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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도는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 제목: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京城帝大와 일본 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도 역시 Monkey대학임. 경성제대 후신이 주축인 서울대는 점령대상으로 한국에서 축출해야 될 일본잔재임은 여전한데, 미군정기에는 대학으로 승격된 평민계 기독브(세브란스 의전)이(이화학당) 하위의 Monkey(종교와 관련없이 점령군의 미군대위가 총장으로 초대 취임)대학으로 잠정적 개편을 당하였다 할 수 있음. 을사조약이 무효고, 일본이 받아들인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등에 따라, 한국인은 일본의 불법 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민족이고 해방국가임. 일본과 일본인은 연합군의 점령대상(한국에있던 일본총독부나 그 휘하 조직인 경성제대 및 일본의 교육기구등도 미군정기 점령대상). 미군정기를 거치고 나면 을사조약 무효이론.포츠담선언과 카이로선언에 따라 다시, 한국에서 축출해야 될 일본 강점기 잔재가 일본 총독부잔재와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이 세운 학교나 강점기 포교종교들임. 

 

일본이 새로 만든 후발 국지적 신앙인 신도에서 유교의 조상제사등을 차용하였다 주장하여도 그들은 이를 유교로 보지 않고, 일본인의 개념대로 일본은 유교와 불교를 외래종교로 보는 잘못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것 같음. 세계종교 유교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19세기에 새로만든 후발 혼합신앙인 局地的 民族信仰 神道 중심으로, 유교와 불교등을 재단하며, 현재는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유교화된 중국 불교)를 2중으로 같이 믿고 있는 상태임.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황하문명, 세계종교 유교, 태학.국자감.경사대학당, 성균관같은 유교 교육과 동떨어져 살다가, 서양에서 조총같은 무기를 우연히 입수하여, 전쟁기술만 발전시키며 여전히 아시아의 고립된 변방문화를 가지다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급작스럽게 국제적 위상이 상승하여, 그들의 後發 局地的 문화를 단시간내에 퍼뜨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할 수 있음.     

 

1. 개략적 설명. 

히로히또의 인간선언. "살아있는 부처"개념에서 차용한듯한 "살아있는 신"등은 불교사상으로 판단됨.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창조주보다 높아 창조주를 발밑에서 가르친다는 불교의 Monkey 부처 사상처럼 Monkey 일본 수장(천황은 잘못된 표현)이 하느님이나 예수님보다 높다고 주장하여 개신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음.

 

하느님(하늘天)이 인간을 창조한 유교(詩經의 天生蒸民)나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기독교, 그리고 神중심 이슬람 및 인더스문명의 원래 시초인 브라만교(힌두교의 모태가 됨)는 무신론적 불교와는 다른것 같음. 브라만교에 대항하여 네팔출신 부처가 새로 만든 無神論的 불교는 하느님(신)을 숭배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서 그 큰 특징이 있는것 같음.   

 

2. 경향신문 기사.

 

정진호 기자 기사(2010.12.31 기사).

 

[어제의 오늘]1946년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

 
ㆍ국민들에 패전 수용 권유

  • 1946년 1월1일 아침. 일본 히로히토 일왕(昭和天皇)은 라디오 방송으로 신년 담화를 발표한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신(神)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일왕은 스스로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혔고, 국민들에게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한다.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패전국 일본에 대한 원활한 통치를 위해 히로히토와 정치적 거래를 한다. 아시아 각국의 바람과는 달리 일왕을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으며 ‘천황제’ 역시 폐지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 대신 신격화된 초법적 권위로 절대복종의 명령을 내리던 일왕이 직접 육성으로 일본인들에게 ‘인간’임을 선언하도록 했다.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스’가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천황’에 대한 단죄 대신 정치적 이용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일왕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11세기 무사들이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700여년간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다. 권력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은 1600년 이후로는 항상 존폐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

일왕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이유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도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일왕을 이용한다. 일왕을 민족 통일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유신정권의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왕을 헌법 위에 올려놓으며 ‘천황의 뜻’이라면 불가능이 없는 일본 제국주의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무모한 전쟁은 무조건 항복으로 마무리됐고, 이듬해 ‘천황’은 ‘인간’이 됐다. 물론 아직도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여전히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지만 이는 ‘인간선언’으로 일왕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비록 타의에 의한 정치적 ‘인간선언’이었지만 ‘천황’의 인간화는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적 선진화에 큰 도움이 됐다.

새해 우리나라에서도 비인간적인 ‘정치’를 쏟아내던 이들의 반성과 성찰, 그리고 진심어린 ‘인간선언’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3. 엔하위키 미러에 나타난 히로히또의 인간선언 본문.

 

연두, 국운진흥의 조서

이에 신년을 맞이한다. 돌이켜보건대, 메이지 덴노(明治 天皇)는 메이지 초에 국시로서 5개조의 서문(誓文)을 내리셨다.

여기서 말하기를,

 1, 넓리 회의를 활성화하고 만사를 공론에 부쳐 결정하라.

 1, 상하가 합심하여 경륜(經綸)을 활발히 행하라.

 1, 문무백관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그 뜻을 이루고, 인심(人心)이 지치지 않도록 할 것을 요한다.

 1, 구래(舊來)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公道)를 따르라.

 1,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황국의 기반을 크게 진작하라.

예지(叡智)가 공명정대하니, 또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이에 짐(朕)은 각오를 새로이 하여 국운을 열고자 한다. 모름지기 이러한 취지에 따라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민의를 창달하며, 관민(官民) 공히 평화주의를 철저히 하고 풍부한 교양으로 문화를 구축하며, 이로써 민생의 향상을 꾀하고 신일본을 건설하라.

크고 작은 도시가 입은 전화(戰禍), 이재민들의 간고(艱苦), 산업의 정체, 식량의 부족, 실업자의 증가 추세 등은 실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현재의 시련에 직면하여, 또 철두철미 문명을 평화에서 찾는 결의가 굳고 그 결속을 잘 완수하면,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인류를 위해 찬란한 전도(前途)가 전개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릇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그 열렬함을 본다. 이제 실로 이 마음을 확충하여 인류애의 완성을 향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생각컨대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이 패배로 끝난 결과, 우리 국민은 자칫 초조함으로 흘러, 실의의 심연에 침윤되려는 경향이 있다. 궤격(詭激)한 풍조가 점차 거세져 도의를 지키는 마음이 몹시 쇠퇴하고, 그로 인해 사상 혼란의 징조가 있음은 참으로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짐는 너희 국민과 함께 있으며, 늘 이해(利害)를 같이 하고 평안함과 근심걱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필자 주 1). 다음부터는 히로히또의 인간선언 해당 문구임.

 

짐과 너희 국민 사이의 유대는 시종 상호 신뢰와 경애로 묶여지는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덴노(天皇)을 현어신(現御神)으로 하고, 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 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하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진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짐의 정부는 국민의 시련과 고난을 완화하기 위해 모든 시책과 경영에 만전의 방도를 각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짐은 우리 국민이 시국의 난제에 궐기하여 당면한 곤고(困苦)를 극복하기 위해, 또 산업과 문운(文運)을 진흥하기 위해, 용왕매진(勇往邁進)해주기를 희망한다. 우리 국민은 공민 생활에서 단결하고 상부상조하여 서로 관용하고 용서하는 기풍을 진작하는 데 있어 능히 지고의 우리 전통에 부끄럽지 않는 진가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실로 우리 국민이 인류의 복지와 향상을 위해 절대적인 공헌을 할 까닭임을 의심치 않는다. 한해의 계획은 연두(年頭)에 있다. 짐은 짐이 신뢰하는 국민이 짐과 한 마음으로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여, 이로써 이 대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히로히토


 

쇼와21년(1946년) 1월 1일

 

 

4. "하나님이 높은가, 천황이 높은가" 질문을 받고 고난을 당했던 개신교의 사례등. 가톨릭도 이런 비슷한 고난 있었음 

 

1). 한국 기독교사, 박봉진 목사 편.

 

한국에서의 교파합동에 따른 성결교대표이던 이명직목사는 “일제가 성경에서 구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다”며 강력히 맞섰고 결국 성결교단은 당시 기관잡지인 `활천'이 폐간되는 동시에 43년 5월,전국 성결교회 일제검속령이 내렸다.바로 이 때 박봉진목사도 철원경찰서에 구속,수감된다.

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게하고 좁쌀과 콩밥을 주는 색다른 환경 속에서 박목사는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그러나 박목사에게는 더 큰 고통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앞에 불려간 박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유를 하나님 이외에 참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이 천황보다 더 높다고 여기느냐고 묻는 질문에도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다.강직한 신앙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목사님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패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간을 주야로 고문했지요.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른 볏집처럼 말랐지만 항복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일본천황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을 아버님은 끝까지 신앙지조를 지키신 것이지요

 

2). 한국 장로신문. 제 1363호(2013년 4월 20일).

 

164. 일제 치하 기독교인은 반역자.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일제 헌법이 천황을 신성불가침이라 규정한 점이다. 신성하고 절대로 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어디에선가 천황폐하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자동차도 사람도 다 그 자리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반듯하게 차렷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일제 말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일본 경찰이나 형사에게서 천황이 높은가, 여호와 하나님 높은가라는 황당한 검문을 받기 일쑤였다. 또 그 헌법에는 일본인의 모든 권리가 천황에게서만 나온다는 그런 조항이 서두에 나온다. 국민들은 다만 천황의 신하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절대자 이상의 권한과 존엄을 누리는 것이 일본 천황이었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국가 최고의 존엄이란 말을 쓴다. 그런 천황에게는 최경례 곧 최고의 경례를 표하여야 하는데,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존재도 섬기거나 예배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신앙 첫째의 준수사항이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일제시대 기독교는 그 자체가 헌법상 존재할 수 없거나 천황제 아래 굴종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천황을 예배하지 않거나 신사참배에 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반역일 수밖에 없었다.

 

민 경 배 목사<백석대학교 석좌교수>

 

3).  가톨릭신문 기사. 발행일 : 1984-07-22 [제1415호, 6면]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76. 첫 한국인 교구장 탄생의 뒷얘기들

主敎임명놓고 日本에 密派돼
교황사절에 한국인임명호소
숨막히는 면담 끝에 승락 얻어-기쁨의 눈물 넘쳐
교구장취임장면 全國서 뉴스영화로 上映

일본 군국주의가 한반도 문화를 페결핵균처럼 파먹어 들어가던 때、우리 가톨릭도 탄압을 받았다. 천황이 더 높은가 그리스도가 더 높은가 하여 각 성당 제대 위에 가미다나(神棚)를 모셔라 했고 미사 시작전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일본국가제창을 강요했다. 성당의 종을 때어 헌납하라、신부출장땐 배정기(配程記)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아라、 고해성사때 신자들이 신부들께 스파이질을 하니 신부와 신자사이에 의자를 놓고 그내용을 들어야겠다고도 했다. 마침내는「기독교 종교단체법안」까지 만들었고、1940~41년에는 일본내 외국인교구장을 교황사절을 앞장세워 일본인 교구장으로 갈아치웠다.....

 

4). 평화신문 2000.08.13 발행. 가톨릭뉴스.

종소리를 듣고 성당으로 몰려온 신자들은 "이제는 하느님이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는 일본
헌병의 질문 신사참배 강요 황군(皇軍)의 무운장구를 비는 미사 고해소에 형사가 입석하 는 일 그리고 신부가 공소를 방문할 때마다 순사에게 신고해야 하는 일이 없어지게 됐다" 고 기뻐했다.

http://news.catholic.or.kr/WZ_NP/section/view.asp?seq=37966&tbcode=SEC02 


 

 

5. 대략적인 마무리.

 

한국은 (後發 局地的) 神道 국가 일본의  불법강점기때문 모든 주권을 잃었던 나라입니다. 神道는 19세기에 일본의 국교가 된 後發局地的 신앙입니다. 모든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던 일본 막부시대이후 불교적 토양으로 바뀐 일본 불교를 토대로 "살아있는 부처"개념의 "살아있는 신"이된 일본 수장(日王이 적당)입니다.

 

일본에서 後發局地的으로 19세기부터 일본 국교가 된 神道. 日王(天皇은 중국의 전설과 신화에 나오는 고유명사 천황칭호를 도용한 誤用)은 "살아있는 부처"개념을 차용하여 후발로 만든 "살아있는 신"개념에 해당됩니다. 

 

日王(天皇이라 오용)은 불교적 특성이 강한 후발국지적 일본만의 특이한 존재로 "살아있는 부처"처럼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님보다 높은 존재라고 일본 Monkey들은 19세기에 불교사상등을 혼합하여 유교사회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든 "살아있는 신"이라는 존재를 만듭니다. 그렇게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님보다 높다고 후발로 만든 존재니까 전통 유교국가 한국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본 신도와 일본 민간불교를 마음대로 퍼뜨리며 유교의 하늘天(하느님)이나 공자님보다 더 중요하게 일본 神道와 日王(天皇이라 誤용)숭배, 일본 불교를 퍼뜨렸겠지요.  

 

네팔출신 피조물 부처가 인더스문명의 브라만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상을 일으키고 창조주를 발 밑에서 가르친다는 특이한 無神論 사상이 불교입니다. 창조주를 모르고 깔아뭉개면 Monkey류는 분명합니다. 

日王이라야 적당할텐데 중국 상고시대 전설적.신화적 존재인 天皇의 고유명사 칭호까지 도용해버리고 天皇이라 호칭을 붙입니다. 

새로만든 일본 신도의 수장(천황? 아님)도 無神論的인 부처 Monkey처럼 살아있는 부처처럼 살아있는 神이되어 하느님보다, 예수님보다 높다고 그렇게 인식시키며 신사참배도 강요하고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학교나 기독교 인들은 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경우도 발생합니다. 하느님이나 예수님보다 높은 "살아있는 부처(실제로는 창조주부정 후발 피조물이 덤비는 Monkey사상)"개념이 후발국지적 일본 신도의 수장(일왕, 천황이라고 오용하고 있음)인 "살아있는 신" 이었습니다. 이런 특이한 "살아있는 부처"개념의 "살아있는 신"이란 후발 국지적 사상을 유교국가 한국에 마음대로 퍼뜨린 일본. 일본 신도, 일본 불교(시중에 진출하여 불교마크 달고 포교하며, 승려가 결혼하며, 산속 천민승려로 머물지 않고 재가불교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음)를 한국에 퍼뜨리며, 2차대전때 항복하면서 "살아있는 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선언"을 하게 된 일본 수장!(日王인데 天皇이라고 중국 고유명사 天皇칭호 도용중).  인더스문명의 브라만에 대항 창조주를 부정하고 창조주를 밑에두고 창조주에거 설법한다는 無神論的 사상의 불교 부처(알고나면 창조주에 대항하는 Monkey사상임).

 

여하튼 19세기에 모든 주민을 절에 등록시키던 일본 막부의 습속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불교적 사상으로 유교를 왜곡시키며 일본의 국교가 되고 生佛(살아있는 부처)개념의 "살아있는 신"이되어 하느님이나 창조주, 공자님, 예수님이 안중에 없었을 無神論的 Monkey류 일본 신도 수장!(살아있는 부처류, 살아있는 신으로 잘못 떠받들려짐).

 

연약한 피조물 일본 수장(일왕,천황?)은 2차대전 패전후 "살아있는 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그 잘못된 전통은 그대로 상당부분 살아있어서 일본이나 불법강점기 한국에 일본 불교적 생각을 퍼뜨려왔고, 지금도 이런 불교적 생각들은 한국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으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과 함께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시켜야 할 불교적 일본신도와 시중까지 진출한 일본 불교. 이런 잔재들을 축출해야 그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고 대대적인 교육.홍보가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 유교도 일본 불교적인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때문에 여러가지 왜곡을 겪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본 神道는 19세기에 일본 國敎化 된 신앙으로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며, 일본만의 後發 局地的 신앙에 해당됩니다.     

 

* 필자 주 2). 신도가 19세기에 국교가 되었다는 출처 두 가지.

 

. 출처 1.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교양 6 철학 종교. 존 라이트외/김우열 역/이지북/2005.06.10, 117페이지

The New York Times guide to essential knowledge

 

.... 신도는 19세기 메이지 천황 치세에 국교가 되었고, 신도는 일본천황의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제국주의자의 파괴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기는데 기여하였다. 전후기간중에 천황의 신성 주장과 함께 신도의 국교로서의 지위는 폐지되었으나, 일본 전사자의 넋을 추모하는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는 것과 같은 태도에 대하여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출처 2. 일본의 신도. 시사 상식사전/박문각.

 

..............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신도는 천황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종교가 되고, 신사는 정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결국 국가와 종교의 합체는 국수주의적인 기풍을 몰고 왔으며, 특히 1930년대 이후에는 '국가신도'가 널리 보급되기에 이른다.

1889년 헌법에는 형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신사에서 참배하는 것을 모든 일본인의 애국적인 임무로 간주했다. 10만 개가 넘는 신사에 대한 행정은 정부가 맡았고 신도식 수양을 가르치는 수신(修身) 과목은 학교의 필수과목이 되었으며 정부는 천황의 신성(神性)을 선전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사회의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분리되게 된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차원의 글입니다. 일본 불법 강점기로 인해 왜곡된 세계질서와, 유교질서, 한국의 기득권 전통을 유지.복구하기 위하여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19세기에 불교사상을 가미하여 유교사상도 혼합하면서 국교화시킨 천황제하의 일본신도로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을 억압한것은 유교국인 조선(대한제국)이 그런게 아니므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국제법과 역사적 측면의 한국 국교는 유교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현행 한국 헌법내에서 신앙의 자유를 가지시면 되겠습니다.