寡人(宮 성균관대 임금)과 御서강대 임금의 국제법적.정신적 臣民들이여. 새해 福많이 받을지어다.
필자는 宮 성균관대임금(=御 서강대 임금. 두 임금은 먼저 왕이 되었으나, 제천의식을 지내시는 황사손을 발견하고 이 분을 종교적 구심점으로 함. 그러나 두 임금은 이전부터 신의 은총에 의해 왕으로 등극한 국제관습법상의 왕들임.)임.
중국 황하문명에서 피어나 오랫동안 중국,한국,베트남,대만,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화교등에 전승되어온 유교권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春節, Lunar New Year's Day)과 대보름등이 낀 정월입니다. 설날(春節)이나 추석(仲秋節), 대보름, 단오, 한식(淸明),동지등은 십수억명 유교도들의 유교 전통 名節이지요. 그리고 입춘, 입하, 입추, 입동등도 유교 제사로 중요합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 및 후세의 전문자료가 설명하는 설날의 유래와 성격등을 알아보겠습니다.
I. 유교 경전인 禮記로 살펴봄.
1. 禮記 祭法으로 살펴봄.
1-1).
陰曆 正月의 名節인 설날~대보름까지의 기간!
두산백과에 의하면 중국 춘절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
며칠씩 계속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보름 이상 계속되는 곳도 있다.
필자가 볼때, 설날이나 春節은 하루 당일의 名日이 아니고 陰曆 正月 초하루부터 음력 정월 열닷새(正月 대보름)까지 걸쳐서 상당기간 지속되는 名節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로 설날을 元日,元辰,元旦,元正등 여러 용어로 쓰는데 음력 정월 대보름에 해당하는 용어인 上元이란 용어도 중복해서 사용하던걸로 보아서 설날(元日,元辰,元旦,元正등)이나 대보름(上元)을 하루짜리 별도의 名日로 취급하지 않고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음력 정월 열닷새까지 겹쳐 上帝가 계시는 하늘에 제사하고, 소원빌고, 日神에 제사하고, 月神에 제사하고, 태초의 조상신들인 五帝님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上帝가 되어 하늘의 일부분을 통치하는 神이 되었다고 보아 조상신 제사도 같이 치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조상신제사는 이후 天子와 諸侯, 士大夫, 庶人의 신분으로 별도 구분하게 됩니다.
중국 天子나 고대 한국의 제사장(王의 제사장겸임이 많이 나타남)들은 하늘(天, 太極과 연계된 인간창조주 하늘天)에 제사하던 최고 제사장들입니다. 특히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음력 정월 열닷새(정월 대보름)까지의 명절기간은 日神에 제사하고, 月神에 제사하며 일반 대중도 月神을 숭배하고 소원을 빌며, 조상에 제사하고 가족 및 친척, 지인들에 세배하며 여러가지 유교 祭儀를 행하는 기간입니다. 복합적인 개념으로 중국天子나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고대 한국의 王부터, 士大夫 및 모든 백성들이 하늘에 제사하고 소원비는 名節기간인데 日神祭祀와 月神祭祀(대중은 달맞이때 달님에 소원을 비는 행사), 조상제사.세배등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에서 설날기간에 행하는 조상제사는 忌祭가 아닌 節祭에 해당됩니다.
현대 중국은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인 上元까지의 기간에 걸쳐 유교 祭儀를 행합니다. 중국의 경우 이 기간의 명절향유는 음력 정월 초하루의 하루 名日이 아니고 음력정월 초하루~음력 정월 열닷새까지의 상당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전통탓인지, 지금도 일부 지방이나 농촌등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대보름인 上元까지에 걸쳐 그런 여러가지 祭儀를 행하면서, 시중의 여러가지 전통 풍속 및 주변국과의 문물교류로 인해 추가로 첨부된 놀이등을 결합한듯한 풍속도 나타납니다. 현대에 들어와 중국이나 한국이나 설날(春節)기간의 며칠은 公休日이며 대보름은 公休日이 아니지만 대보름도 陰曆 正月 초하루부터 시작되는 보름정도(또는 그 이상)기간에 가져오던 주요 名日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이 음력 정월 초하루~음력 정월 대보름까지의 名節 기간에 있어 현대 중국은 春節개념을 가지는데 대보름인 上元의 祭儀까지 포함하는 장기적 名節기간이며 대도시의 관공서,학교,군부대,금융기관,기업체에서는 현대화된 풍속으로 대보름(上元)이 공휴일이 아니라도 일부 지방과 농촌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은것 같습니다. 名節과 公休日은 다른 개념인데, 공휴일이 아니라도 설날(春節, 元日,元辰,元旦)처럼 대보름(上元)은 여전히 중요한 陰曆 正月의 名日인 것 같습니다.
1-2). 다음부터는 유교의 경전인 五經 四書 중 하나인 禮記 祭法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제사입니다.
有虞氏禘黃帝而郊嚳 祖顓頊而宗堯 夏后氏亦禘黃帝而郊鯀 祖顓頊而宗禹
殷人禘嚳而郊冥 祖契而宗湯 周人禘嚳而郊稷 祖文王而宗武王
燔柴於泰壇 祭天也 瘞埋於泰折 祭地也 用騂犢
埋少牢於泰昭 祭時也 相近於坎壇 祭寒暑也
다음부터는 해와 달, 별, 장마와 가뭄, 사방에 제사지내는 부분입니다.
王宮祭日也 夜明祭月也 幽宗祭星也 雩宗祭水旱也 四坎壇祭四方也...
...................
일월성신을 民(백성)이 우러러보는 禮記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及夫日月星辰 民所瞻仰也 山林川谷丘陵
民所取財用也 非此族也 不在祀典....
2. 禮記 王制로 조상제사를 살펴봄.
天子七廟 三昭三穆與大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大祖之廟而五
大夫三廟 一昭一穆與大祖之廟而三
士一廟 庶人祭於寢
* 필자 주 1). 여기에서 조상제사를 행할때 세우는 사당(廟)은 家祭에 해당되며 墓에서 치르는 墓祭와 구별됩니다. 家祭의 경우 士까지는 1廟를 허용하지만 庶人[* 필자주 2). 士가 아닌 그 이하 신분들. 庶人은 사대부가 될 수 없는 사대부 자손이나 중인, 평민,그 이하의 신분이라 할 수 있음. 현대에는 호적에 등재하여 사대부의 자손인 경우에는 구별하지 않는게 일반적 현상]의 경우에는 사당(廟)을 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墓祭와 家祭는 다릅니다.
3. 元日(설날)에 제사하는것은 예기(禮記)』에 근거합니다. 「월령(月令)」에 “천자가 원일(元日, 첫 辛日)에 상제에게 풍년을 빌고(天子乃以元日 祈穀于上帝"라 하는 내용입니다. 殷正月도 모르고, 유교 경전인 禮記도 공부하지 않아서, 설날의 한자표기인 元日이나 元辰등의 표현을 망각하게 되고, 유교권 공통명절인 설날의 유래를 다른데서 찾으려 하는분도 있습니다. 유교권 공통名節인 설날(春節),대보름,淸明(한식),단오,추석(仲秋節)등은 유교 경전과 중국의 古書에서 찾아야 중국인도 이해하고, 한국인.베트남인.대만인.싱가포르인도 제대로 이해하는 역사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II. 국립 민속 박물관의 설명으로 한국의 설날을 살펴봅니다.
1. 설날의 다른 명칭인 元辰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신(元辰)
설날의 다른 말. 새해 아침.
내용
고대 중국 하력(夏曆)의 정월 초하룻날을 가리키며 길신(吉辰)이라고도 한다. 흔히 원단(元旦)·원일(元日)·원삭(元朔)·원정(元正)·원조(元朝)·삼원(三元)·세조(歲朝)·세수(歲首)·세단(歲旦)·수조(首祚)·정조(正朝) 등과 같은 말로 쓰인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진(晉) 유천(庾闡)의 ‘양도부(揚都賦)’를 인용하여 “설날 새 아침, 음양이 차례를 이루네(歲惟元辰 陰陽代紀).”라 하였고 장화(張華)의 ‘식거동서상악시(食擧東西廂樂詩)’에는 “천지인 삼원의 새 아침, 조정에 빼어난 인물들 모여드네(三正元辰 朝慶鱗萃).”라 하였다. 한편 길신(吉辰)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데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원일(元日, 첫 辛日)에 상제에게 풍년을 빌고 원신(元辰, 亥日)을 택하여 천자가 몸소 쟁기를 싣고 참보개(좌우 호위병) 사이에 이를 놓는다(天子乃以元日 祈穀于上帝 乃擇元辰 天子親載耒耜 措之于參保介之御間).”라 하였고, 주(注)에 “원신은 교사를 지낸 후의 길신이다(元辰 蓋郊後吉辰也).”라 하였으며, 소(疏)에는 “해일(亥日, 돼지날)을 밭가는 날로 하여 그 때문에 이를 원신이라 한다(耕用亥日 故云元辰).”고 하였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 풍속사전, 국립 민속 박물관.
2. 설날을 이르는 다른 말인 元日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날 행해지는 풍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 의하면 “사당에 제를 올리는 것을 차례(茶禮)라 하며,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 설빔, 歲庇廕)이라 한다. 그리고 어른을 찾아뵙는 것을 세배(歲拜)라 하며, 시절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이때에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조정에서는 의정 대신들이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며 전문(箋文)과 표리(表裏)를 바치고 정전(正殿)의 뜰에 나가 조하(朝賀)를 올린다. 그리고 8도의 관찰사, 병사(兵使), 수사(水使), 각 주의 목사(牧使)는 전문과 방물(方物)을 바친다.”고 하였다.
중국의 풍속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이날 “장유가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차례로 세배하고 축하하면서 초백주(椒柏酒)를 올리고, 도탕(桃湯)을 마시며, 도소주(屠蘇酒)와 교아당(膠牙餳, 치아를 굳히는 엿)을 올린다(長幼悉正衣冠 以次拜賀 進椒柏酒飮桃湯 進屠蘇酒膠牙餳).”라 하여 세찬과 세주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날 한 해의 소망을 붓으로 써서 대문 혹은 문미(門楣), 문주(門柱) 등에 붙이는 풍속도 있었다.
.출처: 원일 [元日]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3. 원단 [元旦]
설날을 이르는 다른 말로 정확하게는 설날 아침을 뜻함.
내용
원조(元朝)·원일(元日)·원삭(元朔)·원정(元正)·삼원(三元)·세조(歲朝)·세수(歲首)·세단(歲旦)·수조(首祚)·정조(正朝) 등과 같은 말이다. 이날은 일년의 첫날이자 첫 아침이며 사시의 시작이기 때문에 신성시되었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사시란 계절이 (시작되는) 날이다(四始者 候之日).”라 하고, 정의(正義)에 “정월의 아침은 한 해의 시작이고 시간의 시작이며 하루의 시작이자 한 달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사시’라 한다(謂正月旦 歲之始 時之始 日之始 月之始 故四始).”고 하였다. 그리고 ‘양삼조아악가(梁三朝雅樂歌)’에 “사기가 새롭게 원단을 맞으니 만수(임금의 천수)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되네(四氣新元旦 萬壽初今朝).”라는 구절이 있다.
.출처: 국립 민속 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사전, 국립민속 박물관.
4. 원정(元正)
음력 1월을 달리 부르는 말.
내용
원(元)은 한 해의 처음을 뜻하는 말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을 의미한다. 세수(歲首)·원단(元旦)·원일(元日)·신원(新元)이라고도 하며,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 해서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에 “원정(元正)은 한 해의 시작이며 동지(冬至)에는 양(陽)이 다시 생기니, 두 절기가 가장 중요하다(元正歲始 冬至陽之復 二節最重).”고 한 구절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 박물관 한국 세시 풍속사전, 국립 민속 박물관.
5. 연시(年始)
한 해의 시작. 연수(年首)·연두(年頭)·연시(年始)·세초(歲初)·세시(歲始) 등과 같은 말. 혹은 설의 다른 말, 또는 일년의 첫 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련어
연시제(年始祭)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조부(祖父) 2대(代)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출처: 국립 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 박물관.
6.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 원단(元旦)의 다른 말. 연(年)·월(月)·일(日)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
내용
양나라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정월 1일은 삼원의 날이다(正月一日是三元之日也).”라 하였고, 청나라 부찰돈숭(富察敦崇)의 『연경세시기(燕京歲時記)』에도 『옥촉보전(玉燭寶典)』을 인용하여 “정월 1일은 원일이며 역시 삼원이라고도 한다. 한 해의 시작이요, 때의 시작이며 월의 시작이다(正月一日爲元日 亦云三元 歲之元 時之元 月之元).”라 하였다. 그리고 “이날은 먼저 뜰 앞에 폭죽을 터뜨려 산조(山臊)라는 악귀를 피한다(正月一日 先於庭前 燃爆竹以避山臊惡鬼).”라 하였다. 그 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옥촉보전』을 인용하여 “정월은 단월이며 그 하루는 상일이다. 역시 삼원이라고도 한다.
한 해의 시작이요, 월의 시작이며 시의 시작이다(正月爲端月 其一日爲上日 亦云三元 謂歲之元 月之元 時之元也).”라 하였다. 한편 남조(南朝) 제(齊)나라 왕검(王儉)의 ‘양암친봉증상의(諒闇親奉烝嘗議)’라는 글에 “공경대부는 (이날) 천자께서 병풍을 등지고 친히 임하시며, 삼원의 시작됨을 고하니 만국의 조회를 받는다(公卿大夫 則負扆親臨 三元告始 則朝會萬國).”라 하였고, 당나라 반맹양(潘孟陽)의 ‘원일화포택(元日和布澤)’이라는 시에는 “흐르는 서기가 만물을 적셔주고 은택이 이 삼원날에 널리 퍼지도다(流輝霑萬物 布澤在三元).”라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2와 『동문선(東文選)』 권22에 ‘삼원’이라는 말을 정월 원단의 의미로 쓰인 예가 있다.
.출처: 국립 민속박물관 한국 세시 풍속사전, 국립 민속 박물관.
7. 세수(歲首)
한 해의 첫머리. 설의 다른 이름으로 세초(歲初)·연두(年頭)라고도 함.
내용
중국 송(宋)나라 육유(陸游)의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에는 “한밤중 제사를 지내고 남은 박탁을 나누어 먹으며 여명에 일어나 종규(鍾馗, 역병을 몰아내는 귀신 형상)를 바꾸네(中夕祭餘分餺飥, 黎明人起換鍾馗).”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그 구절을 설명하면서 “시골 풍속에는 이 세수일(歲首日)에 반드시 탕병(湯餠)을 쓰는데, 이를 동혼돈(冬餛飩), 연박탁(年餺飥)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구절을 통해서 중국에서는 한 해의 첫날을 세수(歲首)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혼돈, 연박탁이라는 탕병을 먹는 풍속이 우리나라의 떡국 먹는 풍속과 유사한 것도 알 수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1. 세계사적 개념으로 한국의 역사를 잘 아는데 도움되는 책들은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後漢書등임은 아시는분은 잘 아실것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보면 부여의 제천의식인 영고를 대략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魏書 東夷傳 夫餘條)의 기록을 보면,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첫머리에,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인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以臘月祭天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라 하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오늘날의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내용이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져 그것은 종교적 제의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추수감사제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영고만은 은력 정월, 곧 12월에 행해졌다.
* 필자 주 3). 위에서 나타난대로 殷나라 歷法인 殷正月(은력 정월)은 지금의 陰歷과 차이가 있지만 부여가 殷歷을 채택해서 그게 바로 그 당시 正月(1월)의 설날입니다. "은력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 하는 부분이 바로 황하문명의 설날(元日,元旦)이며 중국등 중화권(중국.대만.홍콩), 한국,베트남,싱가포르의 설날(Lunar New Year's Day)에 해당됩니다. 이 부분은 성균관대 출신이나 유교학자들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 전개한 이론으로 판단합니다.
2. 고대 한국의 백제에서 正月에 제사지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고이왕(古尒王) 5년(서기 238) 봄 1월과 10년 봄 1월 및 14년 봄 1월, 근초고왕(近肖古王) 2년(서기 347) 봄 1월, 아신왕(阿莘王) 2년(서기 393) 봄 1월, 전지왕(腆支王) 2년(서기 406) 봄 1월, 모대왕(牟大王) 11년(서기 489) 겨울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 지냈다. 다루왕 2년 봄 1월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책계왕(責稽王) 2년(서기 287) 봄 1월, 분서왕(汾西王) 2년(서기 299) 봄 1월, 계왕(契王) 2년(서기 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1월, 전지왕 2년 봄 1월에도 모두 이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古尒王五年 春正月 十年 春正月 十四年 春正月 近肖古王二年 春正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牟大王十一年 冬十月 並如上行 多婁王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 春正月 汾西王二年 春正月 契王二年 夏四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腆支王二年 春正月 並如上行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연관목차 (153/264)
.출처: 제사[祭祀]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3.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설날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자료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출처:한국문화재보호재단
4. 왕이 설날에, 日月神에 절하던 祭儀.
왕이 매년 설날 아침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하였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서(隋書)』 권81 「열전(列傳)」46 신라(新羅)에는 “매년 정월 원단(元旦)에 서로 하례(賀禮)하는데, 왕은 이날 연회를 베풀어 뭇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또 이날에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제를 올린다(每正月元旦相賀 王設宴會 班賚羣官 其日拜日月神).”는 기록이 있으며,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149 신라에는 “원일(元日)을 중하게 여겨서 서로 경하하고 연회를 베푼다. 해마다 이날에 일월신에게 절을 한다(重元日 相慶賀燕饗 每以其日拜日月神).”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신라에는 “원일에 서로 경하(慶賀)한다. 이날에 일월신에게 절을 한다(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 필자 주 4). 유교의 五經중 하나인 예기(禮記). 예기 제법(祭法)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王宮祭日也 夜明祭月也.................
신라의 왕이 설날에 日月神에게 제사하는 예법은 禮記 祭法에 근거한 것에 해당됩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날(설날) 아침에 日神에게 제사지내고, 밤에(夜明)에 月神에게 제사지내는게 예법에 맞겠습니다.
IV. 현대 중국의 춘절(春節)에 대한 설명자료들.
1.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춘절(春节)은 중국 민간 전통명절로 음력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용어이며 일 년 중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한(汉), 좡(壮), 부이(布依), 둥(侗), 조선(朝鲜), 흘료(仡佬), 야오(瑶), 쉐(畲), 징(京), 다우르(达斡尔) 등 민족은 모두 춘절을 쇠고 있다. 춘절의 역사는 유구하여 은상(殷商) 시기 연말연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활동에서 기원되었으며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한무제가 음력을 사용한 이래 중국은 대대로 24절기중의 입춘일(立春日)을 춘절로 삼았으며 음력 정월 초하루를 신년이라고 하였다. 입춘(立春)은 가장 빠른 제천(祭天)으로 농업신과 봄의 신에 제사지내고 소를 채찍질하며 풍년을 빌던 날짜였다.
사기(史记), 한서(汉书)에서는 정월 초하루를 사시(四始) 즉 새해의 시작인 세지시(岁之始), 시간이 시작되는 시지시(时之始), 하루가 시작되는 일지시(日之始), 한달이 시작되는 월지시(月之始) 및 삼조(三朝) 즉 세지조(岁之朝), 월지조(月之朝), 일지조(日之朝)라고 칭하였다. 고인들은 이날을 경축하여 각종 오락 활동을 행하였으며 신을 맞이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며 날씨를 점치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였으며 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풍부한 신춘가절(新春佳节)의 명절이 되었다.
신해혁명에 의한 중화민국 성립 후 정부는 전통적인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채택하며 신년의 경축활동을 금지시켰으나 민간에서는 이를 계속 지켜왔다. 위안스카이(袁世凯, 원세개)의 집권기간 그레고리력에 의한 양력 1월 1일을 신년 원단(元旦)으로 정하며 음력 정월 초하루는 춘절이 되었으며 문화혁명 기간 중에는 춘절기간의 휴가를 억제하기도 하였으나 1980년 다시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춘절[春节]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2010.8.1, 도서출판 황매희)
* 필자 주 5).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상으로 보면 음력 1월에 입춘(入春)이 있음. 현대 중국이 유교 경전인 예기에 근거하여 음력1월에 있는 입춘 기준으로 춘절(春節)을 삼았다고 이해하며 예기의 월령(月令)으로 그 내용을 살펴봄.
是月也 以立春 先立春三日 太史謁之天子 曰某日立春 盛德在木 天子乃齊 立春之日
이달[* 필자주 6). 이 달은 맹춘지월(孟春之月), 곧 음력 1월인 正月을 의미함)]에 입춘(入春)이 있다.
입춘 3일전에, 太史가 天子를 알현하고, 아뢰기를 "어느날이 입춘입니다", "盛大한 德이 木에 있습니다"라고 하면, 천자는 이에 齊(재계를 의미함)하고 있다가, 입춘일에...
2. 다락원에서 출판된 서적의 설명.
- 춘절은 음력 1월 1일로서,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중국 최대의 명절이다. 춘절을 보내는 것을 과년(過年)이라고 하는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농업사회인 중국에서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를 택하여 천지신명과 조상들에게 지난해의 풍요로운 가을걷이에 대해 감사하고, 올해의 풍성한 수확을 기 원하기 위하여 발생한 명절이 바로 춘절이다.
서양에서 매년 12월이 되면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술렁이듯이, 중국에서도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춘절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한다. 우선 음력 12월 8일에는 납팔죽(臘八粥)을 먹는다. 납팔죽은 오곡이 풍성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라오서(老舍) 『뤄튀샹즈(駱駝祥子)』의 "새해가 가까웠군. 어느덧 납팔일이니.(年節越來越近了, ᅳ晃兒已是臘八.)"에서 보듯이, 춘절의 분위기는 납팔죽을 먹으면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이어서 음력 12월 23일에는 조왕신(竈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엿이나 단 음식을 제사 음식으로 올리는 것은 조왕신이 달게 먹고 옥황상제에게 좋은 말을 해서 집안에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춘절의 전날 밤인 음력 12월 30일, 즉 제석(除夕)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여서 연야반(年夜飯)을 먹는다.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있다면, 그의 밥그릇과 젓가락을 함께 준비하여 모든 가족의 단란함을 표시하기도 한다. 연야반을 먹은 다음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환담을 나누거나 TV 및 오락을 즐기면서 밤을 지새는데,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바야흐로 새해로 넘어가는 순간인 자정이 되면, 천지를 뒤흔드는 폭죽(鞭炮) 소리가 춘절을 알린다. 요란한 폭죽 소리는 사악한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명절 분위기를 한껏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폭죽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화재를 유발하며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 폐해가 커짐에 따라, 베이징 등의 대도시에서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드디어 춘절 아침, 일찌감치 조상에게 차례(祭祖)를 지낸 사람들이 친지나 가까운 사람을 찾아다니며 세배(拜年)를 한다. 물론 축하와 덕담이 오가고 세뱃돈(壓歲錢)을 주는 것은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 한편 춘절 기간에는 집집마다 연화(年畫)를 사서 실내에 붙인다. 봄을 맞이하는 기쁨을 표현하고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연화는 사악한 귀신을 쫓는 신의 모습, 복이나 행운을 기원하는 내용, 신화·고사나 풍속을 그린 것 등 소재가 매우 다양하며, 최근에는 영화배우나 풍경화 등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춘련(存聯)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붉은 종이에 검은색이나 황금색으로 길상이나 축복의 말을 적어서 대문에 붙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춘련으로는 붉은 종이에 복(福)이나 춘(春)을 써서 실내에 거꾸로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중국인의 가정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다.
이렇듯 다양한 풍속과 행사로 진행되는 춘절은 현대 중국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전통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납팔죽이 캔으로 만들어져서 판매되고, 손으로 빗던 교자(胶子)가 냉동 교자로 대체되며, 세배는 전화, 호출기 및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하면, 연하장(賀年片) 역시 인터넷 사이트에서 수백 종을 찾을 수 있는 등 춘절의 풍속도가 변해가고 있다. 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변하는 명절 분위기는 당연한 풍경인가 보다.
.출처: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2011.3.3, 다락원/저자 공상철
- 3. 두산백과 설명
중국의 가장 큰 명절인 음력 정월 초하룻날.
중국의 가장 큰 명절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일컫는다. 한국의 설날(음력 1월 1일)과 같은데, 원래는 한 해의 으뜸날 아침을 뜻하는 원단(元旦), 신년(新年) 등으로 쓰였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때 서력 기원을 채택하면서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서 이 날을 춘절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1949년 9월 중국이 공식적으로 서력 기원을 채택하면서부터 양력 1월 1일은 원단, 음력 정월 초하루는 춘절로 굳어졌다.
춘절 행사는 지난해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는 수세(守歲)로부터 시작된다. 이 날 밤이 되면 중국인들은 집집마다 가족이 둘러 앉아 만두를 만들며 밤을 지새운다. 아침 해가 솟으면 일제히 폭죽을 터뜨리며 집안에 있는 악귀를 쫓는다. 이어 찹쌀떡을 만들어 먹는데, 남방에서는 며칠 동안 쌀을 이는 만년양미(萬年糧米)의 풍속도 전해지고 있다.
보통 춘절은 며칠씩 계속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보름 이상 계속되는 곳도 있다. 또 집집마다 대문에 춘련(春聯)이라는 대구의 글귀(대련)를 써서 붙이고, 방 안의 벽에는 잉어를 안고 있는 아기의 그림과 같은 연화(年畵)를 붙이거나 걸어 놓는다. 대문에 '복(福)'자(字)를 거꾸로 붙여 놓는 풍습도 있는데, 중국어로 읽으면 '복이 들어온다(福到了)'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인 민속놀이는 사자탈춤(사자무)이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뱃돈을 주는 풍습도 있다. 관공서를 비롯한 공공기관이나 기업체들의 평균 휴일은 6일이지만, 한 달 동안 가동을 중단하는 기업도 있다.
4. 시사 상식사전 설명.
춘절(春節)은 음력 1월1일로 중국 최대의 명절이다. '춘절'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춘절의 다른 이름으로 '과년(過年)'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춘절은 3일 동안이 휴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까지 쉬면서 즐긴다. 이 기간에는 보통 대청소, 설빔준비, 춘련, 연화 붙이기, 세배, 폭죽놀이 등을 한다.
한편, 춘절 전날 밤은 '제야의 밤'이라는 뜻으로 '제석(除夕)'이라고 한다.
- .출처:춘절[春節]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V. 한국에서 을사조약 이후 일본 불법 강점기로 인해 새로생기며 혼란을 준 왜곡된 용어나 풍습, 견해.
1. 구정(舊正)
양력설을 신정(新正)이라 부르는 것에 대비되어 생긴 설날의 이칭.
내용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방식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설이 아닌 오래된 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시간관념 아래, 새해는 음력에 근거하여 시작되었다. 음력에 기반한 전통적 시간체계는 1896년을 기하여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따르게 되었다. 양력설이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좀 더 체계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시간 체계에 맞는 양력설을 새롭고 진취적이라는 의미에서 신정으로 부르고, 피식민지인인 한국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으로 불렀다. 일제가 전통 설을 지칭한 구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양력설 정책을 답습한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의해서도 사용되었고, 그 사용이 장려되기도 했다. 음력설은 해방된 뒤에도 공무원이나 일부 국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새해를 맞고 차례를 모시는 날이었음에도 정부는 1985년에서야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을 하루만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1989년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관한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을 설날로 개칭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하여 총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로써 전통 설은 구정이라는 낙후된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고 구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상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 신라 법흥왕 이전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신라 설화를 설날이나 대보름의 유래로 잘못 차용한 불교인들의 견해.
@ 사금갑설화
신라 소지왕 또는 비처왕이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내용의 설화.
내용
신라 소지왕 또는 비처왕이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내용의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하며, 소지왕에 관한 인물전설이면서,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서출지(書出池)라는 못의 지명전설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다. ‘서출지’·‘둘 죽이고 하나 살리기’·‘오곡밥 먹는 유래’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현재 경주시 일대에서 구전되고 있으나, 보고된 자료는 많지 않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지왕 10년(488) 정월 보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서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 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日官: 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 하고 아뢰므로 왕이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갑[琴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그 중은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하여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전설화에서는 소지왕 대신 중국의 왕이나 막연한 왕이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못에서 나온 노인이나 간통하던 중이 없거나 그 구실이 희미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적 사상 간의 갈등이라는 의미가 약화되고 까마귀를 기리기 위하여 오곡밥을 먹게 되었다는 유래담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한편, 점쟁이가 보통 사람에게 닥친 비슷한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개인의 행운과 불운에 국한되어, 나라의 운수를 다룬 ≪삼국유사≫의 설화에 비하여, 그 의미의 폭이 좁아졌다.
이 설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수수께끼는 그 해결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죽게 되어 있는 ‘목수수께끼’의 일종이며, 일관이 풀었다는 것은 그 수수께끼가 사회적·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제의적 기능(祭儀的機能)을 지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소지왕이 두 명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풍속과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 뒷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설화에 나타난 왕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보호되는 신성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를 뿐만 아니라 노옹의 계시가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여서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신이(神異)한 능력을 갖추고 건국신화에 등장하던 왕의 모습이 약화되어, 신의 능력과 인간의 능력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전에 일어난 토착 신앙과 외래 신앙 사이의 갈등 양상이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당시 왕실과 불승(佛僧)의 관계, 왕에 대한 백성의 인식, 민속적 사실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필자 주 7).
소지왕 10년(488) 정월 보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서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런 설화임.
그러나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시기는 528년(법흥왕 15)으로 이 이전(488)에 일어난 유교나 도교, 음양가, 법가등 제자백가에서 비롯된 토착 신앙에서 생긴 설화를 고려 후기 중 일연이 정사인 삼국사기를 모방하면서 불교적 시각으로 변작한 내용일수도 있음.또는 설화 그대로를 기재하였다 하더라도,이 토착 설화를 나중에 불교인들이 중국 황하문명에서 파생된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서와 다른 견해의 후발 설화로 설날.대보름의 기원으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등재하기는 무리가 따름. 신라시대는 외래신앙인 불교를 거부하며 이차돈의 죽음등이 있었음.
설날관련 불교인들의 시각은 중 일연의 삼국유사 설화에서 차용한 잘못된 견해들임. 이 오인은 아마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성균관대 출신및 .유교인 뿐 아니라, 일본 강점기 일본 민중불교인들이 개입한 불교학교 후신 동국대 출신이나, 불교적 일본 신도.민중불교 영향받은 서울대출신, 일본 유학파들도 상당수 참여하면서 기재된 의견 같음. 正史인 三國史記나, 그 이전의 중국 역사서와 달리 고려후기 중 일연이 삼국사기를 모방하여 불교설화적 시각으로 각색한 삼국유사 설화를 대대적으로 반영한데서 나온 불교설화적 잘못된 견해로 필자는 판단함. 불교인이나 일본 유학파 및 서울대 출신들의 견해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유교 경전이나 중국.한국 史書(正史)등과 비교하며 世界史的 견지에서 대조해 보아야 함. 창조주 브라만에 대항해 새로운 사상을 정립한 부처가 창조주보다 높아 창조주를 그의 밑에서 가르친다는 불교는 부처나 관련 인물에 불공드리는게 불교며 유교전통에 뿌리를 둔 변형 중국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견해도 있음. 일본 신도나 일본 민중불교는 중국 漢字, 중국이나 한국의 祭天儀式, 山川祭祀, 祖上祭祀, 공자님제사, 유교교육, 冠婚喪祭, 중국.한국의 유교풍속등을 변형한 後發 局地的 신앙으로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일본만의 독특한 신앙이라고 판단됨.
* 첨부자료.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로 일본 강점기로 왜곡된 한국 유교문화의 전통 명절 설날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자 자료들을 인용하였으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