2014 춘절 맞이 동포 노래자랑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730957
6).빅토리아 항의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꽃 - 홍콩의 춘절 풍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5&aid=0002089416
7).춘절 맞은 중국인 관광객 한국으로
http://www.newsis.com/pict_detail/view.html?pict_id=NISI20140202_0009294690
8).말띠 해, 붉은 색 말 - 싱가포르 춘절 풍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5&aid=0002089365
9).필리핀, 중국 "춘절" 분위기 물씬 느껴져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609230&thread=05r02
10). "귀 터지겠다!" - 파나마 차이나타운의 춘절 풍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5&aid=0002089364
11). 중국 춘절 맞아 36억 명 ‘인류 대이동’
http://news.ichannela.com/inter/3/02/20140130/60497594/1
3.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 春節(한국은 설날)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신문기사를 접하여 보았습니다. 갑자기 殷나라.周나라.漢나라 및 唐나라 그리고 元나라의 대 제국을 이룬 칭기스칸이 떠 오릅니다. 물론 세계 각지의 중국 華僑들은 漢나라 이후 魏나라, 隋나라, 唐나라, 宋나라, 元,明,淸의 왕조들이 멸망할때도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고,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꾸준하게 주변국으로 이주민이 발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념이 어떻든 국가가 어떻든, 수천년 유교국가들인 중국인과,한국인,중국화교들에게 생활의 일부로 체화된 유교명절 설날(春節,元日,元旦,元辰)기간의 日月神 숭배 및 조상제사 전통! 곧 이어 대보름(上元)입니다. 대보름(上元)은 하루짜리 名節이 아니라 陰曆 正月의 상당기간에 포함되는 名節중의 마무리 날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春節(설날 명절기간)기간은 公休日 개념으로는 곧 끝나는데, 농촌이나 일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대보름(上元)이 아주 중요한 名日(陰曆 正月의 春節.설날기간에서 마무리 시점에 행하는 여러가지 풍속이 있음)입니다. 따라서 시중에서는 대보름(上元)때 달맞이등의 유교 祭儀를 중심으로 다른 하위 개념 시중 풍속을 행하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대보름(上元)의 달맞이등을 마지막으로 陰曆 正月의 유교 祭儀는 거의 마무리됩니다.
황하문명의 유교 종주국 中國의 또 다른 대표적 名節로는 淸明절(한국은 한식), 단오절[(중국에서는 중오(重午) ·중오(重五) ·단양(端陽) ·오월절이라고도 함], 中秋節(한국은 추석)등이 있습니다. 한국이나 베트남,대만,싱가포르등은 그 달의 상황에 맞게 유교 祭儀를 행하면 되겠지요. 물론 冬之도 중요한 名日입니다.
막부시대 全 住民을 절에 등록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기전 유교의 이런 전통 명절이 일본에도 계승되어, 나중에 절에서도 병행하면서 불교로 오인되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일본은 유교국도 아니고, 불교국도 아니고 19세기에 일본 國敎가 된 신도(일본은 원래 한국이 전해준 유교국가 특성을 가졌었으나, 이후 도교.중국불교등을 수용하면서 육지와 거리가 멀어 별도로 자체적 혼합신앙을 만들어 낸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본 신도는 막부시대 불교적 특성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 유교+도교+불교의 혼합신앙이며, 後發局地的 신앙에 해당됨)체제입니다.
일본에는 (유교를 변형 혼합시키고, 불교적 토대가 강한) 신도와 (유교를 변형 혼합한) 일본 민중 불교가 주종이라 일본을 유교국으로 오인하다가는 큰 낭패에 빠지게 됩니다.
陰曆을 폐지하고 陽曆을 도입한 일본의 명절등도 유교권의 음력 전통 명절과 많은마찰을 빚어왔었습니다.
* 필자 주 1). 일본의 음력폐지 사실
.....1872년에는 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이 도입되었으며...
. 출처: 문명개화 - 근대초기의 문화(1866년 ~ 1873년),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정혜선/2011.12.30, 가람기획]
4. 여하튼 징기스칸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징기스칸에 영향받은 몽골인들이 이루었던 세계제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또한 元나라(元나라때도 國子監 있었음. 중국이 天子國이라 하여 元나라 말기 중국 國子監과 똑같은 명칭인 고려시대 國子監을 폐지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 國子監은 이후 成均監.成均館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를 세운 후 중국문명과 유교를 접한 元나라인들이 세계에 퍼뜨렸을 유교적 풍속들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天子國이란 생각, 하늘天 숭배, 日月神 숭배,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에서의 공부, 조상제사등은 이슬람국가 왕족들과 지배세력(현재의 이슬람 국가들인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 중동 이슬람국가들 및 기타), 러시아지역, 유럽일부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음. 태국이나 버어마(미얀마),유구국도 한국.베트남처럼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나라들이라 이렇게 중국이 보호국이 되고 왕위나 기타 칭호등을 인정해주던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몽골씨족의 하나인 바를라스부의 일원으로 태어난 티무르. 그 티무르의 후손이 인도의 무굴제국을 세웠음. 이렇게 볼 때 이슬람국가들과, 인도는 중국 황하문명의 유교, 원나라.징기스칸,몽골인,티무르에 영향받은 나라임.
* 필자 주 2). 고려 국자감이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되고 이후 성균감-성균관---국자감-성균관으로 개칭된 과정.
국자감의 명칭은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되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성균감이라 고쳤고(1298년은 충렬왕 24년이지만 이해 1월부터 8월까지는 충선왕이 통치하고 있었던 기간임),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하였다. 그 뒤 1356년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따라 다시 국자감이라 하였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 말기의 잦은 명칭 변경은 내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국자감은 본래 유학과 기술학을 교육하는 곳이었는데 뒤의 성균관은 기술학을 분리시키고 유학만 교육하는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주자학이 전래되어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이 중요시되면서부터이다.
.출처: 국자감[國子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고대에서 근대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국이 중국과 행하던 조공무역의 성격.
요컨대, 국가간에 서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반복되자, 조빙 사대는 약소국이 스스로의 생존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인 호국책으로 성격이 변모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힘의 강약에 의한 지배, 종속 관계 대신에 헌상물을 전제로 한 조빙 사대가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한대(漢代) 이후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과 책봉 관계란 약소국인 주변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하여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침략을 둔화시키고자 한 외교정책이었다. 나아가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기미정책(羈縻政策 : 종속관계 등을 맺어 통제하는 정책)을 통하여 상호불가침의 공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과의 경제·문화 교류를 원하는 경우 그 형식은 조빙공헌과 하사라는 절차를 밟아야만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이란 동아시아 외교체제로의 편입을 증명하며, 곧 국제적인 승인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공·책봉 관계는 한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간에 있어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어, 우리 나라를 포함한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국제 관계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모든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일본도 조공을 했고, 심지어는 19세기에 이르러 영국·불란서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취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규범화되어 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외교 행위를 통하여 국가의 생존권을 보존하고, 공식적으로 무역 및 기타 문화 교류를 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 자체만을 가지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내지는 종속을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출처: 조공[朝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3-a).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은 한자사전에서 티베트를 말함).안남(安南은 두산백과에 의하면 중국인이 베트남을 가리켜 부른 명칭) 및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모든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에 대한 부가 설명임.
* 필자 주 3-b).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관계임. 예속이나 종속을 단정할 수도 없지만 조공하고 경우에 따라 책봉도 받고 많은 물품을 받아온 상호 호혜적 조공관계도 병행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움.
* 필자 주 3-c). 한편 베트남의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이러함.
베트남의 지배자들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왕이라 칭하고, 책봉을 받으며 충실하게 조공을 약속하나[주로 '안남국(安南國)'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동아시아 내 중국의 지위를 그대로 적용했다. 스스로 황제라 했던 베트남의 왕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국명은 주로 '다이 비엣(Dai Viet 大越)'], 주변의 라오스, 참파, 캄보디아, 또 북부 변방 지대나 중부 고원 지대의 소공국들을 왕으로 삼아 그들 위에 군림하며 독자적인 조공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출처:장기 왕조의 발전(동남아시아사, 2007.9.12, 미래엔(구 대한교과서)/저자 최병욱
* 필자 주 3-c)-(1). 위의 출처항목 "장기 왕조의 발전"에서 장기란 베트남 최초의 장기왕조인 리(Ly 李) 왕조(1009-1225)를 서술하면서 나온 말임.
* 필자 주 3-d). 중국과 태국의 조공관계.
1. 소수종족의 존재 및 발전의 역사적 배경.
13세기부터 태국은 중국과 친선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했으며,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굽는법을 배웠다.....
. 출처: 태국의 이해. 한국 태국학회 저/한국 외국어 대학교 출판부/2009.02.28. 81페이지
* 필자 주 3-e). 중국과 유구(琉球)국과의 조공관계.
류큐(琉球)는 현재의 오키나와(沖繩)를 가리킨다.....
류큐는 삼국 정립 시대인 1372년, 주잔의 왕이었던 찰도(察度)가 명 태조인 홍무제에게 처음으로 조공을 바치고 중국의 책봉 체제에 편입되었다. 명에 대한 조공은 2년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거의 매년 중국으로 건너가 무역을 행하였다. 류큐인들은 중국의 도자기와 견직물 등을 나하(那覇)로 운반해 왔다. 이리하여 조공 무역의 형식을 취한 통상 루트가 류큐와 중국 사이에 출현하였다....
. 출처:류큐와의 관계(일본사, 2009.4.20, 미래엔(구 대한교과서)/공저 박석순, 손승철, 신동규, 서민교
* 필자 주 3-f). 중국과 브루나이의 조공관계.
.....
브루나이가 송 조정에 사절을 보낸 이후 브루나이와 중국과의 관계는 줄곧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명대에 이르면 이곳의 왕이 직접 수도 남경을 찾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감격 및 환대에 대한 사서의 묘사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홍무(洪武) 3년(1370)에 중국에서 먼저 사절을 보내 조공하게 했다 하며, 이에 응해 사절이 오기 시작해 영락(永樂) 3년(1405)에는 브루나이의 왕이 왕후 및 자제들을 이끌고 직접 중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왕의 일행은 복건(福建)의 유명한 대외 교역 도시 천주(泉州)로 들어왔고, 오랜 여정을 경과하여 3년 뒤에 수도에 도착했다. 『명사』에는 이렇게 여정이 늘어진 이유가 중도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태국이나 말라카의 사례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왕이 중국을 직접 찾는 일은 동남아시아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왕비며 자제들을 모두 이끌고 긴 여행을 한 사례는 브루나이가 최초였다. 그 뒤에 곧 말라카의 건국자 파라메시바라가 1410년에 처자 및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고 말한 바 있다. 왕이 이처럼 오래 외유를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가는 의문이다. 하지만 『명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왕은 남경에서 객사를 했고, 그 묘소는 아직도 남경에 있으니, 왕이 친조한 것은 확실하다. 왕위 계승 분쟁이나 내분 때문에 피신했던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이 시기도 자와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그 세력을 견제할 후원자를 찾고자 함이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왕이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이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영락제는 극진히 브루나이 왕가 일행을 대접했고, 브루나이 왕실에 대한 보호 세력을 자처했다. 왕은 사망했지만, 왕자 일행은 중국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왕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았고, 3년 1공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왕으로 책봉을 받으면 적어도 중국의 황제 아래 태국이나 말라카, 베트남, 참파 등 각국 왕과 동격으로 간주되는 것이니, 브루나이 왕실의 외교는 큰 수확을 거둔 셈이다...
.출처: 브루나이-술탄 외교의 전통(동남아시아사, 2007.9.12, 미래엔(구 대한교과서)/저자 최병욱
* 필자 주 3-g). 중국과 미얀마(구 버어마)의 조공관계. 오마이뉴스 11.07.29 [* 필자 주 3-h). 11은 오마이뉴스 역사상 2011년이 가장 정확함], 김규종 기자 기사.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을 김규종 오마이뉴스 기자가 읽고 쓴 서평에 나오는 기사임.
....조공제도는 문명국가를 자처하는 중국이 오랜 세월 주변 국가들과 맺어온 문화적, 도덕적 제도다. 조공제도가 보편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일부지역, 베트남, 미얀마 모두 때가 되면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말라카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은 조공을 바치거나 최소한 중국이 종주국임을 인정했다. 다양한 형태를 띠었지만 조공제도는 중국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가 국민국가 사이의 평등관계라면, 조공제도는 위계질서에 입각한 불평등관계에 기초한다.(360~383쪽)
* 필자 주 3-i). 오마이뉴스 기사는 아래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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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표지 | |
ⓒ 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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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좌파 연구자이자 언론인인 마틴 자크의 책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은 오늘날 중국에 함의된 다채로운 의미망을 종횡으로 풀어나간다. 600쪽에 달하는 서책의 방대함도 그렇거니와 거기 실린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21세기 전망까지 흥미롭기 짝이 없다. 한 권의 서책에서 이처럼 많은 정보와 판단자료를 얻는 일은 실로 유쾌한 노릇이다.
중국의 두 얼굴 : 영광과 굴욕의 역사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통일을 이룩한 다음 중국은 1074년 동안 통일유지, 673년 동안 부분적 통일유지, 470년의 분열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것을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 한다. 쪼개진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쪼개진다는 뜻이다. 중국을 지배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는 하나같이 중국문명에 동화되었고, 오늘날 종족마저 자취를 감춘 경우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들 왕조를 포함해 모두 36개 왕조가 지난 3천 년 동안 명멸해갔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중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북송(960~1126) 시대의 번영을 기억한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 과거제도의 도입, 신유학의 등장, 화약발명, 목판인쇄술 발달, 수학, 자연과학, 천문지리학의 발전 등을 꼽을 수 있다. 송대에 발명된 방적기는 수세기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할 만큼 산업발달을 촉진하였다. 이슬람 세계만이 중국의 경쟁상대가 되었을 뿐 유럽은 중국에 한참 뒤져 있었다.(109쪽). * 필자 주 3-j). 필자가 다시 유의해 두는부분임.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를 경과하면서 경제발전이 상당히 느려졌고, 유럽은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으로 중국을 앞서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의 결과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방하는 등 '굴욕의 세기'를 경험하기에 이른다. 결국 중국은 유럽과 미국에 뒤지고, 19세기 말에는 일본에게도 밀리게 된다.
1884년 중국의 안마당 베트남이 프랑스에게 넘어가고, 1894년 조선을 둘러싼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여 황실의 연간예산 세 배에 달하는 전쟁비용을 배상한다. 19세기 말엽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벨기에, 러시아의 침략으로 주권을 크게 손상받는다. 식민지 전락을 가까스로 피한 중국은 1949년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다.
중국의 부상 : 21세기 중국의 두 얼굴
서양의 시간개념에 따르면 기원전(BC : Before Christ)과 기원후(AD : Anno Domini)가 있다. 그런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다른 개념으로 오늘날의 시간을 설명한다고 한다.
이제 중국은 우리 눈앞에서 세계를 변모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현대경제사를 중국이 등장하기 전의 경제사(BC : Before China)와 중국이 등장한 이후의 경제사(AC : After China)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국제경제의 지배력을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시켜 놓았다.(246~256쪽)
18세기 후반에 영국을 기점으로 시작된 근대가 중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에서 정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마틴 자크의 생각이다. 물론 그것의 배경에는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의 선구적인 구실과 한국과 대만, 홍콩과 싱가포르라는 '네 마리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험이 지대하다. '메이드 인 차이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엉터리 짝퉁' 물품이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대량생산하는 소비재 상품'을 뜻한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반면에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허다한 문제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삼중으로 나타나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들 수 있다. 해안지역과 내륙지역의 빈부격차가 심하다. 가장 부유한 지역과 가징 빈곤한 지역의 1인당 총소득이 열배나 차이가 난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 공식적인 경제부문과 비공식적인 경제부문의 격차도 발생한다. 이런 불평등에서 야기되는 소득격차는 필연적으로 사회갈등을 부추긴다.(223쪽)
자원집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토지, 산림, 물, 석유 같은 자원의 급속한 고갈과 극심한 환경오염도 심각한 문제다. 세계 최고의 오염도시 20개 가운데 16개가 중국에 포진하고 있다. 전 국토의 3분의 1에 산성비가 내리고, 4분의 1이 사막화되었으며, 전 국토의 58퍼센트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중국은 급기야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조공제도는 부활할 것인가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조공제도와 관련한 미래예측 부분이다. 660년 백제 멸망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 언제나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1300년 우리 역사를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011년 시점에서 여전히 중국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다수의 한국인이 이 문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궁금하다.
조공제도는 문명국가를 자처하는 중국이 오랜 세월 주변 국가들과 맺어온 문화적, 도덕적 제도다. 조공제도가 보편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일부지역, 베트남, 미얀마 모두 때가 되면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말라카와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은 조공을 바치거나 최소한 중국이 종주국임을 인정했다. 다양한 형태를 띠었지만 조공제도는 중국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가 국민국가 사이의 평등관계라면, 조공제도는 위계질서에 입각한 불평등관계에 기초한다.(360~383쪽)
이런 역사적인 준거에 기초하여 지은이는 앞으로 전개될 세계역사의 흐름이 중국에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한 강대국은 영국과 미국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는 21세기가 중국의 세계지배가 현실화되는 시점이라고 확언한다.
* 필자 주 3-k). 일본이 고대에 중국에 조공을 했다는 사실을 위키백과의 자료로 추가 설명함. 고대이후 천년 가까이 일본과 중국의 책봉―조공관계는 단절되어 있던 것이 된다는 설명도 덧붙여 있음.
또한, 《후한서》 중 〈동이전〉은 1~2세기경의 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57년에 나코쿠((奴国)의 사자가 낙양에 도달하여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로부터 인수(印綬)를 받아왔다. 그것이 에도시대의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 발견된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진 왜노국왕인(倭奴国王印)이다. 또한, 107년에는 왜의 국왕인 스이쇼(帥升)들이 160명의 노예를 안제에게 헌상하였다. 이로써 후한과 책봉관계에 있었던 소국들이 규슈 북부에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중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3세기경의 왜의 상황은 대방군의 바다 맞은편에 야마타이코쿠가 있어 내분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히미코가 여왕이 되자 제정일치(祭政一致)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239년에는 히미코가 위나라에 조공을 하여, "친위왜왕"(親魏倭王)이 새겨진 금도장(金印)과 동경을 받았다.
701년 일본은 당나라의 영휘 율령(651년 제정)을 참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율령,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 율령의 반포 및 시행으로 고대 일본은 본격적인 중앙집권의 율령제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고대 이래 일본과 중국은 밀접한 관계였지만, 5세기 무렵 왜5왕(倭 5王)의 책봉 다음에 일본 국왕이 중국으로부터 책봉된 것은 14세기 후반의 가네나가 신노 (懐良親王) 또는 15세기 초의 일본국왕 아시카가 요시미쓰이다. 따라서 천년 가까이 일본과 중국의 책봉―조공관계는 단절되어 있던 것이 된다.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 칸[一代天驕成吉思汗]
...테무친은 몽골 보르지긴족의 후예로...
몽골·금 전쟁 약도
1219년, 칭기즈 칸은 대군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대국인 호레즘 왕국을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러시아 동남부까지 점령했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칭기즈 칸이 죽은 다음 아들 오고타이가 몽골의 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남송에게 길을 빌어 금나라의 도성 변량을 포위했다...
.몽골의 통치자들은 장병들에게 활쏘기 실력뿐만 아니라, 몽골문과 중문을 잘 쓸 것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鎭紙와 먹, 벼루등은 당시의 통치자들이 병사들의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 출처: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 칸[一代天驕成吉思汗]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4.25, (주)신원문화사)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4.25/저자 풍국초. 옮긴이:이 원길.
* 필자 주 4). 황하문명과 유교사상을 형성한 중국은 세계 4대 발명품으로도 유명하지요.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 중국 역대 왕조중에 宋나라는 그리 영토가 넓지 않은 나라였는데, 金이라는 또다른 주변 强國이 등장하여 宋나라는 南宋으로 영토가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위 출처자료중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필자가 느끼는점은 이렇습니다. 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몽골이 宋나라와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金나라를 공격할때 南宋은 몽골과 연합하여 金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점을 유념해두고자 합니다. 金나라가 없었고 宋나라 단독으로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면 주변의 몽골같은 나라가 宋나라를 이기는건 어려웠겠지만, 중국은 春秋戰國時代, 5호 16국시대등을 거치면서 분열의 시대를 많이 겪어서 宋나라와 金나라의 대립같은 사례는 중국사에서 흔한 일중의 하나입니다. 여하튼 칭기스칸의 아들 오고타이때는 南宋까지 합세해서 金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强國이었던 金나라를 흡수한 몽골은 이제 중국의 우수한 문화, 발명품.군사제도등을 수중에 넣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南宋까지 멸망시킬수 있게 되는 튼튼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 필자 주 5). 남송당시 몽골이 金나라를 공략할때 南宋이 몽골과 연합한 이유는 주로 이런 이유라 판단됩니다.
여진(女眞)족이 세운 금(金)이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6년 송나라 수도 開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가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에 더하여 그 당시 변방의 몽골군은 南宋을 위협할 상대가 아니라고 오판하여 金나라를 멸망시키는데 동참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세계적인 발명품들과 우수한 문화는 元나라를 통하여 이슬람국가, 유럽, 러시아, 인도등에 전파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국가들이 지리상의 발견도 하게 되고, 무기도 발전시키고, 인쇄문화도 발전시키고, 필기문화도 발전시키면서, 서양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약탈자정도에서 지배자가 된 몽골족. 金나라와 알력을 빚던 南宋의 도움으로 金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결국 南宋까지 멸망시켰고 다른 칸의 대제국까지 건설했던 나라 몽골족의 元. 소수 지배민족이 되었지만 중국 문화를 수용해야 했던 몽골의 元나라이기도 함.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원 왕조의 성립(1271년)
...몽골족은 초원의 목동이자 전사였고, 정복민인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몽골인들의 중국 지배관을 바꾸어놓은 이가 야율초재였다. 그는 거란 황실 출신의 금나라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로, 몽골이 금나라로부터 얻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오고타이 때까지 30여 년간 재상으로 활약했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농토와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토지가 생산해내는 풍부한 생산물을 세금으로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외국인이었다...
...소수파에 불과했던 쿠빌라이가 중국대륙의 광대한 힘을 기반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문화와 접촉했던 중국통으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 되는 몽골인의 한 사람이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전통 도시 카라코룸을 두고, 제국의 근거지를 중국 영내로 옮겼다. 수도는 금의 수도였던 대도 북경으로 옮겨졌고, 1271년에는 국호를 '시초', 혹은 '근원'이라는 뜻의 '원(元)'으로 칭했다. 이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서 자구를 딴 것이다. ...
원제국은 중서성(中書省)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국식 중앙관제를 약간의 손질을 가해 그대로 운용했다.
.출처: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 원 왕조의 성립(1271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3.23, 가람기획)/저자 안정애
8.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형성한 제국. 광활한 영토들
몽골제국의 흥망일지
칸국명 | 건국자 | 존속기간 | 위치, 멸망 원인 |
---|---|---|---|
오고타이한국(Ogotai汗國) |
오고타이(칭기즈칸의 3남) |
12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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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남부 알타이(Altay) 산-발카슈 호 일대 |
차가타이한국(Chaghatai汗國) |
차가타이(칭기즈칸의 차남) |
1227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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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 지역 - 초기에는 아마리크 - 후기에는 동(東)차가타이: 악스/서(西)차가타이: 사마르칸트(Samarqand)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티무르에게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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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한국(Kipchak汗國) |
바투(칭기즈칸의 장손자) |
124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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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볼가 강 유역 · 멸망 원인: 모스크바공국의 독립, 티무르 침입, 내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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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국(Il汗國) |
훌레구(칭기즈칸 4남의 아들) |
125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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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이라크 등 서남아 일대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티무르에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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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 |
쿠빌라이(칭기즈칸 4남의 아들) |
1271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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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전 지역, 몽골 지역 · 멸망 원인: 내부 분열, 홍건적의 난(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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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몽골제국 시대(1206년~1360년) (몽골 개황, 2011.8, 외교부)
9. 원나라를 제외한 사 한국(四 汗國)의 대략적 영토 설명.
가). 킵자크 한국: 남러시아 지역에서 시작함. 안으로 러시아 제후를 지배하고, 밖으로 동로마제국 황제와 친교를 맺는 한편, 이집트와 통혼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흑해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며,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켰다.
나). 오고타이 한국:외몽골,내몽골,북중국에서 시작. 몽골적 색채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
다).일 한국:일 한국은 이슬람 영토에 세워짐. 초기에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이슬람교를 압박했으나, 이후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켜 몽골.페르시아문화를 발전시키고, 수학·지리학·역사학 분야에서 다수의 학자를 배출했다.
라). 차카타이 한국:중앙아시아를 지배.
.두산백과에 나온 四汗國 내용에 의거하여 필자가 요약함.
- 10. 티무르에 대한 설명과, 무굴제국을 세운 티무르 후손 바부르(Babur)에 대한 설명.
(가). 티무르에 대한 설명. 티무르[Timur] - 광기와 풍운의 왕 (제왕열기, 2002.2.28, 도서출판 들녘)/저자 허 윤정.
.......
1336년, 티무르는 이슬람화된 몽골 씨족의 하나인 바를라스 부(部)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티무르의 가계(家系)는 예전엔 명가(名家)였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몰락하여 4, 5명의 시종밖에 없는 유목민 일가에 불과했다. 청년 시절을 양과 말을 약탈하는 데 보낸 티무르는 얼마 후 수백 명을 이끄는 도적단의 수령(首領)이 된다....
(나). 티무르의 후손이 무굴제국을 세운 출처. 티무르(중동사, 2008.1.15, 미래엔(구 대한교과서)/저자 김 정위.
....
그 이후 무슬림 세계는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Babur)가 세운 인도의 무굴(Moghūl) 제국(帝國)(1526~1858), 시아 이란의 싸파비(Safavi)조(朝)(1501~1732) 및 오스만 제국(1281~1924)으로 나뉘어졌다....
11. 고대나 중세의 영토확장은 합법적임. 중세시대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 이후 한때는 이슬람에 영향받았던 (그러나 가톨릭국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인 아메리카나 필리핀등에, 로마 가톨릭과 스페인어.포르투갈어등을 전파시킨것도 중세시대의 합법적 가톨릭 포교시대였음.
12. 스페인이 이슬람에 영향받았던 내용. 출처는 위키백과 스페인편.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13. 포르투갈이 이슬람에 영향받았던 내용. 출처는 두산백과 포르투갈의 역사편.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하여 온 여러 종족의 혼혈로 형성된 켈트계 이베리아인 원주민은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8세기에는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문화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아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 로마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다. 그후 고트족등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 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 테호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왕(王)이 되었다.
* 이 글은 논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영리적,공익적 차원의 글로, 세계사나 세계의 종교.교육.문화등을 더욱 폭 넓게 이해하기 위한 에세이형식의 글입니다. 이런 취지로 웹주소등을 명기(웹주소 명기시 인용해도 무방하다는 견해있음)하고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